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정하(申靖夏, 1681-1716)


신정하(申靖夏, 1681-1716)                                 PDF Download

 

창협의 문인이다. 김상헌의 증손자로 숙종의 묘정에 배향된 김창협은 낙론의 거목으로 도학과 문장에 출중하였는데, 신정하의 문집은 적은 편수지만 문학적 성취를 보여주는 글들이 빼곡하다. <제농암선생문(祭農巖先生文)>에서 신정하는 김창협이 범순부의 경학, 구양수의 문장, 주자의 의리(철학)를 한 몸에 지니고 있다고 평가하였는데, 스승에 대한 존경과 긍지의 소회를 충분히 살필 수 있다.

본관은 평산(平山)으로 자는 정보(正甫)이고 호는 서암(恕菴)이다. 증조부는 신준(申埈)이고 조부는 신여정(申汝挺)이며, 아버지는 영의정 신완(琓)이다. 어머니는 황해도관찰사 조원기(趙遠期)의 딸이며 신유(申瑜)에게 입양되었다.

1705년(숙종 31) 증광문과에 병과로 급제, 예문관검열·설서(說書)·부교리 등을 역임한 뒤, 1715년 헌납(獻納)으로 있을 적에 유계(兪棨)의 <가례원류(家禮源流)>를 발간하면서 발문을 쓴 정호(鄭澔)가 윤증(尹拯)을 비난한 일 때문에 윤증·유계의 제자들 사이에 일어난 소송사건에 연루되었다.

일찍이 효종 때 유계(兪棨)가 주자의 <가례>에 단마다 해석을 붙여 <가례원류>를 편찬했으나 미처 간행하지 못하고 죽었다. 그 뒤 1713년(숙종 39)에 당시 좌의정 이이명(李頤命)이 간행되어야 할 필요성을 제기하고, 또 저자의 손자인 유상기(兪相基)가 용담현령(龍潭縣令)으로 있으면서 간행하려 했으나 사정이 여의치 못하여 간행하지 못하고, 이 실정을 왕에게 고하여 마침내 1715년에 권상하(權尙夏)의 서문과 정호(鄭澔)의 발문을 추가하여 출간되었다. 그런데 정호의 발문 가운데 소론 윤증(尹拯)이 스승 송시열(宋時烈)을 등지고 당쟁을 조장했다는 내용이 들어 있어 정계에 파문을 크게 일으켰다.

신정하의 부친 신완은 박세채와 윤증의 문도인 관계로 그도 애초에 비판의 입장에 섰다가, 후에 숙종 42년에 올린 상소문에서는 <가례원류>의 서론과 발문을 쓴 권상하와 정호를 벌 줄 것을 주장한 소론 이진유의 부당함을 누차 상신하고, 유상기의 귀양과 유봉오의 정거를 철회할 것을 청한 것으로 인하여 사헌부의 탄핵을 받고 파직 당했다.

이전에 사헌부에서 관작 삭탈을 주청한 소장에

“전 헌납(獻納) 신정하(申靖夏)는 고(故) 상신(相臣) 이경석(李景奭)의 외손으로서 전에 그 자손들과 함께 변명하는 상소에 참여하였는데, 저번에 <가례원류(家禮源流)>의 일로 한 소(疏)를 바친 것은 그 존앙(尊仰)하는 정성이 도리어 전에 원수로 여기던 곳에 있으므로, 마침내 스스로 도리에 어긋나는 지경에 빠졌으니, 청컨대 관작(官爵)을 삭탈하소서.”

라고 한 것으로 보아서 신성하의 입장이 전후로 변동이 있음을 알 수 있다.

사관이 이를 두고,

“사헌부(司憲府)에서 전에 아뢴 일을 다시 아뢰었으나 임금이 따르지 않았고, 신정하(申靖夏)는 파직하여 서용하지 말라고 명하였다. 신정하(申靖夏)는 고(故) 상신(相臣) 신완(申琓)의 아들인데, 젊은 나이에 청요직(淸要職)에 올랐으며 평소에 뜻이 고요하고 소박하며 문장에 능하여 명망이 자자했는데, 한 번의 상소가 임금의 뜻을 거슬러 파직당하고 배척당하여 얼마 안 되어 죽으니, 한때의 명류(名流)가 모두 매우 아까워했다”

라고 기록하고 있다.

<해동가요(海東歌謠)> 등에 시조 3수가 전하는데 그 중 박세당의 아들로 숙종이 인현왕후를 내치는 것을 극간하다가 장살당한 박태보를 기린 시조가 있다.

“간사(諫死)  박파주(朴坡州) ㅣ 야 주그라 셜워마라, 삼백년(三百年) 강상(鋼常)을 네 혼자 붓들거다. 우리의 성군(聖君) 불원복(不遠復)이 네 죽긴가 노라.”

무슨 의미인가 하면, 충간하다 죽고만 전 파주부사 박태보여 서러워 마시게. 조선의 강상을 오직 그대만이 붙들고 지켰네. 어진 임금 오래지 않아 다시 왕후를 불러들인 것은 필시 그대의 죽음으로 그리된 것일세.

저서로는 <서암집(恕菴集)>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