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광후(朴光後, 1637~1678)


 

박광후(朴光後, 1637~1678)                              PDF Download

 

광후(朴光後, 1637~1678)는 조선시대 중기의 문신으로 송시열의 문하에서 학문을 배웠다.  그는

“지금은 세상에 나가서 도(道)를 행할 때가 아니다.”

라고 하면서, 늘 나라에 도가 없음을 개탄하고,  뜻을 같이하는 사람과 함께 상소를 하거나,  궐문(闕門)에 가서 항의를 하였다. 혹독한 형벌을 받기도 하였으나 기개를 꺾이지 않았다.  마음씀이 공명정대 하고불의에 굴하지 않아 생전에 호남의 대표적인 선비로 인정을 받았으나 42세가 되던해 갑자기 사망하였다.

우암송시열이지은박광후의묘갈명
우암송시열이지은박광후의묘갈명

1637년(1세, 인조15년) 6월 2일에 광주(光州)의 아산리(지금의비아도천동)에서 태어났다.  본관은 순천(順天), 자는 사술(士述),호는 안촌(安村)이다.  할아버지는 진사(進士) 박창우(朴昌禹)이며, 부친은 충의위(忠義衛) 박천용(朴天用)이다.

부친은 일찍 세상을 떠났으며, 모친은 남씨(南氏)이다. 할아버지 박창우는 호가 칠졸재(七拙齋)인데, 병자호란(丙子胡亂) 때에 의병을 일으켜 북으로 올라가 출정(出征)한 적이 있다.  송시열은 박광후의 묘갈명에이렇게 적었다.

“박사술의 본관은 평양(平陽, 즉순천順天)이며 10대조 박석명(朴錫命)은 본조(本朝)의 훈신(勳臣)인데, 아마도 인수(仁叟, 박팽년朴彭年의자字) 선생과 같은 집안일 것이다. 할아버지 박창우(朴昌禹)는 진사(進士)이고 아버지 박천용(朴天用)은 학문이 있었으나 일찍 별세하였으며, 어머니 남씨(南氏)는 성품이 엄하고 법도가 있었다.
박사술은 홍씨(洪氏)를 아내로 맞아 한 아들과 여섯 딸을 낳았는데, 아들 박중회(朴重繪)는 사리에 밝고 재주가 뛰어나서 사우(士友)들이 칭찬하며, 네딸은 다사인(士人)의 아내가 되고 두 딸은 아직 출가하지 않았다.”

1650년(14세,효종1년) 남양홍씨(南陽洪氏)를 아내로 맞이 했다. 부친을 일찍 여의고 집안일을 도맡아 하면서 어머니를 섬겼다.

1651년(15세,효종2년) 향교에 다녔다.

1656년(20세,효종7년) 송시열(宋時烈)과 송준길(宋浚吉)의 문하에들어가 성리학을 배웠다. 그는 어려서부터 학문에 정진하여 학식(學識)이 높았으며,  마음이 정대(正大)하고 조금도 불의(不義)에 굴하지않아, 호남 선비들 의사표가 되었다.  그를따라 남도에서 정상용, 박치도, 박상현, 박상진, 박광일, 박광원, 박광오, 박광선, 박광윤, 박중회, 박상지, 민사하등많은학자들이 일어나 학통(學統)을 계승하였다.

1660년(24세,현종1년) 서울에 가서 윤휴(尹鑴)를 만났다 . 고향으로 돌아가 주위사람들에게 윤휴를 평하기를 “길인(吉人, 좋은사람)이아니다.” 라고 하였다.

1666년(30세,현종7년) 식년사마시(式年司馬試)에 생원 3등으로 합격하였다.  성균관(成均館)에 들어가 학문공부를 하였다.  과거공부에연연하지 않고 자기 실천을 위한 학문에 힘썼다.

