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응구(申應榘, 1553-1623)- 제2편


신응구(申應榘, 1553-1623)- 제2편                PDF Download

 

응구는 자는 자방(子方)이고 호는 만퇴헌(晩退軒)이며, 본관은 고령(高靈)이다. 증조는 판결사 신한(申瀚)이고, 조부는 가평군수 신여주(申汝柱)이며, 부친은 동지중추부사 신벌(申橃, 1523-1616)이다. 우의정을 역임한 신익상(申翼相)이 그의 손자다. 성혼과 이이의 문하에서 수학했다.

신벌은 명종 7년에 효자로 천거 받아 사재감참봉(司宰監參奉)이 되었고, 그 뒤 광흥창봉사(廣興倉奉事)·장악원직장(掌樂院直長)·종부시주부(宗簿寺主簿) 등을 지내고 직산현감·개성부도사·안산군수·여산군수·단양군수 등의 외직을 거쳤다. 이 후 선조 27년에 세자익위사사어(世子翊衛司司禦)와 선공감판관(繕工監判官)이 되었다가 병으로 사직하고 향리에 돌아갔다.

80세에 당상으로 오르고, 아들 양주목사 응구(應榘)가 자기 아버지의 나이가 90이 되었으므로 은전을 베풀어줄 것을 아뢰자 왕이 실직제수(實職除授)를 명하여 1612년(광해군 4)에 동지중추원사(同知中樞院事)가 되었다. 인품이 근엄하고 겸손하였으며, 직산현감 자리를 떠난 뒤 읍민이 송덕비를 세우자, 이를 철거하도록 하였다.

공은 1582년에 사마시에 합격하고 학문에만 정진하다가 천거로 장원(掌苑)이 되었다. 1588년 직산현감(稷山縣監)이 되었으나 병으로 사직하였다가 그 뒤 임실·함열 등의 현감을 잠시 지낸 뒤 고향으로 돌아갔다.

1597년 어머니를 여의고 3년상을 마친 뒤 다시 관계에 들어가 형조정랑·한성부서윤·이천부사 등을 역임하였는데, 1602년 무고를 당하자 사직하였다.

경기어사 유몽인(柳夢寅)이 상고하길,

“전 이천 부사(利川府使) 신응구(申應榘)는 중국 사신의 지공(支供)을 핑계로 백성들에게서 쌀을 거의 70여 석이나 거두어다가 이를 강선(江船)에 가득 싣고 갔는데 끝내 어찌 했는지 모르는 상태에서 체직되었기 때문에 민간에서 증오하여 그의 살점을 먹고자 합니다. 응구는 명신 성혼(成渾)의 고제(高弟)로 당시 사람들이 사호(四皓)에 비유했었는데, 도리어 도척(盜蹠)도 하지 않는 짓을 하였습니다. 감사로 하여금 국안(鞫案)을 올려 보내게 하여 그 허실을 조사하게 하소서.”라고 했다. 이 기사를 적은 후에 사관이 평하길, “이것은 혼(渾)이 바야흐로 시론에 배척당하자 응구가 그 파도에 휩쓸린 탓으로 그렇게 된 것이 아니겠는가.”

라고 했다.

다시 충주목사·삭녕군수 등을 역임하였다. 1610년(광해군 2) 공조참의가 되었고 그 뒤 양주목사를 역임하고, 1613년 이이첨(李爾瞻) 등이 폐모론을 주장하자 관직에서 물러나 충청도 남포(藍浦)로 낙향하였다.

그 뒤 조정에서 여러 차례 불렀으나 나아가지 않다가 인조반정 후에 형조참의·동부승지·좌부승지 등을 거쳐 장례원판결사(掌隷院判決事)·춘천부사를 역임하였다.

광해군일기[정초본]⌋ 광해 11년 기사에 신응구가 사직하는 소를 올려 녹훈을 사양하는 기사를 적고 있는데 사관의 평이 박하다.

