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한준(兪漢寯)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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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암공 유한준(兪漢寯)
저암공 유한준(兪漢寯)

한준(兪漢寯, 1732∼1811)은 영조 44년, 즉 1768에 진사시에 합격한 뒤 김포군수, 형주 주부(主簿), 군위 현감, 해주 판관 등을 역임하였다.

그는 명문 집안인 기계(杞溪) 유씨(兪氏) 집안에서 태어났으며, 조상 대대로 송시열을 섬기는 가풍이 있었다. 그래서 당파적으로는 노론계 인물이라고 할 수 있으나, 그러한 당색에 얽매이지 않고 북인계 남인 실학자들의 견해도 적극적으로 받아들이고, 노장과 불교에도 이해가 깊었다.

성리학에서는 소론파의 견해도 받아들이는 등 개방적인 사유의 소유자였다. 그는 당대의 뛰어난 문장가로 평가되어 주변으로부터, “향후 백년간은 이러한 작품이 나오지 않을 것”, “일세를 독보하는 문단의 거장”이라는 등의 평가를 받았다.

그의 이러한 폭넓은 관심과 자유로운 정신은 그의 아들 유만주(兪晚柱, 1755~1788)에게로 이어졌다. 유만주는 과거에 합격하지 못하고 33세로 사망하였으나, 그가 살아생전에 매일 같이 기록한 ⌈흠영일기⌋를 통해 조선시대 사회의 다양한 모습을 후세에 남기고 있다.

 

1732년(1세, 영조 8년)
4월 7일, 조선의 명문 집안인 기계(杞溪) 유씨(兪氏) 집안에서 태어나다. 부친은 진사 유언일(兪彦鎰, 1697∼1747)이며, 어머니는 창녕(昌寧) 성씨(成氏)이다. 증조할아버지 유명뢰(兪命賚)는 송시열의 문하생이었는데, 송시열이 사약을 먹고 사망하자, 평생 동안 은거하며 관직이 나아가지 않았다. 할아버지 유광기(兪廣基)는 예산 현감을 지냈으며, 부친 유언일(兪彦鎰)은 평생 포의로 지냈다.

 

1747년(15세, 영조 23년)
부친이 사망하였다. 향년 50이었다.

 

1748년(16세, 영조 24년)
10월, 부친을 잃은 슬픔을 못이기고 큰형 유한병(兪漢邴)이 사망하였다. 매부 김려행(金礪行)의 집이 있는 덕산(德山)에서 의탁하여 지냈다. 이해 안취범(安取範)의 딸 순흥안씨(順興安氏)와 결혼하였다.
이즈음 김이곤(金履坤)에게 시를 배우고 남유용(南有容)에게 문장을 배웠다. 유한준은 먼 친척인 박윤원(朴胤源, 1734∼1799), 박준원(朴準源, 1739∼1807) 형제와 어려서부터 같은 동네에서 글을 함께 배우고 평생 깊은 교유관계를 맺고 지냈다. 박유원은 미호 김원행에게서 성리학을 배우고 일가를 이루었으며, 박준원은 1787년 셋째 딸(가순궁 수빈 박씨綏妃朴氏)이 간택 후궁으로 궁중에 들어가 세자 순조(1790∼1834)를 낳아, 임금의 외할아버지가 되어 순조 시대 초년, 순조의 장인이 된 김조순(金祖淳)과 함께 국사를 관장하게 되었다.

 

1758년(26세, 영조 34년)
2월에 어머니가 돌아가셨다. 다음해 어머니 행장(先妣行狀)을 지었다.

 

1762년(30세, 영조 38년)
단양 일대를 유람하였다.

 

1763년(31세, 영조 39년)
사마천(司馬遷)의 사기열전(史記列傳)처럼 우리나라의 인물을 소개하기 위해, 우선 동전표목(東傳標目)이란 목록을 구성하고 서문을 썼다.

