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경의(韓敬儀)1739∼1821


한경의(韓敬儀)                                                             PDF Download

 

1739(영조 15)∼1821(순조 21). 조선 후기의 학자.

관은 청주(淸州). 호는 치서(菑墅)이다. 영의정 상경(尙敬)의 후손으로, 아버지는 통덕랑(通德郎) 진철(震喆)이며, 어머니는 단양우씨(丹陽禹氏)로 상규(尙奎)의 딸이다.  큰아버지 진유(震愈)에게 입양되었다.   이장오(李章五)에게 사서를 배우고, 뒤에 조유선(趙有善)의 문인이 되었다.   나산 조유선은 김원행(金元行)의 문인이다.

향시(鄕試)에 네 번 합격하였으나 부친상을 당한 뒤로는 벼슬에 뜻을 끊고, 오직 경학에 열중하여 장현문(張玄聞)·이춘위(李春韡) 등과 함께 이택회(麗澤會)를 조직하고, 사서오경과 ⌈소학⌋·⌈심경⌋·⌈근사록⌋·⌈성리대전⌋·⌈강목⌋ 등을 강론하였다.

예악(禮樂)·도수(度數)·역상(易象) 등도 깊이 연구하여 후진양성에 전념하였고, 지행일치(知行一致)를 평생의 신조로 삼았다. 학행(學行)으로 이름을 떨쳤으며, 시문(詩文)에도 능하였다. 뒤에 동몽교관(童蒙敎官)에 추증되었다. 저서로 ⌈치서집⌋ 6권이 있다.

치서집(菑墅集)⌋은 조선 후기의 학자 한경의의 시문집이다.  6권 3책으로 목활자본이다.  1822년(순조 22) 아들 한흥교(韓興敎), 손자 한영희(韓永熙) 등이 편집하여 간행하였다.  현재 규장각 도서와 국립중앙도서관 등에 소장되어 있다.

권1·2에는 시와 만사 227수, 서(書) 3편, 서(序) 3편, 기(記) 1편, 발(跋) 3편, 잡저 10편이 있고,  권3∼6에는 제문 19편, 행장 25편, 묘갈명 7편, 묘지명 13편, 묘표 5편, 부록으로 저자의 행장 등이 수록되어 있고, 끝에 허무(許懋) 등 300여명의 사림(士林)이 저자의 학문과 효행을 들어 관에 포증(褒贈)을 청하였다는 기록이 있다.

서(書)는 모두 고을사람들을 대신하여 관가에 건의한 민원서(民願書)이다.  「청수축본부내성(請修築本部內城)」은 송도(松都)의 지리적 여건과 역사적 사실들을 열거하고, 심도(沁都, 江華의 옛 이름)와 함께 국가의 막중한 요충지이므로 성지(城池)를 수축하고 관방을 엄격히 하여야 한다고 주장한 글이다.

청포유사과순룡부부서(請褒劉司果順龍夫婦書)」는 병자호란 당시 전몰한 유순룡과 남편의 뒤를 따라 자결한 그의 처 장씨(張氏)에 대하여 국가에서 그들의 충렬(忠烈)을 포양하여 줄 것을 건의한 글이다.

종정계서(從征契序)」는 1811년(순조 11) 홍경래(洪景來)의 난 때에 송영(松營)의 기사(騎士)로서 토벌에 가담하였던 18명의 계(契)의 내력과 그 취지를 기록한 것이다.  홍경래의 난은 1811년(순조 11)부터 1812년(순조 12)까지 홍경래와 우군칙 등을 중심으로 평안도에서 일어난 농민반란이다.

그밖에 「주역의 구괘(姤卦)」를 이용하여 천도(天道)의 소장(消長)과 억음부양(抑陰扶陽)의 뜻에 대하여 논한 「독구괘(讀姤卦)」와 경전 강마를 위하여 조직하였다고 하는 「이택회규약(麗澤會規約)」이 있다.

 

[참고문헌]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