민주현(閔冑顯)1808∼1882


민주현(閔冑顯)                                                             PDF Download

 

1808(순조 8)∼1882(고종 19). 조선 말기의 문신․학자.

관은 여흥(驪興). 자는 치교(穉敎), 호는 사애(沙厓). 아버지는 문행(文行)이 뛰어나서 호조참판으로 추증되었고, 어머니는 울산김씨(蔚山金氏)로 김인후(金麟厚)의 후손인 김방엽(金邦燁)의 딸이다.  민주현은 1808년에 동북현 사평리집에서 2남 1녀 중 둘째 아들로 태어났다.

학문은 주로 아버지로부터 배웠으며, 송치규(宋穉圭)·안수록(安壽祿)·장헌주(張憲周)·기정진(奇正鎭)·홍직필(洪直弼) 등을 두루 사사하였다. 7살 때에 아버지로부터 「십구사략(十九史略)」을 배우기 시작하였는데, 그 때 한 번 배우면 책을 덮고 암송하는데 한 글자도 틀림이 없으므로 그의 아버지는 마음속으로 매우 기특하게 여겼다. 14세 때에는 당․송․원․명과 우리나라 여러 시인 중 좋은 시를 뽑아 시집을 엮어 그 이름을 「박동집(泊董集)」이라고 하였다.

16세 때는 「시전(詩傳)」을 읽고, 18세 때에는 「주역」을 읽었으며, 19세 때에는 관례를 행하였다. 20세 때에는 양호영(梁灝永)의 따님을 아내로 맞아 혼례를 올렸다. 21세 이후 성리서를 잠심강구하여 종제 민삼현(閔三顯)과 함께 조계사와 영봉사에서 글을 읽었다. 29세 때에는 구례 향시에 응하여 백형 민갑현(閔甲顯)과 함께 나란히 합격하였다. 그 후 송치규(宋穉圭)를 찾아가 교유하였고, 안수록(安壽錄)과 장헌주(張憲周)의 문하에 드나들며 교유하였다. 39세에 장성의 탁곡에서 기정진(奇正鎭)을 찾아뵈었는데, 민주현의 식견이 남다름을 알고 기정진이 존경하고 우러러보게 되어 도의로써 교우를 허여하였다.

40세에는 홍직필 선생을 알현하였다. 44세의 늦은 나이로 경과정시(慶科庭試)에 병과로 급제하였다. 45세(1852)에 권지승문원부정자(權知承文院副正字)로 벼슬생활을 시작하였고, 이 해에 스승인 홍직필 선생이 상을 당하여 광주 구수동에 가서 곡을 하였는데 홍직필의 장례를 집행함에 있어서 알맞게 헤아리고 예절의 규정이 곧고 치우침이 없으니 사방에서 보는 이들이 칭송하였다.

46세(1853)에는 겸춘추관기사관(兼春秋館記事官), 1854년 조경묘별검(肇慶廟別檢)을 지냈다. 그 뒤 성균관전적․사간원정언․형조좌랑․사간원헌납․사헌부집의․봉상시정(奉常寺正)․병조정랑․사간 등을 거쳤다. 64세 때 경연특진관(經筵特進官)·동지춘추관사(同知春秋館事)․병조참판, 67세에 좌승지를 역임하였다. 여러 스승을 사사하였으며 66세에 다시 임헌회(任憲晦)의 제자가 되기도 하였다.

민주현은 향촌사회에서 올바른 예법이 보급될 수 있도록 앞장섰다. 특히 신암(申巖)과 더불어 12동지회를 결성하고 상가(喪家)에 만연된 허례허식과 낭비의 폐습을 고치지 위해 향음례(鄕飮禮)를 제정, 검소하고 실용적인 상장제례(喪葬祭禮)를 보급하여 사람들로 하여금 이를 따르도록 권장하였다. 이때 저술된 「초학지남(初學指南)1권은 학동들의 교육지침서가 되었다.

민주현은 형제간에 우애가 심히 돈독하였고, 자식을 가르침에 의로운 방법으로 하였으며, 친하고 멂에 구애받지 않고 반드시 공경하고 예의를 다하였다. 행동엥 절제와 엄숙함이 따랐고 독서를 게을리 하지 않았으며 학문하는 일을 특별히 여기지 않았다. 민주현의 모습을 알 수 있는 글이 있다.

“무릇 날마다 말하고 행동하는 것이 모두 나의 분수 안에 있으니 어찌 반드시 종일토록 독서한 연후에야 학문을 한다고 하겠는가? 선비라는 자는 마땅히 제때에 학문에 힘써서 자신의 덕을 쌓고 여력이 있으면 문장을 익혀 자신의 재주에 통달해야 하니 잘 쌓이고 이미 두터우면 절로 감동하는 것이 있을 것이다. 출사(出仕)하여 임금을 섬길 때는 계책을 내고 생각을 밝혀 나라를 걱정하고 공익에 힘쓰며 항상 세상을 구제하고 백성을 윤택하게 하는 것을 뜻으로 삼아 그 뜻에 합치하지 않으면 몸을 거두어 물러나야 한다.”