유한준은 도(道)와 문(文), 즉 도학(성리학)과 문예(문장)를 구분하고 각각의 가치를 인정하였다. 그리고 문예의 모범을 육경이나 성리학 서적에서가 아니라, 사마천이나 반고로 대표되는 진나라, 한나라 때의 고문(古文)으로 보았다. 그는

“진한(秦漢) 이래 도술(道術)이 천하에 분열되어, 문장과 학문이 나뉘어 두 길이 되었다. 그리하여 유학자들은 각각 제가 사모하는 바를 좇아, 사모하는 바가 도학에 있으면 도학을 숭상하고, 사모하는 바가 문장에 있으면 문장을 숭배하여, 근원에서 멀어질수록 말단은 더욱 나뉘어졌는데, 이는 그 추세가 그런 탓이다.”

유한준은 이렇게 역사와 문장에 특별한 관심이 있었는데, 이러한 경향은 아들 유만주에게 깊은 영향을 미쳤다.

 

1764년(32세, 영조 40년)
12월, 둘째 아들 유면주(兪冕柱)가 천연두에 걸려 만 5살의 나이로 죽었다.

 

1767년(35세, 영조 43년)
4월, 「에호부(殪虎賦)」를 지었다. 과거에 누차 응시하였으나 결과가 계속 좋지 못했다. 이즈음 문장이 주변에 소문이 나서

“향후 백년간은 이러한 작품이 나오지 않을 것”

이라는 말을 듣기도 하고,

“일세를 독보하는 문단의 거장”

이라는 평가를 받았다.

 

1768년(36세, 영조 44년)
진사시(進士試)에 합격했다. 아들 유만주(兪晚柱)가 결혼했다. 며느리는 오재륜(吳載綸)의 장녀 해주 오씨다. 스승 뇌연(雷淵) 남유용(南有容)에게 「치사송(致仕頌)」을 올렸다.

 

1771년(39세, 영조 47년)
음직(蔭職)으로 종 9품의 동릉(東陵) 참봉(參奉), 즉 여주(驪州)의 영릉 봉사(寧陵奉事)에 임명되었다. 「청심루송(淸心樓頌)」, 「단궁난(檀弓難)」을 지었다.
다음해 사옹원 주부, 의금부 도사에 임명되었다.

 

1773년(41세, 영조 49년)

손자 유구환(兪久煥)이 태어났다. 봄에, 며느리 오씨(吳氏)가 출산 후유증으로 사망했다. 가을에 지평 안대제(安大濟)의 건의로 파면되었다.

 

1774년(42세, 영조 50년)
새로 이사한 곳을 읊은 「초당부(草堂賦)」를 지었다. 아들을 다시 장가보냈다. 새로 맞이한 며느리는 박치일(朴致一)의 장녀다.

 

1776년(44세, 영조 52년)
형주 주부(主簿)에 임명되었다가 승진을 하여 형조 낭관이 되었다.

 

1777년(45세, 정조 1년)
경상도 군위(軍威: 羅山, 赤羅) 현감으로 임명되었다. 이때 쓴 문장으로 「나산책(羅山策)」이 있는 데 일부 내용을 소개하면 다음과 같다.

“관리의 세 가지 정사(政事)는 전정(田政), 군정(軍政), 환곡(還穀)이니, 나라의 율령은 거역할 수 없다네. 백성들이 곡식을 해마다 반환해도 향리들이 쥐새끼처럼 곡식을 훔치네. (중략) 누런 띠풀 흰 갈대만 무성한데도, 마을사람에게서 고혈(膏血)을 쥐어 짜내고, 거친 모래와 자갈뿐인 땅인데도, 그 친족들까지 착취하네.”

“수령은 살피지 않고, 감사는 구휼(救恤)하지 않으며, 조정은 논의하지 않으니, 임금의 귀에 들리지 않네. 그런 까닭에 백성은 병들고 지쳐서 입과 배를 채울 겨를 없으니 예의를 어찌 돌보겠으며, 예의가 없으니 어찌 순수함이 있겠는가? 어디든 다 그렇지만 영남이 가장 심하고, 그렇지 않은 고을이 없지만 나산(羅山)은 갑절이라네.”

그는 이러한 문장과는 별도로 경상도 관찰사에게 다음과 같은 공문을 보내기도 하였다.

“본 현은 3,40년 이래 폐단이 해마다 늘어 정리할 수가 없습니다. 가장 차마 하기 어려운 것은 대체로 세 가지 폐단입니다. 첫째는 환곡이고 둘째는 군정(軍丁)이며 셋째는 결세(結稅, 토지세)입니다. 환곡의 폐단은 이렇습니다. 본 현은 아주 작은 방처럼 작고 초라하며 백성들의 집은 모두 텅 비어 있습니다. 가구 수는 2,800호에 불과한데 환곡세는 37,000석입니다.

