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석정(崔錫鼎, 1646-1715)- 2

최석정(崔錫鼎)-2                                                  PDF Download

최석정은 본관이 전주(全州)이고 초명은 석만(錫萬)이며 자는 여시(汝時), 여화(汝和)이고 호는 존와(存窩), 명곡(明谷)이다. 병자호란 때 주화론을 주장했던 최명길의 손자이다. 아버지는 한성좌윤 완릉군(完陵君) 최후량(崔後亮)이다. 어머니는 안헌징(安獻徵)의 딸이다. 응교 최후상(崔後尙)에게 입양되었다.

9세(1654) <시경>과 <서경>을 암송했다.

12세(1657) <주역>을 도해할 수 있는 수준에 이르러 신동으로 인정받았다. 남구만(南九萬), 이경억(李慶億)의 문인이고 박세채(朴世采)와 종유하면서 학문을 닦았다.

17세(1662) 감시(監試) 초시에 장원을 했고 21세(1666) 진사시에 장원했으며 동시에 생원시도 합격하였다.

26세(1671) 정시문과에 병과로 급제하여 승문원으로 관직 생활을 시작하였다.

30세(1675, 숙종 1년) 의정부에서 홍문록(弘文錄)을 선발한 17인 중에 최석정이 뽑혔다.

31세(1676) 응지소에서 윤휴를 비난하고 송시열, 김수항을 옹호하는 소를 올렸다. 양사와 옥당이 일제히 최석정을 멀리 귀양을 보내야 한다고 하자, 숙종이 허락하지 않다가 열여섯 차례나 아뢰어서 관직을 박탈하고 ‘문외 출송(門外出送, 문밖, 즉 한양바깥으로 쫓아 내보내라)’하라는 명을 내렸다.

34세(1680) 경신환국 이후 병조정랑, 승정원동부승지에 이르렀으나 양부모의 상을 당해 관직에서 물러났다.

39세(1685) 사학 유학생들이 이른바 <명재의서(明齋疑書)>가 이이를 모함하여 욕했다고 비난하자 최석정이 대제학으로서 윤증을 신구하는 소를 올렸다. “김성대(金盛大) 등이 윤증의 서찰 한 구절의 말을 따가지고 선현을 무욕하였다고 일러서 죄를 성토하는 글을 돌렸습니다. 그런데 윤증은 문간공 성혼의 외손자이고, 문성공 이이는 실로 성혼과는 덕을 이웃하여서 외롭지 아니합니다. 윤증이 두 분의 선현을 높여 사모한지 여러 해가 되었은즉 이제 이이를 모욕하였다는 것이 과연 이치에 가깝겠습니까? 하물며 그의 편지는 선현을 끌어다가 그의 아비의 일을 인증하려는 것에 지나지 않았으니, 어찌 일분인들 날조한 것에 근사한 말이 있었겠습니까?” 했다.

41세(1687) 부제학으로서 나양좌(羅良佐)를 구원하는 상소를 올렸다. “대로(大老: 송시열)의 상소의 말이 절박하게 윤선거(尹宣擧)를 몰아세웠으니, 문생들의 마음에 몹시 박절하게 여겨 한 번 변명해 보려고 함은 천리와 인정에 그만둘 수 없는 일입니다. 오직 말을 해가는 사이에 실로 화평한 면은 없고 거의 과격한 말이 많았으니 진실로 잘못한 것이 없지는 않습니다마는 서서히 따져보지 않고 무거운 율을 내리어 위엄과 노여움의 진동이 겹치게 되면 몰골이 수참하게 됩니다. 오도일(吳道一)에게 있어서는 생각이 있으면 반드시 주달하는 일을 한 것인데 죄를 주었으니, 이 이후로는 비록 지나친 일이 있으시더라도 다시는 말하는 사람이 없게 될 듯합니다.” 했다. 앞서 송시열이 윤선거를 책망하는 상소로 인한 파장에 대해 대신들과 의논하였는데, 우의정 이단하(李端夏)가 윤선거의 문생들의 상소를 받지 말도록 하면 좋겠다는 안을 내놓자, 최석정이 “대신이 진달한 말은 비록 진정시키려는 뜻에서 나온 것이기는 하지만 바치지도 않은 상소를 앞질러 받지 말라는 영을 내림은 과연 일의 대체에 합당한 일인지 알지 못하겠습니다.” 했다.

