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재석(金載石,1895-1971)


 

김재석(金載石,1895-1971)                                  PDF Download

 

1895(고종 32)~1971. 근대의 학자이다.

관은 울산(蔚山). 자는 경담(景潭), 호는 월담(月潭)이다. 「행장(行狀)」에 따르면 그의 자와 호는 모두 간재(艮齋) 전우(田愚)가 친히 지어준 것으로, 석담(石潭) 즉 율곡 이이를 흠모하라는 뜻이 담겨있다고 한다. 하서(河西) 김인후(金麟厚)의 후손으로 순창군 복흥면 사창(社倉)에서 아버지 김병대(金炳大)와 어머니 행주 기씨(幸州奇氏)의 장남으로 1895년 9월 24일에 나주 여황면 흑석리의 외가에서 태어났다.

어머니는 기주현(奇周鉉)의 딸이다. 할아버지 김상기(金相璣)는 1906년 최익현(崔益鉉)과 함께 을사늑약에 항거하는 유림들의 의병활동을 도모하다 일본경찰에 체포되기도 하였다. 후에 고종은 그의 공적을 평가하여 독립의군부초토영참서관(獨立義軍府招討營參書官)을 제수하였다. 아버지 김병대는 효행으로 유명했으며, 약간의 나이에 송병선(宋秉璿)을 사사하고, 그 후 전우와 기우만(奇宇萬:기정진의 손자)을 따라 배웠다. 어머니는 기고봉(奇高峰)의 후손인 기주현(奇周鉉)의 딸이다.

김재석은 전우의 문하에서 수학하였으며, 이규헌(李圭憲)․정도현(鄭道鉉) 등과 교류하였다. 스승인 전우가 순창의 훈몽재(訓蒙齋)에서 강의할 때 10세의 나이로 소학 전편을 틀리지 않고 외워 전우로부터 친필 훈화(訓話)를 받았다. 이것이 바로 김재석과 전우와의 첫 만남이었다. 어린 김재석이 당시 최고의 유학자로 추앙받던 전우를 만난 것은 그의 인생에서 매우 의미 있는 일이다. 그리고 ⌈소학⌋은 이후 그의 언행과 삶에 커다란 영향을 기친 것으로 보인다. 이후 김재석은 전우의 가르침을 가슴에 새기고 평생 전우의 학문에 복응한다.

어린 시절 김재석의 종학(從學) 활동은 여기에서 그치지 않는다. 11세였던 1905년 가을에는 백헌(柏軒) 김관수(金觀洙)가 사대부 자식들을 데리고 서정병사에서 공부하자 김재석 역시 그를 따라 배웠다. 전우의 문인이었던 김관수가 당시 김재석에게 강조한 것은 선조의 덕행에 대한 계승과 조술 그리고 지행(知行)과 독서명리였다. 김재석의 학문과 행적을 살펴볼 때 김관수의 가르침 역시 어린 김재석에게 큰 영향을 끼친 것으로 보인다. 당시 김재석이 전우의 학문과 처사를 이해하기에는 어린 나이였지만, 김관수의 가르침을 이해하기에는 결코 어렵지 않았을 것이다. 그의 「행장」에는

“공은 타고난 기운이 순정하고 재주가 비범하여 장로들이 모두 원대한 인물이 되기를 기대했다. 글을 배우기 시작하면서 문리가 일찍 통하였고 총명함이 보통을 넘었다”

라고 하였는데, 이러한 평가는 결코 상투적인 미사구어가 아닌 것 같다.

김재석의 일생에 지대한 영향을 끼친 사건은 할아버지 김상기의 항일운동인데, 이로 인해 김재석의 집안은 커다란 고초를 겪고 가사를 탕진하는 지경에 이른다. 이러한 상황과 분위기는 김재석에게 적잖은 영향을 끼쳤다. 김재석 역시 25세인 1919년에는 무력을 통한 항일운동에 참여했던 것으로 보인다. 김재석이 무력 항일투쟁에 참여했던 직접적인 원인은 고종이 일제의 음모에 의해 독살되었기 때문이다. 고종의 승하는 당시 유림들의 분노를 사고 있었다. 대한 제국의 백성으로 고종의 원수를 갚기 위해 행동하는 것은 지극히 당연해 보였다. 아마 기미년 가을에 읊은 것으로 보이는 시에는 당시의 분함을 이렇게 노래하고 있다.

