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상현(朴尙玄, 1629-1693)


박상현(朴尙玄, 1629-1693)                                 PDF Download

 

박상현(朴尙玄, 1629-1693)은 조선시대 중기의 유학자다. 우암 송시열을 스승으로 모시고, 명나라를 사모하는 마음이 지극하였다.  조정이 청나라 만주족을 두려워하여,  중국 남부에서 표류해 온 명나라 유민들을 청나라로 압송한 것을 보고 세상에 나갈 뜻을 버렸다.  조용한시골에 은둔하며 주희의 학문을 근본으로 삼아 경전 연구에 매진하였는데, 특히 ⌈대학 ⌋에 정통했다.  아들들과 조카를 송시열 문하에서 학문을 하도록하여 ,호남노론의 핵심이 되었다.

1629년(1세, 인조7년) 음력 5월 9일에 태어났다.  본관은 순천(順天), 자는 경초(景初), 호는우헌(寓軒)이다. 증조할아버지는 박언침(朴彦琛),  할아버지는 박진정(朴震挺), 아버지는 박수림(朴遂林), 어머니는봉산 이씨(鳳山李氏)로 이사숙(李思淑)의 딸이다.  부인은 장택 고씨(長澤高氏) 고부민(高傅敏)의 딸이자,  군수 고성후(高成厚)의 손녀이다.

1643년(15세, 인조21년) 부친상을 당하였다. 3년 동안 나물국을 먹지않고 제사에 정성과 공경을 다했다.  글 공부를 시작한 뒤에는 자기 수양에 힘쓰고 경전공부를 열심히 하였다. 특히 ⌈대학 ⌋에 공을 들여 공부를 하고,  학문의 바탕으로 삼았다.
주희(朱熹)를 본받고자 하였으며,  산림의 깊은 골짜기(전라도광주光州의 진곡眞谷)에서 평정을 지키고 살며,  부귀와 화려한 것에 대해서욕심을 가지지 않았다.  당시 중국과 우리나라를 침범한 청나라를 극도로 싫어하여 책력 속에 있는 청나라의 연호를 모두 지워버렸다. 우헌(寓軒)이라 호를 지었다.

1663년(35세,현종4년) 이즈음 송시열의 문하에 들어갔다 . 서인이 노론파와 소론파로 대립하게 될 때 그는 노론을 선택하여 송시열과 더욱 가깝게 지내고 집안의 아들,  조카들을 송시열의 제자가 되게 하였다.  정이, 주희(朱熹), 퇴계이황(李滉), 율곡이이(李珥)를 높이 받들고, ⌈태극도설(太極圖說) ⌋, ⌈통서(通書) , ⌈황극경세(皇極經世) ⌋, ⌈역학계몽(易學啓蒙) ⌋, ⌈정몽(正蒙) ⌋등 성리학 서적을 깊이 연구하였다.
특히 성명(性命), 이기(理氣), 도기(道器), 태극 등의 개념에 관심이 많았다. 스승 송시열과 이런 문제에 대해서 대화한 내용이 그의 문집에들어있다.

1667년(39세,현종8년) 제주도에 표류해 온 임인관(林寅觀) 등 중국인 95명을 청나라에 압송하였다.  그들은 청나라 만주족에 대항하던 복건성(福建省)의 명나라 유민들이었다.  그들은 자기들이 일본으로가던 상인인데 풍랑을 만나 표류하게 되었다며 일본으로 보내 주든지고향으로 돌아갈 수  있게 해달라고 요청하였다.  그러나 조정의 관리들은 그들이 가진 물건으로 보아 평범한 상인이 아니라 중국 남부지방에 명나라의 잔존세력들이 세운 남명(南明)의 관리들이라고 판단하였다.  조정에서는 청나라의 후환이 두려워 그들을 강제로 청나라로 압송하였다.  명나라 유민들을 결국 청나라에 보냈다는 소식을 들은 박상현은 명나라를 섬기는 충정으로 조정의 결정에 분개하였다. 이에 세상에 나갈 뜻을 끊고 두문불출하며 경전연구에 힘썼다.
명나라 유민들 송환 사건은 130여 년이 지난 정조때 다시 문제가 제기 되었다.

1797년(정조21년)에 정조는 임인관 등95인이 청나라에 굴복하지 않고 명나라를 섬긴 절개가 가상한데 그들을 받아들이지 않고 청나라에모두 강제 압송한 일은 잘못된 일이라고 평가하였다.  이러한 정조의평가에 따라 그들은 현충사(顯忠祠)에 배향되었다.

