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병운(李柄運: 1858∼1937)


 

이병운(李柄運: 1858∼1937)                               PDF Download

 

관은인천(仁川), 자(字)는 덕칠(德七), 호(號)는 긍재(兢齋) 또는 창계(蒼溪)이며, 이억상(李億祥)의 아들로 고려조(高麗朝)의 소성백(邵城伯)을 지낸 이허겸(李許謙)의 후손이다.   그는 기호학(畿湖學)의 적전(嫡傳)인 연재(淵齋) 송병선(宋秉璿)과, 심석재(心石齋) 송병순(宋秉珣)형제에게 사사하여 긍재(兢齋)란 호를 받았다.

1888년(고종25)에 진사시(進士試)에 합격하고, 경학(經學)으로 도천(道遷)을 입어 관직에 올랐으나 당시 사회적인 변란으로 시사(時事)가 불길(不吉)하자 낙향(落鄕)하였다.
1896년에 도백(道伯)이 참서관(參書官)의 직첩을 내렸으나 나아가지 않았다.  그는 우암(尤庵) 송시열(宋時烈)의 문집간행(文集刊行)에 적극 참여하였으며,  만년에 채국정(採菊亭)을 짓고 후진양성과 학문에 전념하였다.

서신(書信)의 왕래는 서찬규(徐贊奎), 장승택(張升澤), 민영환(閔泳煥), 최익현(崔益鉉), 박해규(朴海奎), 우성규(禹成圭) 등과 주로 하였으며,  문집으로는《긍재집(兢齋集)》14권 4책이 있다.
이 문집은 목활자본(木活字本)으로 되어있으며,  1942년 그의 동생 병선(柄選)이 편집하여 간행한 것으로, 서문과 발문은 없고,  끝에 간기(刊記)가 있다.  국립중앙도서관에 소장되어 있다.

그의 시(詩) 작품은 대부분 자연과 인생을 소재로 읊은 것과 차운한 것이 많다. <춘우후음(春雨後吟)>은 도연명(陶淵明)의 의경(意境)을 본떠서 지은 은일적(隱逸的)인 분위기를 묘사하고 있다.  그 밖에 최익현(崔益鉉)을 따라 전국의 유적지를 다니며 차운(次韻)한 시와 황재찬(黃在瓚)과 안효제(安孝濟)등 명사들에 대한 만사(輓詞)도 주목해 볼 만한 내용을 담고 있다.

그리고 <청오현승무소(請五賢陞廡疏)>는 1888년에 성균관 유생(成均館儒生)으로 있을 때 올린 것으로, 김정(金淨), 김상헌(金尙憲), 민진원(閔鎭遠), 권상하(權尙夏), 이재(李縡) 등의 문묘배향을 요청하는 상소이다.  그는 이 상소문에서 도학(道學)은 사문(斯文)의 준칙이요, 유현(儒賢)은 국가의 원기(元氣)라고 지적하면서,  다섯 유현의 도학과 덕업과 행적을 일일이 열거하여 소상히 밝혔다.   그런가하면 그의 작품 중에 <등명(燈銘)>과 같은 글도 있어 살펴보기로 한다.

밝혀 놓은 등불 하나가                一點燈火
내 책상 위에 놓여있어                在我案頭
밝은 빛이 환히 비추니                 光明炯澈
마치 태양이 비춘 듯하네           若太陽流
이것을 가지고 비추면                 以之爲燭
어둠을 죄다 밝히리니                可破黑窣
너의 지시를 따라서 가면           賴爾指南
앞서간 자취를  찾게 되리라     得尋前轍
어찌 하면 남은 빛을 빌려와     安借餘光
사방에 두루 미치게 할까           遍及四方
시절을 어찌할 수 없으니           時也無奈
외롭게 임당만 비출 뿐이네      孤照林堂
성현의 책을 대하고 있으니      對越聖賢
해는 저물고 밤만 깊어가네      歲晏夜長

등불의 상징적인 이미지는 어둠을 밝히는 데 있다.  그러나 작자는 이작품을 통해 단순히 등불을 밝혀 놓고 글 공부를 하려는게 아니다.  작자는 이 작품을 통해 현실과 자신과의 괴리현상을 잔잔한 목소리로 읊조리고 있는 것이다.

