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우(田愚)


전우(田愚)                                                                      PDF Download

 

2017 율곡학맥-전우
전우 초상
전우(田愚, 1841~1922)는 조선 시대 말엽에 활동한 유학자로 임헌회(任憲晦, 1811∼1876)의 제자이다. 그는 어려서부터 서울에서 공부를 하였기 때문에 기호학파의 학자들과 교류를 하였으며 학문적으로 율곡에 연원을 두게 되었다. 특히 낙론계열의 학맥을 계승한 임헌회와 사제관계를 맺게 되어 낙론의 영향을 받고, 율곡과 송시열의 사상을 추앙하고 옹호하였다.

조선 성리학의 마지막 시기를 대표하는 그는 저서로 ⌈간재집⌋, ⌈간재사고(艮齋私稿)⌋, ⌈추담별집(秋潭別集)⌋, ⌈안자편(顔子篇)⌋, ⌈연원정종(淵源正宗)⌋ 등을 남겼다.

 

1841(1, 헌종 7)
8월 31일에 전주부(全州府) 서문(西門) 밖 청석동(靑石洞)에서 아버지 청천(聽天) 전재성(田在聖)과 어머니 남원 양씨 사이에서 둘째 아들로 태어났다. 어렸을 때 이름은 경륜(慶倫) 혹은 경길(慶佶)이며, 자(字)는 자명(子明), 호(號)는 간재(艮齋)이다. 구산(臼山), 추담(秋潭), 담주(潭州) 등의 호를 사용하기도 하였다. 본관(本貫)은 담양(潭陽)이다.

1846(6, 헌종 12)
집안이 비교적 넉넉하여 일찍부터 글을 배웠는데, 이 해에 『소학(小學)』을 공부 하였다.

1849(9, 헌종 15)
아버지의 명으로 화분에 피어있는 매화를 보고 다음과 같은 시를 지었다.

 

聽雪鼓絃琴韻冷
눈 내리는 소리를 들으며 거문고 뜯으니 운율이 싸늘하고

看花題句墨痕香
꽃을 보며 시를 적으니 먹의 흔적에서 향기가 나는 구나.

 

1852(12, 철종 3)
왕희지(王羲之)의 필법(筆法)을 익히기 시작했다. 글쓰기 실력이 상당한 수준까지 도달하였으나

‘말엽적인 기술에 머물 것이 못된다.’

고 생각하여 나중에 그만 두었다.

이즈음 사서오경 공부를 하고 있었는데 다음해에 사서오경을 모두 독파하였다.

 1854(14, 철종 5)
가족을 따라 서울 정동(貞洞), 삼청동(三淸洞), 순화동(順化洞) 등으로 옮겨 살면서 학문 공부를 하였다.

1858(18, 철종 9)
밀양 박효근의 딸과 결혼하였다. 스승 임헌회가 효능참봉(孝陵參奉)에 임명되었으나 취임하지 않았다. 임헌회는 그 다음해에 활인서별제(活人署別提), 전라도사 등에 임명되었으나 역시 사양하고 부임하지 않았다.

1859(19, 철종 10)
책을 들고 입산하여 학문에 심취하였다. 특히 시문에 일가를 이룬 뒤, 능숙한 문장 솜씨로 그의 명성이 주위에 알려지기 시작했다.

1860(20, 철종 11)
이해에 최제우가 경주에서 동학을 창시하였다. 전우는 퇴계(退溪)의 글을 읽고 학문에 뜻을 두게 되었다.(일설에는 학문에 뜻을 두고 퇴계집을 읽다가 유학의 근본인 위기지학爲己之學에 흥미를 갖게 되었다고 한다.) 나중에 그는

“내가 20세에 비로소 『퇴계집』을 읽고 느낀 바가 있어서 뜻이 간절하던 차에, 퇴계 선생의 현몽으로 학문의 방향을 잡게 되었다”

고 술회하였다.

 

1861(21, 철종 12)
신응조(申應朝)의 소개로 전재(全齋) 임헌회(任憲晦, 1811∼1876)를 만나 그의 학문을 배워 계승하였다. 임헌회는 이 해에 조정의 경연관에 임명되었으나 역시 사양하였다. 임헌회는 홍직필(洪直弼)의 제자로 성리학에 조예가 깊었다. 낙론(洛論)의 대가로 인성(人性)과 물성(物性)이 같다는 낙론의 입장을 고수하고, 율곡 이이(李珥)와 우암 송시열(宋時烈)의 학문을 계승하였다.

