홍대용(洪大容)


홍대용(洪大容)                                                             PDF Download

 

대용(1731년∼1783년)은 조선시대 후기의 문신이자 실학자, 과학사상가이다. 그는 음사로 관직에 나가 영조 말년에 내직 3년, 정조가 즉위한 뒤에는 6년간의 외직 생활을 하였다. 관리로서는 크게 두각을 나타내지 못했지만, 1766년 북경 방문은 계기로 청나라의 사정과 자신이 겪은 경험을 글로 정리하여, 당시 젊은 지식들 예를 들면 박지원(朴趾源, 1737년∼1805년), 유득공(柳得恭, 1748년∼1807년), 박제가(朴齊家, 1750년∼1815년), 이서구(李書九, 1754년∼1825년) 등에게 깊은 영향을 미쳤다.

이 때문에 그는 북학파 혹은 이용후생 실학파의 선구로 평가된다. 그는 대표작이라고 할 수 있는 「의산문답(毉山問答)」과 「임하경륜(林下經綸)」을 통해서 새로운 과학사상에 대한 관심을 표하고 조선 사회의 개혁을 주장했다.

 

중국 친구 엄성(嚴誠)이 그린 홍대용
중국 친구 엄성(嚴誠)이 그린 홍대용

1731년(1세, 영조 7년)
홍대용은 충청도 천원군 수신면 장산리 수촌마을에서 홍력(洪櫟)의 장남으로 태어났다. 어머니는 청풍김씨로 군수를 지낸 김방(金枋)의 딸이다. 영의정을 지낸 김재로(金在魯)와는 6촌사이다. 홍대용의 본관은 남양(南陽)이고, 자는 덕보(德保), 호는 담헌(湛軒)과 홍지(弘之)다.

부친 홍력은 과거시험에 합격하지 못했지만 음관으로 문경현감, 영천군수, 해주목사, 나주목사 등을 역임했다. 증조할아버지 홍숙(洪璛)은 충청도관찰사, 강원도관찰사, 호조참판, 병조참판 등을 지냈다. 할아버지 홍용조(洪龍祚)는 충청도관찰사, 호조참의, 대사간 등을 지냈는데, 신임사화(辛壬士禍)로 유배를 당하기도 하였다.

 

1742년(11세, 영조 18년)
양주 석실서원(石室書院)에 가서 미호 김원행(金元行)에게 글을 배웠다.

 

1746년(15세, 영조 22년)
거문고를 배우기 시작했다. 나중에 박지원으로부터 ‘조선 거문고의 명수’라고 칭찬을 받을 정도가 되었다.

 

1751년(20세, 영조 28년)
윤증(尹拯)의 문집을 얻어 보고 윤증의 문장에 매력을 느꼈다. 회니시비(懷尼是非)와 관련하여 송시열(宋時烈)을 비판하는 입장을 취했다. 이러한 문제를 스승 김원행에게 물어보다 꾸지람을 듣기도 하였다.

 

1754년(23세, 영조 30년)
스승 김원해에게서 ⌈소학⌋을 배웠다.

 

1755년(24세, 영조 31년)
이즈음 스승 김원행의 석실서원에서 연암 박지원을 만나게 되었다. 다음 해에 석실서원에서 이재 황윤석(黃胤錫)을 만나 교류를 하였다. 황윤석은 홍대용에 대해서 ‘과거공부를 하지 않는 박학한 사람’, ‘중국 선비들과의 지속적 교유를 하는 자’, ‘기이한 서책과 문물의 소유자’, ‘음악가’등으로 평가하였다.

 

1758년(27세, 영조 34년)
부친이 나주(羅州)목사로 임명되었다. 부친을 따라가 나주에 머물렀다. 이 때 나주의 향약(鄕約)과 권무사목(勸武事目)에 대한 서문을 지었다. 또 화순 동복의 물염정(勿染亭)에 은거하는 과학자 석당 나경적(羅景績)을 찾아가 교류하였다.

