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이안(金履安:1722~1791)


김이안(金履安:1722~1791)                                PDF Download

 

의 본관은 안동(安東)이며, 자는 원례(元禮), 호는 삼산재(三山齋)이고, 시호(諡號)는 문헌(文獻)이다. 김상헌(金尙憲)의 후손으로, 김창협(昌協)의 증손자이며 김원행(金元行)김원행(김元行): 낙론(洛論)을 지지하는 대표적인 학자로, 그의 문하에서는 순수 성리학자들과 일부 실학자가 배출되었다. 그는 신분이나 지역, 직업에 차별을 두지 않고 학생을 받아들였다. 그의 학통을 이은 제자로 아들인 이안(履安)과 박윤원(朴胤源), 오윤상(吳允常), 홍대용(洪大容), 황윤석(黃胤錫) 등이 있다.의 아들이다.

조선 후기의 집권계층인 노론(老論)의 후손이자 당대의 학자였던 아버지에게서 글공부를 하여 1762년(영조38)에 학행(學行)으로 천거를 받았다. 그리하여 민이현(閔彝顯),김두묵(金斗默), 조림(曺霖) 등과 함께 경연관(經筵官)에 기용되었고, 1781년(정조5) 에는 충주목사(忠州牧使)를 지냈으며, 1784년(정조8)에는 지평(持平), 보덕(輔德), 찬선(贊善) 등을 거쳐 1786년(정조10)에는 좨주(祭酒)가 되었다.

당시 북학파(北學派) 학자 홍대용(洪大容)과 박제가(朴齊家) 등과 교유를 맺어 실학에 관심을 보이기도 하였다. 특히 홍대용과는 같은 연배로서 교우관계가 두터웠다. 그는 또 아버지 김원행의 문하에 출입하던 성리학자 박윤원(朴胤源), 이직보(李直輔), 오윤상(吳允常) 등과 교유하여 성리학자로도 명망이 있었으며, 예설(禮說)과 역학(易學)에도 조예가 깊었다.

홍재전서(弘齋全書)》 37권에는 당시 지평이었던 김이안에게 내린 돈유문(敦諭文)이 수록되어 있다. 명문가의 후손인 그를 조정으로 불러들이는 정조의 정성어린 마음이 잘 드러나 있는 글이다. 이 글을 통해서 그가 당시 사람들로부터 어떤 평가를 받고 있었는가를 짐작할 수 있을 듯하다.

“그대가 유현(儒賢)으로 천거 받은 것이 어찌 우연한 일이겠는가. 지난날 내가 세손으로 있을 때에 그대의 부친이 나의 찬선(贊善)이 되었는데, 우리 선대왕께서 주연(胄筵)에다 두고 나의 부족함을 채우게 하고자 구원(丘園)으로 여러 차례 초치하는 교서를 내렸으나 나를 멀리하려는 마음을 돌리지 못하였다. 그러다가 영원히 세상을 하직하고 말았으니, 이것을 생각할 때마다 그리워하는 마음이 더욱 일어난다.

아, 현자(賢者)의 태어남은 세덕(世德)에 매여 있는 것이 아니라서 공사장에서 등용한 사람도 있고 밭두렁에서 일으킨 사람도 있지만, 시례(詩禮)의 업을 이어받고 가정의 가르침에 물든 것으로 말하자면 또한 속일 수 없는 점이 있다. 호명중(胡明仲)에게는 문정(文定)이 있었고, 사마강(司馬康)에게는 단명(端明)이 있었으니, 이러한 아비 밑에 이러한 아들이 있었던 것이 지금까지도 유문(儒門)의 성대한 일로 전해 오고 있다.

