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기진(李起振:1869~1908)


이기진(李起振:1869~1908)                                PDF Download

 

관은 전주(全州). 자는 한여(翰汝) 또는 효백(孝伯), 호는명와(明窩)이다.
그는 충주의 하곡, 오늘날의 충주시 동량면 하천리에서 태어났다. 20대 초반에 유중교(柳重敎)의 가르침을 받아 화서학파(華西學派)에 입문하였고,  유중교 사후에는 유인석(柳麟錫)에게 배웠다.
명성황후(明成皇后)가 일본군에게 피살되고 단발령(斷髮令)이 내려지자 유인석이 이끌던 의병진에 참가하였다.

을미의병 당시 홍선표(洪選杓)·정화용(鄭華鎔)등과 함께 유인석의 종사관으로 활약하였다.  충주성(忠州城) 전투와 제천(堤川)에서 패한 후 서행할 때 그의 활약상이 전한다. 소모대장(召募大將) 서상렬(徐相烈)의 시신을 수습하는 책임을 맡기도 하였는데, 후에 병고로 의병에 합류하지 못하게 되자, 고향으로 돌아가 국권 침탈의 시국을 개탄하면서 《화서집(華西集)》의 발간을 위한 기금마련에 주력하였고,  향리의 후진(後進)들을 교육하면서 족계적(族系的) 성향을 지닌 동약(洞約)을 시행하기도 하였다.
문집으로는《명와집(明窩集)》이 있다.  이상이 그의 대략적인 생애와 관련된 기록이다.

위의 내용에 대하여 좀더 구체적으로 살펴보면 그가 유인석의 문하에서 수학하던 그 무렵은 시대의 격변기였다.  이때 민심이 격앙되어 사방에서 의병(義兵)이 봉기(蜂起)하고,  유인석을 대장으로 하는 제천 의병이 출범하게 되었던 직접적인 원인은,  사실상 1894년에 동학 농민군이 일어난 것을 빌미로 삼아 일본군이 개입하면서 서울을 장악했다는 소문이나 돌고,  그 이듬해 여름에는 일본군에 의해 명성황후가 시해되고,  단발령이 실시 되었다는 사실이 널리 유포된 데에 있었다는것이 일반적인 견해이다.

이때 이기진은 병든 몸을 이끌고 주변의 만류에도 불구하고 의병에 가담하였다.  그리하여 유인석의 종사관으로서 활약하면서 충주성 수성전(守城戰)에 참전하였다.
한편 조선말기 정직과 지조있는 선비상을 지닌 화서(華西) 이항로(李恒老)선생은 나라의 위기 앞에 도의와 백성을 걱정하는 마음이 간절한 선비였다.  그의 학통을 계승하여 온 사람들을 역사에서는 화서학파(華西學派)로 규명한다.
화서는 의병봉기 계획을 추진하면서 유인석에게 주선해 줄 것을 권유하였고,  유인석으로 하여금 의병에 참여하게 하였다.  그러한 연유로 유인석 문하에 있었던 이기진도 자연스럽게 의병활동에 참여할 수 있었던 것이다.  다시 말하면 전국의 병항전을 선도한 화서학파는 사실상 의병활동 의실천적 사상의 배경이 되었다고 할 수 있다.

이기진은 또 충주성 전투에서 포수들을 독려하고,  빗발치는 포탄에 뺨이 문드러지는 부상을 입기도 했다.  의병진이 근거지인 제천을 빼앗기고 서북지방으로 이동할 때 그는 신병으로 뒤에 남아 있었는데 이때 소모대장 서상렬이 전사하자,  다행스럽게도 그의 시신을 수습할 수 있었다.  이 일에 대한 기록이 의암(毅菴) 유선생(柳先生)의‘서행행략(西行略)’에,

“선생이 주현구(朱鉉九)이기진을 보내 경암(敬庵)의 사실을 탐지하고 시신을 거두어 오게 했는데, 현구(鉉九)는 이 일을 성사시키지 못 하였다.”

라고 기록되어 있다. 그 뒤 이기진은 병으로 낙향한 이후에도 산봉우리에 진지를 구축하여 일본군과 관군의 공격에 대비하였다.  지금도 그 진지의 흔적이 그대로 남아있다고 한다.

1894년 동학 농민군이 크게 일어났을 때,  일본군의 위세를 보고 포도대장을 만나서 일본군을 토벌할 계책을 물었으나, 무기력한 답변만을 들었다.  단발령 이후에 병든 몸으로 의병진에 가담하여 활동 할 당시 그는 그때 일을 회상하며 다음과 같이 말하였다.

“바람을 맞으며 먹고 자는 고통,  부대 내의 갈등을 어루 만지는것,  마을마다 부역을 고르게 하는 것 등이 어려웠다.”

그는 말년에 병고로의병에 합류하지 못하고 고향에 남아서 시국을 개탄하면서 후학 양성에 앞장섰을 뿐만 아니라 향리에서 직접적인 교육과 향약운동에 관심을 기울였다. 그는 또 후손들에게 남긴 가훈에서암울한 현실에 대해 아래와  같이 표현했다.

“왜국 공사관이 우리 주상을 위협하고 우리 조정의 신하를 강제하여장차 백성을 옮겨 바다에 빠뜨리고자 하니 우리 인종을 모멸하는 화가 조석간에 박두하였다.”

고종(高宗)의 강제 퇴위 이후에 수많 은인민들이 봉기하였다 는소식을 듣고, 이기진은 의병을 일으키려는 이를 위하여 격문(檄文)을 짓기도 하였다. 이기진이 이등박문(伊藤博文)에게 보낸 격문에서는 일본은 금수와 같은 나라라고 하면서

“아는 것이라고는 식색(食色)을 탐하는것 뿐이요 숭상하는 것이라고는 빼앗으려는 욕심 뿐”

이다고 질타한 바 있다.  그는 1908년 향년40세를 일기로 생을 마쳤거니와 기울어 가는 나라에 대한 탄식과 실천운동을 강조하였던 진정한 조선인의 한 사람이었음을 우리는 자랑으로 삼아야하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