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지백(金之白)


김지백(金之白)                                                             PDF Download

 

161623(인조 1)~1671(현종 12). 조선 중기의 유학자이다. 본관은 부안(扶安)이며, 자는 자성(子成)이며, 호는 담허재(澹虛齋)이다. 조부는 증 이조참판 김익복(金益福)이고, 아버지는 성균관진사 증 동몽교관 도촌(陶忖) 김연(金沇)이다. 모친은 여산송씨(礪山宋氏)이며 현감(縣監) 송처중(宋處中)의 딸로, 4남 1녀를 두었다.

인조 때의 명현 신독재 김집의 제자로써 스승의 총애를 받았으며, 동창생인 송시열(宋時烈)․송준길(宋浚吉) 등과도 교분이 두터웠다. 1648년(인조 26) 무자(戊子) 식년시(式年試) 생원(生員) 2등 21위로 합격하였고, 생원(生員)이 된 뒤에 덕행으로 교관(敎官)에 천거되었으나 나아가지 않았다. 이후에 진사(進士)가 되었다.

1667년(현종 8) 중국인 임인관(林寅觀) 등 95인이 제주도에 표류하여 상륙하자 조정에서는 청나라를 두려워하여 이들을 본국에 압송하기로 결정하였다. 이에 선생은 중형 김지중(金之重)과 함께 상소를 올려 그의 불가함을 힘써 주장하였다. 평생 명나라의 숭정(崇禎) 연호를 썼으며, 문장이 아담하기로 이름 높았다. 만년에는 고향 남원에서 후생들의 교육에 힘썼으며 많은 훌륭한 제자를 길렀다. 사헌부 집의에 증직되었고, 남원의 요계사(蓼溪祠)에 제향되었다. 산동면 목동리 요계서원에 배향되었다.

아버지 김연(1596~1661)의 자는 장원(長源)이며, 호는 도촌거사(陶村居士)이다. 1618년(광해군 10) 무오증광사마시(戊午增廣司馬試) 진사(進士)에 합격하였으나 대과(大科)에는 응시하지 않았다. 1637년(인조 15) 이후부터는 세상과 인연을 끊고 산 속에서 시를 읊조리고 살며 스스로 자신의 호를 ‘도촌거사’라고 하였다.

맏아들 김지명(金之鳴)은 1639년(인조 17) 기묘식년사마시(己卯式年司馬試)에 진사 부장원으로 합격하였고, 김지성(金之聲)은 1648년(인조 26) 무자식년문과(戊子式年文科)에 급제하여 정랑(正郞)을 지냈다. 김지중(金之重)은 1651년(효종 2) 신묘식년사마시(辛卯式年司馬試)에 생원 3등으로, 김지백(金之白)은 1648년(인조 26) 무자식년사마시(戊子式年司馬試)에 생원 부장원으로 합격하였다. 딸은 사간(司諫) 이상형(李尙馨)의 아들 이문원(李文源)과 혼인하였다.

또한 맏아들 김지명(1607∼1684)의 자는 자겸(子謙), 호는 양망재(兩忘齋)이다. 품성이 준수하고 기상이 온아하며 학문에 잠심(潛心)하여 나이가 많아질수록 덕도 따라서 높아지니 세인이 모두 존경하고 복종하였다. 학문은 중부(仲父)인 재간당(在澗堂) 김화(金澕)에게서 수학하였다. ⌈효종실록(孝宗實錄)에 의하면, 그가 진사에 합격하던 해에 상소하여 임진왜란에 순절한 증 찬성 황진(黃進)과 증 판서 이복남(李福男)의 사당에 이름을 내려줄 것과, 당시 구례현감 이원춘(李元春)이 포상의 은전을 받지 못하였으니 증전(贈典)을 내려줄 것을 청하고 그 답을 받았다. 만년에는 거처하는 곳을 양망(兩忘)이라 편액하고, 후진을 기르며 주위 명사들과 교유하였다. 그의 ⌈양망유고(兩忘遺稿)⌋는 ⌈부안김씨세고(扶安金氏世稿)⌋에 합철되어 간행되었다.

김지백은 1655년 경상남도 하동군의 청학동을 유람하고 유두류산기(遊頭流山記)를 등 많은 시문을 남겼다. 시문집으로는 ⌈담허재집(澹虛齋集)⌋이 전해진다.

담허재집⌋은 조선 중기의 학자 김지백의 시문집이다. 6권 3책으로 활자본이다. 1895년(고종 32) 후손 김종술(金鍾述)이 편집, 송병선(宋秉璿)이 교열, 8세손 김낙린(金洛麟)․김낙리(金洛鯉) 등이 간행하였다. 권두에 민종현(閔鍾顯)의 서문과 권말에 김낙리 등의 발문이 있다. 현재 국립중앙도서관에 소장되어 있다.

