민익수(閔翼洙, 1690-1742)


민익수(閔翼洙, 1690-1742)                                  PDF Download

 

익수는 자는 사위(士衛)이고 호는 숙야재(夙夜齋)이며 본관은 여흥(驪興)이다. 관찰사 민광훈(閔光勳)의 증손으로, 할아버지는 여양부원군(驪陽府院君) 민유중(閔維重)이고, 아버지는 민진후(閔鎭厚)이며, 대사헌 민우수(閔遇洙)의 형이다.

조부 민유중은 숙종의 장인으로 인현왕후의 아버지이다. 자의대비 복상문제 때 대공설을 지지했다. 딸이 숙종의 계비가 되자 여양부원군이 되었다. 노론에 속했다. 경서에 밝아 명망이 높았다. 대사헌 민기중(閔蓍重)과 좌의정 민정중(閔鼎重)의 동생이다.

부친 민진후(1659-1720)는 호는 지재(趾齋)이고 시호 충문(忠文)이다. 숙종 계비 인현왕후의 오빠이다. 송시열(宋時烈)의 문인이다.

1681년(숙종 7) 생원이 된 뒤, 1684년 별시문과에 병과로 급제하여 승문원 정자(正字)에 등용되었다.

1697년 충청도관찰사가 되었다. 대사간·강화부유수·형조참의·한성부판윤 등을 역임하였다.

1718년 숭록대부에 올랐다. 내국제조(內局提調)로서 홍문관제학에 임명되었으나, 사양하였다. 뒤에 개성부유수를 지냈다.

공은 진사로서 세마(洗馬)의 자리에 올랐으나, 조정이 당론으로 소란스러운 것을 보고는 과거를 포기하고 동생 민우수와 함께 여강(驪江)으로 돌아가 은거하였다. 그 뒤 공조좌랑·사어(司禦) 등에 제배되었으나 관직에 나아가지 않았다.

1729년 재행(才行)으로 한덕필(韓德弼) 등과 함께 별천(別薦)에 올랐다가, 1737년 군자감정(軍資監正)에 음보(蔭補)로 기용되었다.

1740년 지평(持平)으로 대직(臺職)에 올라 그해에 장령(掌令)으로 승진하였다. 그런데 같은 해 이른바 위시사건(僞詩事件)에 연류된다.

영조 16년(1740)에 위시사건과 관련하여 영조가 김원재(金遠材)를 친히 국문하면서,

“네가 임금을 범하여 근거 없는 시(詩)를 진신(搢紳)들 사이에 전파하였는데, 이는 너 같은 어리고 미련한 사람이 지어낼 수 있는 것이 아니고 반드시 사주한 자가 있을 것이다. 사실대로 정직하게 공초하라.”

명한다.
이에 김원재가 이 시를 집에서 보관하게 된 내력을 말하길,

“그 시는 백망(白望)이 가지고 온 것으로, 어제(御製)라고 하면서 신의 집에 대한 이야기와 함께 전하여 주었는데, 또한 신의 아비가 세상에 살아 있었을 적에도 들었습니다. 성상께서 이미 이런 일이 없다고 하시니, 신이 어떻게 감히 이런 일이 있었다고 할 수 있겠습니까?”

하고 공초한다.
아울러 이 시가 알려진 경우를 밝히는데,

“신의 아비가 직접 국가에서 받은 것이 아니고 백망이 전하여 준 것이었습니다. 그래서 목릉(穆陵, 선조)께서 신의 집에 내사(內賜)한 어필(御筆)과 함께 봉함하여 보관해 두었었습니다. 그러나 당초에 다른 사람에게 전하여 보여 준 일이 없었는데, 김진옥(金鎭玉)·민익수(閔翼洙)는 지친(至親) 사이이기 때문에 보여 주었을 뿐입니다.”

라고 했다.
정조가 김원재로 하여금 위시(僞詩)를 외어서 고하게 했다.

