율곡과 계미기사(癸未記事)


율곡과 계미기사(癸未記事)

 

계미기사』는 1583년(선조 16) 1월부터 12월까지 1년간의 시정(時政)을 기록한 것으로 율곡 이이를 중심으로 동서당론에 관계된 기사를 뽑아 편찬한 책이다. 1583년은 율곡이 세상을 떠나기 바로 전 해이다. 이 글은 계미기사의 내용을 중심으로 당시 치열했던 동서 붕당간의 갈등상황을 재구성한 것이다.

1583년 1월, 선조는 율곡을 병조판서로 기용하여 병권을 맡겼다. 당시 율곡은 거듭되는 승진으로 인하여 몇 년째 과로가 누적된 상태였다. 따라서 그는 병을 이유로 사직을 청했지만 선조는 허락하지 않았다. 그 해 6월에 니탕개가 이끄는 여진족 2만여 명이 함경도 종성을 포위하는 사태가 벌어지자, 율곡은 이에 대한 대책을 다각도로 제시하였다. 우선 군사 가운데 전마(戰馬)를 바치는 자에게는 북변으로 가는 것을 면제해 주는 조치를 취하면서, 이를 임금에게 미리 아뢰지 않고 시행했다가 뒤늦게 임금에게 계(啓)를 올려 ‘황공하다’는 뜻을 표하였다. 또 임금이 변방의 일을 논의하기 위해 병조의 당상관을 불렀는데, 율곡은 내병조까지 왔다가 현기증이 일어나서 가지 않았다.
그러자 동인들로 채워져 있던 사헌부와 사간원 양사가 6월 11일에 선조에게 율곡을 파직시킬 것을 요청했다.

“군정(軍政)은 중대한 일인데 아뢰지도 않고 마음대로 행하였고, 또 예궐하여 대죄하지도 않았습니다. 아울러 부름을 받고 궐내에 왔으면서도 내조에만 들르고 끝내 지척 사이에 있는 승정원에 들려 교지를 받지도 않았습니다. 이로써 임금을 업신여긴 죄가 크니 파직을 명하기 바랍니다.”

간원들은 여러 날에 걸쳐 논박을 하면서 지속적으로 율곡을 파직해야 한다고 주장했으나 선조는 받아들이지 않았다. 그러나 율곡은 양사로부터 탄핵을 받은 터라 계속해서 사직의 상소를 올렸다. 그럴 때마다 선조는 율곡을 타이르며 사직하지 말 것을 당부했고, 영의정을 비롯한 정승들도 율곡의 사직을 반대했다. 그런 가운데 율곡은 6월 17일에 이런 상소를 올렸다.

“신은 죄를 짓고 황공하여 감히 출사를 못 하였습니다. 병권을 제 마음대로 하거나 임금을 업신여기는 일은 바로 신하로서는 사형에 해당하는 죄입니다. 지난번 대신들이 신을 위하여 각자 상소를 올리면서도 대간의 말이 지나치다고 지적하지는 않았습니다. 신이 이렇게 큰 죄를 짓고서 병조 수장의 위치에 처하여 장수들을 호령한다면, 그것이 사방에 전해졌을 때 반드시 해괴하게 여길 것이니 사면령을 내려주소서.”

그러면서 율곡은 계속해서 사직의 상소를 올렸다. 이러한 율곡의 태도에 대해 사헌부와 사간원 간관들이 다시 그의 파직을 청했다.

“이이는 자신을 반성하여 허물을 살피기에 겨를이 없어야 할 것인데도 오히려 자기가 먼저 의심하고 시기하여 분노를 깊이 품어, 여러 날 올린 상소의 내용들이 평온하지 않고 대간이 논핵한 것을 꼭 허구 날조한 것으로 돌리려 하고 있습니다. 심지어 대신들이 대간을 물리치지 않은 것을 그르게 여기고, 또 좌우와 여러 대신에게 물어 경중을 헤아려주기를 바라는 것이 마치 무슨 승부를 결정하려는 것 같았습니다.(중략)
대간이란 말을 하는 것이 직책이므로 귀에 거슬리는 말을 하면 임금이라도 그대로 들어주어야 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더구나 신하의 반열에 있는 자가 자기의 허물을 듣기를 싫어하여, 자기가 옳다고 강변하고 말을 한 대간들을 속 좁은 자들로 몰아 입을 열지 못하게 하니, 이는 매우 대간을 멸시하고 공론을 가볍게 여긴 것입니다. 파직하도록 명하소서.”

하지만 여전히 선조는 율곡을 파직하지 않겠다고 버텼다. 그러자 이번에는 홍문관이 나서서 율곡을 강력하게 비판했다.

