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재규(鄭載圭, 1843-1911)


 

정재규(鄭載圭, 1843-1911)                                  PDF Download

 

정재규의 <노백헌집>
정재규의 <노백헌집>

 

재규(鄭載圭, 1843-1911)는 조선시대 말기의 유학자로 경상도 합천 삼가현에서 출생하였다. 전주에서 활동한 유학자 기정진의 제자가 되어 주리론(主理論)을 계승하였다. 그는 유교 부흥을 자신의 임무로 삼고 후학 양성에 전념하였는데, 특히 나라가 망국으로 치닫는 상황에서 성리학의 가르침을 버리지 않고 그것으로 세상을 구하고자 하였다.

1843년(1세, 헌종 9년) 11월 11일에 삼가현 물계리(勿溪里)에서 태어났다. 본관은 초계(草溪, 지금의 경상남도 합천군 삼가면)이며, 자는 영오(英五), 후윤(厚允)이고, 호는 노백헌(老柏軒), 애산(艾山), 청계(淸溪) 등을 사용하였다. 정방훈(鄭邦勳)의 아들이다.

1850년(5세, 철종 1년)에 서당에 다니면서 글을 배웠다. 다음해부터 ⌈논어⌋, ⌈맹자⌋ 등 사서(四書)와⌈소학⌋을 읽기 시작했다. 16세(1858년) 때 여양진씨(驪陽陳氏)를 부인으로 맞이하였다.

1860년(18세, 철종 11년), 개화를 반대하고 위정척사론을 주장하였다. 당시 김홍집(金弘集)이 청나라 황준헌(黃遵憲)의 『조선책략(朝鮮策略)』을 근거로 개화를 주장하자 적극 반대하였다.

1864년(22세, 고종 1년), 주위 사람들의 소개로 400리나 멀리 떨어져있는 장성 하사리의 기정진(奇正鎭, 1798-1876)을 찾아갔다. 당시 기정진은 67세의 나이로 학문적으로 완숙한 시기였다. 정재규는 그의 가르침을 받기로 하고, 다음해 귀향하여 소학과 사서를 읽으며 학문에 정진하였다.

1867년(25세, 고종 4년), 겨울에 달성에서 거행된 향시에 응시하였다. 대과 시험을 볼 때 숙부와 친분이 있던 정승 정병시가 한번 보고자 하였다. 숙부의 부탁으로 그를 만나고 고향으로 내려왔으나 이때부터 나라일이 무언가 잘못되고 있음을 알게 되었다.

1870년(28세, 고종 7년), 과거시험 공부를 중지하였다. 이후 스승이 사망할 때(1879년)까지 성리학 공부에 전념하였다. 전해인 1869년 2월에는 진주와 사천, 통영 등지를 여행하고 이순신을 모신 충무사(忠武祠)에 참배하였다.

1873년(31세, 고종 10년) 5월 부친상을 당하였다. 부친이 돌아가시기 직전에 오랫동안 병수발을 하였다. 그로 인해 잠을 못자고 먹는 것도 부족하여 상을 당했을 때는 기절할 정도였다. 엄격하게 상례를 집행하고 3년 동안 부인을 보지 않았다. 이렇듯 그는 항상 예를 강조하고 실천을 중시했다. 그는 “주자가 평소에 논한 것이 매우 많은데, 마땅히 그대로 이행해야한다. 망령되게 자기 견해를 함부로 만들어서는 안 된다.”고 주장하고, 예를 모르면 선비가 아니며, 예를 알고 익힌 뒤에야 심안(心眼)이 분명해지고, 입신(立身)할 수 있다고 하였다.

1876년(34세, 고종 13년) 4월 스승 기정진을 찾아가 뵈었다. 전해에 전해 받은 스승의 『납량사의(納凉私議)』를 주위 사람들에게 강의하였다. 12월에 황매산 아래로 이사하였다. 이후로도 정재규는 생활이 어려워 수시로 이사를 하였다. 당시 그의 집안 사정은 몹시 궁핍하였다. 흉년까지 겹쳤으나 찾아오는 손님들은 많아 소금이나 나물로 대접하였다.