1677년(49세,숙종3년) 9월 27일 큰 아들 박광일(朴光一)과 집안 조카 박광후(朴光後)를 송시열이 유배가 있는 장기(長鬐)로 보냈다.  두 사람은 박상현의 편지를 전하고 예물을 올리며,  송시열의 문인(門人)이 되는 의식을 행하였다.

1684년(56세,숙종10) 두아들 박광일과 박광원(朴光元)을 회덕(懷德)의 송시열(宋時烈)에게 보내 가르침을 받도록 하였다. 아들 박광일은자는 사원(士元), 호는 손재(遜齋)로, 1701년 천거를 받아 내시 교관(內侍敎官), 시강원 자의(侍講院咨議) 등에 임명되었으나 모두 사퇴하고 권상하(權尙夏), 정호(鄭澔) 등과 교류하며 학문연구에 힘썼다. ⌈손재문집 ⌋은 그의 작품이다.  둘째 아들 박광원은 자는 사선(士善)이며, 호는 백야당(白野堂)이다.  1712년에 참봉(參奉)이 되었으며, 이어서 종묘봉사(宗廟奉事)·의금부도사(義禁府都事) 좌랑, 정랑, 청암도찰방(靑巖道察訪) 등을 역임하고, 1738년에 첨지중추부사(僉知中樞府事)가 되었다.

1689년(61세,숙종15년) 1월, 제주도로 귀양가는 송시열을 전송하였다.  6월, 송시열이 사약을 받고 사망하였다는 소식을 듣고 곡을하였다.

1690년(62세,숙종16년) 6월, 송시열의 제문(祭文)을 지었다. 이즈음박상현의 모습은 권상하(權尙夏)가 지은 묘갈명에 잘 묘사되어 있다.

“공(박상현)은 기상과 용모가 장엄하고 중후하며 정신과 풍채가 조용하고 안정되어 있었다.  말이 간결하고 걸음걸이가 조용하며 간사하고 문란한 소리나 일들은 화살처럼 멀리피하였다.  집안에서는 삼가고 부드러워서 친척을 접대하면 각각 그들의 환심을 얻고, 멋대로 구는 것을 보면 더불어 겨루지 않았다. 옛 사람이 구별하여 밝히지 않은 말을 늘 외우면서 되새겼다.  그러므로 향리 사람들이 감복하여 우헌 선생(寓軒先生)이라 칭하고 이름을 부르지 않았다.”( ⌈墓碣銘 ⌋)

1693년(65세,숙종19년) 암행어사가 된 교리(校理) 김만길(金萬吉)이임금에게 박상현을 추천하였다.  1월 12일에 사망하였다.  3월에 광주(光州) 북쪽 태산(台山)에 장사를 지냈다. 숙종40년(1714년)에 사헌부장령 (掌令) 에  추증(追贈) 되었다.  권상하(權尙夏)가 묘갈명을 짓고, 이희조(李喜朝)가 묘지명을 지었다.  문집으로 ⌈우헌선생문집(寓軒先生文集) ⌋ 이 있다.  그는 사단칠정설(四端七情說)은 율곡이이의 설을 따랐으며, 예학은 김장생(金長生)을 따랐다.  천문역법에도 밝아<음양소장도(陰陽消長圖)>와 <혼천의(渾天儀)>를 만들기도 했다.

⌈우헌선생문집 ⌋은 4권 2책으로 1898년에 간행 되었으며, 규장각에그 필사본이 소장되어 있다. 스승인 우암 송시열과의 편지문, 시문 그리고 제문(祭文) 등이 다수 실려있다. 시문 중에는 제주도로 귀양가는 송시열을 전송하는 시, 송시열을 곡하는 시 등이 있다.  이 외에도 ⌈무극이태극(無極而太極)⌋, ⌈이설(理說)⌋, ⌈성설(性說)⌋,
⌈성리문답(性理問答)⌋, ⌈잡설(雜說)⌋, ⌈권경변(權經辨)⌋ 등의 문장이실려 있다.
<참고자료>
⌈송자대전⌋ 제 16권 어록3,  박광일(朴光一)의 기록
권상하, ⌈박상현의 묘갈명⌋, ⌈국역국조인물고⌋,  세종대왕기념사업회, 1999