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징후(崔徵厚, 미상-1715)

최징후(崔徵厚)                                                       PDF Download

최징후는 자가 성중(成仲)이고 호는 매봉(梅峯)으로 권상하의 문하에서 공부했다. 전거마다 명단이 조금씩 다르지만 한원진, 이간, 윤봉구, 채지홍, 현상벽, 성만징, 한홍조 등과 함께 강문팔학사(江門八學士)라로 불린다.

1705년 한원진과 함께 오서산(烏棲山) 정암사(淨巖寺)에서 독서하고 강학했다.

1709년 3월, 호락논쟁의 발단에 중요한 매개 역할을 한다. 한원진이 1705년에 <동지에게 알리는 글示同志說>을 썼고, 이후 <율곡 선생 별집에 의견을 덧붙임栗谷別集付籖>, <본연지성과 기질지성에 대한 논설本然之性氣質之性說>, 〈인심도심에 대한 논설人心道心說>, 퇴계 선생 문집의 의문점에 대한 해설退溪集箚疑>을 잇달아 내놓는다. 이를 통해 최징후와 한원진 사이에 활발한 토론이 벌어졌다.

1707년 권상하의 제자가 된 이간은 한원진의 견해를 접하고 자신과 절친했던 최징후에게 편지를 보낸다. “저는 덕소(한원진)와는 아직 알지 못합니다. 친구들에게 듣자니 대개 우리 문하에서 의지할 만한 인물이라고 했습니다. 그래서 평소 그를 흠모하여 한 번 만나보고 싶었습니다. 그러다가 지금 그가 논설한 것을 보니 제 생각과 잘 맞는 부분이 없지 않아 아주 다행입니다. 다만 위에서 언급한 세 가지 설에 대한 제 견해는 주제넘지나 않았는지 생각되니, 직접 찾아가 물어보고 싶습니다. 형이 이 뜻을 전하여 주선해 주었으면 좋겠습니다.”

1709년 4월에 이간, 한원진, 한홍조, 윤혼, 현상벽 등과 함께 홍주(洪州) 한산사(寒山寺)에서 회강했다. 앞서 이간이 보낸 편지를 받아본 한원진이 회신하길, “공거(이간) 형의 편지를 보내주시니 감사합니다. 제가 학식이 얕아 아는 바가 없는데도 여러 학형들께서 비루하다 여기지 않고 매양 의리로 판별하여 혼매한 저를 깨우쳐 주시고 또 기탄없이 의견을 주시니 정말로 큰 우정입니다. 지금 공거 형의 편지가 저의 잘못을 정밀하게 증명하셨는데 그분과 더불어 마땅한 결론에 이르고 싶은 마음 간절합니다.” 한산사 회합의 자리가 마련되었다.

1711년 한원진과 함께 홍주(洪州) 벽제산(碧蹄山)에서 회강했다.

1715년 최징후가 졸했다. 한원진이 최성중이 지은 <가례의소>에 해설을 달아 〈崔成仲家禮疏義付籖〉을 지었다. 권상하가 한원진에게 보낸 편지에 “성중(최징후)은 사우들의 기대가 매우 중하였는데 뜻밖에 이에 이르렀으니 이것이 모두 우리들 운기(運氣)의 불행이 아니겠는가. 슬프기 그지없네.” 했다.

참고자료

<남당집(南塘集)>
<한수재집(寒水齋집)>
<관봉유고(冠峯遺稿)>