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영상(金永相)


김영상(金永相)                                                              PDF Download

 

2017 율곡학맥-김영상
김영상 초상
김영상(金永相, 1836∼1911)은 조선시대 말엽의 유학자로 일본의 강압적인 한일합방에 저항하였다. 을미사변 때에는 나라의 운명을 걱정하면서 두문불출하였고, 1906년경에는 임병찬, 최익현 등과 한일의병 운동을 주도하였다. 조선이 멸망한 뒤에는, 일본의 유화정책을 거부하고

 

“원수와는 한 하늘아래 같이 살수 없다”

 

며 저항하다 옥중 단식 중 사망하였다. 저서로 ⌈춘우정문고(春雨亭文稿)⌋가 있다.

 

1836(1, 헌종 2)
지금의 전라북도 고부(古阜) 산북리(지금의 정읍시 정우면)에서 부친 김경흠(金景欽)과 모친 나주 오씨의 아들로 출생하였다. 조선 개국의 원종공신(原從功臣) 김회련(金懷鍊)의 후손이다. 호는 춘우정(春雨亭), 자는 승여(昇如)이며, 승화(昇和)라는 이름을 쓰기도 하였다. 본적은 전라북도 정읍(井邑)이며, 본관은 도강(道康)이다. 도강은 현재의 전라남도 강진군(康津郡)으로, 1895년(고종 32년) 탐진현(耽津縣)이 합쳐져 강진군이 되었다.

1851(16, 철종 2)
가족을 따라 태인(泰仁) 고현내면 원촌으로 이주해 살았다. 이곳은 조상 대대로 살던 세거지였다. 이후 줄곧 태인에 거주하며 활동하였다.

1853(18, 철종 4)
집안의 아저씨에 해당하는 이재 김인흠(肄齋 金麟欽)에게 글을 배웠다.

1858(23, 철종 9)
집안의 할아버지인 비인재 김기(卑忍齋 金曁)에게 글을 배웠다.

1871(36, 고종 8)
미국 함선이 조선에 들어와 공격을 받은 신미양요(辛未洋擾) 사건이 일어났다. 이해 스승 비인재의 소개로 노사 기정진을 만났다. 이후 전주 출신의 간재 전우와도 자주 교류를 하였다. 당시 기정진과 전우는 전라도 지방의 대표적인 유학자들이었다.

1885(50, 고종 22)
50세의 나이에 익산에 사는 인산 소휘면(仁山 蘇輝冕, 1814∼1889)을 스승으로 모셨다. 당시 그는 폐백(幣帛)을 가지고 가서 경의를 표하고 제자의 의례를 한 뒤에 소휘면과 사제관계를 맺었다. 소휘면은 일찍이 젊었을 때부터 학문으로 주변에 널리 알려진 사람으로, 1881년에 선공감가감역, 전설시별제(典設寺別提), 전라도사 등에 제수되었으나 취임하지 않고, 1882년 역시 사헌부지평에 제수되었으나 취임하지 않았다. 오직 후학의 양성에 힘을 기울인 인물이다.

1895(60, 고종 32)
10월 8일 경복궁에서 명성황후가 일본인들에게 암살된 사건이 일어났다.(을미사변乙未事變) 12월에는 단발령이 내려졌다. 이러한 사건을 겪으면서 나라의 운명을 걱정하고, 일본의 침략을 개탄하며 두문불출하였다.

1906(71, 광무 10)
이해에 치욕적인 을사늑약이 체결되었다. 면암(勉菴) 최익현(崔益鉉), 돈헌 임병찬 등이 이 무성서원에서 항일의병을 일으킬 때(병오창의) 같이 참여하여 성명문을 낭독하였다. 이후 석지 채용신, 면암 최익현, 돈헌 임병찬 등과 밀접한 관계를 유지하면서 일제의 침략에 맞섰다. 이 가운데 채용신(蔡龍臣, 1850년∼1941년)은 무과에 응시하여 급제하고 관료생활을 하였는데, 1905년 이후에는 그림만 전문적으로 그리던 사람이었다. 그는 김영상을 그린 그림을 남겼다. 면암 최익현이 이 해에 대마도에서 순절하였다.