1877년(35세, 고종 14년), 다시 스승이 사는 곳을 방문하여, 기질성(氣質性), 인물성(人物性), 명덕(明德) 등에 대한 문답을 나누었다. 5월에 부인 진씨가 사망했다. 큰비가 내리고 전염의 두려움 때문에 주위 친척들이 한사람도 오지 않았다. 혼자서 부어오른 시신을 수습하고 장례를 치렀다. 겨울에 다시 방동(芳洞)으로 이사를 하였다. 다음해 5월, 밀양박씨(密陽朴氏)를 부인으로 맞이했다.

1879년(37세, 고종 16년) 정월에 사촌 동생 정면규(鄭冕圭), 제자 권운환 등과 함께 스승 기정진을 찾아갔다. 김대곡(金大谷)·정일신(鄭日新), 조성가(趙性家) 등 제자들과 함께『외필(猥筆)』을 받아서 읽었다. 기정진은 그동안 감추어두었던 자신의 글을 이때 처음으로 제자들에게 보여주었다. 『외필』은 율곡 이이의 견해에서는 다소 벗어나 리를 매우 강조한 것으로 이후 율곡을 따른 학자들로부터 많은 비판을 받았다. 정재규는 이러한 스승의 학설에 대해서 초지일관하여 지지를 표하였다. 이해 말에 스승 기정진이 사망하였다.

1889년(47세, 고종 26년) 들에 굶어죽은 시체가 가득했다. 관직에 있는 지인에게 임금의 은혜를 펴고, 백성의 어려움을 불쌍히 여기도록 훈계의 편지를 보냈다. 이 해에 어머니가 별세하여 부친의 상례와 똑같이 하였다.

1892년(50세, 고종 29년) 아들이 태어났다. 5월에 최계남, 김산석, 정면규 등에게 『태극도설』과 『외필』을 강론하였다. 8월에 『남명집(南冥集)』을 교감하였다. 다음해(1893년) 봄에 호남을 유람하고, 가을에는 경모정(敬慕亭)에서 『대학』을 강론하였다.

1894년(52세, 고종 31년), 봄에 동학교도들의 숫자가 늘어나 우매한 사람들이 날로 빠져들었다. 정재규는 사람들이 거기에 빠져들지 않도록 유도하고 행동을 조심하여 사람들 스스로가 느낄 수 있도록 하였다. 김홍집 내각에서 군국기무처(軍國機務處)라는 임시 합의기관을 설치하고 행정제도, 사법제도, 교육제도 등에 대해 각종 개혁을 추진하자, 통문(通文)을 돌리고 적극 반대했다. 그는 정통 유학을 고수하고, 천주교나 신식 학문을 적극 반대하였다. 서양의 학문이 전해지는 것에 대해서 “그것은 오랑캐나 금수가 되는 전초다. 강상과 윤리가 완전히 끊겼으며, 오천년 동안 내려오는 성현의 도리를 강론할 곳이 없다.”고 탄식하였다. 다음해(1895년) 여름 명성황후가 사망하였다. 나중에 소식을 들은 정재규는

“국모가 바깥에서 들어온 도둑에게 죽임을 당했는데, 조정의 신하는 높건 낮건 한 사람도 복수할 생각이 없으니 나라에 사람이 있다고 하겠는가?”

라며 한탄하였다.

1900년(58세, 광무 4년), 4월에 제자들과 함께 국사봉(國師峯)에 올랐다. 여름에 신안정사(新安精舍), 대원암(大源菴) 등지로 피서를 가 그곳에서 여러 제자들에게 『대학』, 『근사록』 등을 강론하였다.
1903년(61세, 광무 7년) 회갑을 맞이하였다. 정월 초하루에 자손들이 잔을 들어 장수를 빌려고 하였으나, 일찍 돌아가신 부모님을 생각하여 그치게 하고 하루 종일 즐거워하지 않았다. 여름에 『외필변』을 지었다. 조경묘(肇慶廟)의 참봉으로 임명되었으나 취임하지 않았다. 조경묘는 전주 이씨 시조와 시조비 경주 김씨의 위패를 봉안한 사당으로, 전주에 세워져 있었다.

