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진영(吳震泳)


오진영(吳震泳)                                                            PDF Download

1868년(고종 5)∼1944년. 한말의 유학자.

오진영의 본관은 해주이고, 자는 이견(而見), 호는 석농(石農)이다. 아버지는 오기선(吳驥善)이며, 어머니는 전주 이씨이다. 전우(田愚)의 문인이다. 진천 갈월리 외가에서 1868년 2월 18일(음력)에 태어났다. 그는 용모가 단정하고 풍채가 훌륭하여 주변 사람들이 앞으로 큰일을 할 인물로 평가할 정도였다. 그의 「연보」에는 3∼4세 이후에 독서를 하여 주변 사람들을 놀라게 하였다는 기록이 있다.

오진영은 19세 때 호서 지역의 대표적 유학자인 전우의 문인이 되었으며, 스승인 전우의 학설을 적극적으로 옹호하고 계승한다. 전우의 심즉기설(心卽氣說)에 근거하여 한말 성리학의 대표적 인물인 이항로(李恒老)와 이진상(李震相) 등이 리와 심을 일치시키고 심을 리라고 규정하는 입장을 반박하고, 심은 작용이 있으므로 리를 갖추고 있지만 기임을 주장한다.

오진영은 ‘성은 리이고 심은 기이다’는 이론에 근거하여 이진상의 ‘심이 곧 리이다(心卽理)’는 이론을 비판하고, 스승의 ‘성존심비(性尊心卑)’를 계승한다.

“성은 리이고 심은 기이다. 심으로 성을 높이는 것이 리를 주로 하는 주리(主理)의 학문이다.”

“성인의 학문은 리를 주인으로 삼고 성을 높이며, 이단의 학문은 기를 주인으로 삼고 심에 근본한다.”

즉 성은 리에 해당하므로 높여야 하고 심은 기에 해당하므로 낮추어야 한다는 것이다. 이것이 바로 그의 ‘성존심비’의 이론이다. 이러한 관점에서 “성은 치우친 것이 있고 기는 본래 탁하다고 주장하는 자들은 말단은 보았지만 근본은 보지 못한 것이며, 심을 리라 하면서 기질을 가지고 심이라고 하는 자들은 근본은 보았지만 말단은 보지 못했으니, 학자들이 살피지 않을 수 없다.”라고 하여 ‘심즉리’를 주장하는 자들을 비판한다.

또한 오진영은 심을 ‘기’로 보아야 하는 이유를 다음과 같이 설명한다.

“심은 기이고 성은 리이다. 심이 기이기 때문에 허명(虛明)하고 본래 선한 것이지만, 언제나 악으로 빠질 수 있어 리가 순선하고 악이 없는 것과는 다르다. 심이 본래 선하다는 것은 성에 근본하는 것이고, 악으로 흘러가는 것은 심이 스스로 방자한 것이다. 따라서 심은 반드시 잡아서 보존해야 하는데 성으로 근본을 삼아서 공경하고 높여야 한다.”

심은 리가 아니라 기이다. 그러므로 비록 본래모습이 순선한 것이라고 할지라도 악으로 빠질 우려가 있다. 그런데 이 심을 그대로 리라고 하여(심즉리) 믿고 따른다면 멋대로 방자해져서 금수와 같은 지경에 떨어질 수 있다. 심은 반드시 성을 근본으로 삼고 표준으로 삼아야 잘못되는 지경에 이르지 않게 된다. ‘심이 본래 선하다’는 말 역시 심이 성에 근본할 때에 해당되는 말이다. 심이 성에 근본하거나 표준으로 삼을 때만이 심이 본래 선한 것이 된다. 때문에 ‘심즉리’를 주장하는 학자들처럼 심이 곧장 리가 될 수 없고 반드시 성에 근거할 때만이 리가 될 수 있다.

때문에 오진영은 성과 심을 분명히 구분한다. 성은 리이고 형이상의 개념이니 높은 것이 되고, 심은 기이고 형이하의 개념이니 낮은 것이 된다. 이것을 스승과 제자의 관계로 설명하면, 성은 높은 것이니 스승에 해당하고, 심은 낮은 것이니 제자에 해당한다. 이것이 바로 그의 ‘성사심제(性師心弟)’이며 ‘성존심비’의 이론이다.

한편 이진상처럼 ‘심즉리’를 주장하는 자들은 성리학의 주요 명제인 ‘심통성정(心統性情)’의 개념을 자신들이 주장하는 ‘심즉리’의 이론적 근거로 제시한다. ‘심통성정’은 말 그대로 심이 성과 정을 통섭하고 주재한다고 해석될 수 있기 때문이다. 심이 성과 정을 통섭하고 주재하기 때문에 심이 곧 리가 되어야 한다. 왜냐하면 심이 리의 지위에 이르지 못하면 성과 정을 통섭하거나 주재할 수 없기 때문이다.