권1에는 시 167수가, 권2에는 소 2편이, 권3에는 서(書) 24편이, 권4에는 잡저 8편이, 권5에는 서(序) 4편, 기 7편, 발 1편, 축 2편, 제문 17편, 전(傳) 6편, 행장 3편이, 권6에는 부록으로 행장·묘갈명·유사·요계사축(蓼溪祠祝) 각 1편 등으로 구성되어 있다.

시에는 오언절구 22수, 칠언절구 57수, 오언율시 12수, 칠언율시 41수, 오언고시 5수, 만시(輓詩) 29수, 부(賦) 1수 등 각체의 시가 수록되어 있다. 서(書)에는 김집(金集)에게 보낸 ⌈심경(心經)⌋·⌈가례(家禮)⌋ 등에 관한 문목(問目)·별지(別紙)가 상당수 있다.

잡저 가운데 「독서차기(讀書箚記)」는 모두 8개 항목으로, 1∼3항목은 정(靜)·동(動)·동정교양(動靜交養) 등에 관한 논설이다. 4∼6항목은 심통성정(心統性情)·심지체용감처(心之體用感處)에 관한 것이다. 7항목은 혼실(昏失)의 병(病)을, 8항목은 ⌈논어⌋ 가운데 의심나는 점을 논한 것이다.

심통성정설」에서는 사람의 본성(性)은 하늘에서 부여받은 것이고, 이러한 성이 대상과 감응하여 드러난 것이 정(情)이다. ‘성’은 고요한 속에 갖추어져 있고, 정은 감응하여 드러나는데, 이때는 반드시 주재자로써의 심(心)이 있어야 한다는 ‘심통성정’의 개념을 설명하였다. 끝에는 도표가 제시되어 있다. 그밖에 「정완책(頂頑策)」 등 4편은 모두 과문(科文)이다. 그 가운데 「사자입언(四子立言)」은 차중(次中), 「역상마(易喪馬)」는 감시이하(監試二下)로 합격한 작품이다.

이어서 1656년(효종 7)에 유유상종한 사우들과 은일자중하며 이안정(怡顔亭)에서 읊은 시 한편을 소개한다.

 

茅軒蕭灑壓淸川  (모헌소쇄 압청천)
띠집(茅軒)의 청결함이 맑은 시내보다 나으니

專壑生涯得百年  (전학생애득백년)
이 골짜기에서 마음껏 한 백년(百年)은 살겠네.

報秋登催善釀  (보추등최선양)
하인이 결실을 알려니 술 잘 빚기를 재촉하고

鳥傳春信覓新篇  (조전춘신멱신편)
새소리가 봄소식을 전하니 새 시편을 구하네.

一庭梧月閒宵裡  (일정오월한소리)
오동나무 뜰에 달빛은 밤 중 내내 한가하고

半畝荷風暮雨邊  (반무하풍모우변)
저녁 비 내린 끝에 작은 연못가에 바람 인다.

靜認主人標額意  (정인주인표액의)
고요함 속에 주인이 내건 편액의 뜻을 알지니

開顔隨處卽怡然  (개안수처즉이연)
얼굴 펴고 사는 것이 곧 기쁨이 아니겠는가.

갈치방을 흐르는 수려한 요천 물가에 비록 소박한 띠집이지만 청결한 분위기가 맑은 시내를 압도하는구나. 이러한 청정 골짜기라면 고고한 마음으로 한 백년은 넘게 살겠네. 일하는 하인이 정자에 와서 가을 곡식을 거둘 것을 알린다. 주인은 먼저 술 담그는 것부터 서둘러 챙긴다. 벌써 늦은 가을이면 생명의 기운은 쇠잔하고 이제 새봄을 기다려야 한다. 벌써 봄소식을 알리는 새소리를 듣는 것 같다. 새로운 시편을 구해야겠다. 뜰 안 오동나무에 걸린 밝은 달은 밤중 내내 외롭다. 저녁에 잠깐 비가 내리고 찬바람이 뜰 안의 작은 연못을 스쳐간다. 조용하기만 한 밤. 주인이 걸어 놓은 ‘이안정’이란 편액의 뜻을 헤아려 본다. 세상사 넉넉한 인심으로 과연 얼굴에 근심 없이 사는 것이 큰 기쁨이구나.

[참고문헌]: 호남지, 남원지, 조선호남지, 전라문화의 맥과 전북인물,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국조인물고」, 「양망유고」, 「효종실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