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유흥(李裕興)


이유흥(李裕興)                                                            PDF Download

1859(철종 10)∼1923년. 조선 말기의 유학자.

이유흥의 본관은 경주이고, 자는 사중(思中)이고, 호는 성암(誠菴)이며, 별호는 성재(誠齋)이다. 1859년 3월 26일 천안 수신면 백자리 증자동 구택에서 태어나서 1923년 2월 29일 향년 65세의 나이로 세상을 떠났다. 증조부는 이화진(李華鎭)이고, 조부는 이철규(李喆奎)이며, 부친은 이계열(李啓烈)이다. 외조부는 김유(金有)이고, 처부는 곽상기(郭相夔)이다. 묘는 충청남도 천안군 수신면 증자동 선영 아래 있다. 충청남도 연기군 남면 방축리의 덕성서원(德星書院)에 배향되어 있으며, 저서로는 『성암문집』이 있다.

이유흥은 어려서

“외면은 허약한 것 같았지만 내면은 강하고 분명하였다. 효성이 다른 사람에 비하여 뛰어났으며, 천성이 순수하였다. 욕심을 적게 가지고 말하는 것을 매우 아끼었다.”

이유흥은 10살 무렵 『소학』을 배우기 시작하였는데, 평소 그의 학습 태도는 다음과 같다.

“수업 후에 만약 이해하지 못한 곳이 있으면 고요히 생각하여 의심을 풀고, 풀어도 그 뜻을 얻지 못하면 다시 질문하여 반드시 깨닫고자 하였다. 어른이 수업하고 있으면 곁에 앉아 듣다가, 부친께서 그 글 뜻을 물으면 그의 대답은 지체함이 없었다.”

이처럼 어려서부터 그의 학문하는 자세는 진지하고 범상치 않았음을 알 수가 있다.

또한 그의 효행은 예사롭지 않았으니, 8세 무렵의 품행에 대하여 「연보(年譜)」에서는 다음과 같이 적고 있다.

“효성이 다른 사람보다 뛰어났으니, 새벽에는 부모의 침소에 나아가 안부를 살폈으며, 저녁에는 이부자리를 정해드렸으며, 별미의 음식이 있으면 반드시 진상하였다.”

8세의 어린나이에 ‘저녁에는 부모님의 잠자리를 보아 드리고 아침에는 문안 인사드리는’ 도리를 행하였다는 것은 인위적인 노력에 의한 것이 아니라 천성이 본래 그러하였다는 것을 알 수 있다.

그 뒤 13세 되던 해에 부친의 상을 당하고, 2년 후인 15세 되던 해에 집안의 경제와 정신적으로 의지하던 백부마저 세상을 떠났다. 기울어가는 가세에 그는 직접 산과 들에 나가서 나무와 농사를 하면서 홀어머니를 봉양함에 정성을 다하고 그 마음을 편안하게 해드렸다. 그러한 후에 여가가 있으면 책을 읽었다. 일을 할 때에도 암송하고 생각하며, 저녁에는 서당에 나아가 의심스러운 곳을 질정하기를 5∼6년을 하였는데, 이러한 일과를 하루도 게을리 하지 않았다.

이유흥은 21세 되던 해에 김준영을 처음을 만났다. 김준영은 부모에 대한 효행과 각고의 노력으로 낮에는 일하고 밤에는 공부하는 이유흥을 보고 매우 기뻐하고 자주 찾아와 만나곤 했다. 이유흥은 어려서부터 가정형편의 어려움 속에서도 독서를 놓지 않았으며, 당시 이미 학식과 품행은 주위에 모범이 되었다. 이러한 이유흥의 실정을 누구보다도 잘 알고 있었던 김준영은 그가 장차 큰 성취가 있으리라는 것을 알고, 그에게 학문을 할 것을 권하였다. 이유흥은 이로부터 수시로 김준영을 찾아뵈면서 가르침을 받았으며, 그로부터 3년 후에 정식으로 김준영과 사제의 의를 맺었다.

그 이듬해에 이유흥은 또한 김준영을 따라 전우선생을 배알하였다. 당시 전우는 이유흥에게 ‘심통경고(心桶敬箍)’라는 네 글자를 써 주면서 다음과 같이 설명한다.

“마음은 통과 같고 경은 테와 같으니 모름지기 단단히 죄어야 한다. 조금이라도 단단히 죄지 아니하면 통이 풀어져 흩어지게 된다. 이 말은 고인의 아름다운 말씀이시다. 글자는 비록 아름답지 않지만 뜻은 새겨볼 만하다.”