이기론에서도 전우는 스승 임헌회의 영향을 받아 ‘성은 바로 기(性卽氣)’이며, ‘기는 바로 성(氣卽性)’이라는 입장을 취하였다. 「이기유위무위변(理氣有爲無爲辨)」에서 태극은 리만 있고 동정(動靜)의 능력이 없으며 음양이 동정한다고 보고, 리를 무위(無爲)한 것, 기를 유위(有爲)한 것이라 정의했다. 이를 인간에 적용시켜 성(性)은 무위한 것이며, 심(心)은 유위한 것이라고 하였다.

이러한 관점에서 당시 주리론(主理論)의 관점을 가진 기정진(奇正鎭)이나 이항로(李恒老)를 비판했다.

또 이이의 ‘기발이승설(氣發理乘說)’을 계승하였는데, 이(理)는 무위(無爲)이며 실지로 모든 작용은 기(氣)가 주체가 되어 작용하는 것으로 보았다. 뿐만 아니라 율곡의

‘명덕은 단시 본심일 뿐(明德只是本心)’

이라는 주장을 이어받아

‘심은 바로 기(心卽氣)’

이며

‘명덕은 기라는 설(明德是氣說)’

을 주장하고 ‘심즉리(心卽理)’설을 반대했다.

나아가 율곡의 ‘심위기주(心爲氣主)’ 사상을 확대하여 ‘심본성(心本性)’, ‘심학성(心學性)’을 주장하였으며, ‘성은 존귀하며 마음은 비루하다(性尊心卑)’, ‘성은 선생이며 마음은 제자이다(性師心弟)’ 등의 새로운 학설을 제시하였다. 예를 들면

“주자가 말하기를 성은 태극이라 하였고 심(心)은 음양이라고 하였다. 그러므로 하늘과 태극은 마땅히 높은 것이고 심과 음양은 마땅히 낮은 것이다.…… 이를 미루어 보면 성은 스승이고 심은 제자라는 것은 주희의 설에 바탕을 둔 것이다. 하지만 내가 새로 창시한 것이니 의리가 지극히 정미한 것이며 절실한 공부이며 이것이 스스로 만든 심제(心弟) 두 글자다.”

라고 하였다.

그리고 전우는 낙론 계통의 학설을 발전시켜 ‘미발기질체청설(未發氣質體淸說)’을 창안하였다. 이렇게 전우는 주자가 ‘성은 즉 리(性卽理)’라고 하여, 인간의 성을 가장 근본적인 것으로 여겼다는 점을 강조하고 율곡의 학설을 철저하게 계승, 발전시키고자 하였다.

1863(23, 철종 14)
우의정 박규수(朴珪壽)의 추천으로 보양관(輔養官)에 천거되었으나 왕의 승낙을 얻지 못하였다. 이 당시 진사 최한기(崔漢綺, 1803년 ∼ 1879년)가 육왕학을 칭찬하고 또 일본 학자가 주자 학설을 비난한 일을 칭찬하자, 그를 타이르는 시를 지었다.

1865(25, 고종 2)
가족이 임헌회가 있는 공주(公州)의 명강(明剛)으로 이사하자, 매일 스승을 찾아가 모셨다. 조정에서 만동묘(萬東廟)의 제향을 폐지하라는 명령이 내려졌다. 이에 스승 임헌회는 그러한 조치의 부당함을 상소하여, 다시 제향할 수 있도록 건의하였다.

1866(26, 고종 3)
이 해 병인양요가 있었다. 조선의 천주교 탄압을 구실로 프랑스가 함대를 보냈다. 강화도를 점령한 프랑스 함대 7척은 천주교 신부를 살해한 자에 대한 처벌과 통상조약 체결을 요구했으나, 대원군은 그 요구를 묵살하고 무력으로 대항했다. 결국 프랑스 해군은 40여 일 만에 퇴각했다. 프랑스는 실지로 조선의 문호를 개방시키려고 하였으나 오히려 조정의 쇄국정책은 더 강화하였다.

이러한 움직임과 관련하여 유림에서는 위정척사 운동이 일어나기 시작했는데, 기정진(奇正鎭)과 이항로(李恒老)가 척화(斥和)의 상소문을 올렸다.

다음해 4월 어머니 양씨와 아버지 청천공이 잇달아 세상을 떠났다.

1869(29, 고종 6)
이기설(理氣說), 음양설(陰陽說), 정시기질설(靜時氣質說) 등을 지었다.

 1870(30, 고종 7)
스승 임헌회가 왕을 알현한 뒤, 전우를 추천하였다. 스승의 명으로 ⌈오현수언(五賢粹言, 다섯 현인들의 아름다운 말씀)⌋ 14권을 지었다. 이 책은 도학의 의리정신을 기리기 위해서 동방의 오현, 즉 조광조(趙光祖), 이황(李滉), 이이(李珥), 김장생(金長生), 송시열(宋時烈)의 문집에서 좋은 문장을 모은 것이다.