1675년(39세,숙종1년)스승 송시열이 유배를 당하자 박광후는 광주, 나주, 장성 등 고을 유생들과 연대하여 구명운동을 펼쳤다.  이 일로 옥고를 치르게 되었으나 조금도 좌절하지 않고 스승을 따랐다.  이즈음세상의 상황이 크게 변하여 출세할 생각을 접었다. 혹시 권하는 자가있으면 “지금은 세상에 나가서 도(道)를 행할 때가 아니다.” 라고 하였다. 하지만 늘나라에 도가 없음을 개탄하고,  뜻을 같이하는 사람과 함께 상소를 하기도 하고, 궐문(闕門)에 가서 호소하여 잘못된 일에 대해 극진히 말하여 항의하기도 하였다.  당시 동료들과 함께 혹독한 형벌을 받기도 하였으나 기개를 꺾이지 않았다.

1677년(41세,숙종3년) 장기해변(지금의포항부근)에 유배중인 스승송시열을 찾아가 위문하고, 순천박씨(順天朴氏)의족보(族譜) 서문을청했다.

1678년(42세,숙종4년)에 갑자기 안청동 외성당(畏省堂)에서 별세하였다.  부인 남양홍씨(南陽洪氏)와 사이에 1남 6녀를 두었으며,  광주(光州) 진곡리(晉谷里)에 장사를 지냈다. 스승 송시열은 1680년 8월에 부탁 받은 족보 서문과 묘갈명을 보내왔다.  묘갈명에서 송시열은 이렇게 말했다.

“아! 박사술(박광후의자)은 이제 죽었거니와, 지금 세상에 다시 이런사람이 있겠는가?  그는 어버이에게 효성하고 뭇사람에게 자상하고 벗에게 성실하였으며 늦게는 학문에만 종사하였으니,  그 진취는 장차 한이 없었을것이다. 아!운기(運氣)가 좋지 않으니, 그가 어찌 죽지 않을 수  있었겠는가?  나는 매우 고루하여 그와  전혀 친분이 없었는데,  하루는 천리 길을 찾아 왔으므로 그 용모를 대하고 그 이야기를 들으니,  사람으로 하여금 시원히 마음을 각성하게 하였다.  내가 제주(濟州)에 있을 때에 그가 또 사우(士友) 몇 사람과 함께 보러 왔는데, 변을 겪고 험한고 난을 겪은 것이 이처럼 지극한데도 기개와 언론은 예전과 다름없었다. 내가 이 사람은 장차은 산철벽(銀山鐵壁)이 될 것이라고 생각하였는데,  이제 갑자기 이지경이 되었으니, 귀신이 어찌 어질지 못한가?”

송시열은 10여년이 지난 1689년 2월 18일, 기사사화(己巳士禍) 때에제주도로 유배가는 길에 광주의 안청동 부근을 지나게 되자 박광후가세상을 떠난 고택 외성당을 찾아 그 감회를 적고 애절한 시 한수를 남기고 길을 떠났다.  약200년 후인 1879년 면암 최익현도 유배지 흑산도에서 풀려 나와  상경할 때 외성당을 방문하여 외성당 방문기(訪問記)와 시 한수를 남겼다.
박광후는 문집으로 『안촌집(安村集)』을 남겼는데, 4권 2책으로 목활자본이 전남대학교 중앙도서관에 보존 되어있다. 기정진(奇正鎭)이 서문을 작성했으며,  송시열의 충절을 노래한 시가 많고,  이이와  성혼을 문묘에 배향해 달라는 상소문, 기축옥사에서 정철이 최영경(崔永慶), 이발(李潑) 등을 죽이지 않았다는 상소문, 옥중에서 동료들에게 보내는 편지 등이 실려있다.  또1677년 유배지에서 송시열의 말을 기록한 어록도 이 문집에 실려 있다.

<참고자료>
송시열, 박광후묘갈명, 세종대왕기념사업회, ⌈국조인물고 ⌋, 1999
이미선, 박광후,<한국역대인물 종합정보시스템>, 한국학중앙연구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