“동국의 대현은 사계옹이고/지극한 행실은 또 서하공이 있다.

서하공의 후손에 김공이 있는데/ 충효와 학문이 조부와 같다.

마치 상(商)나라의 부열255) 이 은거한 것과 같고/

남양 땅에 제갈양이 은거한 것에 견줄 만하다.

태산 같은 높은 명성 들었으나 얼굴을 보지 못했는데/

지난밤에 갑자기 꿈속에서 만났네.

어느 때나 서로 만나 기쁨을 함께 할거나/

태평연월 누리면서 꽃밭에서 취하고 싶네.”

 

정조는 이 시가 정녕 거짓된 시라는 점을 거듭 밝히자, 김원재가 재차 말하길,

“신의 아비가 백망에게 속은 것인데 백망이 이 시를 어느 곳에서 얻었는지 신은 실로 알지 못합니다. 그리고 그 시를 주고받을 즈음에는 신의 나이가 아직 어렸었으니, 무엇으로 연유하여 그것이 거짓인 줄 알았겠습니까? 단지 신의 집에서 전하여 오는 말만 들었을 뿐인데, 신의 어미가 을사년(정조 원년) 뒤에 비로소 이 시를 민익수(閔翼洙)에게 보였었으니, 민익수를 불러 물어 보면 혹시 그 진위를 변별할 수가 있을 것입니다.”

하고 공초했다.
송인명 등이 민익수도 아울러 국문할 것을 청하였고 또 민형수(閔亨洙)가 위시(僞詩)를 깊이 믿었다는 것으로 죄를 가하려 했지만 정조가 모두 윤허하지 않았다. 이 시를 김원재 부친에게 전해주었다는 백망(白望)은 신임옥사에 관여된 인물이다. 신임옥사는 목호룡(睦虎龍)이 백망(白望)·오서종(吳瑞鍾)·정인중(鄭麟重) 등이 경종을 시해하고 이이명(李頤命)을 왕으로 추대하려는 음모를 꾸몄다고 거짓으로 고변하여 노론 4대신을 사사하게 하고 그 외 수백 명을 살해한 사건이다.

영조 16년에 위시사건이 발생하고 그 후 얼마 지나지 않은 영조 18년에 민익수가 졸하였는데, ⌈영조실록⌋18년 조의 졸기는 다음과 같다.

전 사헌부 장령 민익수(閔翼洙)가 졸하였다. 민익수는 판서 민진후의 아들로, 자신을 단속하고 행실을 닦아 능히 그 가풍을 이었으며, 신축년·임인년 이후로는 과거 공부를 그만두었다. 대직(臺職)에 천거하여 제배하였으나 고사하고 끝내 명에 응하지 아니하다가 이때에 와서 졸하니, 사람들이 모두 애석하게 여겼다.

⌈영조실록⌋ 42년 조에는 영조가

“민익수(閔翼洙)는 참으로 대가(大家)의 사람이다. 당습(黨習)에는 비록 몰두하나, 그 사람은 어질다.”

라고 평했다.
⌈고종실록⌋ 12년 조에는 이최응이

“문충공(文忠公) 민익수(閔翼洙)는 일생동안 선정신(先正臣) 김장생을 존경하고 사모하였으며 학문은 극기(克己)하는 데 주력하였습니다. 신사년(1701)과 임오년(1702)의 사화 후에는 한결같이 임금의 무함을 밝히는 데 주력하였기 때문에 조정과 선림들이 명분과 의리의 영수로 대하였습니다. 영묘조(英廟祖)의 50년 동안 의리가 해와 별처럼 빛났던 것은 사실 문충공이 논의를 제창한 힘입니다. 영원히 조천(祧遷)하지 말도록 하여 높이 보답하는 뜻을 나타내는 것이 좋을 듯합니다.”

하니 고종이 윤허하였다.
<참고문헌>
『영조실록』
『고종실록』
민족문화대백과사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