다음해 미국이 1866년 대동강에서 침몰한 제너럴셔먼호 사건을 빌미로 함대를 파견하여 조선을 공격하였다. 강화도에 침입한 미군을 조선의 관군과 백성이 맞서 싸워 격퇴하여 40여일 만에 물러갔다.(신미양요)

1874(34, 고종 11)
스승 임헌회는 이조참판에 임명되었으나 상소하여 사직을 표하고 부임하지 않았다. 그 뒤에도 대사헌, 좨주 등에 임명되었다.

이 전해부터 전우는 이항로의 제자 유중교(柳重敎)와 서한으로 ‘심성이기태극설(心性理氣太極說)’에 관한 논쟁을 시작하였다. 이 논쟁에서 그는 심성과 이기, 태극과 명덕의 본래 의미를 밝히고자 하였는데, 서신의 왕래가 이후 14년에 걸쳐 이루어졌다.

1876(36, 고종 13)
이 해에 일본과 강화도조약(한일수호조약)을 체결하였다. 전년에 일본은 운양호사건을 일으키고 조선의 개항을 강요한 바 있었다. 강화도 조약의 체결로 조선은 문화를 개방하고 서양의 열국과도 조약을 체결하게 되었다. 이러한 조약에 반대하여 이만손(李晩孫) 등이 만인소(萬人疏)를 올려 개화를 반대하였다. 나중에 중암(重庵) 김평묵(金平默), 최익현(崔益鉉) 등도 지속적으로 개화 반대를 호소했다. 특히 최익현은 일본과 서양은 한 몸이라고 주장하는 ‘왜양일체론’을 펴면서 개화를 거부했다.

이 해에, 시국을 걱정하여 내방한 김평묵(1819∼1891)과 심성의 문제를 토론하였다.

이해 2월, 스승 임헌회가 공주 삼기(三岐)로 이사하여, 새로 집을 짓고 마을 이름을 성전(星田)이라 하였다. 전우 가족도 그곳과 가까운 연기(燕岐) 죽안(竹岸)으로 이사하고 임헌회를 모셨다. 이해 스승 임헌회가 사망하였다. 임헌회는 저서로 ⌈전재집⌋ 20권이 있다. 사망하기 직전 스승은 전우에게 뒷일을 부탁하였는데,

“김평묵이 율곡학설을 공공연히 비판하고 새로운 학설로 후진을 선동하니 그대가 이를 반박한 뒤에 도리가 밝아질 것이다.”

라고 하였다.

유중교(柳重敎, 1832-1893)의 ⌈성재집⌋에 임헌회에 보낸 글이 나온다.

“은거지를 새로 정하시어 가옥이 다 완성되었습니다. 풍토와 세상인심이 예전과 비교해 어떠신지요? 전자명(田子明, 즉 전우田愚)이 식솔을 데리고 이끌고 따라갔으니 강론하는 즐거움이 마땅히 예전과 같을 것입니다. 기대를 가질 만한 젊고 뛰어난 사람들을 몇 명이나 얻으셨는지요?”

전우가 스승을 따라서 이사한 소식이 주변에 널리 알려진 것이다. 허전은 편지에서 계속 자신의 상황을 소개하면서 이렇게 썼다.

“저는 2월에 가평군 화악산(華岳山)의 남쪽인 조종천의 북쪽으로 이사하였습니다. 샘과 돌의 정취와 꽃과 나무의 즐거움에 평소 품었던 생각이 그런대로 위안되었습니다. 다만 선생님과의 거리가 몇 사(舍, 병사가 하루에 걷는 거리, 즉 약 30리를 말함) 정도 더 멀어져 안타까운 감회가 더욱 간절합니다. 일명(一命)의 은택을 받았으나 분수를 헤아리니 황송하여 몸 둘 곳을 모르겠습니다. 다만 평소에 글을 읽었지만 알맹이도 없고 한갓 글만 읽는 척하였는데 저의 이름이 갑작스레 사람들에게 알려지게 되었습니다. 시국의 일은 금수가 사람을 핍박해서 조금씩 더 심해집니다. 통곡하고 길게 외쳐본들 어찌하겠습니까.(이하 생략)”

세상의 변화에 대한 한 유학자의 무기력감이 짙게 배여 있다.

 

1878(38, 고종 15)
충북 음성(陰城) 삼현(三峴)으로 이사하였다. 「주재설(主宰說)」, ⌈讀中庸首章說⌋을 지었다.

