임윤지당(任允摯堂)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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윤지당(任允摯堂, 1721∼1793)은 조선시대 말엽, 영조·정조의 문화적 전성기에 생존하였던 여성 유학자로 오빠 녹문(鹿門) 임성주(任聖周, 1711∼1788)에게 성리학을 배웠다. 동생 운호(雲湖) 임정주(任靖周, 1727∼1796)도 성리학에 조예가 깊어 어려서부터 이들 형제들과 함께 경사(經史)를 논하고 서로 배웠다.

출가해서도 신랑과 시집을 모시면서 틈틈이 글을 쓰고 경전을 읽었다. 그녀는 성리학의 음양이기론에 기초하여

“남녀는 상호 보완 관계이며, 남녀 모두 공히 하늘로부터 동등한 성품을 받았으므로, 여성도 성인(聖人)이 될 수 있다”

고 주장했다.

유고집으로⌈윤지당유고(允摯堂遺稿)⌋를 남겼다. 이 유고집에는 조선시대 여성 시문집에는 볼 수 없는 성리학 논문(論)이 11편이나 들어 있어, 조선을 대표하는 여성 유학자라고 할 수 있다.

 

1721년(1세, 경종 1년)
노은(老隱) 임적(任適)의 5남 2녀중 둘째딸로 태어났다. 증이조판서 윤부(尹扶)의 외손녀이며, 본관은 풍천(豐川)이다. 부친은 과거시험에 계속 낙방하였는데, 이때는 음서로 관직에 나아가 양성현감으로 재직 중이었다. 양성은 지금의 경기도 안성 양성면이다. 이곳에서 임윤지당이 태어났다. 어머니 윤씨는 파평윤씨 호조정랑 윤부(尹扶)의 딸이다.
1725년(5세, 영조 1년)
부친이 함흥판관으로 발령났다. 가족들도 함께 함흥으로 가 살았다. 이곳에서 부친은 2년 간 재임하다 탄핵을 받아 관직을 떠났다. 사건을 재판하는 과정에서 피고인이었던 기생을 매질한 것이 문제가 되었었다.

 

1728년(8세, 영조 4년)
부친상을 당하였다. 가족을 데리고 서울로 돌아와 샛방에서 살다가 청주로 이사하여 농사지으려고 했으나, 역병으로 사망한 것이다. 부친은 관직을 물러난 뒤에는 벼슬에 뜻을 버리고 오직 학문에 힘썼다. 유교 경전과 기타 다양한 서적을 섭렵하며, 재리(財利)를 멀리하여 사망할 때는 장례비용이 없어 주변에 돈을 빌려야할 정도로 궁핍하였다. 부친의 유고집으로 ⌈노은집(老隱集)⌋이 있다.

 

1729년(9세, 영조 5년)
모친을 따라 청주(淸州) 근처 옥화(玉華)로 이사하였다. 둘째 오빠 녹문(鹿門) 임성주(任聖周)에게 글을 배웠다. 열녀전(烈女傳), 효경(孝經), 소학(小學), 사서(四書)등 읽고 성리학에 대해서 배웠다.

큰오빠 임명주는 사간원 정언을 지냈고, 둘째 오빠 임성주(任聖周)는 군자감정(軍資監正), 성천부사를 지낸 유학자이다. 도암(陶庵) 이재(李縡)에게서 배웠는데, 초년에는 스승의 학설을 따라 인물성동론(人物性同論)을 주장하였으나 나중에는 기일원론적(氣一元論的)인 입장에서 호락(湖洛)의 양론을 종합하여 자신의 학설을 세웠다.

둘째 오빠는 임성주는 임윤지당보다는 열 살 위로, 글을 가르쳐 주는 등 부친 역할을 담당하여 큰 영향을 미쳤다.
‘윤지당’이라는 당호(堂號)도 오빠 임성주가 지어준 것인데 ‘태임(太任)과 태사(太姒)를 독실이 신봉한다’는 뜻으로, 주자의 “윤신지(允莘摯)”라는 글귀에서 따온 말이다. 신(莘)은 문왕의 부인인 태사의 고향이며, 지(摯)는 문왕의 어머니인 태임의 고향이다.

동생 임정주는⌈윤지당유고⌋에서 그 이름을 다음과 같이 소개한 바 있다.

“윤지당은 곧 망자(임윤지당)의 어린 시절 우리 중형이 지어준 이름이다. 주자의 윤신지(允莘摯)라는 말에서 취한 것인데, 그 뜻은 지중(摯仲)의 지(摯)의 뜻을 겸한 것이다. ‘독신지임(篤信摯任, 믿음이 돈독하고 책임에 정성을 다한다.)’과 같은 뜻이다. 우리 이종형 한정당 송공이 손수 도장을 새겨서 이를 주니 이로부터 집안에서 윤지당이라 자주 칭하였다.”

