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기종(朴淇鍾, 1824-1898)

 


박기종(朴淇鍾, 1824-1898)                                 PDF Download

 

박기종은 본관은 무안(務安)이고 자는 공진(公振), 호는 죽포(竹圃)이다. 감찰(監察) 혁수(赫修)의 아들이다. 처음 김상철(金相轍)에게 수학했고 홍직필(洪直弼)의 문하에서 이기설(理氣說)에 몰두하였다.

스승 홍직필은 어려서부터 재능이 뛰어났는데 7세 때 이미 문장을 지었다. 17세에는 이학(理學)에 밝아 성리학자 박윤원(朴胤源)으로부터 오도유탁(吾道有托: 올바른 도를 맡길 만함.)이라는 찬사를 받았다. 1801년(순조 1) 부모의 권유로 사마시에 응시해 초시에 합격했으나 회시에서 실패하였다. 이로부터 성리학에 전념하였다.

당시의 원로 숙유인 송환기(宋煥箕)·이직보(李直輔)·임로(任魯) 등과 연령을 초월해 교유하였다. 특히 오희상(吳熙常)과 가장 오래 교유했는데, 그로부터 유종(儒宗: 유학자의 으뜸)이라 일컬어졌다. 또한 이봉수(李鳳秀)로부터는 학문이 가장 뛰어나다는 칭찬을 받았다.

그의 학문은 궁리(窮理)를 근본으로 하고 육경(六經)은 물론 제자백가에 통달하였다. 천지음양귀신(天地陰陽鬼神)의 묘와 역대흥망치란(歷代興亡治亂)의 자취와 산천풍토인물족계(山川風土人物族系)에 이르기까지 두루 통하였다. 한원진(韓元震)의 심선악설(心善惡說)과 임성주(任聖周)의 “성선(性善)은 곧 기질(氣質)이다.”는 주장도 반대하였다.

박기종은 1861년(철종 12) 식년문과에 급제하여 승문원부정자·사간원정언·이조정랑 등을 지냈다. 1874년(고종 11) 시폐(時弊)를 논한 상소, 1882년 임오군란으로 인한 국정문란의 대책을 논한 상소, 1884년 갑신정변에 대한 대책을 논한 상소를 올렸다. 내용들은 위정척사(衛正斥邪)의 관점을 기반으로 한다.

1890년 일본세력이 횡행함에 분을 참지 못하여 치사(致仕, 관직을 사직함)하였다. 1894년 동학혁명이 일어나자 진압에 힘썼다. 1895년 을미사변으로 단발령이 내리자 결연히 의병의 뜻을 품었으나 병고로 이루지 못하였다. 저서로는 『죽포집』이 있다.

죽포집은 10권 4책으로 된 목활자본이다. 1912년 동문 송영술(宋榮述)·고태주(高兌柱) 및 동족 우상(禹相)·홍상(洪相)·기룡(淇龍) 등이 편집하여 간행했다. 권두에 기우만(奇宇萬)의 서문이 있고 권말에 사종질(四從姪) 순상(舜相), 사위 오근후(吳根厚), 족질 임상(琳相) 등의 발문과 나경성(羅經成)의 후서가 있다.

소의 「갑술봉소(甲戌封疏)」는 1874년(고종 11)에 사헌부장령으로 당시의 시폐(時弊)를 지적하여 올린 것이다. 「임오봉소」는 임오군란으로 인한 국난을 6가지 조목으로 나누어 올린 글이다. 「갑신봉소」는 갑신정변 때의 정황을 적고 그 대책을 강구한 내용 등이다. 당시의 정세나 사회상을 파악하는 데 좋은 자료들이다.

서(書)는 일반적인 문집처럼 경의(經義)를 논한 것이 아니라 당시 정치·사회상의 문제점을 논한 것이 대부분이기 때문에 사료적 가치가 높다.

잡저에는 『삼국지』에서 지금까지 논란거리가 되어온 인물의 평이나 주요 사건에 대한 시비를 나름대로 평한 「독삼국지(讀三國志)」와 벼슬에 있으면서 올린 서계(書啓)·관문(關文)·보장(報狀)과 일반 백성에게 내린 통문 등이 실려 있다.

금잡기(禁雜技)」는 잡기에 대한 폐해를 7가지로 나누어 설명한 흥미 있는 내용이다.

 

<참고문헌>

죽포집(竹圃集)』
한국민족문화대백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