이처럼 많은 환곡을 저 정도의 가구가 분담하니 이것이 소인국 사람에게 솥을 들어 올리게 하며 파리, 모기에게 산을 짊어지게 하는 것과 무엇이 다르겠습니까? 사방 들녘은 이미 가을이지만 관리들의 빚 독촉을 지탱하기 어려우니 지탱할 수 없으면 도망가고, 도망가거나 죽게 되면 친족이 대신 물게 됩니다. 해마다 친족에게 빚을 징수하고 매년 이웃 사람을 침해하니 죽음뿐인 우리 백성들의 삶이 슬플 뿐입니다. (이하 생략)”

아울러 그는

“대낮에도 뇌물이 행해지며 음지에서는 문서를 위조하여 관리들은 그것으로 처자를 배불리 먹이고 서리들은 술과 고기를 실컷 먹습니다. 진실로 기댈 곳이 있는 자들은 다른 사람을 먹이지 않고, 참으로 의지할 곳 없는 사람들은 도리어 다른 사람을 먹입니다.”

라고 질타하고 흉년이 든 이 해 한해만이라도 환곡을 경감해주도록 호소하였다.

 

1778년(46세, 정조 2년)
풍기(豐基), 단양(丹陽), 경주 등지를 여행하였다. 아들 유만주는 자신의 일기를 ‘흠영(欽英)’이라고 이름지었다.

 

1779년(47세, 정조 3년)
6월, 영남 암행어사 황승원(黃昇源)의 보고에 따라, 군위현감으로써 지역을 잘 다스리지 못했다는 이유로 처벌을 받았다.

 

1782년(50세, 정조 6년)
이해 황해도 해주 판관(海州判官)에 임명되었다. 개성, 평양 등지를 여행하였다. 다음해 그동안 지은 시문(詩文)을 정리하였다. 스스로 편집하여 ⌈자저(自著)⌋라고 이름을 붙였다.

 

1784년(52세, 정조 8년)
봄에 아들 유만주가 해주와 평양으로 여행을 왔다. 아들이 여름 8월에 명동에 백칸 집을 사서 이사를 하였다고 하였다. 유한준은 집이 너무 크고 화려하여 반대하고 값을 내려서라도 집을 내놓으라고 연락했다. 아들은 9월에 과거시험을 보았는데 또 낙방을 하였다. 아들 유만주는 11월에 홍대용의 집에 가서 서

양 천문기기를 보고, 12월에 한양에 온 청나라 사신의 행렬을 구경하였다. 홍대용은 작년 겨울에 사망하였다.

 

1785년(53세, 정조 9년)
해주 판관의 직에서 해임되었다. 관내에서 일어난 옥사사건의 처리를 잘못하였기 때문이다. 익산 군수에 임명되었다. 여름에 명동의 집을 다시 팔고 창동의 작은 집으로 되돌아갔다. 부친 유언일(兪彥鎰)의 행장(行狀)을 지었다. 다음해 「가전(家傳)」을 지었다.

 

1787년(55세, 정조 11년)
둘째 손자 유돈환(兪敦煥)이 태어났다. 큰손자 병으로 유구환(兪久煥)이 죽었다. 아들 유만주는 과거시험에 또 응시하였으나 떨어졌다. 사도사(司䆃寺) 첨정(僉正)을 거쳐 부평(富平) 부사(府使)에 임명되었다. 생질 김리중(金履中)이 사망하였다.

 

1788년(56세, 정조 12년)
2월, 아들 유만주(兪晚柱)가 자식의 죽음을 슬퍼하다 만 33세의 젊은 나이로 죽었다. 유만주는 자신이 열심히 썼던 일기 ⌈흠영⌋을 미완성한 글이니 불태워달라는 유언을 남겼다.

아들 유만주는 책 읽는 일을 매우 좋아했다. 비록 과거에 합격하지는 못했지만, 유교 경전과 역사책, 제자백가, 지리서, 패관잡설, 등 수 천권의 서적을 읽고 장차 역사가가 되는 것을 꿈꾸었다. 죽기 1년 전에도

“밤에, 사관(史官)이 되는 꿈을 꾸었다.”