유중교가 전우의 행동에 대해서 불쾌하게 평가한 내용이 그의 서신에 다음과 같이 보인다.

“전우(田愚)에 관한 일은 역시 사문(斯文)의 일대 변괴입니다. 그 사람의 재능과 식견은 그다지 엉성하지도 않은바, 크게 사문의 복은 되지 못하고, 크게 사문의 화가 될 것입니다. 이것이 저의 깊은 걱정거리입니다. 일전의 한 통 편지는, 거절하였을 뿐만 아니라, 실로 분쟁의 길을 열어놓았습니다.

(제가) 사람이 미천하고 말이 가벼워서 힘을 얻기가 쉽지 않은 것이 한스럽습니다. 형께서는 그와 더불어 알고 지낸 지가 오래되었기에 한마디 가르침이 있을 것이라고 생각하였습니다. 그런데 이에

“세상은 넓고 인물은 많으니, 내가 그 사람에 대해 좋게 보지 않으면 그만이지, 무슨 상관이 있겠는가?”

라고 하시었습니다. 모르겠습니다마는, 형께서는 평소 이 사람과의 관계에 있어서 교화할 수 없음을 보고서 그런 말을 하신 것입니까? 아니면 다른 사람의 시비는 나의 일과는 상관이 없으니 그들이 제멋대로 하더라도 내버려 두고 자신의 느긋하고 편안히 즐기는 계획을 이루고 있을 것입니까? 전자일 것 같으면 이 사람을 위해 실망됨이 더욱 심하고, 후자일 것 같으면 형을 위해서도 유감이 없을 수가 없습니다. 대개 어진 사람이 타인을 대할 때는 그 마음 씀씀이가 이처럼 괄시해서는 안 됩니다. 어떠합니까?”

(「성재집」, 「서여심께 답함(答徐汝心)」(1878년, 10월 戊寅十月)

유중교가 말하는 ‘전우에 관한 일’은 김평묵의 임헌회 제문과 관련된 일을 말한다. 전 해에 임헌회가 사망 한 뒤 제사를 지낼 때, 전우는 내용상 어떤 문제 때문에 김평묵(1819년∼1891년)이 지은 제문을 문제시 했다. 그리고 전우는 임헌회의 아들인 임진재(任震宰)와 함께 김평묵에게 편지를 보내어 절교를 선언하고 제문을 돌려보냈다. 이일을 유중교는 ‘사문’ 즉 유림의 일대 변괴라고 한 것이다. 그리고 자신이 느낀 전우에 대한 불쾌한 감정을 서여심에게 표현한 것이다.

1882(42, 고종 19)
이 해에 임오군란이 일어났다. 조선은 미국과 수호조약을 체결하였다. 일본과는 제물포 조약을 체결하였으며 청나라와는 조청상민수륙무역장정이 체결되었다.

전우는 영의정 홍순목(洪淳穆)의 천거로 선공감(繕工監)의 가감역(假監役)과 감역(監役), 전설사 별제(典設司 別提)와 강원도 도사(江原道 都事) 등에 임명되었으나, 모두 사양하였다. 이후 상주(尙州)․장암(壯岩)․문경(聞慶)․진천(鎭川)․만죽(晩竹)․문천(文泉) 등을 옮겨 다니면서 학문을 연마하고 후학을 양성하였다.

1894(54, 고종 31)
이해에 동학농민운동이 일어나서 청나라 군대와 일본 군대가 조선에 출병하여 청일전쟁이 발발하였다. 7월에 정부에서는 갑오개혁을 추진하였다. 한편 일본군은 경복궁을 점령하고 민씨정권을 축출한 뒤, 흥선대원군을 추대하였다. 김옥균이 상해에서 살해당했다.

전우는 사헌부 장령(司憲府 掌令)에 임명되었으나 부임하지 않았다.

1895(55, 고종 32)
친일 개화론자 박영효(朴泳孝)가 전우를 수구파 학자 중 우두머리로 지목하고 고종에게 개화를 실현시키려면 그를 죽여야 한다고 여러 차례 건의하였다. 하지만 고종은 전우를 순흥 부사(順興 府使), 중추원 찬의(中樞院 贊議) 등에 임명하였다. 전우는 사양하고 나가지 않았다.

10월, 명성황후가 일본인들에게 시해(弑害) 당했다.(을미사변) 전우는 상소문을 올려 역적 처벌을 주장했다.

1896(56, 고종 33)
이 해에 시민사회단체인 독립협회가 설립되고 서재필이 독립신문을 창간하였다.