임윤지당은 이러한 주위의 도움을 받아 평생에 걸쳐⌈맹자⌋, ⌈논어⌋, ⌈춘추⌋, ⌈자치통감⌋, ⌈근사록⌋, ⌈중용⌋, ⌈대학⌋ 등 서적을 읽고 성리학에 대한 이해를 깊이 하였다.

 

1737년(16세, 영조 13년)
모친을 따라 여주(驪州)로 이사하였다. 여주에는 조상들의 선영이 있는 곳이었다. 이때의 일을 동생 임정주(任靖周)는 다음과 같이 기록했다.

“나이 열한 살 때 청주 옥화에서 여주로 이사가 살게 되었다. 여주는 번화한 곳이어서 친구들이 밀고 당겨 나도 모르게 방자하게 되었다. 누님이 조용히 타이르시기를 ‘왜 방심한 마음을 거두지 아니하고 남들을 따라 다니면서 두레박처럼 오르락내리락 놀기만 하느냐’ 하셨다.

내가 이 말씀을 듣고 깊이 뉘우치고 곧 마음을 바로 잡았다. 누님께서는 순순히 가르치시고 타이르는 성의가 간절하셔서 사람들을 감동시키기에 충분하셨다. 내가 지금까지 큰 죄를 면하게 된 것은 실상 우리 누님께서 그때 깨우쳐 주신 덕분이다’ 하였다.”

 

1740년(19세, 영조 16년)
원주의 선비, 평산신씨(平山申氏) 신광유(申光裕, 1722∼1747)와 결혼했다. 임윤지당은 행동거지가 지혜로워 시댁의 사랑을 많이 받았다. 낮에는 부녀자의 일을 열심히 하고 밤이 깊어서는 조용히 책을 읽었는데 공부하는 티를 내지 않았다. 이후 줄곧 원주에서 살았다.
임윤지당이 쓴 글 가운데 「송능상 부인의 전기(宋氏婦傳)」는 결혼한 뒤 당시 그녀의 마음가짐을 잘 엿볼 수 있는 내용이 들어 있다. 다음과 같다.

지평 한계진의 딸 한씨는 송씨의 아내이다. 어려서 어머니를 여의고 몹시 슬퍼하더니 시집을 가서도 상자 속에 간직한 친정어머니의 필적을 보게 되면 슬픔을 참지 못하고 울어 눈물이 옷을 적셨다. 일찍이 남편의 형제들이 남편과 더불어 포부를 이야기하다가 말하기를

“우리는 율곡의 도덕과 영귀(榮貴, 영광되며 귀함)함을 부럽게 생각하네.”

라고 하였다. 남편도 역시 그렇다고 하였다.
다른 사람들이 자리를 떴을 때, 한씨가 남편에게 묻기를,

“여러 형님들의 말씀을 어떻게 생각하시는지요?”
하고 하니,

“좋다고 생각하오.”
라고 말했다.

한씨는 이렇게 대답했다.

“저는 이렇게 생각합니다. 율곡의 율곡다운 점은 도덕이 있기 때문입니다. 설령 율곡이 빈천해서 깊은 산 속에 보잘 것 없는 곳에 산다 한들 그의 덕이 어찌 손상을 입을 수 있겠으며, 영귀하다고 해서 그 덕에 무슨 보탬이 되겠습니까? 지금 여러 형님들이 다만 그 도덕만 말한다면 이는 참으로 덕을 사모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도덕과 영귀를 같이 말한다면 이는 덕을 사모하는 것이 아니고 실상은 그 귀함을 사모하는 것입니다. 낭군께서 그것을 좋다고 하시니 이는 불가능한 일이 아닌가요?”

남편은 그 말을 듣고 아내의 식견에 감복하였다. 그리고 마음을 걷어잡고 공부에 힘써 훌륭한 선비가 되었다. 부인은 또한 시부모를 섬기는 데 며느리의 도리를 다했다. 한번은 시어머니가 몸소 누에고치를 켜고 있을 때, 여러 며느리가 제가끔 대신하겠다고 청했으나 허락하지 않았다. 그러자 여러 며느리들은 각기 자기네 방으로 돌아갔다. 유독 한씨만은 돌아가지 않고 불을 피워서 일을 도왔는데 민첩하고 공경하여 게을리 하지 않았다. 이는 시어머니의 수고를 딱하게 여겨 음식 만드는 일을 거들어 시어머님의 일을 덜어드리고자 한 것이었다.

