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장생(金長生)


김장생(金長生)                                                              PDF Download

 

김장생(金長生, 1548∼1631)은 조선의 학자이자 문신으로, 예조 참판을 역임한 황강공(黃岡公) 김계휘(金繼輝, 1526년∼1582년)의 아들이며, 신독재(愼獨齋) 김집(金集)의 아버지다.

구봉(龜峯) 송익필(宋翼弼)에게 사서(四書)와 『근사록(近思錄)』 등을 배웠으며, 20세 무렵에는 율곡 이이(李珥)의 문하 들어가 성리학을 배웠다. 그는 특히 예학을 깊이 연구하여 아들 김집에게 계승시켜 조선 예학을 구축하고 예학파의 태두가 되었다.

또 송시열(宋時烈), 송준길(宋浚吉), 조익(趙翼), 윤순거(尹舜擧), 윤원거(尹元擧), 최명길(崔鳴吉) 등 수많은 조선의 명사들을 배출하였으며, 『상례비요(喪禮備要)』, 『가례집람(家禮輯覽)』, 『전례문답(典禮問答)』, 『의례문해(疑禮問解)』등을 남겼다.

1548년(1세)
명종 3년, 7월 8일(음력, 이하 모두 같음), 서울 황화방(皇華坊) 정릉동(貞陵洞)에서 태어났다. 자는 희원(希元), 호는 사계(沙溪), 시호는 문원(文元)이며, 본관은 광산(光山)이다. 고향은 충청도 연산(連山, 지금의 논산)이다. 어머니 신부인(申夫人)은 우참찬을 지낸 평산신씨(平山申氏) 신영(申瑛)의 딸이다.

1549년, 김장생이 두 살 되던 해에, 부친 김계휘가 식년 문과에 을과로 합격했다. 김계휘는 사가독서(賜暇讀書)를 한 뒤, 검열, 홍문관 정자와 박사, 이조좌랑 등 요직을 역임하였다.

김계휘는 고봉(高峯) 기대승(奇大升), 율곡(栗谷) 이이(李珥) 등과 더불어 도의(道義)로 깊이 사귀면서 일세의 표상이 된 인물이다. 경세(經世)의 재간으로는 이들 중에 가장 높은 평가를 받았다. 기대승이 사망한 뒤 김계휘는 율곡과 함께 행동을 하였다. 율곡은 조정에서 항상 말하기를 “참으로 정승을 구하고자 한다면 중회(重會, 김계휘의 자)가 바로 그 사람이다”라고 하였다.(「黃岡行狀」)

1557년(10세)
부친이 김홍도(金弘度) 당으로 몰려 파직을 당했다. 당시 김홍도와 김여부(金汝孚)의 반목으로 옥사가 일어났다. 부친은 낙향하여 연산현의 벌곡 양산리에 정회당(靜會堂)을 세우고 후학들을 가르쳤다.

1558년(11세)
9월, 어머니(申夫人)이 사망하였다. 연산의 선산에 장사를 지냈다. 이즈음 부친은 반대세력의 모함으로 외지로 쫓겨나 있었다. 이 때문에 김장생은 이후 서울에 남아 할아버지와 할머니의 손에 자랐다.

 

1560년(13세)
3년상을 지내고 상복을 벗었다. 구봉(龜峯) 송익필(宋翼弼)에게 사서와「근사록(近思錄)」등을 배웠다. 송익필은 부친과 가깝게 지내던 인물이었으며 예학(禮學)에 특히 조예가 깊었다. 후에 김장생은 제자 송시열에게 다음과 같이 말한 적이 있다.

“내가 『근사록』을 구봉 선생께 배웠는데, 구봉 선생은 재지(才智)가 아주 영민하고 출중하여 글을 읽는 데 막힘이 없었다. 그래서 선생님은 다른 사람들도 모두 자신과 같은 줄 아시고 한 번 읽어주고 난 뒤에는 다시 자세하게 설명해 주지 않으셨다.