조정에서 개혁을 단행하여 의복 간소화를 추진하고 단발령(斷髮令)을 내리자 전우는 통곡하면서 모든 자손과 제자들에게 의복과 상투를 죽음으로 지킬 것을 명하였다. 아울러 단발을 행한 제자 1,000여 명을 자신의 문인록(門人錄, 제자 명단)에서 삭제하였다. 이 해 7월 최명희가 주선하여 충청도 태안의 근흥면에서 후진 교육에 힘썼다.

1897(57, 고종 34)
대한제국이 탄생하였다. 고종은 국내외에 조선이 독립국임을 선포하고, 국호를 대한, 연호를 광무, 왕을 황제라 칭하였다. 서대문에 있던 영은문을 헐고 독립문을 세웠다. 영은문은 중국의 사신을 맞이하던 모화관(慕華館) 앞에 세운 문으로 청나라로부터의 독립을 강조한 것이다.

1899(59, 대한제국 광무 3)
그동안 서산과 태안 지역에서 후진 양성에 힘쓰다 공주 금곡(金谷)으로 이사하였다.

 1901(61, 광무 5)
‘심본성설(心本性說)’을 발표하고 세상의 유학자들이 마음을 리로 알고 본성을 근본으로 삼지 않는 오류를 지적하였다. 또 ‘양명심리설변(陽明心理說辨)’을 지어 왕양명의 ‘심즉리설(心卽理說)’을 배척하였다.

1903(63, 광무 7)
스승의 명으로 편찬한 「오현수언(五賢粹言)」을 다시 정리하여 글을 쓰고 합철하였다.

1905(65, 광무 9)
일본과 조선 사이에 을사보호조약이 강제로 체결되었다. 전우는 두 차례에 걸쳐 상소문(「청참오적(請斬五賊)」)을 올려 을사오적을 처단하고 조약 파기를 요구하였다. 이어서 「포고천하문(布告天下文)」, 「경세문(警世文)」 등을 지어 이토 히로부미를 탄핵하였다. 이에 친일파 조정 대신들은 전우를 죽이도록 고종에게 건의하였으나, 고종은

“너희들은 짐에게 선비를 죽인 누를 입게 하려 하느냐.”

고 하였다.

1906(66, 광무 10)
고부에서 36책의 「간재사고(艮齋私稿)」를 정리하였다. 겨울에 중추원 부찬의(副贊議)에 임명되었으나 부임하지 않았다.

이해 2월경에 최익현(면암, 1834년~1907년)이 편지를 써서 호남에서 의병을 일으키려고 하니 참가해줄 것을 부탁했으나 전우는 거절했다. 최익현은 을사조약 이후, 일본사람들에게 저지되어 상경하지 못하였다. 그리고 송병선(宋秉璿, 호는 淵齋)이 순국하였다는 소식을 듣고 이렇게 말했다고 한다.

“사람마다 죽기만 하면 누구를 의지하여 국권을 회복할 것인가. 아직 죽지 않고 살아 있는 사람은 마땅히 마음을 합치고 힘을 뭉쳐 불에서 구해 내고 물에서 건져 내는 것처럼 서둘러야지 일각도 잠자리에 편안히 있을 수가 없다.”(「면암집」 부록 제4권 「연보」)

그리고 의병을 계획하고 이용원(李容元, 판서), 김학진(金鶴鎭, 판서), 이도재(李道宰, 관찰), 이성렬(李聖烈, 참판), 이남규(李南珪, 참판), 곽종석(郭鍾錫, 호는 俛宇), 그리고 전우(田愚)에게 편지를 보내 함께 국난을 구하자고 권한 것이다. 하지만 호응한 사람이 한사람도 없었다. 그래서 최익현은

“함께 일을 계획할 만한 사람이 없다. 인심이 이와 같으니 참으로 ‘내가 사방을 둘러보아도 궁박하여 갈 곳이 없다.’는 말과 같다.”

고 탄식했다. 그는 나중에 결국 임병찬(林炳瓚)ㆍ김기술(金箕述)ㆍ유종규(柳種奎)ㆍ김재귀(金在龜) 등과 의병을 일으켰다.

 

1907(67, 융희 1, 순종 1)
4월, 퇴계의 묘소와 구택, 도산서원 등을 방문하였다. 6월, 바다로 나갈 것을 계획하고 태안으로 갔다. 8월, 안민도로 가서 망명할 장소를 살피고 돌아왔다.

1908(68, 융희 2, 순종 2)
9월, 나라가 망하더라도 도학(道學)을 일으켜 국권을 회복하겠다고 다짐하고, 망명을 실현하기 위해서, 변산반도 앞에 있는 위도 서쪽의 왕등도(旺嶝島)로 들어갔다. 당시 그는

“공자는 춘추전국시대의 어지러운 세상에서 “도(道)가 행해지지 않으니 뗏목을 타고 바다로 들어가겠다.”라고 하였으니 나도 바다로 가겠다!”