“응구는 조금 명성이 있었기 때문에 선임되어 왕자의 사부가 되었는데, 주군(州郡)을 맡고서는 명성이 크게 떨어졌다. 또 몸가짐을 깨끗하고 바르게 하지 못하여, ‘관직에 있지 않으면서도 나라를 염려했다.’는 이유로 임해군(臨海君) 옥사로 공신에 들기까지 함으로써 사론(士論)의 비웃음과 손가락질을 받았다. 그래서 겸손한 말로 녹훈을 사양한 것이다. 그러면서도 자신의 노자(奴子)로 하여금 궁궐에 드나들게 하였는데 왕이 모든 청탁을 다 들어주었으므로 사론이 추하게 여겼다.”

또한 ⌈인조실록⌋ 인조 1년 11월 조에는 졸기가 나오는데, 사관의 평이 역시 박하다.

“춘천부사(春川府使) 신응구(申應榘)가 졸(卒)했다. 응구는 젊어서 이이(李珥)와 성혼(成渾)의 문하에서 공부하여 일찍부터 중망(重望)이 있어 당시 사람들이 모두 추허(推許)하였다. 그런데 폐조 때 임해군(臨海君)의 옥사(獄事)을 당하여 조진(趙振) 등과 함께 정훈(正勳)에 참여되었는데, 당시에 그를 일컬어 집에 있으면서 국가를 걱정한 공신이라고 하자 사람들이 모두 비웃었다. 뒤에 양주 목사(楊州牧使)가 되어서도 행실을 삼가지 못하였다는 비난이 많았으니, 선사(先師)를 욕되게 하였다 하겠다.”

한편 그에 앞서 인조 1년 1월에 인조가 신응구를 춘천부사로 보내려고 하자, 재고를 요청하는 간관의 말은 신응구가 공직을 잘 수행한다는 평가다. 사관이 “춘천 부사(春川府使) 신응구(申應榘)는 과거 판결사로 있을 적에 임무 수행이 엄명하고 강어(强禦)를 두려워하지 않아서 청단(聽斷)과 신리(伸理) 모두에 공평성을 얻었으니 당연히 그 직임에 오래 두어야 하는데도 갑자기 외관으로 옮겼습니다. 상규(常規)에 얽매이지 말고 특별히 잉임시켜서 청송(聽訟)하는 자리를 신중하게 하소서.” 하고 아뢰었다.

한편 김상헌은 신응구의 묘갈명에서 다음과 같이 공을 평하고 있다.

“공의 모습을 바라보니, 한 겨울의 눈 속에 늠름한 송백(松栢)처럼 우뚝 서 있었고 공의 중심을 살펴보면 이치가 분명하고 의리에 합치되어 얼음이 녹듯이 화평했도다. 약관(弱冠)에 향양(向陽)의 마을에 찾아가 배워 스승과 제자가 되었으니, 70명의 제자가 공자(孔子)를 따른 것과 다를 것이 뭐가 있겠는가. 그 세상에 어려움을 만나 조금만 시험해 보고 항상 곤궁하게 살았도다. 하늘에 기대할 수 있을 것 같았으나 결국 창생의 한을 남기었도다. 아! 매우 슬프도다!”

신응구의 손자인 신익상의 졸기가 숙종실록 숙종 23년 조에 실려 있는데, 그 중에 “당시 조정의 형상이 오이를 가르듯 노론(老論)·소론(少論)의 색목(色目)이 있었는데, 신익상이 그의 조부(祖父) 신응구(申應榘)가 송시열(宋時烈)에게 배척당하였다 하여 유감과 한을 깊이 품고 있다가, 마침내 송시열에게서 떠나 소론의 무리가 되었었다.”라는 사관의 기록이 나온다.

신응구에 대한 실록의 평가는 당론의 향배가 상당한 영향을 주었을 것이다.
<참고문헌>
⌈선조실록⌋
⌈광해군중초본⌋
⌈인조실록⌋
민족문화대백과사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