한씨는 학식과 덕행이 있을 뿐 아니라 글재주도 갖추고 있었다. 그 친정 아버지가 세속의 쓰잘 데 없는 말을 믿고 글을 가르치지 않았으나, 가끔 경서와 역사에 관한 글을 읽어서 그 대강을 깨달았다. 불행히 일찍 죽으니 어찌 아깝지 않으랴!

 

1745년(24세, 영조 21년)
작은 아버지 임경주(任敬周)가 사망했다.

 

1747년(26세, 영조 23년)
남편이 사망하였다. 향년 만 25살이었다. 이 때 임신하고 있던 아이도 어렵게 낳았으나 어려서 죽었다.

 

1756년(35세, 영조 32년)
3월, 동생 임병주(任秉周)가 사망했다.

 

1757년(36세, 영조 33년)
11월, 큰오빠 임명주(任命周)가 사망했다.

 

1758년(37세, 영조 34년)
여름, 공주 친정에 가서 어머니를 뵙다. 12월, 친정어머니가 돌아가셨다.

 

1759년(38세, 영조 35년)
4월, 친정에서 남편이 시작한 시경(詩經), 초사(楚辭)의 필사작업을 마쳤다.

 

1765년(44세, 영조 41년)
양시어머니(文化柳氏)의 상을 당하였다. 이즈음에 시동생의 아들을 입양하였다. 시동생은 신광우(申光祐, 1726∼1798)로 사간원(司諫院)의 대사헌을 역임한 인물이다. 그동안 형수의 성리학 공부에 많은 도움을 주었다. 윤지당유고(允摯堂遺稿)의 발문 2편 중 한편인 윤지당의 「언행록」은 이 시동생이 쓴 글이다.

 

1767년(46세, 영조 43년)
본시어머니(豐山洪氏) 상을 당하였다.

 

1771년(50세, 영조 47년)
양근(楊根)의 근무지로 오빠 임성주를 찾아뵙다.

 

1782년(61세, 정조 6년)
봄에 오빠 임성주가 가족과 함께 원주 산호(山湖)로 이사 왔다.

 

1784년(63세, 정조 8년)
동생 임정주(任靖周)가 찾아왔다. 동생은 다음과 같은 글을 남겼다.

“내가 갑진년에 원주에 가서 인사를 했는데, 누님은 이미 63세였다. 항상 일찍 일어나 빗질을 하고 세수하며, 하루 종일 단정히 앉았으며 옷가짐도 바르게 했다. 용모와 행동거지가 단정하고 삼가는 것이 어릴 때와 한가지였다. 육칠 개월을 머물렀는데 한 번도 게으른 용모를 볼 수 없었다. 그러나 도리어 그윽하고 한가로우며 조용하고 여유가 있어 얽매이는 기색이 조금도 없었다.”

그는 이어서 계속 이렇게 썼다.

“누님의 자질과 성품이 뛰어나고 학문에 대한 공부도 그에 못지않았다. 그러므로 일상생활에서 몸가짐과 일 처리에 순수하여 사욕에 끌리지 않으셨으며, 한결같이 올바른 의리에 바탕을 두었다. 제사를 모시고 손님을 접대하는 예절에서부터 친척과 이웃 그리고 식구들을 대하고, 집안 살림을 돌보는 일에 이르기까지 그때그때의 형편에 따라 그 본분을 다해 알맞게 했다. 자연스러운 가운데 넉넉하게 법도를 지켰다.

아아, 누님 같은 사람은 참으로 규중의 도학자이며 여자 중에 군자라고 말 할 수 있으니, 작은 형님이 누님을 두고 ‘편안히 하면서도 이루었다’고 한 말이 결코 아첨하는 말이 아니다.”

1785년(64세, 정조 9년)
문집 초고⌋를 지계로 올려 보내면서(文草謄送溪上時短引)」을 지었다.

“나는 어려서부터 성리학을 알았고, 이미 자란 다음엔 더욱 좋아하기를 고기처럼 되어 능히 그만둘 수 없어서, 서적에 실려 있는 성현의 유훈을 마음에 담고 묵묵히 구한지가 수십년이 되었다. 말할 것들이 조금 생겼으나 곧 글자로 나타내고 싶지는 않아서 드러내지 않았다. 하지만 말년에 이르러 죽을 날이 얼마 안 되어 갑자기 초목처럼 썩어 버릴까봐 걱정이 되었다. 마침내 가정일 틈틈이 글을 써서 뜻밖에도 모두 40편이 되었다.”

