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수이(愼守彛, 1688-1768)


신수이(愼守彛, 1688-1768)                                 PDF Download

 

수이는 자가 군서(君叙), 호는 취한당(就閒堂)이며 황고선생(黃臯先生)으로 불렸다. 본관은 거창(居昌)이다. 조부는 신경호(愼景昈)이고 부친은 신부(愼桴)이다.

8세 무렵에 새잡이 그물을 치는 것으로 동네 아이들 끼리 옥신각신하다 욕설이 오고갔는데, 공이 사람은 양보하는 것을 최우선으로 하거늘 한동네에서 사소한 이익 때문에 싸우는 것은 안 된다고 하면서 이를 시로 지었는데 그 사리가 분명하였다.

장성하여 공부하러 다닐 적에 일상 언행을 소학에 따라 준행하여 소학동자라고 일컬어졌다. 나무를 깎아 패로 만들어 환성자(喚醒子)로 명하고 허리춤에 차고 다녔는데, 나무패가 부딪힐 때 나는 소리로 자신을 각성하였다.

한천에서 학문을 가르치던 도암 이재를 찾아뵙고, 수개월 동안 가르침을 받은 후에야 비로소 제자의 예를 표했다. 이재는 공의 연수와 학문을 고려하여 도학지우로 지내고자 했으나 한사코 거부했다. 이재 또한 겸양하고 제자로 대하지 않았다.

공이 이재와 변론한 내용들은 사문 안에서 늘 높은 평가를 받았다. 이재가 졸하자 제자로서 심복을 하고 이재의 어록을 수정하였다. 공이 기록한 어록은 내용이 자세하면서도 분명하여 이재의 평소 가르침을 잘 전하고 있다.

공이 죽은 후에 구연서원(龜淵書院)에 배향하고 후에 도암 이재, 역천 송명흠과 더불어 성천서원(星川書院)에 배향하려고 했지만 성사되지는 못했다.

공은 기품이 순수하고 자질이 돈후하였으며, 의양이 단정했다. 평소 집안에 거할 적에도 경계하고 독실하게 처신하였다. 집안이 다스려지는 것은 아내에게 본보기가 되는가에 달려 있으니, 이것이 집안을 다스리는 근본이라고 했다.

8권 3책으로 된 황고집(黃皐集)이 전한다. 증손 신필우(愼必祐) 등이 수집 편집하여 1845년(헌종 11)에 간행하였다. 시(詩)·서(書)·서(序)·발(跋)·기(記)·설(說)·상량문(上樑文)·제문(祭文)·애사(哀辭)·고축문(告祝文)·잡저·묘갈명(墓碣銘)·묘표(墓表)·행장·부록 등이 수록되어 있다.

시는 침착하고 돈중(敦重)한 학자의 면모가 잘 나타나 있고, 벗들과의 차운시·수증시가 많다. 「한중만음(閒中謾吟)」에서는 초가을 활짝 갠 푸른 하늘 아래 자연과 함께 동화된 유유한 심회를 잘 드러내 보이고 있다.

서(書)에는 일상적 안부를 묻는 내용 외에 성리설에 대한 저자의 견해를 개진한 것도 다소 있다. 이재(李縡)는 당시 인물성동이(人物性同異)의 시비로 야기된 호락논쟁(湖洛論爭)의 진전 과정에서 윤봉구(尹鳳九)와 호서심설의 문제로 논쟁했는데, 이재는 낙론(洛論), 윤봉구는 호론(湖論)을 지지한 바 있었다. 서 가운데 이재에게 올린 「상도암이선생서(上陶庵李先生書)」는 당시 학계의 커다란 쟁점이 되었던 심설(心說)에 대해 언급한 것이다.

여기서 공은 주희(朱熹)의 합이기설(合理氣說)을 들어 주기적(主氣的) 성향을 배척하였다. 별지에서는 장재(張載)의 이원론을 들어 주리(主理) 또는 주기의 일원론을 논박하고, 여러 선유(先儒)의 설을 인용해 심즉이기(心卽理氣)의 이원론을 논증하여 스승의 설에 동조하는 견해를 밝히고 있다.

잡저의 「한천어록(寒泉語錄)」은 이재의 어록이다. 스승을 처음 만난 날로부터 죽을 때까지 보고 듣고 느낀 바를 자세히 적어, 덕행과 학문의 대략을 이해하는 데 중요한 자료가 된다. 그밖에 여러 논의들도 당시 심설 논쟁이 활발히 전개되던 학계의 분위기를 이해하는 데 좋은 참고자료가 된다.

영조실록⌋ 영조 13년 조에 신수이에 대한 평이 나온다.

“경상도 감사 민응수(閔應洙)가 상소하여 도내(道內)에 있는 인재들을 천거하기를, ……안음(安陰)의 신수이(愼守彝)는 학문과 행실이 정밀하고 독실한데가 재능도 갖추고 있으며, ……”

<참고문헌>
신수이, ⌈황고집(黃皐集)⌋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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