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인창(鄭寅昌: 1862~1928)


유몽 정인창(鄭寅昌: 1862~1928)                    PDF Download

 

그는 충청남도 천안 광덕면(廣德面) 금곡리(金谷里) 출신이며, 성리학에 조예가 깊은 도학자이다. 그는 일제 강점(强占) 이후 죄인을 자처하여 흰옷을 입은 채로 흰 갓을 쓰고 지냈으며, 강사를 세워 후학을 양성하였다.

 

그가 32세 되던 해에 간재(艮齋) 전우(田愚)에게 나아가 사제의 연을 맺은 뒤로, 스승을 부모처럼 극진히 모셨으며 스승에게 보낸 간찰이 무려 29편에 달한다. 특히 그는 생면부지였던 간재와 함께 공자에게 제사 드리는 꿈을 꾼 뒤 간재의 문하에서 수학하기를 청하였다고 한다. <상간재선생(上艮齋先生)>이라는 제목의 편지를 쓰기도 하였다.

 

또한, 스승이 운명한 뒤 10일째 되던 밤 꿈에 스승을 만나고 이를 고하는 <고선생문(告先生文)>을 지었고, 스승의 문집을 간행하는 데 주도적 역할을 수행한 점 등을 살펴보면, 그와 간재와의 사제 관계가 유별하였음을 보여 준다.

그리하여 그는 <제선생문(祭先生文)>에서,

 

“비록 세상을 바로잡고 군왕을 보좌할 덕을 지니셨으나 한 시대에 쓰이지 못하셨고, 오직 성인의 학문을 계승하고 후학을 깨우쳐주는 일로서 스스로 한 몸의 과업으로 여기셨으니, 선생이 계심에 우리 도가 보존되고, 선생이 돌아가심에 우리 도도 사라지고 말았습니다

[雖匡輔之德 不見用於一時 惟繼開之功 自爲任於隻身 先生之存 斯道之存 先生之沒 斯道之沒).”

 

라고 하며 스승을 추모하기도 하였다. 그리고 그가 남긴 작품 중에 시(詩)는 110여 수로서 그리 많지 않은데 <김을 매며 두 수를 짓다[耘二首]>와 같은 작품은 매우 흥미롭게 표현되었다. 첫째 수를 잠시 감상해보기로 한다.

 

두어 이랑 산밭에 씨 뿌리고 김매지 않아
數畝山田種不耘

가시넝쿨 엉키고 잡초만 구름처럼 덮였더니
荊蔓纏繞草如雲

마을 노인 소를 놓아 모두 밟았지만
村叟放牛來踏盡

게으른 영감 부끄러워 못 들은 척 하네
懶翁自愧若無聞

 

농부는 마땅히 농사일에 게을리 하지 말아야한다. 씨를 뿌렸으면 응당 김을 매고 잘 가꾸어야 할 터인데 잡초가 우거지도록 방치했다면 그 책임은 농부에게 있는 것이다. 노인이 소를 몰고 와서 우거진 잡초를 먹이더라도 할 말이 없는 것이다. 이 작품은 풍자와 자기 반성적인 의미를 담고 있는 교훈적인 시작품으로 보아도 좋을 듯싶다. 둘째 수를 이어서 보기로 한다.

 

내년 봄 다시 씨 뿌리고 일찍 김을 매어
復種明春及早耘

우리 곡식 구름처럼 풍성하게 자라거든
須令我穀盛如雲

소를 놓으려 해도 응당 안 될 것이니
雖欲放牛應不得

오늘 못들은 체 함이 무슨 상관이랴
何傷今日若無聞

둘 째 작품 역시 자기반성이 담겨져 있는 작품이다. 첫째 수에서 김을 매지 않았다가 마을 노인이 소를 몰고 와서 먹여도 부끄러워 말을 못하던 경험을 살려 금년에는 일찍이 김을 매고 잘 가꾸어서 더 이상 우스꽝스런 꼴이 되지 않겠다는 자아 성찰적 의미를 담고 있는 유학자다운 작품이라 할 수 있겠다. 학문을 하는 것도 이와 같은 맥락일거라는 것을 은연중 암시하고 있다. 위기지학(爲己之學)이 아닌 위인지학(爲人之學)을 하고 있는 세상의 수많은 학자들에게 은근한 경계를 하고 있는 그런 작품이 아닐 수 없다.

조선 말기 호서와 호남 지역에서 간재(艮齋) 전우(田愚)를 종주(宗主)로 하는 학파가 형성되었다고 할 수 있겠는데, 정인창 역시 그 문하에서 성리학설에 대한 가르침을 받았음을 그의 문집인 《유몽집(惟夢集)》을 통해 확인할 수 있다. 이는 곧 ‘인성본선인개가이위요순설(人性本善人皆可以爲堯舜說)’에서 스승 전우의 학설을 충실히 이행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참고문헌>
유몽집(惟夢集)》

<근현대 대전·충남 한학가의 문헌 해제>, 충남대학교 인문과학연구소, 2003.
<근현대 대전·충남의 한학가>, 충남대학교 인문과학연구소, 2004.

 

[출처] 한국향토문화전자대전 http://www.grandculture.net/
《네이버지식백과》, 한국향토문화전자대전, 한국학중앙연구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