부친으로부터 제작비를 받아 3년간 혼천의와 자명종을 제작하였다. 고향에 창고(籠水閣)를 지어 보관하였다.

 

1762년(30세, 영조 37년)
부친이 환곡에 관한 일로 처벌을 받아 예천(醴泉)에 정배(定配, 일정한 기간 동안 그 지역 내에서 감시를 받으며 생활함)되었다. 아울러 금고(禁錮) 5년형에 처해졌다. 부친은 이 일로 충격을 받아 금고형이 끝날 즈음에 사망하였다.

 

1765년(34세, 영조 41년)
이해 11월, 작은 아버지 홍억(洪檍)이 동지사(冬至使) 서장관(書狀官)으로 청나라의 연경(燕京, 지금의 북경)에 가게 되었다. 홍대용은 자제 군관(軍官)의 자격으로 중국에 따라갔다. 사전에 김창업(金昌業)의 ⌈노가재연행일기(老稼齋燕行日記)⌋를 탐독하였으며, 북경에 약 3개월간 머물면서 여러 가지 체험을 하였다.

 

1766년(35세, 영조 42년)
2월, 북경 천주당을 방문했다. 그곳에서 흠천감정(欽天監正) 할레르슈타인(유송령劉松齡, August von Hallerstein)과 부정(副正) 고가이슬(포우관鮑友管, Anton Gogeisl)신부를 만나 서양의 천문기술과 서학 등에 대해 필담을 나누고 서양 문물을 배웠다. 이 대화는 ⌈유포문답(劉鮑問答)⌋으로 정리하였다.

정월 7일의 기록을 보면 다음과 같은 이야기가 실려있다.

“유송령(劉松齡)의 나이는 62세, 포우관(鮑友管)의 나이는 64인데, 비록 수염과 머리털은 희었지만 건강한 얼굴빛은 어린애 같았고, 깊숙이 들어간 눈에 눈동자의 광채는 사람을 쏘는 듯하니, 벽화 속에서 보던 인물과 꼭 같았다. 모두 머리를 깎았으며, 의복과 모자는 청국 식으로 유송령은 양람정(亮藍頂)을 쓰고, 포우관은 암백정(暗白頂)을 썼다.

유송령은 3품(品), 포우관은 6품으로 모두 흠천감(欽天監)의 관직이 있었다. 두 사람 모두 중국에 들어온 지 벌써 26년이 되었으며, 수만 리의 먼 길을 항해(航海)하여, 복건(福建)에 이르러서야 비로소 육지에 내렸다 한다. 통역관 홍명복(洪命福)을 통해 ‘배우기를 원한다.’는 의사를 전하였더니, 두 사람은 모두 ‘감히 어찌……’ 하고 사양하였다.

오랫동안 얘기를 나누었으나 통역도 알아듣지 못하는 말이 많아서, 깊은 뜻은 말할 수 없었다. ‘당 안을 두루 살펴봅시다.’고 청하였더니, 유송령이 곧 일어나서 읍하고 인도해 주었다.”

홍대용은 또 항주에서 온 중국 선비 엄성(嚴誠), 반정균(潘庭筠), 육비(陸飛) 등을 만나 형제의 의를 맺고, 이들과 성리학, 역사, 풍속 등에 대해서 토론했다. 이때 엄성은 홍대용의 초상화를 그려주기도 하였다. 여름에 돌아와 그동안의 자료를 정리하여 ⌈건정동회우록(乾淨衕會友錄)⌋을 만들었다.

 

1767년(36세, 영조 43년)
귀국하였다. 중국에서의 경험을 글로 정리하였다. 중국 친구들과 나눈 필담을 ⌈건정동회우록(乾淨衕會友錄)⌋으로 엮었다. ⌈해동시선(海東詩選)⌋을 완성하여 항주의 반정균에게 보냈다.

