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면행(金勉行, 1702-1772)


김면행(金勉行, 1702-1772)                                  PDF Download

 

는 경부(敬夫)이고, 본관은 안동이다. 증조부는 여주목사를 지냈던 김수익(金壽翼)이고, 조부는 호조정랑을 지낸 김성후(金盛後)이다. 부친은 진산군수였던 김시민(金時敏)이고, 생부는 이조참판으로 추증된 김시서(金時敍, 1681-1724)이다. 김시서는 문중의 김창협과 김창흡 형제에게서 수학했다. 그는 1721년(경종 1) 증광사마시에 진사 1등으로 합격하였으나 남인이 조정의 정권을 잡고 있어서 벼슬 생활을 포기하고 은거하였다.

1755년(영조 31) 정시문과(庭試文科) 병과 2등으로 급제하여 여러 관직을 역임하고 벼슬은 참판에 이르렀다. 아들 김이정(金履正)은 1765년(영조 41) 식년사마시에 진사 3등으로 합격하였고, 1771년(영조 47) 정시문과(庭試文科) 병과(丙科) 4등으로 급제하여 승정원승지(承政院承旨)가 되었다.

영조 32년에 정언이 되고, 35년에는 책례도감(冊禮都監)에 공이 있다하여 가자(加資) 되었다. 35년에 승지에 제배되어 소임을 다 하던 중에 38년 6월에 상소문을 접수하지 않은 건으로 찬배(竄配)의 처분을 받았다.

영조가 건명문(建明門)에 나아가 가뭄을 민망히 여겨 비가 오는가를 바라보고 있었는데, 헌납 박치륭(朴致隆)이

“신이 지난번 듣건대, 용안현감 이정(李瀞)이 상소를 안고 와서 올리다가 후원(喉院, 승정원)에서 물리침을 당하자 분함을 이기지 못하고 칼을 뽑아 정원 문 밖에서 스스로 목을 찔렀다고 합니다. 엄숙하고 깨끗해야 할 궁궐 안에 이처럼 변괴의 일이 있었는데도 끝내 보고하지 않았으니, 거의 옹폐(壅蔽)하는 데 가깝습니다. 청컨대 그때의 정원에 있던 승지(承旨)는 아울러 삭직을 명하소서.”

라고 하자, 영조가 죄가 삭직에 그쳐서는 안 된다. 멀리 찬배하라고 명하였는데, 그때의 해방(該房) 승지가 김면행이었다.

 

그러나 8월에 영조는 처분이 지나쳤다고 하고, 다음해 영조 39년에 대사간에 임명한다. 이후 승지와 대사간을 교대로 역임하던 중, 영조 47년 대사간으로 재임 중에 조엄(趙曮, 1719-1777)에 관한 일로 체직 당한다.

조엄은 문장에 능하고 경사(經史)에 밝았을 뿐만 아니라 경륜(經綸)도 뛰어났던 인물이다. 경상도관찰사 재임 시 창원의 마산창(馬山倉), 밀양의 삼랑창(三浪倉) 등 조창을 설치하여 전라도에까지만 미치던 조운을 경상도 연해 지역에까지 통하게 하여 세곡 납부에 따른 종래의 민폐를 크게 줄이고 동시에 국고 수입을 증가하게 하였다. 또한 통신사로 일본에 갔을 때 대마도에서 고구마 종자를 가져오고 그 보장법(保藏法)과 재배법을 아울러 보급하여 구황의 재료로 널리 이용되게 했다. 후에 제주도에서는 그의 성을 붙여 고구마를 조저(趙藷)라고 불렀다. 고구마라는 말 자체가 그가 지은 <해사일기(海槎日記)>에서 일본인이 ‘고귀위마(古貴爲麻)’라고 부른다고 기록한 데서 유래되었다고 한다.

영조 46년(1770) 조엄이 이조판서로 있을 때 영의정 김치인(金致仁)의 천거로 특별히 평안도관찰사로 파견되어 감영의 오래된 공채(公債) 30여 만 냥을 일시에 징수하는 등 적폐(積弊)를 해소하는 수완을 발휘한다. 그러나 토호세력들의 반발로 탐학했다는 모함을 받아 곤경에 처한다.

이 건과 관련하여 영조가 대신과 비국 당상을 인견하고 조엄의 함답(緘答)을 읽도록 명하였다. 비국 당상 신회(申晦)가 말하기를, “신이 관서(關西)에서 온 사람에게 상세하게 물어보니 3자의 설은 실제로 있지 않았다고 하였습니다.”라고 대답한다.

대신(大臣) 및 여러 비국 당상들도 모두 신회의 말과 같았으나 영조가 여전히 의심스럽게 여겨 태천현감 이종영(李宗榮)과 전 의주부윤 홍억(洪檍)을 입시하도록 명하여 하문하였는데, 모두가 이런 일이 없었다고 대답한다. 또 전 서장관(書狀官) 이명빈(李命彬)을 불러다 사행(使行) 때 백성들이 정말로 눈물로서 간절히 하소연했는지의 여부를 물었는데, 이명빈 또한 울부짖는 자를 보지 못했다고 대답을 한다.

이때 김면행이

“3자의 설은 듣는 사람으로 하여금 매우 놀랍고 비참하게 합니다만 풍문은 믿을 수 없으며, 또한 마땅히 그대로 내버려 둘 수도 없으니, 청컨대 암행어사를 가려 보내어 염찰하고 사실을 조사하게 하소서.”

라고 한다. 영조는 암행어사를 보내는 것이 사체(事體)가 중대하므로 대신이 청할 바가 아니라고 책망한다. 이를 두고 정언 남주로(南柱老)가 김면행이 암행어사를 청한 것은 사체(事體)가 경솔하다고 하면서 파직을 요청하자 그대로 했는데, 조금 있다 김면행을 다시 우윤에 제배한다.

 

훗날 정조 8년에 정조가 하교하기를,

“기묘년(1759, 영조35) 책례 때의 상례(相禮)는 바로 참의 김면행(金勉行)이었는데 그의 아들 김이정(金履正)이 마침 승품(陞品)할 대상에 올랐으니 이는 우연한 일이 아니다. 아직 후임이 차출되지 않은 상례에 전 교리 김이정을 의망(擬望)하여 들이라고 분부하라.”

라고 하였다.

 

정조는 효의왕후와의 사이에 자손이 얻지 못했다. 그러다 나인 출신인 의빈성씨와의 사이에서 문효세자를 얻는다. 이때가 1782년 9월로 정조의 나이 31세 때 일이다. 정조는 문효세자가 태어난 지 만 22개월째인 1784년 7월 세자책례를 올린다. 이는 조선왕조 역사상 가장 어린 나이의 세자책봉에 해당한다. 그러나 문효세자는 5세를 일기로 세상을 떠나 조선왕조 역사상 가장 단명한 세자가 되고 말았다.

 

<참고 문헌>
⌈영조실록⌋
⌈일성록⌋
한국역대인물종합정보시스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