송병선(宋秉璿, 1836-1905)


송병선(宋秉璿, 1836-1905)                                 PDF Download

 

병선은 송시열(宋時烈)의 9세손이다. 우암 송시열은 효종과 동심동력하여 설욕을 갚고자 북벌을 준비한 당대의 거유로 소중화(小中華), 존화양이(存華攘夷) 등 춘추의리(春秋義理)의 화신이었다.   도학에는 정암 조광조요, 학문에는 퇴계 이황이요, 성리에 율곡 이이라고 하는데 조선 역사를 통틀어 의리에 관해서는 우암 송시열을 으뜸으로 삼는다. 송병선은 1905년 을사늑약에 비분강개하며 스스로 자결한 순국지사이다. 이는 조상의 의리정신을 그대로 계승한 것이다.
본관은 은진(恩津)으로 자는 화옥(華玉)이며 호는 연재(淵齋) 또는 동방일사(東方一士)이며 시호는 문충(文忠)이다. 대전시 회덕(懷德)에서 출생하였으며, 송면수(宋勉洙)의 맏아들로서 참의 송달수(宋達洙)와 송근수(宋近洙)의 종질이고, 송병순(宋秉珣)은 그의 동생이다. 큰아버지인 송달수에게서 송병순과 함께 성리학과 예학을 배웠다. 그는 송달수가 죽은 뒤 집안의 학문이 기울어질 것을 염려해 학문에 더욱 힘썼으며, 작은아버지 송근수와 외삼촌 이세연(李世淵)의 지도를 받았다.
이는 송시열 – 권상하 – 한원진 – 송능상 – 송환기, 김정묵 – 송치규 – 송달수, 송근수 – 송병선, 송병순으로 이어지는 학맥이다. 송달수는 조선후기 성리학계를 이분하였던 호락논쟁에만 매몰되지 말고 성리학자들이 스스로 본연의 연구에 매진할 것을 강조한 순수 학문적 입장을 강조했고, 송근수는 1882년 좌의정 재임 시 정부의 조미수호통상조약 체결에 반대하여 사직소를 올려 정부의 개화정책에 반대하였다. 1884년 의제변개(衣制變改)가 단행되자 송병선이 ‘전통질서 중의 하나인 복제를 함부로 바꿀 수 없음’을 역설하면서 위정척사의 정신을 구현하는데, 이 또한 그가 계승한 가학 및 학통의 전통이다.
송병선은 국운을 회복시키기 위해 우선은 동지들을 규합하여 세를 이루고, 사상적 무장을 확대하고자 제자들을 양성하는데 주력하였다. 그는 이를 위하여 유림들이 모이는 자리라면 어디든지 찾아가, 조선을 사상적으로 지탱해 온 성리학적 유교질서를 전파하고, 정신적 무장을 강조하면서 진취적인 기상을 불어넣었다. 1867년 옥천 이지당(二止堂)에서의 강회활동을 시작으로 기국정, 고암서당 등지에서 강회를 개최하고, 성주의 노강 등지에서 향음례를 행하고, 무주 구천동의 서벽정을 중건하여 강학하기도 하였다.
태릉참봉에 제수되었으나 나아가지 않았고, 그 뒤 경연관(經筵官), 서연관(書筵官), 시강원자의(侍講院諮議) 등에 차례로 선임되었으나 모두 거절하였다. 1881년에는 당시 개선할 시무책 8개조를 건의한 신사봉사(辛巳封事)를 올렸다. 이는 성리학의 정진, 언로의 개방, 국가정통성 확립, 국가기강 확립, 재정절약, 인사정책 일신, 조세경감, 왜세 척결 등 8가지 현안문제에 대한 대책을 강구한 것이다. 1조와 8조는 위정척사(衛正斥邪)의 대의를 밝히고 있는데, 위정을 위해서는 성학에 힘쓸 것을 주장하여 국왕으로부터 철저히 성리학으로 무장하여 전 국민이 사상적으로 절대 동요하지 말 것을 주장하였다. 척사의 대상으로는 왜(倭)와 사교(邪敎)를 꼽고 있는데, 왜양일체론(倭洋一體論)의 시각에서 일제를 비롯한 서구사상 일체에 대한 척결을 통하여 국권을 회복하고자 하였다.
1905년 11월 일제가 무력으로 위협하여 을사조약을 강제 체결하고 국권을 박탈하자 두 차례의 <청토흉적소(請討凶賊疏)>를 올렸다. 그러나 이에 대한 비답이 없자 상경하여 고종을 알현하고 을사오적을 처형할 것, 현량(賢良)을 뽑아 쓸 것, 기강을 세울 것 등의 십조봉사(十條封事)를 올렸다. 여기서 송병선은 각국 공사관에 우리정부의 입장을 표명할 것과 외국에 대응할 수 있는 군대의 양성을 주장하였다. 봉사의 핵심은 무엇보다 일제에 맞설 수 있도록 내수를 급히 정비하고, 군사력을 양성하여 일제의 침략으로부터 국가를 지켜내자는 것이었다.
그 후 을사오조약에 대한 반대운동을 계속 전개하려 하였으나 경무사 윤철규(尹喆圭)에게 속아 납치되어 대전으로 호송되었다. 당시 일제는 송병선의 서울 상경, 국왕 면담, 선생을 추종하는 제자그룹 등을 매우 민감한 사안이라고 판단하였다. 12월 28일 대전으로 압송되어 온 다음날 송병선은 70세의 노구로 조국을 위하여, 후세를 위하여 할 수 있는 최선의 방법을 고민하다가 끝내 유소(遺疏)를 써 내려가기 시작하였다. 이것이 마지막 상소이자 제자들에 대한 행동 지침이 되었다. 그리고 음독한 후, 후손과 제자들을 모아 ‘도의 수호를 위해 죽음을 선택한다’는 마지막 유지와 함께 다음날 숨을 거두었다.
조광조(趙光祖)·이황(李滉)·이이(李珥)·김장생(金長生)·송시열 등 대선비의 문집에서 좋은 글귀를 뽑아서, 『근사록(近思錄)』과 같은 범례를 좇아 책을 지어 『근사속록(近思續錄)』이라 하였다. 그 밖의 저서로도 『연재집(淵齋集)』과 『근사속록(近思續錄)』, 『패동연원록(浿東淵源錄)』, 『무계만집(武溪謾集)』, 『동감강목(東鑑綱目)』 등 53권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