고 하였다. 당시 전우는 기울어져 가는 나라에 대한 걱정과 함께 개화파를 비롯한 조정 대신들에 대해서 몹시 절망한 상태였다. 그는 태안에 있을 때부터 이미 섬에서 살고자 하며 안민도(安民島)로 옮기려고 하였다.

전우의 이러한 태도에 대해서 일부 사람들은

“간재는 죽기가 무서워 의병을 일으키지 못했고, 화가 미칠까 두려워 외세를 배척하지 못하였다.”

(김평묵金平默)

라고 비판했다. 또 나라가 망해가는 데도 외면하고 스스로 도학군자만을 자부한다고 비판하였다.

전우는 이러한 비판을 염두에 두고 자신의 입장을 적극 변호하는 글을 써서 「추담별집(秋潭別集)으로 묶었다. 그 안에는 다음과 같은 문장들이 보인다.

 

“국권을 회복한다고 하면서 외세와 손잡게 되면 이는 나라를 회복하기 이전에 내 몸이 먼저 이적이 되는 것이니 이는 절대로 할 수 없는 일이다.”

“500년 종사도 중요하지만 3,000년의 도통(道統)을 잇는 것이 더 소중하니 무가치하게 목숨을 버리지 말고, 학문을 일으켜 도(道)로써 나라를 찾아야 한다.”

“을사년의 수치에도 통곡할 수밖에 없었고, 우리의 모든 선비는 마땅히 피를 토하고 눈물을 흘리며 이를 악물고 살 수밖에 없으나, 눈앞의 위태함만을 알고 나라의 참된 힘이 무엇인가를 깨닫지 못하면, 그것은 총칼 앞에 헛되이 목숨을 버리는 일일 뿐이니, 차라리 몸과 마음을 올바로 가다듬어 신명을 얻어 학문을 열심히 닦아 뜻을 편다면 1년, 2년, 10년, 20년 어느 때인가는 우리의 힘으로 이룰 수 있을 것이다.”

이 당시 대한제국에서 활동하던 영국인 신문기자 베델(Ernest Thomas Bethel, 어니스트 토머스 베델, 대한제국의 성명: 배설裵說, 1872년∼1909년)이 매일신문 논설에서 조선의 유림과 자신을 비판하자 반박문을 써서 제자들에게 돌렸다.

1909(69, 융희 3)

제자들의 간청으로 군산도(群山島) 구미촌으로 거처를 옮겼다.

매천 황현(黃玹)의 이즈음 쓴 시들이 「기유고(己酉稿)」(⌈매천집⌋제5권)에 실렸는데, 「해학(李沂의 호)을 곡하다(哭海鶴)」란 시가 있다. 그 내용은 대략 다음과 같다.

 

歷落嶔奇七尺身
탈속하고 기이했던 칠 척의 몸

風霜到老足悲辛
풍상에 늙어 슬프기도 하네

依劉歲久難爲客
희생한 세월 오래여도 객이 되기 어려웠고

買沃山荒不救貧
사서 가꾼 산이 거칠어 가난을 벗어나지 못했네

蔡澤入秦還有數
채택이 진나라 갈 때는 운이 따라 주었지만

宋牼之楚奈無人
송경이 초나라 갈 때는 사람이 없는 걸 어쩌랴

吁嗟志大終難遇
아아, 뜻은 컸지만 끝내 지우(知遇)를 얻지 못하고

五石空瓠孰復珍
다섯 섬이나 되는 빈 박을 누가 다시 귀하게 여길고

長途萬里恣奔馳
만리 먼 길을 마음껏 내달리니

要是龍駒不可羈
말하자면 준마(駿馬)라 매 놓을 순 없었겠지

義檄風生才薄試
의병 격문 지을 적에 비로소 약간 시험했고

剃刀雪落老逾奇
흰머리 단발하니, 늙을수록 기이 했네……

 

전우는 이 시를 읽고 이렇게 비판했다.

“근래에 이기(李沂)라는 자가 있어서 시문에 능하였는데, 아비가 죽었을 때 상복을 버리고 검은 옷을 입었으며, 연전에 학보(學報)에서는 사람들에게 독서하지 말 것을 권하면서 즐겨 유림(儒林)을 욕하였다. 이 자야 진실로 나무랄 것이 못 되나, 마침내 어떤 문사(文士, 즉 황현)가 그 사람에 대한 만사(輓詞)를 지으면서, ‘흰머리 단발하는 등, 늙을수록 기이했네.(剃刀雪落老愈奇)’라고 하였으니, 이 말이 가소롭다.”