이어서 또

“경으로 마음을 검속하기를 마치 대껍질로 통을 조이는 것과 같이 해야 된다. 만약 조금이라도 느슨하게 하면 바로 풀어져 흩어지게 된다. 이렇듯 공부를 할 때는 절실히 공부하여 조금이라도 끊어짐이 없어야 한다. 이러한 공부가 익숙한 경지에 도달하면 비록 죽고 사는 것이 앞에 펼쳐진다고 하더라도 마음이 동요되지 않을 것이다.”

이후 이유흥은 29세 되던 해에 김준영의 명에 따라 전우를 만나 사제의 의를 맺었다. 이처럼 이유흥의 학문은 김준영으로부터 입문하고, 다시 전우를 통하여 그의 학문의 대강이 형성되었다고 할 수 있다. 이후 나라에 큰 일과 큰 변고가 있을 때는 반드시 김준영과 전우에게 질정을 한 후에 실천에 옮기었다.

당시 사람들 중에 일부는 스승인 전우가 어려움에 처한 조국의 현실을 등지고 산천에 도피하여 학생들을 모아 부질없는 강학만 한다는 비난하였다. 이유흥은 이에 대하여 전우의 입장을 적극 대변하고 자신도 전우와 똑같은 길을 걷고자 하였다. 불가항력적인 일제와의 육체적인 싸움보다는 학문을 강마하고 도의 전수를 통해 많은 인재를 양성하여 훗날 외세를 제거할 수 있는 날을 기다려야 한다는 것이다. 이유흥은 스승의 처세방법을 비난하는 사람들에 대해 다음과 같이 변호한다.

 

“세간의 더러운 입으로 선생을 비난하기를 ‘스스로 세상을 피한다고 한다면, 어찌 높이 날아가고 멀리 달아나서 인간 세상에 있지 않아야 하는데 학생들을 모아 가르치는 것을 달갑게 여기는가’라고 한다. 이것은 자신의 좁은 사심으로 군자의 광대한 마음을 엿본 것이다. 옛날 기자가 스스로 ‘은나라가 망하니 나는 그 신하가 되지 않겠다고 하였지만, 훗날 무왕을 위하여 「홍범(洪範)」을 진설한 것은 아마도 하늘이 이 도를 우임금에게 주고 나에게 전하여 나로 하여금 스스로 끊지 못하게 하였기 때문이다’고 하였다. 여기에서 성인이 천하 만세를 위한 지극한 마음을 볼 수 있다. 오늘날 전우선생이 전하고자 하는 도는 유래가 있으니, 어찌 세상에 숨는다는 이유로 도를 전하지 않겠는가. 대개 함께 행하여도 서로 어긋나지 않으니 어찌 세속의 무리들이 알 수 있는 것이겠는가.”

 

여기에서 이유흥은 스승인 전우의 처세를 기자(箕子)에 비유하여 설명한다. 기자는 은나라의 마지막 임금인 주왕(紂王)의 숙부였다. 그러나 주왕은 사치와 향락에 빠져 나라가 망해갔고, 결국 주나라 무왕이 군대를 일으켜 주왕을 물리쳤다. 물론 기자도 처음에는 주왕이 음탕한 생활에서 벗어날 것을 충고하였으나, 주왕은 듣지 않았다.

주위 사람들이 기자에게 차라리 나라를 떠나라고 하자, 기자는

“신하된 자가 자신의 충고를 듣지 않는다고 하여 나라를 떠나버리는 것은 결국 군주의 잘못을 부추기는 꼴이니 차마 그럴 수 없다”

라고 하면서 머리를 풀어헤치고 미친 척하다가 감옥에 갇혔다. 훗날 무왕이 은나라를 멸망시키고 주나라를 건국한 다음에야 감옥에서 석방되었다. 무왕이 기자를 조선에 봉하고 그에게 통치의 이치를 묻자 「홍범」을 지어 통치의 요체를 제시하였다.