북경여행 경험을 주제별로 정리하여 ⌈담헌연기⌋(한문본)를 만들고, 일기체 형식으로 날짜에 따라 기록한 ⌈을병연행록⌋(한글본)을 정리했다. 이러한 기록은 당시 지식인들에게 많은 영향을 미쳤다. 홍대용은 나중에 이덕무, 박제가, 박지원 등이 중국으로 떠날 때 중국 친구들에게 소개하는 편지를 써주기도 하였다.

홍대용의 ⌈담헌연기⌋는 김창업의 ⌈노가재연행일기⌋, 박지원의 ⌈열하일기⌋와 더불어 3대 연행록으로 꼽힌다. ⌈을병연행록⌋은 서유문의⌈무오연행록(戊午燕行錄)⌋과 함께 대표적인 한글 연행록으로 꼽힌다.

11월, 아버지가 돌아가셨다. 홍대용은 과거시험에 대한 미련도 버리고 벼슬길을 단념하였다.

 

1768년(37세, 영조 44년)
중국 친구 엄성(嚴誠)이 사망했다는 소식을 듣고 조문을 지어 보냈다. 중국 친구들과 주고받은 편지는 ⌈항전척독(杭傳尺牘)⌋에 정리되어 있다. 부친의 상중에⌈주해수용(籌解需用)⌋을 지었다. ⌈주해수용⌋은 그때까지의 수학 지식,
즉 산법(算法)을 체계적으로 정리한 것이다.

이 문장은 내편과 외편, 의기설(儀器說)과 약율해(樂律解)로 구성되어 있다. 우선 구구수(九九數)를 시작으로 수학의 여러 기본법을 제시하였다. 내편에는 덧셈, 뺄셈, 곱셈, 나눗셈을 비롯하여 양전법(量田法), 체적법(體積法), 면적법(面積法) 등 18개 법칙과 직각삼각형 등에 관련된 내용을 실었다. 외편에는 천지의 모습을 살펴보는 측량법을 제시하였으며, 양끝(兩極)을 측량하기 위한 방법, 땅을 측정하기 위한 방법 등을 설명했다.

의기설(儀器說, 籠水閣儀器志)에서는 용수각에 자신이 만들어 모아놓은 천문 관측기기들을 설명하였다. 약율해는 각종 율관(律管)의 크기 등을 계산해 놓은 글과 황종(黃鍾)의 변화, 우조(羽調)와 계면조(界面調)의 차이를 설명한 글 등이 실려 있다.

 

1770년(39세, 영조 46년)
부친상을 마치고 금강산 여행을 다녀왔다. 이곳에서 이송(李淞)을 만났다.

 

1772년(41세, 영조 48년)
그동안 여러 차례 과거시험에 도전하였으나 성과가 없었다. 이해 7월 스승 김원행이 사망했다. 이즈음 ⌈의산문답(毉山問答)⌋을 집필하였다. 이 저술은 그의 대표작이 되었다. 그는 이즈음 지구 자전설을 주장하였다. 그리고 경제정책의 개혁, 과거 제도 폐지, 공거제를 통한 인재 등용 등 조선사회의 개혁에도 관심을 가졌다.

사회 개혁안이 실려 있는 ⌈임하경륜(林下經綸)⌋에서 그는 이렇게 주장했다.

“우리나라는 본래부터 명분(名分)을 중히 여겼다. 양반들은 아무리 심한 곤란과 굶주림을 받더라도 팔짱 끼고 편하게 앉아 농사를 짓지 않는다. 간혹 실업에 힘써서 몸소 천한 일을 달갑게 여기는 자가 있다면 모두들 나무라고 비웃기를 노예(奴隸)처럼 무시하니, 자연 노는 백성은 많아지고 생산하는 자는 줄어든다. 이렇게 하면 재물이 어찌 궁하지 않을 수 있으며, 백성이 어찌 가난하지 않을 수 있겠는가?