이 때문에 나는 처음에는 망연하여 마치 아무것도 배우지 않은 것 같았다. 그런데 물러 나와 정좌(靜坐)하고 보고 또 보고 하여 온갖 애를 다 썼으며, 글을 읽으면서 생각하고 생각하고서 읽기를 밤낮으로 그치지 않았다. 그런 다음에는 점차 환하게 깨우칠 수가 있었다. 그리고 천 번을 생각해 보고 백 번을 따져 본 뒤에, 그래도 분명하게 알 수 없는 다음에 선생님께 여쭈었다. 글을 읽는데 부지런히 애쓰기를 나와 같이 하는 자를 나는 아직까지 보지 못하였다.”(『사계전서』)

1561년(14세)
할아버지를 따라 근무지인 지례(知禮)에 갔다. 12월, 할아버지가 사망하여, 그 상여를 따라 연산으로 다시 돌아왔다. 부친과 함께 선영의 묘지 아래에서 살았다.

다음해 부친은 이조정랑에 복직되었으나 상중이어서 취임하지 않았다. 3년상을 마치고 관직으로 돌아가 사간(司諫)·집의(執義)·응교(應敎) 등 직책을 역임하였다. 김장생도 이즈음 부친을 따라 서울로 거처를 옮겼다.

1566년(19세)
첨지중추부사를 역임한 조대건(曺大乾)의 딸 창녕조씨(昌寧曺氏)와 결혼하였다. 부친은 이해 문과 중시에 40세의 나이로 장원 급제하여 동부승지(同副承旨)·대사헌(大司憲) 등에 임명되었다.

1567년(20세)
부친의 소개로 율곡 이이(李珥, 1537년∼1584년)의 문하에 들어가 수업하였다. 이때부터 성리학 요지를 모두 듣고 힘써 실천하였으며, 무거운 짐을 떠맡기를 자임하였다. 율곡이 해서(海西)로 돌아가자 뒤따라가서 그 문하에 머물면서 예전의 학문을 복습하고 익혔다. 또 새로 얻어들은 것은 갈고 닦았다. 그 가운데서도 김장생은 특히 예학(禮學)에 정밀하여 작고 세세한 점들을 빠짐없이 다 배웠고 크고 작은 일을 모두 실천하였다. 이에 율곡은 항상 그에 대해서 기대가 컸다.

이해 큰아들이 태어났으며, 토정(土亭) 이지함(李之菡)을 보령(保寧)으로 찾아가 면담했다.

당시 김장생은 과거에 큰 관심을 두지 않았다. 그는 “나는 기질이 우둔하고 어려서부터 배우지 못해, 과거 공부에 흥미를 가지지 못했다. 20살에 이르러 처음으로 각오를 다지고 고인의 학문에 뜻을 갖게 되었다.”(『사계전서』, 권5)고 하였다. 스스로 겸손하게 표현을 하였으나 어머니 상을 당하고 부친이 관직생활에 어려움을 겪은 것을 목격하고, 또 정치적으로 혼란한 상황을 경험하면서 그는 관직생활에 대해서 흥미를 갖지 못했다. 그는 오직 도학과 예학에만 전념하면서 젊은 시절을 보냈다.

1571년(24세)
부친이 이조참의, 예조참의 등에 임명되어 사은사(謝恩使)로 명나라에 다녀왔다. 이후 황해도·전라도 관찰사를 거쳐 공조참판·형조참판과 동지의금부사(同知義禁府事) 등을 역임하였다.

1573년(26세)
이해(선조 6년) 10월 1일, 부친의 관리능력 평가 기록이 『선조실록』에 다음과 같이 실려 있다.

“전 참의 김계휘(金繼輝)를 가선(嘉善, 종2품의 가선대부)으로 품계를 올려 경상도 관찰사로 삼았다. 영남은 땅이 크고 사람이 많아 문서가 계속 답지하였는데, 김계휘는 입으로 묻는 말에 답하면서 손으로는 쓰면서 일을 물 흐르듯 처리하였다. …… 처음 경상도에 이르렀을 때 실무를 담당하는 관리인 아전이 각지의 군부(軍簿)를 올리니 김계휘는 한 번 열람하고 치웠다. 얼마 후에 아전이 한 고을의 장부를 잃어버려 그 고을에 있는 장부를 다시 올리게 하자, 김계휘는 서슴치 않고 아전에게 붓을 잡으라고 명하고서 그 장부를 입으로 부르는데 한 글자도 착오가 없었다.