이러한 심학파들의 주장에 대해 오진영은 다음과 같이 비판한다.

 

“마음이 아직 발하지 않았을 적에 대본(大本)을 세우는 것은 왕자가 임금에게 흠향하되 공손히 떠받드는 정성을 엄숙히 상달하는 것과 같고, 이미 발하였을 적에 달도를 행하는 것은 효자가 신주를 내어 공손히 떠받드는 정성을 방달(旁達)하는 것과 같다. 따라서 심이 성과 정을 주재한다는 말을 얻게 된다. 이른바 주재하는 것은 공경히 받들고 공경히 모시는 것을 의미한다. 마음대로 하는 것을 지칭하는 것이 아니다. 어찌 높고 낮은 차등이 없겠는가. 성과 심은 높고 낮은 차등을 둘 수 없다고 하는 자들은 제대로 생각해보지 않았기 때문이다.”

 

오진영에 따르면, 심이 성과 정을 통섭하고 주재한다는 말은 심이 자기 마음대로 통섭하고 주재한다는 말이 아니라, 심이 공경히 받들고 공경히 모시는 것을 의미한다. 심이 ‘공경히 받들고 공경히 모시는 것’은 어디까지나 성에 근거하거나 성을 표준으로 삼을 때라야 가능하다. 왜냐하면 심은 기이고 형이하의 개념이므로 리이고 형이상의 개념인 성에 근거해야 악으로 흐르지 않을 수 있다. 때문에 심은 낮은 것이고 성은 높은 것으로, 심과 성에는 낮고 높은 차등이 없을 수 없다. 낮은 심은 높은 성을 항상 근거로 하거나 표준으로 삼을 때라야 악으로 흐르지 않고 바르게 작용할 수 있다는 것이다.

이어서 ‘심즉리’를 주장하는 자들처럼, 심을 리의 지위로까지 높인다면 심이 제멋대로 작용하여 방자한데로 흐르게 된다고 비판한다.

“리는 본체가 자재하고 기는 말단의 작용이 운동한다. 높은 것은 무위(無爲)하고 낮은 것은 유위(有爲)하는 것이 천리의 본연이고 인도의 당연이다. 성현이 비록 리와 기에 대해 높고 낮다는 말을 사용하지 않았지만, 그 의미는 이미 그 안에 있다. 스승께서 ‘유위’와 ‘무위’를 자세히 설명하여 이기와 심성에 대해 남김없이 설명을 했는데도, 후인들은 도리어 무위하다는 것을 주재가 없는 것으로 여겨 무시하고서 ‘심’자를 천으로까지 높여서 그 성을 넘어섰다. 이것이 이른바 ‘온 세상에 내가 최고다’는 것이니 장차 윗사람을 범하는 무도한 모리배들이 더욱 활개를 치며 거리낌이 없을 것이다. 실로 작은 일이 아니다.”

오진영에 따르면, 리는 무위한 본체 개념이고 기는 유위한 작용의 개념하니, 리는 높은 것이고 기는 낮은 것이다. 왜냐하면 리와 기 또는 본체와 작용의 개념 중 리 또는 본체를 더 근본적인 것으로 보려는 것이 성리학의 기본 내용이기 때문이다. 또한 성은 무위하므로 리가 되고, 심은 지각작용을 하는 유위한 것이므로 기가 된다. 그러므로 무위한 성은 높은 것이 되고 유위한 심은 낮은 것이 된다.

그러나 ‘심즉리’를 주장하는 자들은 성(리)은 실제로 작위성이 없는 무위한 존재이기 때문에 주재할 수 없다고 보고, 심의 지위를 천으로까지 높여서 심의 주재를 주장한다. 심의 주재를 강조할 경우, ‘온 세상에 내가 최고다’라는 말처럼 자신의 주관적 생각을 최고로 여길 가능성이 농후하다. 그래서 내가 생각하고 판단하는 것이 전적으로 진리인양 착각할 소지가 있다.

이러한 이유에서 오진영은 ‘심즉리’를 주장하는 자들을 ‘온 세상에 내가 최고다’거나 ‘무도한 모리배들이 더욱 활개를 치며 거리낌이 없을 것이다’라고 비판한 것이다. 이것은 심을 곧장 리로 보아서는 안된다는 말의 다름 아니다. 왜냐하면 심은 리가 아니라 기이므로 언제나 악으로 흐르기 쉬운 개념이기 때문이다. 심은 성처럼 완전하지 못하고 불완전한 존재이기 때문에 항상 성을 표준으로 삼아야 한다. 그래서 올바른 방향으로 나아갈 수 있다. 이것이 오진영의 심과 성에 대한 해석이다.

여기에서 또한 오진영의 출처관을 소개한다.