42세(1688) 상소하여 진계(陳戒)하고 짤막한 잠언(箴言) 6편을 올렸다. “군주의 마음은 온갖 변화의 근원이 되기 때문에 먼저 단정한 것으로 근본을 삼고, 다스리는 도는 공평한 것보다 큰 것이 없기 때문에 극을 세우는 것이 그 다음이 되며, 군주의 덕은 마음을 비워 남의 말을 받아들이는 것보다 먼저 할 것이 없기 때문에 간하는 것을 받아들이는 것이 그 다음이 되고, 진덕수업(進德修業)은 반드시 학문을 강론하는 데에 의뢰하기 때문에 학문에 항상 종사하는 것이 그 다음이 되며, 안일한 것은 군주의 큰 경계가 되기 때문에 정사에 부지런히 하는 것이 그 다음이 되고, 백성은 나라를 보유하는 근본이 되므로 나라의 흥하고 망하는 것이 매였기 때문에 백성을 무휼하는 것으로 끝을 삼는 것입니다. 했다. 숙종이 기꺼이 받아들이고 호피를 하사했다.

42세(1688) 5월에 선기옥형璿璣玉衡)을 완성했다. 현종(顯宗) 때에 이민철(李敏哲)로 하여금 혼천의(渾天儀)를 만들게 하였으나 중간에 폐지하여 사용하지 않은 지 오래 되었다. 최석정이 수리할 것을 건의해서 숙종이 이민철에게 명하여 다시 수리하게 하고 최석정으로 하여금 그 일을 감독하게 했다. 완성된 선기옥형을 희정당(熙政堂) 남쪽에 있는 제정각(齊政閣)에 두었다.

50세(1696) 이조판서로 관제를 논하는 차자를 올렸다. 그중 인재를 구하는 것으로 서얼의 폐해를 지적했다. “우리나라에서 인재를 등용하는 데에는, 오로지 문벌을 숭상하여 서울 사람을 앞세우고 시골 사람을 뒤로 미루니, 이미 어진 사람을 세우는 데에는 일정한 방도가 없다는 의리에 어그러지며, 서류(庶流)를 막는 데 이르러서는 진실로 옛 제도가 아닙니다. ……이를테면 송익필(宋翼弼)의 학술로도 포의로 마치고, 신희계(申喜季)의 문장과 우경석(禹敬錫), 유시번(柳時蕃)의 재지가 모두 그 뛰어난 재능을 펴지 못하였으니 애석함을 금할 수 있겠습니까?” 했다.

52세(1698) 숙종이 대신과 비국(備局)의 여러 신하들을 인견하였을 적에 최석정이 우의정으로 중국에서 보낸 쌀[호미胡米]로 서울의 위급함을 먼저 구제할 것을 청하자, 예조판서 신완(申琓)이 “금번에 곡식을 청한 것은 오로지 관서 지방의 백성들을 위한 것이었는데 지금 만약 서울 백성들을 먼저 구제한다면 관서 지방의 백성들이 반드시 실망할 것입니다.” 하자, 숙종이 “이는 까닭 없이 공연히 빼앗는 것이 아니다. 앞으로 마땅히 대체하여 지급할 것이다.” 하고, 본도(本道)에 다시 물어본 뒤에 그 수량(數量)을 의논하여 확정하자는 최석정의 말을 옳게 여겼다.

59세(1705) 왜인이 공작미(公作米): 공무(公貿)하는 면포의 대가로 대마도에다 바꾸어 지급하던 쌀)를 허락받는 일 때문에 떠나지 않으므로 동래 부사가 계문했는데, 최석정은 말하길, “왜인에게 공급하는 면포를 쌀로 대신 주는 것은 왜인의 간청에서 나온 것이고 당초에 약조한 것이 아니니 구습대로 번번이 주는 것은 타당하지 못한 일입니다. 그러나 교린(交隣)하는 도리는 처치를 마땅하게 하는 것이 중요합니다. 대마도의 살길은 전적으로 우리나라의 미곡에 의지하므로 전에 와서 청하였을 때에 사리에 의거하여 엄준하게 막을 줄 몰랐던 것은 아니나 허락했습니다. 그 뒤 다시 청하였을 때에도 막지 않았던 것은 실로 후의에서 나온 것인데 이제 굳게 지키고 허락하지 않는다면 왜인이 절망하여 유감을 품는 것은 형세상 반드시 그럴 것입니다. 특별히 헤아려 허락하되 수년이 넘지 않게 연한을 작정하고 그 뒤에는 다시 청하지 말도록 엄하게 약속하여 한편으로는 먼 곳 사람들의 마음을 위로하고 한편으로는 장래의 폐단을 막는 것이 마땅할 듯합니다.” 했다.