또 백성이 소첩(訴牒, 청원이나 소송하는 서류)을 올린 날짜와 이름자를 모두 암기하고 있었다. 나중에 그것을 다시 올린 자가 있으면 출두시켜 꾸짖기를, ‘너는 몇 월 며칠에 이러한 소장을 올렸는데 이제 어찌 재차 올렸느냐’하였다. 사람들은 그 말을 듣고 관찰사는 신명(神明)하여 속일 수 없다고들 하였다. 그리하여 동헌 뜰에는 미결된 백성이 없고 탁자 위에는 적체된 문서가 없어 치적(治績, 다스리는 업적)이 여러 도(道) 중에 으뜸이었다.”

 

김장생의 예학은 바로 이러한 부친의 출중한 기억력과 비상한 업무 처리 능력을 이어받아 구축된 것임을 알 수 있다.

다음해 6월, 김장생의 둘째 아들 김집이 태어났다.

1575년(28세)
큰 딸이 태어났다. 이해에 부친은 동서 분당 때 심의겸(沈義謙)과 함께 서인으로 지목되었다. 하지만 그는 당파 활동에 깊이 관여하지 않고 당쟁완화를 위해 노력했다.

다음해 김장생은 둘째 딸을 보았으나 안타깝게도 일찍 요절하였다.

 

1577년(30세)
4월, 율곡 이이가 살던 석담(石潭)을 방문하였다. 율곡이 구봉 송익필에게 보낸 편지 중에 “김희원(金希元, 김장생)이 이곳에 와 20여 일 동안 있으면서 차분히 강학(講學)을 하였는데, 그의 아버지가 불러 돌아갔다. 이로부터는 서로 도움을 주는 유익함이 없어졌다.”고 하였다.

6월, 우복룡(禹伏龍)을 방문하여 『근사록』, 『맹자』등을 강의하였다.

 

1578년(31세)
이조 판서 이후백(李後白)의 추천으로 창릉 참봉(昌陵 參奉)에 임명되었다. 이후백은 김장생이 “성인의 경전을 깊이 연구하였고 옛날의 훈계를 독신하였다.(沈潛聖經 篤信古訓)”는 내용으로 추천을 하였다. 그러나 1년이 못되어서 그 직책에서 교체되어 물러났다.

1580년(33세)
셋째 아들이 출생했다. 5월, 우계(牛溪) 성혼(成渾)이 거처하는 파산(坡山)을 방문하였다. 우계에 대해서 김장생은 나중에 송시열에게 다음과 같이 말한 적이 있다.

“내가 율곡 선생에 대해서는 마음속으로 기뻐하고 성심으로 복종하면서 항상 더할 수 없이 훌륭한 분이라고 여겼다. 그러나 우계(성혼) 선생에 대해서는 약간 차이를 두고 낮게 보지 않을 수가 없었다. 그래서 우계 선생의 문하에 있는 사람들이 자못 불평하였다. 그 뒤에 오랫동안 왕래하면서 그분의 기상을 보고 의론을 들어 본 다음에야 율곡 선생께서 그 분과 도의(道義)의 교분을 맺은 것이 이유가 있다는 것을 알았다.”

김장생은 스승인 구봉(龜峯) 송익필 선생에게 편지를 올려 인심도심(人心道心)을 논했다. 이러한 편지에 대해서 송익필은 다음과 같이 답하였다.

“학력(學力)이 증진되었다는 것을 알고는 몹시 탄복하였네. 다른 사람이 이론(異論)을 제기하자, 감히 자신의 견해를 옳다고 고집하지 않았으니, 이것은 재주가 크고 학문이 깊은 사람으로서는 그렇게 하기가 어려운 것인바, 참으로 그 태도가 몹시도 아름답네.”

 

1581년(34세)
가을, 잘못 기록된 종계(宗系)를 고쳐달라고 청하기 위해서 중국에 주청사(奏請使)로 가는 부친을 따라 중국에 가게 되었다. 이를 위해 편의상 직책이 돈녕부(敦寧府) 참봉(參奉)으로 변경되었다. 율곡은 중국으로 가는 김장생에게 시를 지어주고 전별하였다.

이해 11월 셋째 딸이 출생하였다.

 

1582년(35세)
4월 부친과 함께 중국에서 귀국하였다. 이 사행(使行)길은 왕복한 거리가 거의 1만 리 정도나 되었는데, 김장생은 아버지를 모시고 가면서 봉양함에 정성과 효성이 간절하고도 지극하였다고 한다.

