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교준(金敎俊,1883-1944)


김교준(金敎俊,1883-1944)                                  PDF Download

 

1883년(고종 20)~1944. 조선 말기 일제 강점기의 유학자이다.

관은 경주(慶州). 자는 경로(敬魯), 호는 경암(敬菴)이다. 선조 때 형조참의 예문관을 지낸 만취(晩翠) 김위(金偉)의 후손이다. 어머니는 황씨(黃氏)이다. 1883년(고종 20) 태어나서 지리산 바래봉 아래에서 살았는데, 어릴 적부터 성격이 강경하면서도 순박하고 진실하였으며, 특히 인자함이 남들보다 뛰어났다고 한다.

어려서 연재(淵齋) 송병선(宋秉璿)에게 글을 배웠다. 송병선이 순국하자, 다시 간재(艮齋) 전우(田愚)를 사사하면서 그의 성리학 이론인 ‘성사심제(性師心弟)’를 탐구하였다. ‘성사심제’란 성(性)을 스승으로 삼고 심(心)은 제자가 되어 열심히 성을 배우라는 유학의 형이상학적 이론이다. 여기서 ‘성’은 하늘이 사람마다 부여하여 준 것으로 순선(純善)하고 것이므로 나에게 부여된 순선한 성을 따라 살아가라는 것이다. ‘심’은 물질을 보면 발동하는 것으로 선도 있고 악도 있는 것으로, 물질을 보면 욕심이 발동하여 사심이 생기는 원인이다. 비유하면 동네 길에서 우연히 일 만금을 주었는데, 갑자기 사심이 발생하여 자기 주머니에 숨겼다. 이때 성이 보고 심을 꾸짖고 꾸짖어 주인을 찾아주라고 한다. 이처럼 심이 성의 명령을 따르고 배우는 것이 ‘성사심제’의 이론이다. 성이 그러지 말고 정직하게 살라고 하므로 성을 스승으로 삼고 심은 제자가 되어 열심히 성을 배우라고 하는 것이 ‘성사심제’의 철학이다. 다시 말하면 심은 성을 근본으로 삼아 선도 있고 악도 있는 심을 순선하게 될 수 있도록 하는 것이다. 성은 순선무악(純善無惡)하므로 성은 높고 심은 선도 있고 악도 있으므로 심은 낮으니 이로써 성존심비(性尊心卑)라고도 부른다. 이러한 ‘성사심제’의 이론을 전우에게 질의한 내용들이 경암집에 들어있다.

전우 사후에는 문집 간행으로 빚어진 영․호남의 시비에 대의를 밝혀 논박하였다. 뿐만 아니라 송시열의 송자대전(宋子大全) 판각과 스승의 묘소 석물에 대해 거금을 출연하기도 하였다. 이후 순창 남원 백전촌(栢田村)과 오산의 농세재(聾世齋)에서 강학하였다. 글을 잘 써 8세조와 증조부, 아버지와 어머니의 가장(家狀)을 썼으며, 한말 의병장이었던 박윤식(朴潤植)의 행장을 쓰기도 하였다. 성인의 도를 받들고 지키면서 부정척사(扶正斥邪)로 일생을 마쳤다. 1944년 세상을 떠났으며, 전라북도 순창군 동계면 신흥리에 위패를 모신 오산사(鰲山祠)가 있다. 저술로는 경암집이 있다.

또한 김교준이 학생들을 가르치기 위하여 1909년 세웠던 농세재(聾世齋)를 1941년 중건하면서 오산서원이라고 이름 붙였다. 김교준은 일찍이 송병선에게 수학한 이후, 1907년 오산에 경재(敬齋)를 신축하여 학문을 닦았다. 이듬해에는 전우에게 나아가 학문에 전념하며 평생 스승으로 모셨다. 1943년 김교준이 세상을 떠나자, 문인과 고향의 유생들이 그의 학문과 덕행을 기리기 위하여 1972년 오산서원을 오산사(鰲山祠)로 이름을 바꾸고 그곳에 영정을 모셨다. 그 뒤 1984년 사당을 신축하여 경현사(景賢祠)로 이름하고 오산사에 있던 김교준을 이안하였다. 1994년 오산사 건물을 원래대로 오산서원으로 환원하고 오산서원지(鰲山書院誌)를 발간하였다.