60세(1706) 영의정으로 조부(祖父) 최명길(崔鳴吉)의 일을 신원했다. “신의 조부가 화친을 주장한 의논은 스스로 본말이 있어, 정묘년의 일은 뜻이 싸움을 그치게 하는 데 있고, 병자년 봄의 일은 근심이 흔단(釁端)을 도발하는 데 있었으니, 남한산성의 일에 이르러서 어찌 그만두어도 될 일을 하였겠습니까? 그 때의 청론(淸論)이 혹은 차라리 나라를 위하여 죽는다는 의리로만 주장을 하였으나 신의 조부는 ‘명나라에 진실로 망극한 은혜가 있으나 이미 사직과 백성이 있는데 어떻게 필부의 양지(諒知)만을 변통성 없이 굳게 지키겠는가?’ 하고 명나라가 거의 망하게 된 것을 민망히 여겨 일신의 이해를 돌아보는 데 겨를이 없었으며 황폐한 땅에 조정을 세우고 잿더미에서 국력을 수습하여 안으로는 여러 가지 일을 종합하고 밖으로는 대의를 신장시키며 굴절주선하는 데 마음이 피로하고 힘이 다하였으니 인인군자(仁人君子)는 마땅히 측연(惻然)한 마음으로 그 뜻을 슬퍼했을 것입니다.” 하고, 여러 번 징병(徵兵)을 거절하고 자문(咨文)을 갖추어 중[僧]을 보내다가 북옥(北獄)에 잡혀 들어간 일 등을 나열했다.

62세(1708) 영의정으로 시무4조의 책자를 올렸다. “첫째 인족(隣族: 인징(隣徵)과 족징(族徵)으로 지방의 백성이 공금(公金)과 관곡(官穀)을 갚지 못하거나 군정(軍丁)이 도망 사망하여 군포세(軍布稅)를 내지 못할 때 이를 억지로 그 인인(隣人)에게나 일족(一族)에게 대신 징수하는 일이다.)을 혁파하여 민원(民怨)을 제거하는 것이고, 둘째 전폐(錢弊)를 교정(矯正)하여 민곤(民困)을 풀어주는 것이고, 셋째 교포(校布: 향교(鄕校)의 교생(校生)이 내는 군포(軍布)다.) 를 거두어 들여서 한민(閑民)을 처치(處置)하는 것이고, 넷째 보미(保米: 군보(軍保)로부터 거두어들이는 쌀이다.)를 제정하여서 속오군(束伍軍)을 너그럽게 하는 것이었다.”

1715년 기사(耆社: 기로소의 다른 이름)에 들어갔고, 이 해 사망하였다. <숙종실록> 41년 11월 기사에 졸기가 있다. “최석정은 성품이 바르지 못하고 공교하며 경솔하고 천박하였으나, 젊어서부터 문명이 있어 여러 서책을 널리 섭렵했는데, 스스로 경술에 가장 깊다고 하면서 주자가 편집한 <경서(經書)>를 취하여 변란(變亂)시켜 삭제하였으니, 이로써 더욱 사론에 죄를 짓게 되었다. 그리고 여러 번 태사(台司) 에 올랐으나 일을 처리함에 있어 전도되고 망령된 일이 많았다. 남구만을 스승으로 섬기면서 그의 언론을 조술하여 명분과 의리를 함부로 전도시켰다. 경인년에 시약(侍藥)을 삼가지 않았다 하여 엄지(嚴旨)를 받았는데, 임금의 권애(眷愛)가 갑자기 쇠미해져서 그 뒤부터는 교외(郊外)에 물러가 살다가 졸하니, 나이는 70세이다. 뒤에 시호(諡號)를 문정(文貞)이라 하였다.” 사관의 평이 박하다.

직업 관료의 성격이 강해 의리·명분론에 집착하지 않고 백성의 어려움과 정치적 폐단을 변통하려 했던 행정가였다. 또한 당쟁의 화를 가능한 한 줄이려고 힘썼던 정치가이기도 하였다.

『야승(野乘)』을 집대성하려고 노력하여 찬수청을 설치하게 하는 데까지 이르렀으나, 뜻을 이루지는 못하였다. 편저에 <전록통고(典錄通考)>가 있고, 저서로 <예기유편>과 <명곡집(明谷集)> 36권이 전한다.

참고자료

<국역조선왕조실록>
<명곡집(明谷集)>