1905년(63세, 광무 9년)에 을사조약이 체결되어 일본에게 외교권을 박탈당해 망국의 위기감이 고조되었다. 이에 정재규는 호남과 영남에 포고문을 내서 일본과 다시 담판할 것을 촉구하였다. 아울러 노성(魯城, 논산)의 궐리사(闕里祠)에서 최익현(崔益鉉)과 궐기하려고 하였으나 실패하였다.

1910년(68세, 융희 4년), 일제가 조선을 강제 점령하고, 지역의 유지들을 포섭하기 위해서 은사금을 뿌렸다. 정재규에게도 제안이 있었는데 수령을 거부하면서 이렇게 말했다. “은사라는 말 자체가 가증스럽다. 이것은 나의 항복을 강요하는 것이다. 선비는 죽음을 당할 지언정 모욕은 당할 수 없다. (중략) 차라리 내 목을 베어가라.”

1911년(69세, 일제시대) 2월 11일 전 해에 지은 노백서사(老柏書舍)에서 갑자기 병이 들었다. 다음날 지인이 찾아와 같이 술을 나누며 나라의 앞날과 유교의 쇠퇴를 걱정하면서 북받쳐 울었다. 13일 사촌동생인 정면규에게일제의 점진적인 침략 정책에 당하지 말고 조심하라는 유언을 남기고 사망하였다. 물계리의 언덕에 장사를 지냈는데, 친구와 제자들 130여명이 상복을 입고, 장례 때는 수천명이 찾아와 애도를 표했다. 1925년에 장성의 고산사에 배향되었다.
노백서사(老柏書舍) 기문에 이렇게 적혀 있다.

“어진 사람은 도덕을 잘 간직하고 있으므로 불행한 세상을 당하였을 때는 온 세상을 화기로운 봄바람처럼 구제하여 만물이 발육하게 하는데 뜻을 두고 있는 것이다. 그렇다면 세상을 등지고 궁벽한 산 속의 골짜기로 들어가 자기 혼자 지조를 지키는 것이 어찌 하고 싶은 일이었겠는가? 세상에서 아무 일도 할 수 없었던 것은 이미 수십 년전에 그 조짐이 나타나고 있었으나 선생은 그 뜻을 버리지 않고 있었던 것이다. 그리고 구름이 자욱한 창가에서 혼자 괴로워하시며 어느 곳에도 의지할 수 없었으므로 이 노백서사를 신축하는 것은 마지 못해서 하는 일이었다.”

문집으로 노백헌집(老柏軒集)이 있다. 이 문집은 1912년에 활자로 인쇄되었는데, 49권 25책, 부록 5권 2책으로 구성되어 있다. 문집에는 스승 기정진의 저작 외필(猥筆)에 대해서 논한 외필변변(猥筆辨辨은 제29권에 들어있으며, 전우(田愚, 간재)의 기정진에 대한 반박을 논박한 「납량사의기의변(納凉私議記疑辨)」·「납량사의기의추록해(納凉私議記疑追錄解)」등은 제28권에 수록되어 있다. 성리학, 유교 경전, 그리고 예에 관한 내용이 많다. 정재규와 관련된 학계의 연구는 그의 학문세계, 대학론, 남명학 계승 등과 관련하여 여러 편의 논문이 발표되어 있다.

<참고자료>
김성환, 「정재규」,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http://encykorea.aks.ac.kr/)
양홍열, 「노백헌문집」,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작자미상, 「노백헌 정재규」, 초계정씨종친회(http://m.cafe.daum.net/narajungss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