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녹휴(金祿休,1827-1899)


김녹휴(金祿休,1827-1899)                                  PDF Download

 

1827(순조 27)~1899. 조선 후기의 유학자이다.

관은 울산(蔚山), 자는 치경(穉敬), 호는 신호(莘湖)이다. 1827년(순조 27) 지금의 전라남도 장성군 황룡면 월평리(月坪里)에서 태어났다. 하서(河西) 김인후(金麟厚)의 후손이다. 조부는 김홍조(金弘祖)이고, 아버지는 김방묵(金邦默)이며, 어머니는 전의 이씨(全義李氏) 이정권(李貞權)의 딸이다. 연일 정씨(延日鄭氏) 정재영(鄭在瑩)의 딸과 결혼하였다.

1835년(헌종 1) 을미(乙未) 증광시(增廣試) 생원(生員) 3등 26위로 합격하였다. 어려서는 둘째 형인 김경휴(金景休)에게서 학문을 배웠으며, 15세 되던 해부터 조선시대 성리학의 6대가 중 한 명으로 꼽히는 노사(蘆沙) 기정진(奇正鎭)의 문하에서 수학하였다. 조선시대 성리학의 6대가로는 이황(李滉)․이이(李珥)․이진상(李震相)․임성주(任聖周)․서경덕(徐敬德)․기정진을 꼽는다. 그때 기정진은 하사리에서 살고 있었는데, 그 곳과 가까이 가기 위해 황룡강 건너에 있는 황룡면 신호리(莘湖里)로 이주하였다. 그의 문집은 무슨 연유인지 1981년에야 간행되었으며, 1책의 분량 밖에 되지 않는다. 그래서인지 성리학에 대한 저술도 찾아보기 힘들고, 그의 누정활동도 거의 알려져 있지 않다.

그러나 그는 산천 유람하기를 좋아하여 명승지를 두루 여행하였으며, 몇 곳에는 정사(亭榭)를 지어두고 동지들과 함께 즐겼다고 행장에 나온다. 사실 그의 문집에는 상외정과 문향정 관련 시가 보인다. 상외정은 1882년에 고창군 부안면 상암리 상포(象浦)에 세웠고, 문향정은 1892년 무렵에 신호리와 가까운 곳에 세웠던 것으로 추정된다. 현재 이 누정들은 사라지고 없다. 상외정에 대한 기문은 주인 김녹휴가 지은 것이 남아 있어서 전반적인 상황을 이해하기 용이하다. 그가 지은 기문에 의하면, 김녹휴가 변산에 거처한 것은 1878년부터인 것으로 나오는데, 과거에 대한 마음을 접고 난 뒤의 일로 추정된다. 상외정의 기둥에 달았을 법한 주련시가 그의 문집에 남아있는데 6언시 16구로 되어 있다. 여기에서 그가 지은 상외정의 원운시를 살펴보자.

만년의 정자를 바닷가에 지어놓으니(晩暮一亭隔海灣)

백년의 천석이 모두 서로 관여하네(百年泉石渾相關)

세속에선 도리어 물외의 경치 거둬들이고(象裏還收象外景)

바다 끝은 해중산을 함께 얻었네(海窮兼得海中山)

이것은 김녹휴가 지은 시로 바다가 굽어보이는 해안에 정자를 지어 놓으니 자연과 하나가 되어서 선경을 이루고 있음을 표현하고 있다. 먼 바다에 배들이 아스라이 멀어져가는 모습은 세속을 초탈한 한가로움이 묻어난다. 정자 주변의 경관과 작자 자신의 심경을 문학적으로 잘 승화한 시라고 할 수 있다. 위 시와 같은 운을 가지고 차운한 시로는 조성가(趙性家)와 오계수(吳繼洙)의 작품이 각각 문집에 남아있는데 모두 뛰어난 시이다. 이 시의 내용으로 보았을 때 상외정은 강학의 공간보다는 다정한 벗들과 함께 경관을 감상하거나 소요하는 공간으로 이용되었음을 알 수 있다.

김녹휴는 만년에 장성으로 돌아와 자신이 사는 곳과 가까운 곳에 문향정을 경영하였는데, 여기에서는 강학활동도 함께 하였을 것으로 추정된다. 조성가가 지은 「문향정기」가 남아 있는데, 1892년에 지은 것이다. 그 내용에서 ‘문향정’이라고 이름붙인 뜻과 세워진 위치를 알 수 있다. 조성가의 「문향정기」에 의하면, 집과 거리가 얼마 되지 않은 언덕에 새 정자를 짓고, 그 아래에는 연못을 팠으며, 연꽃도 가득히 심었음을 알 수 있다. 군자를 상징하는 연꽃은 주돈이의 애련설 이후 많은 선비들의 사랑을 받으며, 연못에 심어지게 되었다.

