송명흠(宋明欽, 1705-1768) – 제2편


송명흠(宋明欽, 1705-1768) – 제2편               PDF Download

 

명흠은 자는 회가(晦可)이고 호는 늑천(櫟泉)이며, 본관은 은진이다. 고조는 동국 18현인의 한 명인 송준길(宋浚吉), 증조는 공조정랑을 지낸 송광식(宋光栻), 조부는 의금부도사를 지낸 송병원(宋炳遠)이다. 병원은 딸만 둘을 두어 동생 병익의 2자 요좌(堯佐, 1678-1723)로 계후하였다. 송요좌의 큰 아들이 송명흠이다. 송명흠은 동생 송문흠(宋文欽)과 더불어 당시 송씨 문중의 쌍벽으로 불리웠다. 이재의 문인이다.

송명흠은 어려서 부친의 가르침을 받았고, 9세에 이미 사서삼경을 재독할 만큼 영민하였다. 16세에 김육(金堉)의 현손인 김도흡(金道洽)의 딸을 배필로 맞이했다. 18세 때(경종 2년)에 신임옥사가 일어나 고모부 김제겸(金濟謙)의 부친이면서 노론 사대신의 한 명이었던 김창집(金昌集)이 죽고 김제겸도 유배지에서 사망했다. 송명흠은 부친 송요좌가 사화를 피해 벼슬을 버리고 옥천(沃川)으로 낙향할 때 함께 갔다.

23세 때 이재를 처음으로 찾아뵙고, 이후 자주 내방하여 수학하였다.

30세 때에 운평 송능상과 맹자와 주서(朱書)를 독서하였고, 12월에는 녹문 임성주와 운평 송능상과 모여서 독서하였다.

영조 15년 35세 때에 신임사화가 소론과격파에 의해 조작된 무옥임이 밝혀져 경신처분이 내려졌다. 신임사화가 마무리되자 영조는 세자 교육을 담당할 산림 천거를 요청하는데, 송인명이 세자의 강학을 위해 도학이 있고 행실이 바른 선비로 5명을 천거하였는데, 그 중에 한 명으로 송명흠도 있었다.

50세 때에 민우수(閔遇洙), 신경(申暻), 김원행(金元行), 송능상(宋能相), 최재흥(崔載興)과 함께 시강원 서연관으로 제수되었으나 어머니 병 때문에 사양하고 취임하지 않았다.

1762년(영조38) 윤5월에 사도세자가 사망한 이후 송명흠을 다시 징소하면서 영조가 “마땅히 너의 할아버지를 생각하고 상설(象設)을 바라보라. 칠순이나 되는 임금의 기대는 오직 호서(湖西)에 있고 동궁의 보도(輔導) 또한 산림(山林)에 있다. 글로는 뜻을 다할 수 없고 오직 ‘반드시 보고 싶다.[必欲見]’라는 세 글자가 있을 뿐이니, 모름지기 나의 뜻을 헤아리도록 하라.”라고 했다.

59세(영조39) 때 3월 5일의 상소에서 영조를 조후(曹侯)비유한 ‘적불(赤芾)’이란 말로 영조의 노여움을 샀다. 적불(赤芾)은 붉은 무릎 가리개로, 대부(大夫)이상의 관원은 적불을 착용하고 초헌(軺軒)을 탔는데, <시경(詩經)> 조풍(曹風) 후인장(候人章)에 조(曹)나라 군주가 군자(君子)를 멀리하고 소인을 가까이하였으므로, 대부가 5인인 제후(諸侯)의 제도를 무시한 채 그 복색(服色)을 한 자가 수백 명이었으며 어진 이는 도(道)를 지키느라고 도리어 빈천(貧賤)하게 되었다는 뜻으로 소인들이 조정에 가득한 것을 풍자한 말이다.

이에 대해 계속해서 초선(抄選)들의 상소가 잇따르자 영조는

“송명흠의 적불이란 말도 역시 산야(山野)의 당론”

이라고 단정 지었다.

이후 박세채의 문묘 종향 문제로 당론이 이어지자 신경(申暻)ㆍ송명흠ㆍ홍계능(洪啓能)ㆍ김양행(金亮行)을 모두 초선에서 빼라고 명하면서 당습(黨習)은 망국의 단서인데 그 원인은 산림의 선비에게서 말미암았다고 글을 지어 유시하였다. 그리고 송명흠, 김양행, 홍계능을 서인으로 만들었다. 그 후 영조43년에 유림을 서인으로 만든 것은 3백 년 동안 없던 바라 하여 송명흠을 서인으로 삼으라는 명을 정지하였다.
영조실록⌋ 44년 조에 송명흠의 졸기가 실려 있는데, 사관의 평이 다음과 같다.

“송명흠은 선정신 문정공(文正公) 송준길(宋浚吉)의 현손(玄孫)으로서 일찍이 가정의 학문을 이어받았으며 글을 읽고 몸을 닦아 사림(士林)이 추앙하는 바가 되었다. 정초(旌招)를 누차 내렸으니 뜻을 지키고 나오지 않더니, 은례(恩禮)가 갈수록 융성해지자 감격하여 조정에 나왔다. 전석(前席)에 출입하면서 애연히(藹然)히 서로 믿음이 있었는데, 마침내 처음의 예우(禮遇)를 계속하지 않기에 이르자 진소(陳疏)하고 지레 돌아감으로써 그 쓰임을 다할 수 없게 되었으니, 사론(士論)이 매우 애석하게 여겼다.”

 

송명흠이 이재의 문인이 된 데에는 부친 송요좌가 낙론의 대표적인 인물인 김창협과 김창흡 형제 문하에서 수학하였던 배경을 작용했을 것이다. 이뿐 아니라 연혼관계도 고려해 볼 수 있다. 이재의 부친 이만창(李晩昌)은 민유중(閔維重)의 딸과 결혼했는데, 민유중은 송존길의 사위이자 문인이다. 이재에게 송준길가는 어머니의 외가가 된다.

송명흠의 학연을 논할 적에 김창협→이재→송명흠으로 학통이 이어진다고 본다. 이재(1680-1746)를 김창협(1651-1708)의 문인으로 본다. 그런데 이재가 김창협에게 직접 지도를 받았는지는 다소 명확하지 않다. 이재 스스로가 김창협으로부터 직접 사사했다는 기록이 안 보이고, 김창협이 사망할 때 이재의 나이가 19세였던 점을 고려하면 김창협에게서 직접 학문을 전수받기는 어려웠을 것이고, 받았다고 하더라도 제한적이었을 것이다.

김창협과 이재의 관계는 직접적인 학문적인 사승관계보다는 연혼관계를 통한 사숙일 가능성이 높다. 이재는 어려서 숙부 이만성(李晩成, 1659-1722)에게 수학했다. 이만성의 배위는 김창협의 숙부인 김수흥(金壽興)의 딸로 이재에게는 작은어머니가 된다. 김창협과 이만성은 사촌처남과 사촌매제 사이다. 이재에게 이만성은 숙부이면서 스승이었고, 김창협은 이만성과 사촌처남매제의 관계다. 이런 연혼 관계로 이재가 김창협에게 직접 지도를 받지는 못했지만 사숙하여 학문이 낙론으로 귀일되었을 가능성이 높다.
<참고자료>
「영조실록」
성봉현, 「늑천(櫟泉) 송명흠(宋明欽)의 학연과 경세관(經世觀)」,「우계학보」 34호, 20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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