(⌈흠영일기⌋, 1787년 3월 11일자)고 하였다.

이해 「광부이산영조천묘시말기(廣富二山營兆遷墓始末記)」를 지었다. 청주(淸州) 목사(牧使)에 임명되었다.

 

1791년(59세, 정조 15년)
아들 유만주의 유고를 모아 ⌈통원유고(通園遺藁)」를 만들었다. 그의 일기인 ⌈흠영일기(欽英日記)」를 정리하고, 두 유고집의 서문을 지었다.

유한준은 이렇게 썼다.

“아아! 재작년 오늘 저녁 너의 시신을 부둥켜안고서 뒹굴고 내던지며 하늘을 울부짖고 벽에 머리를 부딪친 것이 어제 같은데, 스물여섯 달이 흐르는 물과 같이 지나가 홀연 종사(終事)의 기일에 당하여 너의 빈소를 거두고 너를 부모의 묘 곁에 부장하다니, 아아 원통하도다! 이것이 어찌 너의 오늘의 일이란 말이냐?

내가 실로 지극히 미욱하고 지극히 어두우며 지극히 완고하여 죽지 않고 없어지지 않고서 여전히 밥을 먹고 여전히 살아 있구나! 살아 있다면 마땅히 너와 더불어 혼기(魂氣)를 가까이하고 상과 의자를 가까이 하여 대상의 일을 마쳐야 하였거늘, 도리어 무슨 마음에 뱃놀이하고 유람하여 이 비통함을 아침저녁의 제사와 삭망의 제사에 때에 맞추어 드러내지 않고서, 돌아와서야 이 저녁을 마친다는 말이냐. 아비가 되어 살아서는 자식에 대한 사랑을 다하지 못하고 죽어서는 자식에 대한 정을 다하지 못하니, 인간의 도리라고 할 수 있겠느냐? 아아, 애통하도다!(중략)

이제 너의 책을 내가 간행할 힘은 없지만 설령 간행할 힘이 있다고 해도 세상 누가 소유하여 아낄 자가 있겠느냐? 나 또한 석함에 넣어 묘 옆에 묻고서 후세를 기다리려고 하지만, 뜻과 함이 서로 다르지 못할까 두렵구나.

아아! 사람들 중에서는 실로 비록 장수하였으나 장수하지 않은 것과 마찬가지인 자들이 있으니, 이는 칭송할 것이 못된다. 만약 네 책이 다시 나온다면, 네가 비록 요절하였지만 그 수명이 무궁할 것이니, 내가 비록 슬픈지 안 슬픈지 말하지 않는다고 하여도 또 어쩌란 말인가. 그러나 후세는 기대하기 어려우니 이 아픔이 더욱 깊다. 나는 실로 끝내 어떻게 될지 알지 못하겠구나!

아아, 애통하도다! 너는 죽고 나는 산 것이 3년이 되었다는 말이냐? 이 생애 어느 날 다시 아버지와 자식이 된다는 말이냐? 나는 이미 늙었다. 가슴 속에 얼음과 불을 끌어안고 있으니, 세상에 오래 살기를 바랄 수 있겠느냐? 죽는 날에 너희 부자와 함께 지하에서 노닐어, 여기서 다하지 못한 인연을 다시 이으려하니, 너는 잠시 기다리기 바란다. 말을 그치노라. 아아, 애통하도다!”

아들 유만주는 그의 일기에서 이렇게 말한 바 있다.

“나는 누구인가? 『흠영』이 없다면 나라는 존재도 없다. 나는 역사책, 지도, 여행, 주렴, 다래를 좋아하며, 역사가가 되고 싶다. 하지만 스스로 돌아보고 헤아려 보아도 이미 두루뭉실하고 세상 물정을 몰라, 세련되게 꾸미기를 요구하는 세상의 규율에 너무나 맞지 않다.”

유만주의 ⌈음영일기⌋는 2015년 일부가 한글로 번역되어 출판되었다.(⌈일기를 쓰다⌋1, 2, 유만주 지음, 김하라 편역, 돌베개) 유만주의 ⌈음영일기⌋를 기리는 행사가 서울역사박물관 주관으로 <유만주의 한양 – 한양 선비의 한해살이, 1784, Ordinary day in Seoul>라는 제목으로 2016년 11월 25일부터 2017년 2월 26일까지 개최되었다.