이처럼 기자가 망해가는 은나라를 위해 투쟁하지 않고 훗날을 대비한 것처럼, 전우가 현실을 피하여 산속에서 학생들을 강학한 것도 훗날을 도모하는 기자의 처신에 해당한다는 말이다. 전우가 적극적으로 외세에 대응하지 않는 것은 이러한 큰 뜻이 있기 때문인데, ‘세속의 무리들이 선생의 큰 뜻을 어찌 알겠는가’라고 비판하였다. 이처럼 이유흥은 전우의 처세와 마찬가지로 당시의 상황에서는 오직 학생들을 모아 강학을 하여 도를 전수하는 것이 더 시급한 것이라 보았다.

한편 이유흥은 전우의 ‘성사심제(性師心弟)’를 평생의 화두로 삼고, 성(誠) 공부를 그의 학문을 실천하는 근저로 삼는다. 물론 전우 이전의 율곡을 비롯한 여러 성현들의 가르침에 대한 영향 또한 배제할 수 없지만, 보다 구체적이며 직접적인 영향을 준 것은 전우와 김준영의 학문과 덕행이라 할 수 있다. 특히 전우는 이유흥에게

“성사(性師)의 뜻이 있음을 돌아가 구하고, 심제(心弟)를 행할 것을 마음을 비우고 받아라. 이 이치는 신묘하여 다함이 없으니 바로 받아 끝까지 연구하라.”

라고 하였다. 이 글은 전우가 자신의 평생에 걸친 학문의 총결이라 할 수 있는 ‘성사심제’를 제자인 이유흥에게 전수하면서 평생의 화두로 삼을 것을 계시한 것이라 볼 수 있다.

 

“성사심제는 심이 성을 높여서 심이 감히 스스로 멋대로 쓰지 못하는 것을 말한 것이니, 예컨대 마음이 인(仁)을 어기지 않거나 마음을 잘 보존하고 성을 잘 기른다는 것들이 이것이다. ‘마음이 주재가 된다’는 것은 리는 함이 없고 기는 함이 있음으로 말한 것이니, 성이 그 마음을 검속할 수 없고, 마음이 능히 성을 다한다고 하는 것과 같은 것들이 이것이다.”

 

이 구절은 성리학의 주요 개념인 ‘심통성정(心統性情)’에 근거하여 심의 주재성을 강조하는 전우 반대 학자들에 대한 비판이다. 전우 반대 학자들은 ‘심이 성정을 통섭한다(心統性情)’는 구절에 근거하여 심이 성과 정을 통섭하고 주재한다고 주장한다. 심이 성과 정을 통섭하고 주재하기 때문에 심의 지위는 리에 해당한다. 때문에 이들은 ‘심이 곧 리가 된다(心卽理)’고 주장한다. 또한 심이 성과 정을 통섭하고 주재하기 때문에 ‘성은 높은 것이고 심은 낮은 것이다(性尊心卑)’, 또는 ‘성은 스승이고 심은 제자이다(性師心弟)’라는 것을 주장하는 전우를 비판한다.

이러한 전우 반대 학자들의 비판에 대해, 이유흥은 ‘성은 리이고 심은 기이다’라는 이론으로 전우의 주장을 변호한다. 성은 무위(無爲)하기 때문에 리가 되고, 심은 작용이 있기 때문에 기가 된다. 또한 성은 형체가 없기 때문에 형이상의 개념이고 심은 형체가 있기 때문에 형이하의 개념이다. 심이 기이고 형이하의 개념이기 때문에 리이고 형이상의 개념인 성에 비하면 어디까지나 존귀한 성보다는 비천한 것이 된다. 이것을 또한 스승과 제자의 관계로 비유하면, 성은 스승의 지위가 되고 심은 제자의 지위가 된다는 것이다. 이처럼 이유흥은 전우의 입장에서 전우 반대 학자들의 ‘심이 곧 리이다’는 해석을 비판하고, ‘심이 곧 기이다’를 주장한다. 심이 리가 아니고 기이기 때문에 리인 성에 비해 낮은 것이 되고, 스승인 성에 비해 제자의 지위를 갖지 않을 수 없다. 이것이 그의 ‘성은 스승이고 심은 제자이다’는 ‘성사심제’의 이론이다.

또한 이유흥의 호가 성암(誠菴) 또는 성재(誠齋)인 것에서 알 수 있듯이, 그의 평생 공부는 ‘성’에서 출발하고 ‘성’으로 마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스승인 김준영은 성과 관련시켜 이유흥을 다음과 같이 설명한다.