과목별로 조항(條項)을 엄격히 세워야 마땅할 것이다. 그 중 사ㆍ농ㆍ공ㆍ상(士農工商)에 관계없이 놀고먹는 자에 대해서는 관(官)에서 벌칙을 마련하여 세상에 용납할 수 없도록 하여야 한다. 재능과 학식이 있다면 비록 농부(農夫)나 장사치의 자식이 조정에 들어가 앉더라도 분수에 넘칠 것이 없고, 재능과 학식이 없다면 비록 공경(公卿)의 자식이 하인으로 돌아간다 할지라도 한탄할 것이 없다. 위와 아래가 힘을 다하여 함께 그 직분을 닦는데, 부지런하고 게으름을 조사하여 상벌(賞罰)을 베풀어야 한다.”

1774년(43세, 영조 50년)
봄에 이송(李淞)과 함께 동해를 유람하여 양양(襄陽) 낙산사를 방문하였다. 음사(蔭仕, 과거를 거치지 않고 조상의 덕으로 벼슬살이하는 일)로 관직에 나갔다. 처음에 선공감 감역에 임명되었으나 사양하였다. 조정에서는 다시 돈녕부 참봉에 임명하였는데 또 사양하였다. 하지만 12월경, 세자손 정조를 보위하는 세손익위사 시직(世孫翊衛司侍直, 정8품)에 임명되자 출사하였다.

동궁에서 세손(정조)과 주고받은 문답, 강학한 내용을 ⌈계방일기(桂坊日記)⌋라는 기록으로 정리하였다. 여기에는 자신의 연행경험이나 사사로이 잡담한 내용들도 대화체로 모두 기록되어 있다. 그가 맨 처음 강연을 시작한 12월 1일 기록을 보면 다음과 같다.

세손 정조가 이렇게 물었다.

“계방(홍대용)은 바로 얼마 전에 새로 임명된 홍대용 시직(侍直)인가? 학업(學業)에 매우 독실하다는 말을 들었는데……”

경연에 같이 참석한 보덕(輔德) 한정유(韓鼎裕)가 이렇게 거들었다.

“그의 다른 점은 알 수 없으나, 다만 경학(經學)에 넉넉하며, 또 과거(科擧)에만 대응(對應)하는 선비는 아닌 줄로 아옵니다.”

다시 동궁 정조가 한정유에게 이렇게 물었다.

“어제 강론한 형기지사(形氣之私)라는 문장의 뜻을 다시 생각해 보니, 어떻던가?”

한정유는

“신(臣)이 물러나가 다시 보았는데, 어제 말씀하신 내용이 아주 타당하다고 생각합니다.”

동궁 정조는 다시 이렇게 말했다.

“계방(홍대용)은 경학(經學)하는 사람이라니, 반드시 소견이 있을 것이오. 상번(上番, 한정유를 지칭하는 듯)이 시험 삼아 어제 다룬 문제를 가지고 물어 보시오.”

세손 정조의 명을 받들어 상번이 이렇게 홍대용에게 물었다.

“⌈중용(中庸)⌋ 서문(序文) 가운데, ‘형기지사(形氣之私)’라는 ‘사(私)’와 그 밑에 ‘인욕지사(人慾之私)’라는 ‘사(私)’가 있는데, 두 사(私)자의 뜻이 같은가 다른가?”

홍대용이 이렇게 대답했다.

“신은 이 글을 읽은 지 오래되어 갑자기 기억할 수 없으나, 다만 두 사(私)자의 뜻은, 한 이치를 말한 것인 바, 달리 볼 필요가 없을 듯합니다.(즉 같은 뜻입니다.)”

이러한 답변에 대해서 정조는 이렇게 말했다.