 

1792년(60세, 정조 16년)
유언민(兪彥民)의 문집 ⌈석은집(石隱集)⌋의 서문을 지었다. 김이홍(金履弘)이 사망하였다.

 

1793년(61세, 정조 17년)
이즈음 김포 군수가 되었다. 다음해 불미스러운 일에 연루되어 감옥에 갇혔다가 석방되었다. 이즈음(1795년), 임윤지당(任允摯堂)의 유고에 서문을 지었다.

 

1796년(64세, 정조 20년)
8월, 사복사(司僕寺) 첨정(僉正)으로 임명되었다가 종3품의 강원도 삼척 부사(府使)로 부임하였다. 이때가 마지막 외직생활이었다.

 

1798년(66세, 정조 22년)
12월, 삼척 부사에서 해임되었다. 다음해 4월, 원자궁(元子宮)의 요속(僚屬)이 되었다.

 

1802년(70세, 순조 2년)
자저(自著)⌋를 다시 편집하기 시작했다. 새로운 판본은 ‘임술본(壬戌本)’이라 부른다. 장작 부정(將作副正)에 임명되었다가 강화(江華) 경력(經歷)에 제수되었다.

 

1808년(76세, 순조 8년)
이해에 강화도를 여행하였다. 「저수자명(著叟自銘)」을 지었다. 「자명」에서 그는 다음과 같이 회고했다. 자신은 처음 문장이 서툴렀을 때, 진나라 한나라의 고문만을 숭상하여 장자, 굴원, 사마천, 한유 등을 섭렵했으나 이후 50여년간 마침내 얻은 것은 없었다. 이제 늦게야 도(道)는 육경(六經)에 있고 사서(四書)에 온축(蘊蓄)되어 있음을 깨우쳤다. 이것을 너무 후회한다.

또 「자저」(권4)의 고시(古詩) 「내 친구(吾友)」라는 문장에서 그는 다음과 같이 노래했다.

“나도 이미 늙었다. 화려하고 난폭한 언사가 이제는 권태롭다.
옛 성현들의 서적이 오히려 그 의미가 좋음을 이제 깨달았다.
이기(理氣)와 심성정(心性情), 주공(周公)과 공자, 정주(程朱)와 장재(張載),
그들의 도가 달과 태양처럼 밝고, 그들의 말이 실낱같이 상세하네.
이것이 그들의 문장과 언사가 만고불멸하는 이유겠지.”

1810년(78세, 순조 10년)
속자서(續自著)」를 편찬했다. 형조 참의에 임명되었으나 바로 사직하였다.
유한준은 연암(燕巖, 1737년∼1805년) 박지원과는 평생 반목하면서 멀리하였는데, 박지원이 사망한 뒤 다음과 같은 글(朴士能文集序)을 지었다.

“바야흐로 문장에 뜻을 둔 그 시절에 외람되게도 근재(近齋) 박영숙(朴永叔, 박윤원朴胤源) 및 연암(燕巖) 박미중(朴美中, 박지원朴趾源)과 친한 사이가 되었는데, 모두 젊은 시절의 일이다. 영숙은 처음에 고문을 짓는데 힘써 문장에 규칙에 딱 맞았다.

중년에는 인문입도(因文入道)하여 우뚝하니 유림의 표준이 되었다. 미중은 재능이 뛰어나 그 문장이 저절로 경지를 획득하였다. 그는 규칙에 따르는 것을 부끄러워하고, 해학으로 도피하여 문장으로 유희를 삼았다. 대체로 두 사람 다 풍치가 있고 우아하며 걸출하다고 할 수 있겠다.”

1811년(79세, 순조 11년)
봄에 원자궁(元子宮)의 여속(僚屬)이 되었다. 이해 7월 28일, 사망하여 부평(富平)에 장사 지냈다.

참고문헌)
「유한준」<한국문집총간 인물연표(人物年表)>. 박경남, 「유한준 문학의 실학적 면모」, <한국실학연구> 26권, 2013. 김명호, 「박지원과 유한준」, <한국학보> 12권3호, 1986.