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종호(金鍾昊)


김종호(金鍾昊)                                                             PDF Download

 

181874(고종 11)∼1949. 근현대의 유학자이다. 본관은 경주(慶州). 자는 윤청(允淸). 호는 패현(佩弦)으로, 익산군 고현리(古縣里: 오늘날의 이리시 기현동) 출신이다. 신라 경순왕의 후예이다.

성균관 박사로 1910년 경술국치(庚戌國恥) 후 투신하여 순직한 매하(梅下) 김근배(金根培)의 아들이며, 통정대부(通政大夫) 김현교(金顯敎)의 손자이다. 부친에게서 글을 배우다가 약재(約齋) 송병화(宋炳華), 간재(艮齋) 전우(田愚) 문하에서 성리학을 닦았으며, 시와 글에도 뛰어난 저술을 하였으며, 많은 후학을 가르쳤고, 서예에도 능하였다. 김종호의 유고는 다섯 권이 전해지는데, 이 가운데 ⌈성학십도설집(聖學十圖說集註)⌋1권과 ⌈금강산유람기(金剛山遊覽記)⌋1권이 포함되어 있다. 조선 후기의 문신·학자인 우석문(禹錫文)의 시문집인 ⌈아천집(啞川集)⌋(3권 1책, 석인본)에도 김종호의 서문이 있다.

실제로 김종호에 대한 자료는 극히 제한적이기 때문에 김종호의 부친인 김근배의 자료를 조금 보충한다. 특히 아버지 김근배는 익산을 빛낸 근현대 인물로 평가받고 있다.

김근배(金根培)는 1847(헌종 13)∼1910(융희 4). 조선후기의 유학자이며 우국열사이다. 본관은 김해(金海)이며, 자는 광원(光元), 호는 매하(梅下)로 전북 익산 출신이다. 김현교(金顯敎)의 아들이며, 수하 조옥승(曺玉承)씨에게 사사하여 시문을 닦았다. 모현동 출신으로 한때 옥구군 수호에 은거하였다. 1866년 병인양요(丙寅洋擾) 때에는 아직 약관의 나이로 의병을 모집하려는 토적의거격문(討賊義擧檄文)을 지어 올렸으며, 이듬해 성균관 박사가 되어 문명(文名)을 날렸다.

1910년 한일합방이 되자 일본 관헌을 피하여 나주, 김제, 옥구 등에 은거하면서 청장년을 모아 항일투쟁을 기획하였다. 1905년 11월에 일제가 무력으로 을사조약 강제 체결로 국권이 상실되자, 벼슬을 버리고 낙향하여 청장년에게 교육을 통한 항일독립정신을 고취시켰다. 1910년 8월에 일제의 한일합방 뒤 헌병주재 소장을 통하여 그를 회유하기 위한 은사금(恩賜金)을 보내는 등 온갖 위협과 유혹에도 불구하고 이를 거절하였다. 은사금을 받은 대표적인 사람으로는 이완용(李完用)이 15만엔(32억=대략 현재가치로 환산함), 이지용(李址鎔)이 10만엔(20억원), 이재면(李載冕): 83만엔(166억), 윤택영(尹澤榮)이 50만엔(100억), 박영효(朴泳孝)가 28만엔(56억) 등이 있다.

온갖 위협과 유혹에도 굴하지 않고 지조를 지키다가, 죽음으로써 충절을 지키겠다는 유서를 남기고 1910년 12월 13일 돌을 몸에 매고 샘에 빠져 자결하였다. 저서로는 ⌈매하유고(梅下遺稿⌋ 4권 2책이 전해지고 있다. 1963년에 건국유공자로 기미독립선언기념회에서 준 표창장과 대통령표창장을 받은 바 있으며, 1980년에 건국포장이 추서되고 1990년 애국장이 추서되었다.

⌈매하유고⌋는 김종호의 아버지이자 조선 말기의 우국지사 김근배의 시문집이다. 5권 2책으로 석인본인데, 1947년 아들 김종호가 편집하여 간행하였다. 권두에 소학규(蘇學奎)․오진영(吳震泳)․송기면(宋基冕)의 서문과 권말에 김종호의 발문이 있다. 현재 고려대학교 도서관과 영남대학교 도서관에 소장되어 있다.