귀국한 직후, 부친은 21일에 갑자기 사망하였다. 부친은 이때, 특진관(特進官, 예조참판)으로 경연(經筵)에 입시(入侍)하였다가 갑작스럽게 풍(風, 오늘날의 뇌졸중 혹은 뇌출혈)을 맞아 수레에 실려서 집으로 돌아왔다.

임금이 즉각 내시(內侍, 궁궐의 의사)를 보내 병세를 물었으며, 호피(虎皮)를 하사하였다. 나중에 선조 임금은 김계휘의 부음을 듣고 시신을 담는 관을 하사하였다.

율곡은 당시 경연의 자리에서 다음과 같이 발언을 하였다. “김계휘(金繼輝)는 현명하였는데도 크게 쓰이지 못하였습니다. 그러니 관직을 추증해 주고 상장(喪葬)을 돌보아 주는 것이 마땅합니다.”

임금은 이러한 건의를 듣고 대신들에게 물은 다음, 관원에게 장례 치르는 것을 돌보아 주라고 명령하고 김계휘를 이조판서에 추증하였다.

6월에, 부친을 고향인 연산 거정리(居正里)에 장사 지내고 부친의 묘 아래에서 시묘살이를 하였다.

선조실록 15년 4월 1일자로 부친의 졸기(卒記)가 다음과 같이 실렸다.

“예조참판 김계휘(金繼輝)가 졸(卒)하였다. 김계휘는 타고난 자품이 영특하고 마음가짐이 화평하였다. 세세한 행동과 예절에 얽매이지 아니하고 원대한 포부를 지녔기 때문에 수련을 쌓은 공부(道學)는 없었으나 소견이 고매하여 은연중 도리에 합치되었다.

총명하고 기억력이 뛰어나 전고(典故)에 숙달하였으며 인물을 알아보는데 밝았고 정사(政事)를 처리하는데 민첩하여 경국제세(經國濟世)의 재주를 지녔으므로 당시 명현(名賢)들이 모두 그에게 미치지 못한다고 스스로 인정하였다. 당대 사람들도 공보(公輔, 임금을 보필하며 정사를 다루는 대신)로 삼을 만한 재기(才器)라고 칭송하였다.

그는 가정생활이 청렴하고 검소하였으며 30년 동안 현직(顯職, 높고 중요한 직위)에 있었으나 집안 살림이 마치 평민 시절과 같았다. 젊었을 때부터 문명(文名)으로 출신하였는데 권간(權奸, 즉 윤형원 일파)이 득세하던 때를 당하여 한번도 자신을 굽히지 않았으므로 십 수년 동안 배척되었다.

선조임금이 즉위한 처음에 제일 먼저 발탁되었는데 논의가 적절하였으므로 조정이 추중하였고 임금도 특별히 총애하였다. 마침 여론이 분열되었을 때에 어느 한쪽에 동조하거나 영합하지 않았으므로 다시 정승급 벼슬에 들어가지 못했는데 사람들이 이를 애석하게 여겼다. 이때 특진관으로 임금을 모신 강연에 입시하였다가 갑자기 중풍(中風)으로 쓰러져 사람들에게 들려 집으로 돌아와 그 길로 일어나지 못했는데, 임금이 무척 애도하였고 특별히 관곽(棺槨)을 하사하여 장사지내게 하였다.

김계휘는 당파로 배척을 받았지만 그의 청렴 검소하고 관후한 덕에 사람들이 심복하였기 때문에 소인들도 감시 몹시 노하거나 헐뜯지 못하였다. 그리고 넓은 학식과 뛰어난 기억력으로 귀신처럼 잘 알아내는 데는 조정에서 제일인자로 추대하더라도 이의를 제기하는 사람이 없을 것이다. 그의 아들 김장생(金長生)은 뒤를 이어 유학(儒學)으로 세상에 명성을 드러냈다.”

 

1583년(36세)
스승 송익필과 편지로 상례(喪禮)를 논했다. 최초의 예서(禮書)인 『상례비요(喪禮備要)』를 완성했다. 이해 율곡 이이에게 할아버지의 묘갈명(墓碣銘)을 청하였다.