시운이 그러하고 시절이 그러한 현실을 자신의 능력으로 어찌하지 못하니 그저 안타까운 마음을 안고 그저 바람만 가진 채 긴 긴밤을 조용히 보내는 듯한 느낌을 갖게 하는 그런 작품이다.  당시의 암울했던 시대상황을 단적으로 보여주는 그런 작품이기도 하다.

서(書)에는 송병선(宋秉璿), 송병순(宋秉珣), 서찬규(徐贊奎), 장승택(張升澤)등의 선배 학자들에게 사칠론(四七論)과 이기설(理氣說)과 예설(禮說)에 관하여 질문한 것과 김유연(金有淵), 민영목(閔泳穆), 민영환(閔泳煥) 등 당시 정부의 고위 관리에게 보낸 것, 기타 김두한(金斗漢), 서건수(徐健洙) 등에게 경의(經義)와 예설에 관하여 답한 것 등 그 분량이 방대하게 수록되어 있다.

그리고 특기 할 만한 것은 외손자 구자덕(具滋德)에게 답한 짧은 편지가 있다.   그 내용을 잠시 살펴보기로 한다.

너는 아직 나이가 어린데 혹시라도 덧없이 들떠서 지낼까 염려되어 곁에 두고 진보가 있기를 바라고자 하였다.  그런데 지금 장산(獐山)으로 가서 글을 읽겠다고 하니 너는 또한 이 학문에 뜻을 오로지 두려하느냐?  한결같이 여기에 마음을 붙이고 공부해 간다면 무슨 이치인들 뚫지 못 할 것이며 무슨 일인들 이루지 못하겠느냐?  다만 유종(有終)의 미(美)를 거두지 못할까 염려 되니,  세상이 변했다 고조금도 저상 되지 말고,  도가 어긋 났다고 혹시라도 해이 하지 말거라!  공자의 말씀에
“도가 사람에게서 먼 것이 아니다.” 라고 하였으니, 다만 일용사물(日用事物)의 사이에 있을 뿐이다.  또 “죽은 뒤에야 그친다.” 하였으니 어찌 잠시라도 머뭇거리며 동요 할 수 있겠느냐?  이를 생각도록 하여라.

길지 않은 짧은 편지를 외손자에게 답장으로 보낸 것이다.  이 글에서도 시대의 변화에 대하여 흔들리지 말고 글 공부를 열심히 하라는 당부를 하고 있다.  한편으로는 할아버지가 손자에게 타이르는 자상스런 말속에 애정 어린 충고가 담겨 있기도 하지만 , 그 보다도 시대가 변해가고 있는 현실을 어찌해야 할 것인가에 항상 긴장하고 있었던 듯하다.

그러다보니 나이 어린 손자가 세상 모르고 들떠서 지낼까봐 염려하지 않을 수 없었던 것이다.  한말의 유학자들이 대부분 이러한 정서를 지니고 있었을 것으로 여겨지는 한통의 편지가 아닌가 생각한다.

잡저(雜著)의 <계상어록(溪上語錄)>과 <채국정만록(採菊亭漫錄)>은 경의(經義)와 이기(理氣), 심성(心性),  기질(氣質)  인물성(人物性) 등 성리학에 관하여 자신의 견해를 피력한 내용으로 되어 있으며, <회유 대구유림문(回諭大邱儒林文)>은 대구의 유림들에게 알리는 글이다. 또 그가 쓴 경인계첩(庚寅契帖)의 서문은 1916년에 대구 출신 유학자인 우재악(禹載岳)을 기리기 위하여 지역 유림들이 결성한 계첩에 대한 서문으로,  계원들이 그의 학문을 배우고 도를 본받는데 게을리 하지 않기를 다짐하면서 작성한 것이다.  이 글은 조선 후기부터 일제시대까지 대구지역의 유림의 동향과 성향을 엿볼 수 있는 자료라는 점에서 의미를 부여할 수 있겠다.
<참고문헌>
《國譯兢齋文集》, 彩菊亭刊
《조선후기향약연구》, 鄕村社會史硏究會
《嶺南鄕約資料集成》, 嶺南大學校出版部.