민진원(閔鎭遠, 1664∼1736)


민진원(閔鎭遠, 1664∼1736)                                 PDF Download

 

민진원의 단암만록
민진원의 단암만록
진원(閔鎭遠, 1664년∼1736년)은 조선후기의 문신이자 외척이다. 숙종의 장인 민유중(閔維重, 1630년∼1687년)의 아들이며,  민진후의 동생이고,  인현왕후의 작은 오빠다.   28세 때 과거에 급제하였으나, 남인이 집권하여 잠시 관직에 임명되지 못하였다.  1694년 갑술환국 이후 복귀하여 병조좌랑, 전라도관찰사, 대사성, 이조판서, 좌의정등을 역임했다.  영조의 탕평책을 반대하였으며 노론의 영수로 활약하였다. ⌈숙종실록 ⌋과 ⌈경종실록 ⌋의 편찬을 주도하였다.

1664년(1세, 현종5년)에 태어났다.  본관은여흥(驪興, 경기도여주), 자는 성유(聖猷), 호는 단암(丹巖) 또는 세심(洗心)을 사용하였다.  증조할아버지는 민기(閔機), 할아버지는 민광훈(閔光勳)이며, 아버지는여양부원군(驪陽府院君) 민유중(閔維重)이다.  민영익의 6대조이며, 명성황후의 종 5대조이다.  어머니는 좌찬성 송준길(宋浚吉)의 딸이다.  숙종의 부인 인현왕후(仁顯王后)의 오빠이며 우참찬 민진후(閔鎭厚)의 동생이다.  송시열(宋時烈)에게 배웠다.

1691년(28세, 숙종17년) 증광 문과에 을과로 급제하였다.  기사환국(1689년) 이후 동생 인현왕후가 폐비되고 남인이 권력을 잡으면서 등용되지 못했다.

1694년(31세, 숙종20년) 갑술옥사(甲戌獄事)로 장희빈(張嬉嬪)이 폐위되고,  동생 인현왕후가 다시 궁궐로 돌아왔다.  남인이 권력에서 쫓겨나고 노론 일파가 다시 집권하였다. 민진원도 노론으로 활동하였는데,  윤증, 박세채등 남인을 공격하는데 참여했다.  다음해 예문관검열에 임명되었다.

1696년(33세, 숙종22년) 세자시강원 겸 설서(世子侍講院兼說書)가 되었다. 사서에 올랐으나 외척이라는 이유로 물러나게 되었다.  다음해 홍문록(弘文錄)에 뽑혔으며, 수찬(修撰)에 등용되었다.  중시(重試)에 을과로 또 급제하였다.

1698년(35세, 숙종24년) 병조좌랑에 임명된 뒤 사헌부의 지평, 부수찬 등을 역임하였다.

1701년(38세, 숙종27년) 사복시정(司僕寺正),  사헌부집의(司憲府執義) 등에 임명되었다.

1703년(40세, 숙종29년) 전라도 관찰사에 임명되었다.  서원 난립으로 지방 재정이 악화되고 당파 싸움이 더욱 치열하게 되는 것을 목격하고 서원 건립을 억제하도록 하는 상소를 올렸다.

1705년(42세,숙종31년) 공조참의, 강화유수 등에 임명되었다.  장희빈사건으로 유배된 소론파 리더 남구만(南九萬)의 형을 감해 주도록 상소했다.

1706년(43세, 숙종32년) 강화부유수, 평안도관찰사 등에 임명되었다.  강화도에서 근무할 때는 행정구역을 개편하여 편의를 도모하였으며 주민을 순화 시키는데 노력하였다.  또 농한기 때에는 섬과 섬을연결시키는 둑을 만들고,  간척사업을 하였으며 , 주민들에게  전답을분배해 주었다.  아울러 강화도의 내성을 신축하고,  남문과 서문을 새로 건설하는 등 많은 일을 하였다.

1712년(49세, 숙종38년) 사은부사(謝恩副使)에 임명되어 청나라에 사신으로 다녀왔다.

1715년(52세, 숙종41년) 대사성의 직위에 있을 때, 노론파 정호(鄭澔)를 두둔하다 파직되었다.  당시 ⌈가례원류(家禮源流) ⌋의 간행을 둘러싸고 노론파와 소론파의 당쟁이 치열했다.  다음해 노론이 다시 권력을 잡자,  평안도시관(試官)으로 임명되었다.

1718년(55세, 숙종44년) 예조판서에 임명되고, 양전구관당상(量田勾管堂上)을 겸임하였다.  주청사(奏請使)로 다시 청나라 연경(燕京)에 다녀왔다.  이후 강화구관당상(江華勾管堂上), 이조판서, 호조판서 등을 역임하였다.

1720년(57세, 숙종46년, 경종즉위년) 형 민진후가 사망하였다.  숙종이 사망하고 경종이 즉위하였다.  민진원은 형을 대신하여 새 임금 경종의 외숙부로 실권을 장악하고 노론의 리더가 되었다.

1721년(58세, 경종1년) 공조판서 재직 중 실록청총재관(實錄廳總裁管)으로 ⌈숙종실록 ⌋편찬에 참여하였다.  경종은 몸이 허약하고 아들이 없었다.  민진원이 이끌고 있던 노론파는 경종에게 동생 연잉군(훗날의영조)을 다음왕으로 지명할 것을 요구하였다.  경종이 요구를 받아들이지 않자, 민진원은 많은 관료들 앞에서 경종이 효심이 없고 군주로서 자질이 부족하니 서둘러 연잉군을 왕세제로 임명하고,  정치에서 물러나야한다는 발언을 하였다.  소론파는 상소를 올려, 노론파가 임금에 대해서 너무 불충하고, 무례한 행동을 한다고 탄핵을 하였다.

