이병성(李秉成: 1675~1735)


이병성(李秉成: 1675~1735)                                 PDF Download

 

관은 한산(韓山), 자는 자평(子平), 호는 순암(順庵)이며,  이산보(李山甫)의  5대 손으로, 아버지는병마절제도위 이속(李涑)이다.  김창흡(金昌翕)의 문인인 그는 1702년(숙종28) 진사시에 합격하여 군수(郡守)와 공조정랑(工曹正郞)을 역임하고 부사(府使)에 이르렀다. 시문(詩文)에 능하고 글씨를 잘썼다.  저서로는 ≪순암집(順菴集)≫이 있다.

그는 주자서(朱子書)를 주로 많이 읽어서 난해한 부분을 잘 해독해 내자, 주변의 사우(士友)들이 감복하였지만 세상에 알려지는 것을 바라지 않았다. 그는 평소에 저작한 글을 모아 두지 않았다.  그의 시문집(詩文集)은 맨처음 그의 형인 이병연(李秉淵)이 산정하고 편차한 고본(古本)을 그의 아들이 도중(李度重)이 다시 수집하여 이질(姨姪)인 유엄(柳儼)이 1741년(영조17)황해도 관찰사(黃海道觀察使)로 있을 때 도움을 받아 간행한 것인데, 운각활자(芸閣活字)로 간행한 초간본 이다.  본집은 원집 6권, 부록 합3책으로 되어있다.

권수에 이의현(李宜顯)과 어유봉(魚有鳳)이 1740년에 지은 서문과 윤봉조(尹鳳朝)가 1741년에 지은 서문이 실려있다.
시 작품은 저작 연대와 지역에 따라 구성하고 있는데, 호서록(湖西錄)은 1692년 이후 보령(保寧)에 거주할 때 지은 것들이고,  악하록(嶽下錄)은 1698년 이후에 지은 것들이다. 후교이록(朽橋二錄)은 1712년 9월 이후에 지은 것들이고,  덕봉록(德峯錄)은 1717년 이후 양성현감(陽城縣監) 시절에 지은 것들이다.  그의 시(詩)는 간결하며 사람됨이 누속(陋俗)함을 초탈한 것과 같이 힘이 있고 아름다우며 전정(典正)하여 바탕이 넓다.  또한 시가 함축하고 있는 의미가 심절(深切)하고 성격(聲格)이 청신(淸新)하며 만당(晩唐)의 시(詩)에 경도(傾倒)하였으나 깊이 사색하기를 좋아하여 그것을 나타낸 작품들도 있다는 것이 전문가들의 정평이다.

서(書)는 대부분이 문안 편지들인데 <답박공미(答朴公美)>은 학문과 역사적인 인물에 대하여 언급한 것으로,  제갈공명(諸葛孔明) 주희(朱熹) 송시열(宋時烈) 등의 인품을 논하고 있으며,  서(序)는 교유하던 사람들과의 일화를 주로 한 것이 대분이다.  기문(記文)  가운데 <내암기(耐菴記)>는 자신을 경계한 글로 , 참으면 이루지 못할 일이 없다는 것을 고사를 인용하여 논한 글이며, <유용흥폭포기(遊龍興瀑布記)>는 가릉(嘉陵)에 있는 폭포를 돌아보고 감회를 적은 것으로 , 주위의 경관을 자세히 설명하고 폭포의 천연적인 아름다움은 인간의 정서 함양에도 커다란 도움이 된다고 하였다. <제이학통록유초후(題理學通錄遺草後)>는 <이학통록유초>가 발견되었는데 그것은 간행하기 전의 초고로 이황(李滉)의 수택이 분명하다고 지적하고,  9폭에 이르는 분량이 하나같이 정교하다고 칭찬한 글이다.  또 <회암서절요소발(晦庵書節要小跋)>은 주희의 글인 <회암서절요>내용을 설명한 것이다.  그의 글은 아결(雅潔)하고 깊은 뜻이 있으며 전아(典雅)한 맛이 느껴지게 하는 것이 특징이다. 부록에는 형 병연이 1740년에 지은 유사(遺事)가 실려 있다.  책 끝에 조유수(趙裕壽)가 1741년에 지은 발문과 지은 연도가 기록되어 있지 않은 유최기(兪㝡基)의 발문과 유엄(柳儼)이 1740년에 지은 발문이 수록되어다.  그중 유최기(兪㝡基)의 발문(跋文)에는

“그의 사람됨이 맑고 깨끗하며 식견이 명확한데다 의론(議論)은 현사(賢邪)의 구분이 엄격하였다.”

라고 적어 놓았다.  이러한 작품들을 통해 그의 성향이나 행적들을 대략적으로 가늠해 볼 수  있겠다.

그의 문집인《순암집(順菴集)》권5에는〈제월봉상인시권후(題月峰上人詩卷後)〉라는 글이 있다.  이 글에 등장하는 승려쌍식(雙式)은 서봉사(西鳳寺)의 승려로 시 짓기를 좋아하였는데, 그는 이의현(李宜顯)에게는 선사운파(雲坡)의 비명(碑銘)을 부탁하고,  자신이 직접 지은 시는 이병성에게 종종 보였다고 한다.  그리하여 이병성은 1732년(영조8) 초가을에 쌍식의 시집(詩集)에 발문(跋文)을 기록해 주었던 것이다.  이는 그가 당시에 승려들과도 격을 두지 않고 교류했다는 것을 단적으로 보여주는 사례라 할 수 있겠다.

<참고문헌>
《사마방목(司馬榜目)》
《순암집(順庵集)》
《전고대방(典故大方)》
《한국문집총간(韓國文集叢刊)》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