(⌈艮齋集⌋ 後編 續 卷4 答孫周夏)

 

이기(李沂, 1848∼1909)는 노년에 자진해서 머리를 깎고, 양복을 입었다. 그는 조선 말기의 문인이자 독립운동가이며, 계몽운동가였다. 자는 백증(伯曾), 본관은 고성(固城), 전북 김제(金堤)의 몰락한 양반 집안 출신이었다. 시(詩)에 재능이 있어 이름을 날렸으나, 과거에 여러 번 낙방한 뒤에는 실학자들의 저술 연구에 전념하였다. 이후 일본으로 건너갔는데, 거기에서 새로운 문명을 경험하고 단발을 하였다.

귀국 후 한성사범학교 교관을 지냈으며 1906년(광무10년)에 장지연(張志淵) 등과 함께 대한자강회(大韓自强會)를 조직하고 계몽활동을 하였다. 아울러 을사오적의 처단을 위해 자신회(自新會)를 조직하고 실행에 옮기기 위해서 노력하다 체포되어 전라도 진도(珍島)에 유배되었다가 1년 뒤에 풀려났다. 석방 후 서울로 돌아와 호남학회(湖南學會)의 간부로서 글을 발표하는 등 계몽활동을 하였다. 1909년(융희3)에는 단군교(檀君敎) 창립에 가담했고, 그해 7월 서울의 한 여관에서 사망했다. 저서로는 《해학유서(海鶴遺書)》가 있다.

1910(70)
4월, 안중근 의사가 이토 히로부미를 하얼빈에서 살해했다는 소식을 듣고 시를 지어 찬양했다.

8월, 한일합방의 소식을 들었다. 전우는 분함을 이기지 못하고 여러 제자들과 산에 들어가 수일간 침식을 잊고 통곡하다가 다시 왕등도로 들어갔다. 그리고 일본의 침략에 대응하여 조선 사람으로 자처하면서 일본인들을 상대하지 않고 세금도 내지 않고자 하였다. 그는 도가 땅에 떨어진 세상에 국권을 회복하고 난정(亂政)을 바로 잡아 도탄에 빠진 백성을 구제할 힘과 방법이 없다면 차라리 세상을 등지고 자연에 은둔하면서 유교의 학문을 전수하는 것이 유익하다고 판단했다. 이 때문에 사람들로부터 지탄을 받기도 하였으나 그것을 무시하였다.

1911(71)
11월, 경무부의 고등관으로 있는 일본인이 경비선을 타고 왕등도에 들어와 전우의 동태를 살폈다. 당시 전우는 벽에

‘만겁이 흘러도 나는 끝까지 한국의 선비요, 평생을 기울여 공자의 제자가 되리라
(萬劫終歸韓國士, 平生趨付孔門人)’

라는 시를 적어 놓고 있었다. 이것을 보고 그 일본인은 진짜 한국의 선비를 만났다고 보고했다고 한다.

 

1912(72)
제자들의 간청에 따라 왕등도에서 나와 군산도에 머물었다. 다시 부안의 계화도(界火島, 혹은 界華島)에 정착하고, 그곳을 ‘중국문화를 계승한다.’는 뜻의 계화도(繼華島)라 불렀다. 이후 제자들의 도움으로「간재문집」을 완성하였다.

다음해 「기질체청설(氣質體淸說)」을 지어 기질의 본체는 원래 청명하고 순수하다고 주장하였다.

1914(74)
섬에 들어온 이후의 감상을 적은 「해상산필(海上散筆)」을 완성하였다. 이 가운데는 한주 이진상의 ‘심즉리설’에 대한 변론도 들어 있다.

다음해 「해옥병어(海屋病語)」를 저술하고, 정세영 등이 제시한 ‘성리수기이품설(性理髓氣二稟說)’을 반복해서 분석했다. 그 다음해에 「성존심비적거(性尊心卑的據, 성은 존귀하고 마음은 비루한 증거)」를 지었다.

1918(78)
손자를 불러서,

“나는 한국의 유민으로서 어찌 타국에 입적(入籍)하겠는가. 너도 죽을지언정 도장을 찍어 입적을 해서는 안 된다.
(吾以韓國遺民, 豈肯入籍於他邦, 汝雖死不可奈章)”

라는 글을 써주고 왜나라 사람이 되지 않도록 당부 하였다.