“대간이 이이의 직을 파할 것을 청한 것은 당연한 결과이니 이이로서는 자기의 죄를 인정하고 허물을 살피기에 겨를이 없어야 할 것입니다. 그런데도 오히려 거취를 놓고 다투기 위하여 필설을 놀려 공의와 맞붙어 싸우려고 합니다. 그 첫 번째 근거로는 시론(時論)이 자기를 미워하여왔다고 하고, 두 번째는 좌우에 물어보라는 등의 애절하고 괴로운 말들로 임금의 귀를 동요시킴으로써 죄를 대간 쪽으로 돌려보내고야 말겠다는 심산입니다. 이는 바로 온 세상에 사람이 없는 것으로 보고 대간쯤은 손바닥이나 사타구니 사이에다 버려버리겠다는 생각으로 그 얼마나 공론을 무시한 처사입니까?”

홍문관까지 이렇게 강하게 율곡을 비판하고 나서자, 선조는 매우 혼란스러워했다. 결국 선조는 “그대들이 올린 글의 뜻은 알겠다.”면서 삼사의 의견을 받아들일 수밖에 없었다. 하지만 선조는 정승들에게 내린 비망기에서 율곡이 이번 일이 있기 전부터 신진 사림들과 대립하고 있었는데, 마침 율곡이 실수를 하게 되자 이 틈을 노려 기필코 그를 제거하려 했다고 쓰고 있었다. 그리고 이런 말을 덧붙였다.

“다른 공경대부들이 임금의 부름을 받고도 오지 않았던 자들이 많았지만 그들을 임금을 업신여겼다고 논한 경우는 듣지 못하였다. 그런데 왜 대간의 말이 유독 이이에 대해서만 그렇게 직설적으로 공격하는가? 그가 말[馬]을 바치게 한 일을 사전에 아뢰지 않았던 것도 허다한 사무를 집행하는 과정에서 때맞추어 아뢰지 못했던 것뿐이지, 어찌 멋대로 권세를 부리기 위하여 한 짓이었겠는가?”

선조의 이 말을 듣고 옥당 관원들이 모두 사직을 청했다. 이에 대해 선조는 사직하지 말라고 하면서도 홍문관을 맡고 있던 권덕여와 홍진을 강하게 비판했다.

“권덕여와 홍진은 일찍이 내 앞에서 이이의 충직함에 대하여 칭찬하였었는데, 소인을 그토록 찬예했던 그들 자신은 과연 어떠한 사람들인지 알 수가 없구나. 홍진 같은 별 볼 일 없는 무리야 책할 것도 없겠으나, 권덕여는 연로한 사람으로서 신진 선비들에게 붙어 다니는 것을 부끄러워하지 않다가 이제 와서는 이이를 소인으로 지목하고 나서니 그야말로 앞뒤가 뒤바뀐 자가 아닌가?”

이처럼 왕과 신하들이 언쟁을 벌이자, 영의정 박순이 우선은 율곡을 체직시키는 것이 합당하겠다는 의견을 피력하였다. 영의정 박순의 의견에 대해 선조는 다음과 같이 다소 한탄조의 비답을 내렸다.

“병조판서는 갈아야 한다. 이이는 이미 나라를 그르친 소인이 되어버렸는데 무슨 영명이라는 것이 또 있겠는가? 내 비록 어두운 임금이나 소인과 함께 일하는 것을 좋아할 리야 있겠는가? 이이야 자기 고향으로 잘 돌아가서 흰 구름 사이에 높다랗게 누워 있다 한들 그 누가 그를 얽매어둘 수 있겠는가?”

선조의 비답을 전해 듣고 사헌부와 사간원 관원들이 모두 자리를 비워버렸다. 또한 권덕여는 사직을 청하고 물러가 죄를 내리기를 기다렸다. 도승지 박근원을 필두로 한 승정원 승지들이 선조에게 양사의 관원을 모두 출사하게 하고, 권덕여도 출사하여 직무를 볼 수 있게 해달라고 했지만, 선조는 권덕여를 쉽사리 용납하지 않았다. 그런 상황에서 성혼이 이이를 대변하는 글을 올렸다.

“송(宋)의 구양수나 유지도 논핵을 당하고는 모두 글월을 올려 자신을 변명했지만 그들 역시 반드시 소인이었던 것은 아닙니다. 더구나 이이가 말한 것은 그 목적이 출사하기 위함이었고 자신을 변호하기 위함이 아니었는데도 삼사의 논의가 크게 일었고, 게다가 또 나라를 그르친 소인이라든가 방자하여 거리낌이 없다는 죄까지 뒤집어씌웠습니다. 처음은 경미한 죄였는데 거기에다 왕을 업신여긴 죄와 나라를 깔보는 죄명을 씌웠고 이제는 또 그 죄명으로 법에 의거하여 죄를 청하려고 하니, 이는 그를 꼭 죽을 땅으로 몰아놓고야 말겠다는 심산인 것입니다.”

성혼의 상소문에 관한 말을 듣고 장흥 부사 송응개가 상소하여 논박했다. 송응개는 이이와 심의겸은 같은 당인이며, 사실은 이이가 서인의 우두머리라고 했다. 그러면서 다음과 같이 원색적으로 율곡을 비판했다.

