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달환(1851~193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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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달환(1911년, 채용신그림)
문달환(1911년, 채용신그림)
달환(1851~1938)은 전라남도 화순 출신으로 면암 최익현의 제자이다.  그는 스승이 1906년 태인에서 을사조약에 항의하여 의병을 일으키자 지원하여 종군하였으며,순창에서 관군들과 대치하였을 때 마지막까지 스승의 곁을 떠나지 않고 지켰다.  체포된 뒤 일본군사령부에서 가혹한 고문으로 다리가 불편해진 그는 석방된 뒤에 귀향하여 두문불출하고 학문에만 힘썼다.

1851년(1세, 철종2년)에 전라남도 화순군 춘양면 부곡리(富谷里)에서 태어났다.  본관은 남평(南平)이며,  자는 덕경(德卿), 호는 둔재(遯齋)이다.  심암(心庵)  문봉후(文鳳休)의 아들이며, 면암(勉庵) 최익현(崔益鉉, 1833~1907)의 제자다.

1880년(30세, 고종17년) 이즈음에 화순(和順)  한천면 모산리에 거주하다 부곡리(富谷里) 부춘동 마을로 옮겨 살았다.  화순군지에 따르면 그는 “기상(氣像)이 준엄(峻嚴)하고 기개가 강개(慷慨)하여 영웅열(英雄烈士)의 전기를 즐겨 읽었다.”고 한다.

1905년(55세, 광무9년) 매국노 이완용 등이 어전회의에서 고종을 협박하여 일본과 을사조약을 맺어,  대한제국의 국권이 일본에 강탈 당했다.  당시 스승  최익현은 각 지방의 유림들과 함께 의병을 일으킬 계획을 세웠다.  고위 관료들에게 함께 거사할 것을 요청하였으나 별다른 반응을 얻지 못하였다.

1906년(56세, 광무10년) 최익현이 6월에 전라북도 태인(泰仁)에서 의병을 일으켰다.  태인에는 임병찬(林炳瓚)이 살고 있었다.  태인의 무성서원(武城書院)에서 강회를 개설하고 유생들을 모았는데,  문달환은 이때 참여 하였다.
의병들은 약 80여명이 대오를 짜서 태인 본읍으로 진군하였다.  군수는 저항을 못하고 도망쳤으며,  의병들은 무혈로 태인을 점령하였다. 그곳에서 무기를 접수하고 의병을 모아 다시 30여리를 행군하여 정읍으로 진격하였다.  정읍에서 관군과 대결하여 그들의 항복을 받아내고,  다시 내장사(內藏寺)와  구암사(龜岩寺)로 가 그곳을 점령하였다.  다음날 순창으로 진군하여 순창 군수의 항복을 받아냈다.  하지만전주와 남원에 있던 관병이,  전주 관찰사 한진창(韓鎭昌)과 순창 군수이건용(李建鎔)의 지휘 하에 일제히 공격해왔다.  조선 사람들끼리의 전투를 피하려고 하였던 의병들은 저항하지 않고 전장을 피하거나 최익현 주변에 남아 체포되었다.  마지막까지 최익현과 함께한 의병들은 문달환,  임병찬(林炳瓚) 등을 포함하여 12명이었다.  이 12명은 순창 12의사로 불린다.

6월 말에 체포된 의병들은 서울로 압송되어 일본군 사령부에 감금당해 심문을 받고 재판결과, 문달환은 태형 100대에 처해졌다.  약2개월  동안 옥고를 치른 뒤,  8월에 석방되었다.  당시 가혹한 고문으로 문달환은다리가 불편해졌다.  그의 병오일기丙午日記) 에는 이해 1월 16일부터 7월 7일까지의 일이 기록되어 있다.  최익현과 임병찬은 8월 하순에 대마도로 유배되었다.  대마도에서 최익현은 제자들에게 이렇게 전했다.

“글공부 하는사람은 나라를 방위할 책임도 없고,  80이란 나이는 종군할 때도 아니다.  그러나 이와 같은 비상한 시기를 당하여 위로는 조정에서 아래로는 농촌에 이르기까지 벙어리ㆍ장님ㆍ앉은뱅이를 제외하고 모두가 말하기를, ‘제 집안에만 숨어있고 나랏일을 모르는척 하는 사람은 결코 인간의 마음을 가진 사람이 아니다.’ 라고 한다.  내가 저지른 죄로 여러분에게 화가 미치게 되었으니 부끄럽기도 하고,  미
안한 마음이 적지않다.  글자의 고상함이나 시의 품격을 보지 않고 마음이 가는 대로 그 사실만을 서술하여 각자에게 오언 절구1절을 주니, 뒷날에 참고 하거라.”