지금 그대는 명문대가의 유예(遺裔)로서 지행(志行)과 경술(經術)을 보면 물어보지 않아도 고 찬선의 아들임을 알 수가 있다. 여론을 조사해 본 결과 의견이 한결같아 다른 말이 없었으니, 그대가 비록 음직(蔭職)에 머물러 있고자 하더라도 이렇게 은연중에 드러나는 데야 어찌하겠는가. 더구나 문정공(文正公),문정공(文正公): 김상헌(金尙憲)의 시호이다. 문충공(文忠公),문충공(文忠公): 김수항(金壽恒)의 시호이다. 충헌공(忠獻公),충헌공(忠獻公): 김창집(金昌集)의 시호이다.
문간공(文簡公)문간공(文簡公): 김창협(金昌協)의 시호이다.의 도덕과 명절(名節)은 대대로 사람들에게 알려졌으며 기쁨과 슬픔을 나라와 함께하였으니, 그대가 비록 은거하며 곤궁하게 지내고자 하여도 대대로 국록(國祿)을 먹어온 의리를 어찌하겠는가.

유술(儒術)을 높이 장려하고 풍교(風敎)를 도타이 숭상하는 것은 열성조(列聖朝)에 전해 내려온 가법(家法)이다. 돌아보건대 내가 자나 깨나 잊지 못하는 한 생각은 오직 선조(先祖)의 뜻을 계승하는 데 있다. 그러나 내 정성이 부족한 탓에 한 번도 현사(賢士)를 초치하여 우리 조정을 빛내본 적이 없었는데, 작년에 유유현(兪儒賢)유유현(兪儒賢): 유언집(兪彦鏶)을 지칭하는 말이다.
이 또 서거하니 현자의 거처가 마침내 비어버렸다.

내가 이 때문에 두려워하여 정부와 전조(銓曹)에 명하여 회의하여 선비를 추천하게 하였더니, 그대가 과연 가장 먼저 이 선발에 들었으므로 내가 실로 기뻐서 잠을 이루지 못하였다. 그대는 빠른 시일 안에 길에 올라 애타게 기다리는 나의 바람에 부응하도록 하라.”

이 내용은 《일성록(日省錄)》에도 그대로 수록되어 있다. 임금이 신하를 예우하여 초치하는 한 사례로 볼 수 있는 정성어린 글이 아닐 수 없다. 이는 곧 그가 명문가의 후손으로서, 가학(家學)을 통하여 몸에 익힌 학술(學術)을 기반으로 삼아 조정에 나와서 임금의 선정(善政)을 펴는데 보탬이 되기를 바라는 간절한 마음에서 이루어진 한편의 글인 것이다.

그리고 그의 저서에는 《의례경전기의(儀禮經傳記疑)》, 《계몽기의(啓蒙記疑)》, 《삼산재집(三山齋集)》 12권이 있다. 그의 문집인 《삼산재집》에는 시(詩) 158수와 서(書) 130여 편이 수록되어 있으며, 〈상원답교기(上元踏橋記)〉는 정월 보름날의 답교 풍습에 관한 내용을 기술하고 있다. 또한 그의 저술 중에 〈화이변 華夷辨〉은, 화이란 주거지역이 아니라 인물과 종족으로 논해야 하므로 우리나라를 이(夷)로 볼 수 없다고 주장한 내용을 담고 있으며, 〈산의생론(散宜生論)〉, 〈낙로설(落鹵設)〉, 〈미발기질설(未發氣質說)〉, 〈계몽기의(啓蒙記疑)〉, 〈중용기의(中庸記疑)〉 등 13편도 중요한 내용을 담고 있다. 〈의례경전기의(儀禮經傳記疑)〉는 1767년 6월 6일부터 10월 6일까지 〈의례(儀禮)〉를 읽고 의심나는 부분에 대하여 자신의 견해를 적은 글이다. 이 문집은 국립중앙도서관, 규장각, 장서각 등 기관에 소장되어 있다.

<참고문헌>
– 《삼산재집(三山齋集)》
– 《영조실록(英祖實錄)》
– 《정조실록(正祖實錄)》
– 《조선유교연원(朝鮮儒敎淵源)》
– 《한국민족문화대백과》
– 《네이버 지식백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