1907(72, 광무11, 융희 원년)
시산리 대주평(지금의 칠보초등학교 자리)에 태산사(台山祠)를 세우고 면암 최익현의 영정을 모셨다. 유림들의 요청을 따라 태산사 상량문을 짓고, 태산사에 한동안 머물렀다. 이후 태산사는 일제 탄압으로 훼손되었다가 1975년 시산사(詩山祠)로 이름을 바꾸어 원촌마을 산중턱에 중건되었다.

2017 율곡학맥-김영상

1910(75, 융희 4)
이 해 나라를 일본에 내준다는 양국조서(讓國詔書)가 내렸다.(한일합병) 조선이 멸망하여 나라 안의 국민들이 온통 비통스러워하였다. 일제는 이러한 분위기를 바꾸기 위해서 전국의 유학자 100명에게 노인 은사금을 내렸다. 그러나 김영상은 은사금을 여러 차례에 걸쳐 거절하였다.

전해오는 말로 당시 은사금을 가지고 온 일본 순사를 향하여

“내가 일본 국왕의 간을 씹어 먹어야 하는데 그리 못하니 대신 너라도 먹어야겠다.”

고 하면서 그의 팔뚝을 물어뜯었다고 한다.

채용신이 그린 김영상의 투신 모습(投水圖)

1911(76)
계속되는 일제의 유혹을 뿌리치고 면장을 통해 내려온 은사금 사령서를 찢어버렸다. 4월에 불경죄를 저질렀다는 죄목으로 일본 헌병대에 체포되어 산외면 동곡 헌병대에 구금되었다.

5월 6일 동국 헌병대를 떠나 군산형무소로 이송 도중 만경강을 건너다가 손자에게 절명시를 남기고 투신하였다.(일설에는 감옥에서 순절하기 전에 남겼다고 한다.) 그 내용은 다음과 같다.

 

昔屈子之精忠
그 옛날 굴원은 사심 없는 충정으로

指汨羅而爲期
멱라수에 몸을 던져 한 생을 마쳤다.

今春雨余陽九
이제 나는 양구를 뒤로하고

從沙津而逝斯
사진을 떠나 여기에서 작별한다.

酌椒酒之三桮
향기로운 술 세잔을 따라

慰魚腹之忠魂
고기 뱃속의 충혼을 위로하고

踵東海之高蹈
제나라 사람 노중연(魯仲連)의 길을 따라

永陟江於干磐
영원히 물가를 오르내리리.

 

김영상이 투신한 직후 일본 헌병이 급히 물속으로 뛰어 들어가 구조하였다. 이후 군산 형무소 감옥에 수감된 뒤, 단식하던 중 5월 9일 사망하였다.

1991년 건국훈장 애국장에 추서되었으며 1978년 6월 전북지방의 인사들이 발의하여 그가 투신을 시도하였던 창사진 나루터인 김제시 청하면 동지산리에 춘우정 투수 순절 추무비(春雨亭 投水 殉節 追慕碑)를 세웠다.

저서로 ⌈춘우정문고(春雨亭文稿)⌋(1961년 필양사(泌陽祠) 발간)이 있다. 이 책은 6권 3책으로 구성되어 있는데 저자의 사진, 글씨 등이 실려 있으며, 제 1권에는 부(賦)와 시(詩), 제2권에는 서(書)와 기(記), 발(跋), 설(說), 논(論), 잠(箴), 소(疏) 등이 실려 있고, 제3권에는 상량문(上樑文), 제문(祭文), 비(碑), 묘갈명(墓碣銘), 행장(行狀), 유사(遺事), 잡저(雜著) 등이 실려 있다. 나머지는 제6권까지 부록이다.

 

<참고문헌>
김정자, 「인물 생애 정보 – 김영상」, 한국역대인물 종합정보시스템
이종근, 「춘우정 김영상(1836∼1911)」, 새전북신문, 2011.11.16
「채용신의 <항일지사 김영상 투수도>」, 김달진미술연구소, http://www.daljin.com/column/1120

류우현, 「청하면, 김영상 선생 투수비 환경 정비」, 전북중앙신문, 2017.5.29

「전북의 항일운동가-‘원수랑 함께 할 수 없다’ 순절한 춘우정 김영상」, 전북도민일보, 2017.07.19