1584년(37세)
1월, 율곡 이이가 사망하여 곡을 하였다. 이후 스승 율곡 이이와 구봉 송익필에 대해서 매월 1일과 15일에 복(服)을 입고 곡을 하였다. 그리고 스승의 기일에 목욕재계(齋戒, 신이나 조상에게 제사를 지내기 위하여 부정을 타지 않도록 몸과 마음을 깨끗이 하며 행동을 삼감)와 주변 청소를 하고 음식을 올렸다. 이러한 것을 늙도록 그치지 않았다.

6월, 부친의 삼년상을 마치고, 순릉(順陵) 참봉(參奉)에 임명되었다. 곧 평시서(平市署) 봉사(奉事)로 승진되었다.

 

1586년(39세)
봄, 이발(李潑) 등이 율곡 이이, 우계 성혼, 송강(松江) 정철(鄭澈) 등을 모함하자 벼슬을 그만두었다. 4월에 부인상을 당하였다.

다음해 사포서 별제 등에 임명되었으나 사직하였다.

 

1588년(41세)
동몽교관(童蒙敎官)에 임명되었다. 김수언(金秀彥)의 딸 순천김씨(順天金氏)를 부실(副室, 첩)로 맞이했다.

다음해 여름, 중봉(重峯) 조헌(趙憲)이 귀양 가는 것을 전송하였다. 10월, 고양(高陽)에 있는 정철을 찾아보았다.

 

1590년(43세)
12월, 동례원(通禮院) 인의(引儀)에 임명되었다. 송강 정철과 당시 상황을 논하였다.

다음해 아들 김집(金集)이 사마시(司馬試)에 합격하여 진사가 되었다. 봄에 정산(定山) 현감(縣監)에 임명되었다. 부임길에 파산(坡山)으로 우계 성혼을 방문하였다.

1592년(45세)
이해 임진왜란이 발생하였다. 차남 김집(金集)이 좌의정 유홍(兪泓)의 딸을 부인으로 맞이하였다. 5월, 큰아들 김은(金櫽)과 며느리가 일본군에게 해를 당한 소식을 들었다.

다음해 12월, 송강 정철이 사망하였다.

 

1596년(49세)
4월, 임기를 마치고 고향 연산으로 돌아왔다. 12월, 호조 정랑에 임명되었다.

1597년(50세)
봄, 명을 받고 호남에서 군량을 조달했다. 겨울에, 파직되어 연산으로 돌아왔다. 해서(海西)의 황주(黃州)와 봉산(鳳山) 지방에 임시 거처를 찾아 거주하였다. 이때 제자들과 함께 글을 읽으니 멀리서 배우러 오는 자들이 많았다. 12월, 단양군수(丹陽郡守)에 임명되었으나 나가지 않았다. 율곡선생(栗谷先生)의 행장(行狀)을 지었다.

이 즈음 스승인 구봉 송익필이 모함을 당하여 쫓기는 신세가 되어 피신처를 제공하였다.

 

1598년(51세)
4월, 군자감(軍資監) 첨정(僉正)과 호조 정랑에 제수되었으나 나아가지 않았다. 6월, 우계 성혼이 사망하였다. 가을, 『근사록석의(近思錄釋疑)』를 완성하였다. 9월, 남양부사(南陽府使)에 임명되었으나 빠른 승진이라 하여 취소되었다.

 

1599년(52세)
이해 1, 2월에 양근군수(楊根郡守), 익위사(翊衛司) 익위(翊衛) 등에 차례로 임명되었으나 사양했다. 6월, 안성군수(安城郡守)에 임명되었다. 7월, 예학에 밝아 김장생에게 큰 영향을 미친 구봉 송익필이 사망하였다. 김장생은 장례와 제사의 모든 것을 자신이 친히 주관하여 정성을 다하였다.

9월, 『가례집람(家禮輯覽)』을 완성하였다. 이 서적은 임진왜란 직후에 흐트러진 정치적 기강과 사회 윤리를 바로 잡고, 예의 보급에 의한 질서 재건에 크게 기여한 바가 있었다.

 

1601년(54세)
1월, 『소학집주발(小學集註跋)』을 지었다. 9월, 조정의 명령을 받고 서울로 갔다. 10월, 종친부(宗親府) 전첨(典籤)에 제수되었다.