 

“이유흥은 ‘성’자의 공부에 있어서 생각이 이미 반을 지났다고 할 수 있다. 성에는 학자의 성과 성인의 성이 있다. 예를 들어 ‘그 뜻을 성실히 한다’는 것은 학자의 성이며, ‘지극히 성실하여 그침이 없다’는 것은 성인의 성이다. 대저 배운다는 것은 성인을 배우는 것이다. 성인은 사람이며 나 또한 사람이다. 사람이 사람을 배우는 것이 어찌 이르지 못할 도리가 있겠는가. 단지 노력하는 것에 달려있을 뿐이다. 지금 이유흥은 그 뜻을 성실히 하는 자이다.”

 

여기에서 김준영은 성을 ‘학자의 성’과 ‘성인의 성’으로 구분하고, 이유흥이 이미 ‘학자의 성’의 단계를 지나 ‘성인의 성’의 단계로 나아가고 있다고 평가한다. 배운다는 것은 성인을 배우는 것이며, 성인 또한 사람이니 성실히 노력하면 누구나 성인이 될 수 있다. 노력하면 성인의 경지에 이를 수 있다는 일념 하에, 평생토록 학문의 길을 걸을 수 있었던 것이 바로 그의 ‘성’자상의 공부에 있었음을 알 수 있다.

끝으로 공자와 맹자의 주요 내용 중에서 서로 모순되는 듯한 주장에 대한 이유흥의 해석을 소개한다. 즉 공자는

“성인과 같은 아주 지혜로운 사람과 아주 어리석고 못난 사람은 변화시킬 수 없다”

라고 하였고, 맹자는

“사람들은 모두 요임금과 순임금과 같은 성인이 될 수 있다”

라고 하였다. 다시 말하면, 공자는 아주 어리석은 사람은 아무리 교육을 하더라도 성인이 될 수 없다고 하였고, 맹자는 누구나 성인이 될 수 있다고 하였다. 공자와 맹자의 이 두 말은 분명이 서로 모순된다. 한쪽은 아무리 노력하더라도 성인이 될 수 없다고 하였고, 한쪽은 누구나 성인이 될 수 있다고 하였으니 말이다. 이러한 서로 어긋나는 주장에 대해 이유흥은 다음과 같이 둘의 차이를 설명한다.

 

“어떤 이가 물었다. 공자는 ‘상지와 하우는 변화시킬 수 없다’고 하였고, 맹자는 ‘사람은 모두 요임금과 순임금 같은 성인이 될 수 있다’고 하였다. 성현의 말씀이 다른 것이 이와 같은 것은 어째서 그런 것인가. 이유흥이 대답하였다. 무릇 경전의 뜻을 강론함에는 마땅히 그 말의 근본에 나아가 각각 그 이치를 연구해야 하고, 같거나 다른 것을 비교하여 도리어 그 본뜻을 흐리게 해서는 안 된다. 맹자는 일반사람과 요순이 본래 성품이 같음을 밝힌 것이다. 따라서 사람들은 모두 요순이 될 수 있다고 한 것이다. 공자는 사람 성품의 선과 악을 크게 나누었다. 따라서 상지와 하우는 변화시킬 수 없다고 하였다. 말씀마다 각각 마땅한 바가 있다.”

 

즉 맹자는 본연지성에 근거해서 사람들이 누구나 선한 본성을 가지고 있음을 말한 것이고, 공자는 기질지성에 근거해서 기질에 따라 사람의 성이 천차만별로 달라지는 것을 말한 것이다. 맹자가 내면의 순선한 본질에 근거해서 말한 것이라면, 공자는 드러나는 현실속의 선과 악이 혼재하는 인간의 모습에 근거해서 말한 것이라는 말이다. 이처럼 이유흥은 공자와 맹자의 서로 모순되는 듯한 구절을 ‘각각 마땅한 바에 나아가서 말한 것’으로 해석한다. ‘각각 마땅한 바에 나아가서 말한 것’이라는 것은 공자는 인간의 드러나는 현상에 나아가서 말한 것이고, 맹자는 인간의 본질에 근거해서 말한 것이라는 말이다. 이것을 주자 성리학에서는 본연지성과 기질지성으로 설명하였다. 따라서 학문의 궁극적 목표는 본연지성을 회복하여 요순과 같은 성인이 되는데 있으며, 또한 그 공부과정은 바로 가질지성에 해당하는 기질을 변화시키는데 있다고 강조한 것이다.

 

 

[참고문헌]: 「성암 이유흥의 처세와 학문」(민경삼, 『간재학논총』4, 간재학회, 2004),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