이슬 내린 가을 하늘 풀벌레 소리 요란한데(露下天高虫語亂)

수없는 상념으로 잠 못 이루네(百船懷抱不成眠)

제국의 도읍 그 치욕을 언제 씻을까(帝秦大恥何時雪)

가을바람 한강변에 서서 눈물만 흘리네(灑淚秋風漢水邊)

할아버지의 유지를 받아 내외의 동지들과 항일단체를 조직하여 이를 지원하기도 하고, 상해의 임정산하의 요인이 국내에 들어오면 몇 년이고 집에 숨기고 숙식이나 자금을 제공하는 등 보이지 않는 곳에서 항일운동을 도왔다. 김동수(金東秀)․김일두(金一斗)․정계원(鄭啓源) 등을 숨겨준 것도 그중의 하나였다. 또한 신채호(申采浩)와 뜻을 함께 하여 아주 친밀하게 지냈다.

1926년 할아버지를 여의고, 2년 후인 1928년 12월에는 아버지마저 작고한다. 그리고 1945년 해방의 기쁨도 잠시뿐, 민족의 분열과 외세의 개입 그리고 동족상잔의 비극이 몰려오게 된다. 56세에 6.25 전쟁으로 순창 사창에서 완산으로 이사한다. 그 후 김재석은 주로 시문(詩文)을 지어 음미하거나 비문(碑文)과 행장(行狀)을 지어 재야 유학자들의 활동을 선양하는 일에 종사한다. 지금 전하는 그의 문집에 수록된 상당수의 묘갈명과 행장들은 아마도 이 시기에 찬술된 것으로 보인다. 그리고 1971년 6월 18일 오안사의 인봉신장(麟峯新莊)에서 향년 77세로 생을 마쳤다. 전라북도 정읍시 산내면 매죽리 묘덕촌 뒤 선영에 묻혔다. 저서로는 월담유고가 있다.

월담유고(月潭遺稿)는 근대의 유학자인 김재석의 시문집이다. 모두 8권 4책으로 연활자본이다. 1976년에 아들 김종섭(金鍾燮)과 오병근(吳炳根) 등이 편집하여 간행하였다. 권두에 권용현(權龍鉉)의 서문이 있고, 권말에 김종섭․오병근 등이 지은 후지(後識)와 친척인 김천수(金千洙)의 발문이 있다. 현재 국립중앙도서관에 소장되어 있다.

권1에는 시 283수가 수록되어 있다. 시는 문체별로 정리되어 실려있는데, 5언은 모두 121수로 5언 절구 78수, 5언 율시 22수, 5언 고시 21수이다. 7언은 162수인데 7언 절구 65수, 7언 율시 95수, 7언 고시 2수이다. 권2에는 서(書) 58편이 실려있고, 권3에는 잡저 5편, 서(序) 20편, 기(記) 21편, 발(跋) 10편이 있다. 권4에는 명(銘) 1편, 찬(贊)·혼서(昏書) 각 2편, 상량문 13편, 축문 15편, 제문 14편이 있으며, 권5에는 비문 13편, 묘지명 1편, 묘표 14편이 있다. 권6에는 묘갈명 93편, 권7에는 행장과 가장 39편, 서사(書事) 3편, 전(傳) 3편이 있다. 권8에는 저자와 관련된 부록이 수록되어 있다.

서(書) 중에서 「답김성옥(答金聖玉)」은 광복이 되던 해에 교우인 김성옥에게 보낸 것이다. 일제의 질곡으로부터 벗어난 기쁨이 감동깊게 묘사되어 있다. 문집의 핵심은 권3에 수록된 잡저에 있다. 「수록(隨錄)」은 그의 학문적인 연구 결과가 집약된 글이다. 그 중에는 을사조약이 체결된 뒤 고종의 명으로 중국에 밀파되어 독립군 결성의 책임을 맡았던 이재륜(李載崙)의 활동상이 실려있어 주목된다. 이 밖에 1919년과 이듬해에 걸쳐 당시 계화도에 머물러 있던 전우를 찾아가 나눈 문답을 정리한 「화도기행(華島紀行)」이 있다. 「자경십도(自警十圖)」는 전우의 소심존성(小心尊性)의 뜻을 밝혀 존심의 수행법을 10폭의 도표로 그린 것이다. 이처럼 월담유고는 115명의 묘갈명과 39명의 행장이 수록되어 있어 20세 후반기 문인들의 행적을 알 수 있는 자료로서 가치가 있다. 또한 을사늑약 체결 당시 고종이 최익현에게 밀지를 내린 독립운동과 관련된 비화가 담겨 있어 독립운동사를 연구하는 데 참고 자료가 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