“지금 여기에 ⌈중용(中庸)⌋이 없으니, 어찌 다 기억할 수 있을 것이오? 내 의견에 시비(是非)점이 없다는 것이 아니라, 마침 그렇게 보았기 때문에 우연히 말한 것이오. 대개 ‘형기지사(形氣之私)’라는 ‘사(私)’자의 뜻은 주리면 먹고 싶고, 추우면 입고 싶은 것처럼, 남은 그렇지 않은데 나 혼자 그러한 것이오. ‘인욕지사(人慾之私)’에 나오는 ‘사(私)’자의 뜻은, 곧 욕심에서 우러나오는 사사로운 생각인 바, ‘사람의 마음(人心)에 있어야 하는 것’을 뜻함이 아닐 것이오.

또 ‘이자(二者)는 마음속에 섞여 있다.’라는 이자(二者)와 ‘정밀함은 이 이자(二者)를 살핀다.’라는 이자(二者)와는 역시 뜻이 같지 않을 듯한데, 어떻게 생각하시오?”

이러한 정조의 물음에 한정유가 이렇게 말했다.

“계방(홍대용)에게 물러가 깊이 생각해보고, 다시 답변을 하도록 하는 것이 좋을 듯합니다.”

이러한 말에 홍대용도 이렇게 말했다.

“다시 상고해서 생각해보는 것이 타당할 듯합니다. 이다음에 만일 하문(下問)하신다면 우러러 아뢰겠습니다.”

경연에서 왕세손 정조와의 첫 대면은 이렇게 힘들게 지나갔다. 시원스럽게 답변을 하지 못한 것은 홍대용의 중용에 대한 이해가 미흡한 것도 있었지만, 정조는 당시 이미 보통 유학자들의 경전 이해 수준을 훨씬 뛰어 넘었기 때문에 경연에 처음 참석하는 젊은 관리로서는 당연히 겪는 일이기도 하였다.

 

1775년(44세, 영조 51년)
일성록⌋ 기록에 따르면, 이해 1월부터도 경연에 참가하였다. 존현각에서 겸문학 정민시, 겸사서 홍국영 등과 함께 영조와 세손인 정조를 모시고 ⌈주자서절요⌋, ⌈성학집요⌋ 등을 읽었다. 이러한 경연은 이해 4월까지 정기적으로 이루어졌으며, 11월에 1차례 이루어졌다.

 

1776년(45세, 영조 52년)
사헌부 감찰에 임명되었다. 정조가 즉위한 뒤 임금으로부터 어린 말 1필을 수여받았다. 종친부 전부(典簿)가 되었다.
이즈음 홍대용의 생각을 잘 드러내는 글로 「담헌집」 내집(內集) 3권에 실린 「어떤 사람에게 주는 편지(與人書)」가 있다.

주요 내용은 다음과 같다.

“대저 기예(技藝)란 사람에게 있어서 조그마한 기술일지라도 오히려 처음에는 부지런히 하다가 종말에는 게을리 하며, 앞에서는 큰소리로 장담하다가 뒤에 와서는 스스로 포기해 버린다면 남이 반드시 그 어리석음을 비웃으며 이르기를, ‘이 사람은 더불어 일할 수 없다.’할 것입니다.

조그마한 기술도 그러한데, 하물며 천하를 다스리는 큰 도(道)에 있어서는 어떻겠습니까? 나는 마음으로 그대를 위하여 애석하게 여기고 또 부끄럽게 여깁니다. 살펴보건대, 그대는 안으로는 성색(聲色)과 주식(酒食)에 대한 욕심이 적고, 밖으로는 과거에 합격하여 관리가 되고자 하는 욕심이나 명리(名利)에 대한 생각이 적으며, 어떠한 진귀한 물건을 좋아하여 거기에 빠지지도 않고, 늙고 병들어 그 기운을 잃는 일도 없습니다.