이어지는 이 문장의 내용에 따르면, 임윤지당은 문집간행을 염두에 두고, 자신의 문장을 정리하여 한권의 책으로 만들었다. 그 안에는 「송씨부(宋氏婦)」부터 「안자소락론(顔子所樂論)」까지 초년 저작 8편과 「자로론(子路論)」 이하 중년 저작과 만년 저작 32편 등 모두 40편이 들어 있다. 이를 아들 신재준(申在峻)에게 주었는데, 동생 임정주가 멸실을 우려하여 자기에게도 필사본을 보내달라고 하여 필사본 1부를 임정주에게 보내 주었다.

 

1786년(65세, 정조 10년)
임성주가 공주 녹동(鹿洞)으로 돌아간 뒤, 편지로 경의(經義)에 대해 논의하였다. 이 해에 경의를 저술하기 시작했다.

 

1787년(66세, 정조 11년)
아들 신재준(申在峻, 1760∼1787)이 사망했다. 아들의 죽음을 슬퍼하는 문장(祭亡兒在竣文)을 다음과 같이 지었다.

“흰머리에 외롭고 쓸쓸한 몸이 의지할 곳을 잃었으니 이것이 어인일이냐? 심하도다, 나의 모진 팔자여! 이전에 너를 애지중지하던 마음으로 너를 앞세우고 나서 잠시라도 목숨을 부지하며 살지 못할 줄 알았다. 그런데 너를 잃고 나서도 홀로 이렇게 오래 세상에 살아남아서 둔하고 어리석게도 배가 고프면 밥을 먹고, 피곤하면 잠을 자면서 다른 사람과 조금도 다를 바 없구나. 아마도 기운이 떨어지고 정신이 잦아들어 참으로 슬픈 줄을 깨닫지 못해서 그런 것인지, 아니면 어찌할 도리가 없어 운명에 맡기고 목숨이 다하기를 기다리느라고 그런 것인지 모르겠구나.(중략)

슬프고, 슬프다. 내 이제 너의 모습을 볼 수 없게 되었구나. 그래도 행여 꿈에서나마 너와 만나 마음을 위로하고 정을 이을까 하니 너는 자주 자주 꿈에 나타나 늙은 어미의 슬픈 마음을 만분의 일이라나 풀어다오. 아아, 슬프도다.”

1788년(67세, 정조 12년)
3월, 둘째 오빠 임성주가 사망했다. 향년 77세였다. 오빠 녹문(鹿門) 임성주(任聖周)는 유고집으로 녹문집(鹿門集)이 있다.

 

1793년(72세, 정조 17년)
5월 14일, 사망했다. 원주의 정지안(正之安) 무지곡촌(茂芝谷村)에 장사지냈다. 동생인 운호(雲湖) 임정주(任靖周)가 3년 뒤인 1796년에 활자로 문집(윤지당유고(允摯堂遺稿) 2권 1책)을 간행했다. 이 책은 국역 윤지당유고로 번역되어 있다.

유고 가운데는 대학과 중용에 대한 자신의 해석을 정리한 경의(經義)와 이기심성설(理氣心性說), 인심도심사단칠정설(人心道心四端七情說), 극기복례위인설(克己復禮爲仁說) 등이 있다. 이러한 성리학 이론에 관한 문장 외에도 중국 역대 인물들, 즉 북송(北宋) 사대부 왕안석(王安石, 1021∼1086)이나 사마광(司馬光, 1019∼1086)에 관한 비평이 들어 있다. 왕안석에 대해서는

“정치의 근본을 소홀히 하고 지엽적인 것에만 치중하였다. 또 재화의 이득만을 숭상하고 부국강병(富國强兵)만을 꾀하였다”

고 엄한 평가를 내렸다.

그녀의 학문은 대체로 율곡학파의 학설을 계승하였다. 인물성동이론(人物性同異論)은 오빠인 임성주의 설을 기반으로 하나 자신의 독자적인 주장도 들어 있다. 아울러 여성의 입장에서 주자학을 해석한 것이 특징적이다. 그는 남녀는 상호 보완 관계이며, 남녀 모두 하늘로부터 동등한 성품을 받았으므로, 여성도 성인(聖人)이 될 수 있다고 주장했다.

 

참고문헌)
한국고전종합DB 「윤지당유고(允摯堂遺稿)해제」. 최연미, 「임윤지당의 생애와 윤지당유고」, 서지학연구17, 1999.6. 이성미,『우리 옛 여인들의 멋과 지혜』, 대원사, 2012. 이혜순, 한국고전 여성문학의 세계 : 산문편, 이화여대출판부, 2008.