1722년(59세, 경종2년) 노론파가 반란을 일으킬 음모를 꾸몄다는 소론파(김일경과 목호룡등)의 주장이 받아들여져 주요 대신들이 체포되고,  사형을 당했다. 노론파 관료들이 실각을 하고,  민진원도 성주(星州)로 유배되었다.

1724년(61세,영조즉위년) 이해 영조(英祖, 1694~1776)가 즉위하고,  다시 노론이 집권하였다. 우의정에 올랐으며, 실록청총재관으로 ⌈경종실록 ⌋편찬을 주관하였다.  전 임금 경종의 병세가 위독하게 되었을 때,  조정에서 득세하고 있던 소론파가 경종의 병을 숨겼다.  한사람도 이러한 상황에 대해서 감히 말을 하고자 하는 자가 없었는데, 민진원은 분연히 일어나 이렇게 말했다.

“상황이 이러한데도 변론함이 없다면, 우리 선왕(先王)의 인자하고 후덕한 마음과 우리 군주의 효성스럽고 공경스러운 덕이 장차 만세(萬世)에 드러나지 못할 것입니다.  게다가 명분(名分)이 바르지 못하면 화란(禍亂)이 그치지 않을 것입니다.”

또이렇게말했다.

“우리 대행 대왕(大行大王, 경종)께서 불행히 병이 있어서 전하(영조)께 막중한 직위를 맡기셨습니다. 그런데 몇몇 사람들이 자신에게 불리할까 염려하여 참벌(斬伐)을 마음대로 행하고 무함을 심하게 하여 숙종 때의 옛 정령(政令)을 거의 다 바꾸어놓았습니다.  그러면서 걸핏하면‘ 임금에게 뜻을 여쭈고 임금의 뜻을 취한 것이다.’ 라고 하였는데, 이는 모두 대행대왕께서 편찮아서 제대로 살피지 못하신 것입니다. 질병이 성덕(聖德)에 무슨 누가 되기에,  간교한 무리들이 기어이 숨기고는 은밀히 농간을 부린 자취를 감추었으니,  어찌 통탄스럽지 않겠습니까.  이 무리들은 모두 나라의 죄인들이니,  당장에 다 처벌을 한다 하더라도,  이는 나라를 위하여 흉적들을 정죄하는 것이지,  개인적으로 사사로이 복수하고자 하는것이 아닙니다.”

1725년(62세 영조1년)영조의 탕평책에 따라 소론의 리더인 좌의정 유봉휘(柳鳳輝)를 1722년에 일어난 신임사화 주동자로 책임을 물어탄핵, 유배시켰다. 억울한 죄를 얻어 사망한 송시열에게 증직(贈職)할 것을 상소하였다.  이후,  좌의정, 중추부영사(中樞府領事)에 임명되었다.

1727년(64세,영조3년)영조의 탕평책에 따라 당색이 강한 이유로 파직되었다. (정미환국) 그는 영조를 추대하기 위해서 노력하다 처형된 노론파 대신들의 복권을 주장했으며,  노론파 축출을 위해 일을 꾸며낸 소론파 대신들의 처벌을 요구했다 .순안(順安)에 유배되었다가 이듬해 풀려났다.  당시 소론파는 민진원이 주관하여 완성한 ⌈숙종실록 ⌋이 고의로 기사를 누락하고, 왜곡 시킨 부분이 많다고 하며 전면적인 개정을 해야 한다고 주장하였다.  이러한 주장은 노론파의 반대로 수용되지 못했으나 일부 내용이 수정된 ⌈숙종실록보궐정오 ⌋가 제작되었다.

1728년(65세,영조4년) 소론파 강경세력이 남인을 모아 삼남지역에서 대규모의 난을 으켰다. (이인좌의난)영조는 노론파 경세력의 리더였던 민진원을 다시 조정으로 불러들였다.  민진원은 이 기회를 이용하여 소론파와  남인파를 대거 숙청하였다.

1729년(66세,영조5년) 중추부판사에 임명되었다. ⌈가족제복론(加足帝腹論) ⌋을 편찬하여 올렸다.  당파 싸움을 없애려는 영조의 탕평책에 반대하여,  끝까지 소론을 배격하고 노론의 대표로 활동하였다.

1736년(73세,영조12년) 11월에 사망하였다. 원주(原州) 사포(蛇浦)에 장사를 지냈다가, 후에 다시 광주(廣州) 월라산(月羅山) 아래로 이장하였다.  시호는 문충(文忠)이다.  작품으로 ⌈연행록(燕行錄) ⌋, ⌈단암만록(丹巖漫錄) ⌋등이 있다.   그는 글씨를 잘쓰고 문장에 능해 강릉의 송담서원비(松潭書院碑)를 비롯해 다수의 신도비(神道碑 )제작에 관여하였다.
생전에 민진원은 이렇게 말했다.

“(내가 죽거든) 비석을 세우지도 말고,  남에게 비문(碑文)을 요청하지도 마라.  단지 내 묘에 표지만 하게하라.”

몇 년 뒤에 자손이 그 말을 어기고,  그 행장(行狀)을 가지고 친척 중 한사람에게 묘표(墓表)를 청하였는데,  얼마 지나지 않아 그 묘표를 부탁한 사람과 부탁을 받은 사람이 잇달아 사망하였다고 한다.

<참고자료>
⌈미호집 ⌋(제18권봉조하단암민공묘표)
한영국, 민진원,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민진원, ⌈인천광역시사 ⌋. 200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