이 네 가지에는 사람의 타고난 마음과 성품을 잃는 것인데, 지금 그대는 이런 일이 없습니다. 그러나 나로 하여금 마음속으로 애석하게 여기게 하고 뒷공론을 하도록 함은 그 까닭이 어디에 있을까요? 그것은 알기가 어렵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다만 안락함이 독(毒)이 되었을 뿐입니다. (중략) 좋은 음식과 따뜻한 옷으로 거처를 편케 하고, 뜻에 따라 글을 보다가 뜻에 맞으면 그만두며, 왼쪽으로는 어린아이나 희롱하고 오른쪽으로는 쓸 데 없는 이야기나 한다면, 뜻이 어찌 교만하지 않겠으며, 몸이 어찌 방탕하지 않겠으며, 배움이 어찌 제멋대로 되지 않겠습니까?

아아! 안락함의 화란 독살(毒殺)보다 더 참혹하고 칼날보다 더 혹독하며 타는 불보다 더 맹렬한 것입니다. 그러므로 밟는 자는 반드시 죽고 닿는 자는 반드시 망하는 것입니다.”

1777년(46세, 정조 1년)
임금으로부터 다시 반쯤 자란 말 1필을 수여받았다. 전라도 태인현감(泰仁縣監)에 임명되었다. 조정 흥정당(興政堂)에 나가 여러 임명자들과 함께 임금을 뵈었다. 임금이 다음과 같이 말을 하였다.

 

“그대가 일찍이 계방(桂坊, 동궁의 세자 교육 담당 관리)을 역임하였는데, 직책을 옮기고 나서는 오랫동안 보이지 않더니 이제 비로소 보게 되는구나.”

임금은 다른 수여자들에게도 모두 한마디씩 건넸다. 어떤 이에게는 수령이 해야 할 일에 대해서 주의를 주기도 하였는데, 당시 수령은 칠사(七事)라고 하여 일곱가지 중요한 의무가 부여되어 있었다. 그것은 즉 농상성(農桑盛, 농업과 누에치기를 성하게 하는 일), 호구증(戶口增, 인구가 늘어나도록 하는 일), 학교흥(學校興, 지방의 향교나 서원이 흥하도록 하는 일), 군정수(軍政修, 군사와 관련 된 것을 잘 보수하고 유지하는 일), 부역균(賦役均, 백성의 부역을 균등히 하는 일), 간활식(姦猾息, 간사하고 교활한 짓을 그치도록 하는 일), 사송간(詞訟簡, 송사를 간략하게 하는 일) 등이었다. 임금은 특히 이러한 일 외에도 다스리는 법도가 많이 있으니, 성심을 다해서 일에 임하라고 주의를 주었다.

이후로 홍대용은 모두 6년간 외직의 관직생활을 하였으며, 중앙 조정으로 다시 올라오는 일은 없었다.

 

1779년(48세, 정조 3년)
이해 겨울에 경상도 영천군수에 임명되었다.

 

1783년(52세, 정조 7년)
모친의 병을 이유로 영천군수를 사직하였다.
일성록⌋ 1월 19일자에 다음과 같은 기록(영천 군수榮川郡守 홍대용을 재촉하여 내려보내라고 명함)이 있다.

○ 이조(吏曹, 관리의 임명을 담당하는 부서)가 홍대용이 부모의 병을 이유로 고을로 돌아갈 의사가 없음을 아뢴 데 대해, 임금이 다음과 같이 하교하였다.

“부모의 병이 어떠한지 모르지만 신칙하는 하교가 내렸는데 어찌 지체할 수 있겠는가. 다시 재촉하여 내려보내라.”

그러나 홍대용은 끝내 임지로 가지 않고 고향으로 돌아왔으나, 이해 10월 23일, 중풍이 악화되어 사망하였다. 청주(淸州) 구미평(龜尾坪)에 장사 지내고, 박지원(朴趾源)이 묘지명을 지었다. 친구 이송(李淞)이 묘표(墓表)를 지었다. 유족으로 부인 한산이씨(韓山李氏)와 1남 3녀를 두었다.

 

참고문헌)
「일성록」. 「담헌서」. 김경희, 「담헌서 해제」. 「계방일기(桂坊日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