권1·2에는 시(詩) 81수, 서(書) 5편, 기(記) 1편, 발(跋) 2편, 설(說) 3편, 논(論) 3편, 제문 4편, 묘표 1편, 행장 2편, 가장 1편, 서(序) 3편이 들어있다. 권3∼5는 부록으로 제문 13편, 만사 207수, 애사 2편, 찬 1편, 상량문 1편, 축문 2편, 기 1편, 행장 1편, 묘지 1편, 묘갈명 1편, 어록·유사·퇴계선생서절요목록(退溪先生書節要目錄)·가간왕복서(家間往復書)·왜적퇴거후인가제고유문(倭賊退去後因家祭告由文)·유고고성문(遺稿告成文) 등으로 구성되어 있다.

서(書)는 시사와 국가를 걱정하는 내용이 대부분이고, 경전과 처신하는 도리에 대하여 논한 것이 약간 있으며, 특히 전우(田愚)와 왕복한 것이 많다. 잡저 중의 「유서(遺書)」는 헌병소에서 보낸 사은금을 거절하고 자결하면서 자기가 죽은 뒤에 금표(金標)를 헌병소로 보내라는 내용이다. 「회석투정(懷石投井)」은 절명시(絶命詩)로서 수금(讐金)이 몸을 더럽히기 전에 죽어서 가문을 욕되게 하지 않겠다는 의지를 표현한 시이다. 「사일계서(事一契序)」는 1890년(고종 27) 김종호 등이 스승인 이학중(李學中)을 위하여 조직한 계의 서문이다.

 

최근에 전주역사박물관에는 전북지역 독립유공자 유물이 기증·기탁됐다. 전주역사박물관에 따르면, 전북지역의 자결순국자 김근배 유물 70점도 기탁되어 연구·전시·교육 자료로 활용되고 있다고 한다. 이번 유물의 기증·기탁은 광복 70주년 특별전 ‘역사를 잊은 민족에게 미래는 없다’는 특별전을 계기로 진행된 것이다. 그의 유물은 총 70점으로, 초상화 1점과 문집인 「매하유고」 2권, 벼루 및 성균관 박사 임명장, 집안에 소장하고 있던 고문서 등이다.

그의 초상화는 조선 말 대표적 초상화가인 석지(石芝) 채용신(蔡龍臣, 1850∼1941)의 작품으로, 머리카락 한 올까지 세심하게 표현하는 채용신의 필체가 고스란히 담겨있다. 채용신은 전북이 낳은 조선시대 최고의 어진화가다. 어진(御眞)은 왕의 초상을 가리킨다. 한국 근대 미술사에서 가장 뛰어난 인물화가로 평가받고 있다. 채용신은 사진처럼 정밀하고 섬세한 ‘석지필법’을 창안했고 고종 어진을 비롯한 이하응, 최익현, 최치원, 김영상 등 100여 점의 초상화를 남겼다. 또한 화조화, 산수화, 영모화 등에서도 명성을 떨쳤다.

또한 김근배와 김종호의 출생지인 익산은 전라북도 서북단에 위치하며 노령산맥의 지맥인 천호산과 미륵산이 동부에 아름다운 산세를 이루고 있다. 서북부에 함라산 줄기가 이어져 남서로 향하는 구릉과 크고 작은 하천이 비옥한 평원을 이룬다. 북으로는 금강을 경계로 충남 논산시와 부여군에 서로는 옥구평야에 남으로는 만경강을 경계로 김제평야에 접하고 있다. 호남선이 남북으로 중앙을 관통하고 익산역을 기점으로 하는 전라선과 군산선(장항선)이 동서로 통과하며. 호남고속도로는 동부를 지나 금마 진입로에 있고, 1번 국도와 23번 국도 및 10여개의 국도와 지방도 등 전국각지를 이을 수 있는 편리한 교통망이 갖추어져 있다.

익산은 서해와 옥구, 김제 평야를 어머님 품안으로 껴안고 있는 형상이다. 배가 움직이기 위해서는 물류가 유통되어야 하는 것과 같이 일맥 교통의 중심지로 자리 잡고 있기도 하다. 익산시는 전라선과 호남선, 군산선(장항선)을 잇는 교통의 중심지로 유동인구가 유난히 많고 익산 공단내에 있는 국내 최대 귀금속단지를 찾는 관광객이 해마다 늘어나고 있다.

 

[참고문헌]: 「기려수필(騎驢隨筆)」, 「대한민국독립유공인물록(大韓民國獨立有功人物錄)」(국가보훈처, 1997), 「독립운동사」7(독립운동사편찬위원회, 1976),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내고장 솜리, 전라문화의 맥과 전북인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