다음해 봄에 벼슬을 그만두고 연산으로 돌아갔다. 8월, 양성당(養性堂)을 지었다. 부친의 가장(家狀)을 완성하였다.

1603년(56세)
5월, 익산군수(益山 郡守)에 임명되었다.

1605년(58세)
아들 김반(金槃)이 사마시에 합격했다. 10월, 벼슬을 그만두고 연산으로 돌아왔다.

다음해 신흠(申欽, 1566∼1628)이 종묘를 중건할 때, 고례(古禮)에 관해 묻자 편지로 답하였다. 신흠은 조선의 4대 문장가중 한 사람이며 인조 때 영의정을 지낸 인물로, 김장생의 외사촌이 된다.

1609년(62세)
이해 광해군이 등극하였다. 8월, 회양부사(淮陽 府使)에 임명되어 11월에 부임하였다. 다음해 10월, 철원부사(鐵原 府使)로 옮겨 임명되었다.

1613년(66세)
5월, 아버지 김계휘의 첩에서 난 아우들(庶弟)이 계축옥사(癸丑獄事)에 연루되자 벼슬을 그만두고 연산으로 돌아갔다. 정권 담당자들(大北派)은 김장생을 연루시켜 제거하려고 하였으나 피의자들은 죽음을 앞에 두고서도 김장생과의 연루를 극구 부인하여 위기를 넘겼다. 이후 10여년간 두문불출하면서 오직 경서를 연구하고 후학을 가르쳤으며 『상례비요(喪禮備要)』를 간행하였다. 이 당시 그에게서 배운 제자들은 그 아들인 김집을 비롯해 송시열, 송준길, 이유태(李惟泰) 등이 있다.

1617년(70세)
정홍명(鄭弘溟)의 요청으로 송강행록(松江行錄)을 지었다. 3월, 송이창(宋爾昌)과 함께 영동(永同) 지방을 유람하였다. 다음해 경서 연구 자료를 모아『경서변의(經書辨疑)』를 완성하였다.

1623년(76세)
1월, 「사단칠정변(四端七情辨)」을 지었다.

4월, 인조반정(仁祖反正)이 서인 일파가 광해군과 대북파 관료들을 몰아내고 능양군 이종을 옹립하였다. 이에 그동안 핍박을 받던 김장생은 다시 정치적 활동을 할 수 있게 되었다. 그의 많은 지인, 제자들이 새로운 정권의 핵심세력이 되었다.

5월, 「사묘친제시축문(私廟親祭時祝文)」의 칭호에 대하여 상소하였다. 6월, 성균관 사업에 임명되어 원자(元子, 아직 왕세자에 책봉되지 않은 임금의 맏아들)를 보도(輔導, 보살피고 지도)하였다.

1624년(77세)
2월, 이괄(李适)의 난으로 공주(公州)에 피난온 임금을 일신역(日新驛)에서 맞이하였다. 3월, 경연에 입시(참석)하였다. 상의원 정에 임명되고 사업(司業)을 겸하였으며, 집의에 임명되었다. ‘사업(司僕)’은 당시 인조임금이 김장생을 위해서 성균관의 종 4품직으로 특별히 신설한 것으로 성균관의 유생들을 지도하는 직책이었다.

6월, 사직소와 함께 13條의 사항을 올렸다.

이정구(李廷龜) 등과 사친추숭(私親追崇)과 전례(典禮)에 대해 논의하였는데, 이때 논의한 왕복 서간등을 묶어 『전례문답(典禮問答)』이라 하였다.

8월, 특명으로 통정대부(通政大夫) 공조참의(工曹參議)로 승진하였다. 10월, 원자(元子) 강학관(講學官)을 겸하였다. 임금은 김장생을 이러한 직책에 임명하여 왕세자 교육을 맡게 하고 필요시 왕을 직접 접견할 수 있게 하였다.

김장생은 이즈음 임금에게 수차례 상소문을 올려서 정치의 요체와 방책을 제시하였다. 예를 들면 군주는 수많은 변화의 근본임으로, 대본(大本)을 세우며 국가 운영의 기본 방침을 잘 존중하여 효와 예를 다함으로써 여러 신하의 본(本)이 될 것을 요청하였다. 또 친히 정치에 참여하여 민폐를 혁신하고 군정(軍政)을 닦고 궁궐 안의 기강을 바로 잡도록 요구하였다. 특히 소학(小學)을 중시하고 효행과 예행을 솔선수범하여 예를 바탕으로 한 사회 질서의 재건을 시대적인 과업으로 제시하였다.