아울러 이 해에 「양가심성존비설(兩家心性尊卑說)」을 지어 유가는 하늘을 근본으로 삼는 학문인데 반하여 다른 학파, 즉 양명학파는 마음을 근본으로 삼는 학문이라고 설명하였다.

 

1919(79)
1월 고종이 승하하였다. 그 소식을 듣고, 황제만세를 부른 뒤, 삼년상의 상복을 입기 시작했다. 조긍섭은 적에게 항복한 임금을 위해서 복(服)을 입을 수 없다며 상복 입기를 거부하였는데, 여러 사람에게 공격을 당하였다. 전우도 그를 ‘적(賊)’이라고 지목하여 성토하였다.(조긍섭의 암서집)

3·1 독립만세 사건이 일어난 직후, 명망 있는 각 지역의 유림(儒林) 137명이 파리 평화회의에 보내는 장문의 문서(巴里長書)를 다음과 같이 작성하고, 서명하였다.

“한국 유림대표 곽종석, 김복한 등 137인은 삼가 파리평화회의 여러분께 이 글을 올립니다. 천하 만물이 함께 자라 세상을 크게 밝히니 이게 바로 진리일진대, 대소의 형세가 다르다 해서 남의 생명과 남의 나라를 해치고 있으니, 어찌 이런 일이 있겠습니까. 이제 하늘이 여러분을 보내어 대동의 세계를 만들게 할지니, 먼저 우리의 억울함을 살펴주소서. 아! 한국이 문명국임은 다 아는 사실이나 힘이 약하여 일본의 침략을 받았으니 지금부터 그 행위를 폭로하겠습니다.(이하 생략)”

당시 유림은 영남학파와 기호학파로 나뉘어 서로 경쟁하고 있었으나 이렇게 모두 함께 단합하여 호소하였으나 전우는 이에 참가하지 않았다. 이 때문에 사람들이 그를 크게 비판했다. 원래는 맹보순(孟輔淳)을 중심으로 한 유림 수천명이 전우를 대표로 파리평화회의에 독립을 탄원하는 문서를 보내자는 운동이 있었다. 이러한 움직임에 대해서 그는 처음에는 대한제국의 황제를 복위시키고 유교가 국가이념이 되는 일이라면 자신의 육신이 조각난다 해도 파리에 갈 수 있다고 하였으나, 나중에 이러한 뜻을 번복했다. 그는 일이 자신이 의도한 바와는 다르게 진행된다고 주장하고 서명도 거부하였다.

1920(80)
당시 동아일보 사장이었던 박영효가 주자학의 의리를 비판하자 그를 적극 성토하였다. 전우는 자신의 생각과 다른 사상에 대해서 적극적으로 비판하면서 자신의 성리학을 구축한 비판철학자라고 할 수 있다. 대표적인 것으로 김창협(金昌協) 사상을 비판한 「농암사칠의의(農巖四七疑義)」(1918년), 기정진(奇正鎭)의 「외필(猥筆)」을 비판한 「외필변(猥筆辨)」, 이항로(李恒老)의 사상을 비판한 「화서아언의의(華西雅言疑義)」(1881년), 이진상(李震相) 사상을 비판한 「이씨심설조변(李氏心說條辨)」(1911년) 등이 있다. 그는 오직 율곡과 송시열의 사상을 계승하고자 하였다. 그리고 정통적인 도학의 중흥만이 일본에게 빼앗긴 국권을 회복하는 길이라고 믿었다.

1922(82)
제자들이 수집한 원고를 교정하여 간재문집 후고를 완성하였다. 이해 7월 4일 82년의 생애를 마쳤다. 장례식에는 2000여명이 그의 영구를 따랐고, 6만 여명이 넘는 인파가 그의 마지막 모습을 참관했다고 한다. 전북 익산의 선영에 묻혔다. 이후 계화도의 계양사(繼陽祠), 의령의 의산사(宜山祠), 고창의 용암사(龍巖祠), 정읍의 태산사(台山祠) 등에 제향되었다.

그의 제자는 이병은(李炳殷), 성기운(成璣運), 정형규(鄭衡圭), 송기면(宋基冕), 권순명(權純命), 유영선(柳永善), 오진영(吳震泳), 김준영(金駿榮), 김택술(金澤述) 등 3,000여명에 달하며 이들은 간재학파라고 불리는 학파를 형성하였다.

 

<참고문헌>

오종일, 「전우」,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1995
태안문화원, 「간재(艮齋) 전우(田愚)선생」, 충청남도문화원, 2016.5.24

박희우, 「파리장서(巴里長書)를 아시나요?」, 오마이뉴스, 2005.3.1
최전율, 「간재의 성리학 연구」, 원광대학교 대학원 석사학위논문, 1999.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