여기에서 다시 김녹휴의 문향정의 시를 살펴보자.

새벽녘 샘물소리 현근(玄根)을 정화하고(五更泉響玄根淨)

반이랑 못 물은 거울처럼 고요하네(半畝潭心鏡水安)

연하(煙霞)가 가까우니 경영하기 족하고(煙霞密邇經營足)

때때로 읊조리는 소리 들리니 문득 마음이 곧추서네(時聽咿唔便做官)

문향정은 마음을 맑게 하고 내면을 관조할 수 있는 공간이다. 상외정의 시가 선경과 같은 자연을 읊은 것이라면, 문향정의 시는 자신을 수양하는 내용임을 알 수 있다. 자연과 경물을 통해 마음을 맑게 하고 곧추세우고 있다. 문향정 시에 대해서는 기홍연의 문집에 「문향정」 2수가 있고 조성가의 문집에 「문향정즉사(聞香亭卽事)」와 「문향정연화연구(聞香亭蓮花聯句)」가 있는데, 운이 각각 다른 시이다. 「문향정연화연구」는 5언절구 6수로 조성가․김녹휴․기홍연․이정서(李鼎緖) 네 사람이 문향정의 연꽃을 대상으로 번갈아가며 지은 시이다. 이들은 자주 주변의 정자를 찾아다니며 연구로 시를 짓곤 한 시우(詩友)들이다. 특히 조성가는 김녹휴 누정의 주요 작가로서 그 공간을 더욱 빛나게 하였다. 김녹휴의 누정은 비록 많은 사람들의 왕래는 없었지만 다정한 벗들의 좋은 교유처가 되었음을 알 수 있다.

1877년(고종 14) 학행으로 선공가감역(繕工假監役)이 제수되었으나 나가지 않았다. 조성가(趙性家)․이응진(李應辰)․조의곤(曺毅坤)․김평묵(金平默) 등과 교유하였다. 저서로는 신호집(莘湖集)이 있으며, 기정진․조성가 등과 함께 장성의 고산서원(高山書院)에 배향되었다. 고산서원은 1982년 전라남도 기념물 제63호로 지정되어 있다.

⌈신호집⌋은 조선 말기의 학자인 김녹휴의 시문집이다. 모두 3권 1책으로 석인본이다. 1981년 증손 정중(晶中)이 편집하여 간행하였는데, 권두에 김영한(金寗漢)의 서문과 권말에 안종선(安鍾宣)의 발문이 있다. 전라남도 장성의 변시연가(邊時淵家)에 있다.

권1에는 시(詩) 200여 수, 권2에는 서(書) 58편, 서(序) 1편, 기(記) 6편, 발(跋) 4편, 상량문 1편, 제문 4편, 묘지명 1편, 행장 3편, 권3에는 부록으로 제문(祭文)․만사(挽事)·가장(家狀)·행장(行狀)·묘갈명(墓碣銘) 등이 수록되어 있다. 시에는 연작으로 된 「호상십영(湖上十詠)」․「석수암단오회(石水菴端午會)」 등과 서정시 「파초(芭蕉)」․「주망(蛛網)」․「현조(玄鳥)」 등을 비롯하여 황병중(黃炳中)․김류(金瀏) 등을 대상으로 지은 증여시가 있고, 그밖에 금강산과 내장산 등을 여행하면서 지은 다수의 유람시가 실려 있다.

서(書)는 심기택(沈琦澤)․조성가(趙性家)․채상필(蔡相弼) 등과 주고받은 것으로, 그 가운데 「답이직지사(答李直指使)」는 1898년(광무 2) 직지사 이승욱(李承旭)에게 종사(宗事)에 관하여 협조를 요청한 편지이고, 조성가에게 보낸 「답조직교(答趙直敎)」․「여조직교(與趙直敎)」 등 10여 편의 편지는 2년 전에 일어난 동학란을 비롯하여 민비시해사건과 단발령 등에 항거하여 일어난 의병운동의 단편적 상황 설명과 이에 대한 자신의 견해를 피력하는 내용으로 되어 있다. 그밖에 「남원진씨족보서(南原晉氏族譜序)」와 1885년 이상규(李庠珪)가 강진현감에 재임하면서 수인산성 남문의 비각(碑閣)을 수리한 사실을 기록한 「수인산성남문중수기(修仁山城南門重修記)」, 스승 기정진과 기양연(奇陽衍)을 대상으로 지은 제문 등이 실려 있다.

참고할만한 문헌으로는 ⌈신호집⌋, ⌈유학사상-연보집성⌋, ⌈광주고전국역총서⌋, ⌈전남향토문화백과사전⌋등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