“이이는 원래 하나의 중으로서 임금과 어버이를 버리고 인륜에 죄를 지었습니다. 그는 변신하여 환속한 뒤에 권력 있는 가문의 가축이 되었던 것을 이 세상의 청의(淸議: 뜻이 높고 올바른 논의)는 용서하지 않고 있습니다. 그가 처음 높은 관청에 뽑혀 알성급제 할 때에 관청에 있는 많은 선비들은 그와 동렬이 되는 것을 수치로 여겨 사귀기를 불허했는데, 마침 심통원이 자기의 심복을 보내 앞뒤에서 분주히 소통의 길을 열어놓음으로써 비로소 행세할 수 있었습니다. 급기야 출세한 후에는 심의겸의 추천을 받아 청요직의 길이 트였으므로 그와 심복 관계를 맺어 생사를 함께하게 되었으니, 그가 일생 동안 가진 마음을 더욱 알 만합니다. 또 박순은 입을 모아 이이를 찬양하고, 성혼도 박순이 찬양하는 사람이며, 성혼 또한 심의겸과 친분이 두터운 사이입니다.”

송응개의 말을 듣고 선조는 화가 나서 말했다

. “네 말이 설사 다 옳은 말이라 하더라도 이제 와서야 말한 것은 불충이다. 너의 직위를 내놓고 물러가라.”

성혼의 상소를 듣고 사헌부 간관들도 모두 사직을 청했다. 선조는 사직하지 말라고 했지만 사헌부 관원들은 업무를 보지 않았다. 그때 정언 이주가 상소하여 이이를 비판하고, 박순과 심의겸, 성혼 등이 모두 한 패거리라고 했다. 이후 동인 중 한 명이었던 우의정 정지연이 상소를 올려 이이에 대한 조정의 의논을 중재하려 했다. 그는 병이 깊어 조정에 나오지 못하는 상황이었는데, 이이를 탄핵하는 일로 삼사와 왕이 서로 언쟁을 벌이고 동인과 서인이 나뉘어 다투는 양상이 되자, 중재에 나섰던 것이다.

그러나 정지연의 중재 노력에도 불구하고 사헌부와 사간원 관원들은 박순, 심의겸, 이이, 성혼을 한꺼번에 비판하는 글을 올렸다. 그리고 이이를 두둔하는 영의정 박순을 파직하라고 요청하자, 선조는 윤허할 수 없다고 버텼다. 이때 양사의 글을 주도한 인물은 허엽의 아들 허봉이었다. 허엽과 박순은 서로 악감정이 있었기 때문에 허봉이 양사를 충동질했던 것이다.

이러한 조정의 논쟁은 급기야 성균관 유생들에게로 번졌다. 성균관 유생 유공진 등 470명과 전라도와 황해도 유생 400여 명이 상소하여 이이와 성혼은 어진 신하라고 두둔하고 나선 것이다. 성균관 유생들에 의해 힘을 얻은 선조는 그해(1583년) 8월 28일에 이이와 박순, 성혼을 비난한 도승지 박근원은 강계로, 장흥 부사 송응개는 회령으로, 창원 부사 허봉은 종성으로 귀양 보내버렸다. 이것을 계미년에 세 명을 내쳤다고 해서 ‘계미삼찬’이라고 부른다.

세 사람을 유배 보낸 선조는 이이에 대해 자주 이런 말을 했다.

“이이는 진실로 군자이다. 이이와 같다면 당이 있는 것이 근심이 아니라 오직 당이 적을까 근심이다. 나도 주희의 말대로 이이나 성혼의 당에 들어가고 싶다.”

선조는 그런 말을 한 뒤, 1583년 9월 8일에 율곡을 이조판서에 제수하여 조정에 나오라고 했다. 율곡은 그때 파주에 머물면서 병을 치료하고 있었다. 또한 이조판서에 제수되기 사흘 전인 9월 5일엔 사직 상소를 올렸었다. 선조는 그런 율곡의 마음을 이해한다면서 이번에는 이조판서에 제수한 것이다.
율곡은 10월 22일에 궁궐로 들어와 선조를 알현하고 박근원과 승응개, 허봉 등을 유배에서 풀어줄 것을 청했다. 율곡은 박근원과 송응개는 본래 간사한 자들이지만, 허봉은 다소 가볍긴 하나 간사한 사람은 아니라는 평도 했다. 하지만 선조는 단호하게

“내 뜻이 이미 정해졌으니 경은 말할 것이 없다.”

고 거절하였다.

12월 11일에는 해주 사는 유학 박추가 김성일, 우성전, 이경률 등이 동서 분당의 주역이라고 비판하는 상소를 올렸다. 박추의 상소문을 읽고 선조는 “바른 말을 상소하여 가상히 여기는 바이다.”라는 비답을 내렸다. 이처럼 선조가 율곡의 의견을 따라 조정 인사를 단행했을 때 이미 율곡은 건강이 더욱 악화되어 조정에 나오지 못했다. 그리고 이듬해인 1584년 1월 16일, 율곡은 49세를 일기로 생을 마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