 

“출처(出處)는 선비의 큰 절개이다. 성인이 천하에 도가 있으면 나타나고 도가 없으면 숨는다고 했으니, 숨는 때의 뜻이 매우 크다. 선비가 독서하면서 학문을 익히는 것은 장차 나가서 도를 행하고 세상을 구제하기 위한 것이지, 단지 일신의 안위만을 도모하려는 것이 아니다. 도라는 것은 예의강상(禮義綱常)이다.……일찍이 스승께서 예의강상의 도리를 배워서 그 뜻은 차마 세상을 버리지 못했지만 세상이 한 손이나 한 발도 들이지 못할 지경이라 호남에 은거하여 몸을 지켰다. 몸을 지키는 것이 도를 보존하는 것이다. 도는 사람에게 근본이다. 세상에는 근본이 제일 중요하다.……지금 80의 나이에도 여전히 굳건히 은거하면서 뜻을 구하고 있다. 뜻은 어디에 있는가. 도에 있다. 도가 이루어지면 천하가 미루어 실천할 수 있다. 천하의 근본은 자신에게 있다. 자신을 잃지 않는 것이 천하를 구제하는 것이다. 이것이 세상에 나아가고 세상에 물러나는 것이 군자의 큰 절개가 되는 것이다.”

 

오진영에 따르면, 세상에 나아가 뜻을 펼치는 것과 세상에서 물러나 자신을 지키는 것이 비록 구체적인 모습에서는 같을 수 없지만, 천하를 구제하고 도를 실천하는 데에는 다르지 않기 때문에 ‘세상에 나아가고 세상에 물러나는 것이 군자의 큰 절개이다’라고 말한다. 하물며 이미 예의가 무너지고 강상이 무너진 세상에서는 아무런 권세와 지위가 없는 하층의 선비들이 세상을 구제하려는 의욕만 앞서다가는 제대로 뜻을 펼쳐보지도 못하고 도리어 자신을 망치기 십상이다.

결국 전체적으로 보면, 도리어 도에 해로운 형국을 초래하게 된다. 이러한 입장에서 오진영은 스승인 전우가 은거하면서 뜻을 구하고 도를 지킨 것이라고 변호한다. 도가 이루어지면 결국 천하를 구제할 수 있다. 여기서의 도란 예의와 삼강오륜을 중심으로 하는 강상윤리를 말한다. 천하의 근본은 자신에게 있으니, 무엇보다도 자신을 잃지 않는 것이 천하를 구제하는 가장 중요한 내용이다. 나라를 구하겠다는 의욕만 앞서 함부로 경거망동하면 결국 천하를 구제하지 못할 뿐만 아니라 자신 또한 잃게 된다. 오진영은 스승인 전우와 마찬가지로, 은거하여 후학들을 강학하면서 예의와 강상윤리를 지키는 것이 천하를 구제하는 길이라고 강조한다.

1905년에는 일본의 불의를 규탄하는 「포고천하문(布告天下文)」을 지었고, 일본이 국가 간의 공법(公法)을 어긴 죄를 문책하여 세계 각국의 공사관에 호소하는 글을 지었다.

또한 3․1운동을 전후하여 파리강화회의와 미국워싱턴회의에 독립청원의 서한을 보내는 일을 추진하는 등 독립운동에 적극적 관심을 보였으나, 스승의 허락을 받지 못해 실행하지는 못하였다. 이후 오진영은 「기분(記憤)」을 지어 3․1운동을 탄압한 일제의 잔인함에 대하여 울분을 터뜨렸다. 또한 조긍섭(曺兢燮)의 「복변(服辨)」에서 망한 나라의 임금인 고종을 위한 상복을 거부하자, 오진영은 조긍섭의 입장을 반박하는 「변복변(辨服辨)」을 지어 고종을 위해 상복을 입어야 함을 주장하였다.

오진영은 당시 유교를 비난하는 주장에 맞서 유교전통을 수호하는데 힘썼다. 1920년 권덕규(權德奎)가 ≪동아일보≫에 글을 실어 공자와 함께 유림의 부패된 의식을 비판하자, 「경고세계문(敬告世界文)」을 지어 항의하였고, 1931년 이인(李仁)이 공자를 비난하는 글을 싣자 동료 문인들과 함께 적극적인 성토에 나섰다.

스승의 문집인 『간재사고(艮齋私稿)』의 간행을 추진하다가 문인들 사이에 분열이 일어나기도 했지만, 전우의 행장을 짓는 등 스승을 높이고 학통을 수립하는데 진력하였다. 1944년 음성 망화재에서 77세의 일기로 세상을 떠났으며, 그의 문인들이 안성 경앙사에 배향하였다.

 

[참고문헌]: 「석농 오진영의 위정척사 의리정신」(선병삼, 『간재학논총』12, 간재학회, 2011), 「석농 오진영의 생애와 저술」(조남국, 『간재학논총』3, 간재학회, 2000), 「석농 오진영의 의리와 학문」(최근덕, 『간재학논총』4, 간재학회, 2004),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