1625년(78세)
특명으로 가선대부(嘉善大夫)가 되었으며, 동지중추부사(同知中樞府事)에 임명되었다. 동문(同門)인 정엽(鄭曄), 심종직(沈宗直) 등과 함께 스승 송익필의 신원을 위해서 상소하였다.

다음해 1월, 외가 쪽 친척인 신흠에게 편지하여 계운궁(啓運宮) 상례에 대해서 논하였다. 3월, 황산(黃山)서원을 세웠다.

1627년(80세)

1월, 정묘호란(丁卯胡亂)이 일어나 후금 만주족이 침입해왔다. 양
(兩湖, 호서와 호남)호소사(號召使)에 임명되어 국가적인 위기에 대응하였다. 김장생은 의병모집과 군량조달의 막중한 임무를 부여받고 2월에 공주에서 왕세자를 맞이하여 호위하였으며 3월에 강화도 행재소(行在所)에 나아갔다.

1628년(81세)
9월, 형조 참판에 임명되었다. 그러나 사양하고 고향으로 돌아가 제자들과 학문을 연구하고 강론을 계속하였다. 다음해 9월, 정엽(鄭曄)의 「근사록석의(近思錄釋疑)」의 서문을 지었다.

1630년(83세)
가을, 제자 송시열과 격치(格致), 사칠(四七) 등을 논하였다. 「독서강의서(讀書講義序)」를 지었다.


1631년
(84세)
8월, 사망하였다. 10월, 진잠현(鎭岑縣, 지금의 대전광역시 유성구) 성북리(城北里)에 장사를 지내다. 인조 임금은 김장생의 사망 소식을 듣자, 제사와 부의(賻儀)를 하사하고 이조 판서에 추증하였다.

인조실록』 9년 8월 9일자에 다음과 같은 ‘졸기(卒記)’가 실렸다.

“전 형조 참판 김장생(金長生)이 죽었다. …… 상(上, 인조임금)이 반정(反正)하여 덕이 높은 이를 구하였는데, 장령으로 부름을 받고 올라 왔다. 이때 상이 사묘(私廟, 방계傍系에서 왕위에 오른 경우 그 친족, 즉 종묘에 들어갈 수 없는 왕족의 사당.)에 직접 제사를 지내려 하는데, 예관(禮官)이 ‘상이 친손자로 할아버지의 왕통을 이은 이상 두 아버지를 모신다는 혐의가 없으니 축사(祝辭)에 마땅히 아버지[考]로 일컫고 아들로 일컬어야 한다.’고 하였다.

이러한 의견에 대하여 김장생이 수천 마디의 말로 상소를 올려 그 설을 공격하여 깨뜨렸다. 이는 모두 선유(先儒)의 정론(定論)에 근거한 것이었다. 그러다가 추숭(追崇)하자는 논의가 일어나자 김장생이 여러 차례 소를 올려 옳지 않음을 힘껏 말하였으나 그의 의견은 쓰이지 않았다. 김장생은 조정에 있기를 즐겁게 여기지 않은데다가 나이도 많았으므로 자청하여 연산(連山)으로 돌아갔다. 이에 그를 형조 참판으로 다시 불렀으나 김장생은 사양하고 오지 않았다. 집에서 병으로 죽으니 나이 84세였으며, 학자들이 사계(沙溪) 선생이라고 불렀다.”

1634년에 그를 기리는 둔암서원(遯巖書院)이 설립되었다. 1636년에 이조 판서에 추증되었다가 1657년에 영의정(領議政)에 증직되고, ‘문원(文元)’이라는 시호를 받았다. 1717년에 문묘에 종사(從祀)되었다.

<참고자료>

『沙溪全書』

「김장생」, <한국문집총간 인물연표>

선병삼, 「율곡학인물들-김장생」, <율곡학 프로젝트>

한기범, 『沙溪 金長生과 愼獨齋 金集의 禮學思想 硏究』, 충남대학교 대학원 박사학위논문, 199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