최익현은 13명의 제자들에게 오언절구 1절씩을 주었는데 문달환 에게는 다음과 같은 내용의 절구를 주었다.

재난의 그물에서도 이미 벗어났고
(禍網尙可脫)
병세가 좋아진 것은 신이 도운 것같네.
(損疾神佑然)
나는 알겠네,  자네가 고향에 가는날
(深知還鄕日)
맨 먼저 조상의 묘에 절하겠지.
(藉手拜先阡)

제자가 자신 때문에 온갖 고초를 당하고 다리를 다친 것을 미안해 하면서 그러한 아픔이 어느 정도 아문 것을 기뻐하는 모습이 표현되어있다.  그리고 제자의 마음이 되어 고향인 화순으로 돌아가는 모습을 마치 자신도 같이 따라나서는 듯이 노래한 것이다.  최익현 자신은 이해 겨울 일본측의 온갖 협박과 회유를 뿌리 치고 단식에 돌입하였다.

1907년(57세, 광무11년) 1월 1일, 스승 최익현이 옥중에서 단식으로 순절하였다. 화순에서 부산까지 나가 스승의 영구(靈柩)를 모셔와 청양에 안장하였다.  귀향 한 뒤에는 두문불출하고 학문에만 힘썼다.

1909년(59세, 융희2년)에 이완용이 독단으로 기유각서를 교환하여, 사법권을 일본제국에 넘겼다.  그 이듬해 1910년,  한일합방조약이 체결되어 조선의 국권이 완전히 상실되었다.

1911년(61세, 일제시대)에 채용신(蔡龍臣, 1850~1941)이 와서 전신 초상화 2점과 반신 초상화1점을 그려주었다.  채용신은 궁정에서 역대왕들의 어진과 고종의 어진을 그린 유명한 초상화가로, 1906년에 충청남도 정산군 군수직을 사직하고 전라도로 낙향해 있었다.

1914년까지그는 여러 지역을 떠돌아 다니면서 항일투쟁을 하였던 사람들이나 우국지사의 초상화를 그려주었다.  이때 그린 문달환의 초상화는 현재 화순군 춘양면 부곡리249번지에 있는 춘산사(春山祠)에 보관되어있는데, 2011년에 전라남도 유형 문화재제314호로 지정되었다.

1927년(77세) 제자들에 의해서 춘산사(春山祠)가 건립되었다. 나중에 부춘사(富春祠), 부춘정사(富春精舍)라고 불린 이곳은 1937년에훼손되었다가 1945년에 다시 복구되었으며 춘산사로 개칭되었다. 정식명칭은 ‘충의영당및춘산사’이다.  춘산사가 지어진 때 감회를 문달환은 이렇게노래했다. ( ⌈둔재집 ⌋寄富春齋講所)

산속에서 당을 만들고 규약을 정했다는 말을 들으니
(比聞山塾講規成)
의리를 살피고,  글 공부하는 일을 가볍게 할수 없겠네.
(硏義攻文自不輕)
그곳은 천리와  인륜을 밝히는 진실한 곳이니,
(天理人倫眞實地)
공자와  주자의 지극한 뜻이 책속에서 밝아지네
(孔朱至意卷中明)

부춘정사(富春精舍)는 문달환이 만년에 제자들을 양성하고 자신의 학문을 닦는 곳으로 사용하였다.  아울러 화순 지역 문인들이 조용히 수양하면서 서로 소통하는 공간으로 활용되었는데,  문달환은 또 이런 시를 지었다.

조그맣고 깨끗한 오두막이 푸른산 가까이 있네.
(弊廬瀟灑近靑山)
책을 보며 이곳에서 살기가 딱좋겠구나.
(祗合看書住此間)
나라 위한 영웅들은 모두 백발이 되었지만,
(公道英雄皆白髮)
좋은 시절 그 뜻은 붉은 얼굴에 남아 있네.
(好時志業在紅顔)

1938년(88세)에 사망했다.  문집으로 ⌈둔재집(遯齋集) ⌋8권이 있으며, 화순군 능주의 춘산사에 최익현 등과 함께 배향되어 있다.  1990년,  그의 공훈을 기리어 대한민국 정부에서 건국훈장 애족장을 추서하였다.

<참고자료>
⌈면암집(勉菴集) ⌋
문달환,<독립유공자공훈록>, 국가보훈처(http://www.mpva.go.kr)
오인교, 南道정자기행(1807)-화순부춘정사(富春精舍),<한국매일>, 2014.12.18
유치석, 문달환(文達煥),<한국역대인물종합정보시스템>
<화순문달환 초상>, 한국향토문화전자대전, 한국학중앙연구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