이상에서 살펴본 것처럼, 민주현은 화순지방을 대표할 만한 선비이자 학자로 홍직필의 문인이며 도학과 절의가 출중하여 유림의 지표가 되는 인물이라는 평가를 받고 있다.

재직시 국방과 교화에 대한 정책을 주장하였고, 만년에는 학문을 강론하면서 후진양성에 전념하였다. 저서로 「사애문집」 6권이 전한다.

사애문집(沙厓文集)」은 조선 말기의 학자인 민주현(閔胄顯)의 시문집이다. 6권 4책으로 목활자본이다. 현재 국립중앙도서관․규장각 도서․장서각 도서․전남대학교 중앙도서관 등에 소장되어 있다. 1895년(고종 32)기우만(奇宇萬)이 편집한 것을 1933년에 간행하였다. 서문은 없고, 권말에 최익현(崔益鉉)의 발문이 있다.

권1·2에는 사부(辭賦) 1편, 시 234수가 있고, 권3에는 소 7편이 있으며, 권4에는 서(書) 50편이 있고, 권5에 잡저 13편이 있으며, 권6에는 서(序) 제2편, 기 11편, 제발(題跋) 3편, 명 제2편, 혼서 1편, 축문·제문 각 4편, 묘표 1편, 행장 제2편, 유사·묘지 각 3편이 있으며, 별책 부록에는 민주현의 인물 정보를 알 수 있는 연보·행장·묘갈명·묘지명·유사가 수록되어 있다. 사부는 「화도연명귀거래사(和陶淵明歸去來辭)」이다. 시에는 계절을 소개로 한 시, 선암사·송광사·계룡산 갑사·지리산 쌍계사 등을 소재로 한 기행시, 매화[梅]·대[竹]·국화[菊] 등을 소재로 한 영물시(詠物詩), 홍직필(洪直弼)·기정진(奇正鎭) 등 스승에게 올린 증여시, 이수광(李睟光)·이색(李穡)·권필(權韠)·김인후(金麟厚) 등 문인·학자들의 시에 대한 화운시(和韻詩), 만시(輓詩) 등이 있다.

소 가운에 「면성학정방례소(勉聖學正邦禮疏)」는 학문을 권장해 국가의 백년대계를 도모하고 인륜 도덕을 준수하자는 내용이다. 「청양병위이비완급소(請養兵威以備緩急疏)」는 국가가 무사할 때 미리 군병을 조련했다가 비상시에 대비하자는 상소문이다. 이 밖에도 과거의 폐단을 지적하고 그 시정을 요구한 「진과폐소(陣科弊疏)」와 문란해진 삼정을 바로잡아 백성의 부담을 경감하게 하자는 「삼정대책(三政對策)」 등이 있다.

잡저의 「책제(策題)」에서는 정법(政法)의 근본적 개혁을 경장(更張)이라는 용어를 사용하고, 시대의 변화에 따른 정책의 변화를 역사적 고찰을 통해 역설하고 있다. 「몽양편(蒙養篇)」은 후세 교육을 위해 만든 오륜(五倫) 해설서이다. 경서와 심성에 대한 내용으로 「대학도설(大學圖說)」과 「심전설(心田說)」이 있다. 그밖에 「단사설(丹史說)」·「학자오요(學者五要)」·「직중쇄언(直中瑣言)」·「방원도(倣原道)」·「독강목당중종기(讀綱目唐中宗記)」 등은 저자의 해박한 지식을 보여주고 있다. 「수해(睡解)」는 잠을 소재로 한 수필이다. 기(記)의 「태허사기(太虛舍記)」·「연와기(然窩記)」·「봉강서원이건기(鳳岡書院移建記)」·「문천재기(文泉齋記)」·「지헌기(芝軒記)」·「임대정기(臨對亭記)」·「효자손공정려기(孝子孫公旌閭記)」·「유쌍회정기(遊雙檜亭記)」·「즉이당기(則以堂記)」 등은 화순 지방의 문화사를 이해하는데 참고 자료가 된다.

조선 말기의 정치적·사회적 사정을 살피고 유학자의 정치 참여 의식을 이해하는데 도움이 되는 자료이다. 19세기의 호남 인물인 민주현의 개인 문집으로 당시 국내ㆍ외적으로 혼란기를 맞이하여 유학자인 저자의 해박한 지식을 읽을 수 있을 뿐 아니라 학맥과 인맥을 통해 인적 교유망을 유추해 볼 수도 있다.

 

[참고문헌]

「사애문집」,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