1994년 김교준의 문인과 순창의 유림 및 후손이 중심이 된 오산서원지 편집위원회는 전우와 김교준의 정신을 기리기 위하여 오산서원지를 발간하여 운영에 활용하고자 하였다. 2권 1책으로 총 86장이다. 서문 앞에는 경현사와 내삼문 사진이 있고, 오산서원과 농세재 사진이 있으며, 전우와 김교준의 영정이 있다. 서문은 원종복(元鍾復)이 지은 것이다. 권1은 위치, 건물, 건사사실(建祠事實), 향사일(享祀日)을 비롯하여 봉안문(奉安文)과 축문(祝文), 주자백록동규(朱子白鹿洞規), 남전여씨향약(藍田呂氏鄕約), 향약절목(鄕約節目), 상읍례도(相揖禮圖), 강석도(講席圖), 토지목록(土地目錄) 등이 있다. 권2는 전우의 문집과 김교준의 문집에서 뽑았는데 전우의 주요 글로 「전재임선생신도비명(全齋任先生神道碑銘)」․「성사심제변변(性師心弟辨辨)」․「성존심비적거(性尊心卑的據)」․「성사심제독계어(性師心弟獨契語)」 등이 있고, 김교준의 글로는 「상연재송선생(上淵齋宋先生)」․「상간재전선생(上艮齋田先生)」․「농세재기(聾世齋記)」 등이 있다. 권2에 수록된 오산사기(鰲山祠記)」․원임안(院任案)․제관록(祭官錄)․부의계원좌목(扶義契員座目) 등은 오산사의 내역과 서원과 관계된 인물을 수록하고 있어 서원 운영을 알 수 있다.

⌈경암집⌋은 일제 강점기의 문인 김교준의 시문집이다. 모두 9권 6책으로 석인본이다. 1961년 오구영(吳龜泳)․이도형(李道衡)․황갑주(黃甲周) 등이 편집하여 간행하였다. 김교준은 송병선과 전우의 문인으로 학문적 재능이 뛰어나 많은 학문적 업적을 이루었다. 경암집은 김교준이 죽고 20여 년 뒤인 1961년에 제자인 황갑주(黃甲周)․오구영(吳龜泳) 등이 계를 만들어 자금을 마련하여 비석도 세우고 문집도 간행하게 되었다. 권두에 이병은(李炳殷)의 서문이 있고, 권말에 황갑주의 발문이 있다. 현재 국립중앙도서관과 전주대학교 중앙도서관 등에 소장되어 있다.

권1∼3에는 서(書) 160편, 권4에는 잡저 26편이 들어있다. 권5에는 서(序) 14편, 기 28편, 발 6편, 상량문 2편, 책(策) 1편, 잠(箴) 2편, 축문 2편, 제문 9편, 애사 2편이 있으며, 권6에는 행장 8편, 비기 6편, 묘갈명 1편, 묘표 2편이 있다. 권7에는 시 423수, 부(賦) 1편이 있고, 권8에는 만록 100편, 권9에는 부록으로 영(詠) 9편, 행장․묘갈명․묘지명․묘표 각 1편, 제문 2편, 만(挽) 14편, 문인록(門人錄) 1편 등이 수록되어 있다.

서(書)는 대개 스승․동료․친척 등과 주고받은 것으로, 안부 또는 학문적인 내용을 문답한 것이다. 송병순에게 보낸 서에서는 친영례(親迎禮)․상례․문상․복례(服禮)․의관․부녀복(婦女服) 등에 대해 문의하고 있다. 잡저 가운데 「독율농간삼선생유서록(讀栗農艮三先生遺書錄)」에서는 주로 심성론에 관한 이이(李珥)와 김창협(金昌協)의 학설들을 비교해 기술하였다. 그밖에 고구려의 밀우(密友)와 세우(細友)의 충절, 백제의 도미(都彌) 아내의 정절, 신라 이차돈(異次頓)의 죽음 등에 대해 기술하였다. 책 가운데 「삼강책(三綱策)」에서는 군신․부자․부부간의 자세를 고대의 사례를 인용해 자세히 논술하고 있는데, 특히 군신간의 충의에 대해 강조하고 있다.

시는 뛰어난 시재를 선정해 맑고 순수한 생각을 고상하게 표현하고 있는 것이 특징이다. 시 중에서 「화양동십경(華陽洞十景)」은 화양동의 명승을 노래한 것으로, 저자의 초일한 정서가 잘 나타나 있다. 「독서칠절(讀書七絶)」․「칠음(七吟)」 등은 학문과 사상에 관한 심경을 읊은 것으로 그 내용이 진지하다. 만록 가운데 「청수만록(淸水漫錄)」에서는 조선 태조의 왕위계승에 대한 오판으로 인해 왕자의 난 등이 일어났다는 내용을 비롯하여, 정조에 이르기까지 특별한 사건과 붕당의 발생동기․과정․폐단 등 역사적인 여러 사실들에 관해 기술하고 있어 좋은 자료가 된다.

⌈경암집⌋에는 서간문이 많이 수록되었는데, 대부분의 주제가 성리학적과 연관된 것으로, 특히 스승인 전우에게 ‘성사심제(性師心弟)’의 이론에 대하여 질의하고, 이 문제에 대해서 당시의 걸출한 문인들과 토론하고 응답하고 설명하는 내용들이 많다. 경암집은 조선 말기와 일제 강점기의 도학과 문학의 사조를 이해하고, 아울러 전우의 사상을 연구할 수 있는 귀중한 자료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