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예진(高禮鎭,1875-1952)


 

고예진(高禮鎭,1875-1952)                                   PDF Download

 

1875(고종 12)∼1952. 일제 강점기의 독립운동가이다.

관은 장흥(長興). 자는 수문(秀文), 호는 송천(松川)이다. 전라북도 고창군 흥덕면 출신으로 1875년(고종 12) 11월 24일에 태어났다. 면암(勉庵) 최익현(崔益鉉)의 문하에서 수학하였다.

1905년 11월에 일제가 강제로 을사조약(乙巳條約)을 체결하고 외교권을 박탈하자, 이에 분개하여 형제인 고용진(高龍鎭)․고석진(高石鎭)과 함께 의병에 투신하였다. 을사조약은 1905년 일본이 대한제국을 강압하여 체결한 조약으로, 외교권 박탈과 통감부 설치 등을 주요 내용으로 한다. 이 조약으로 대한제국은 명목상으로는 일본의 보호국이나 사실상 일본의 식민지가 되었다.

1906년 4월에 최익현이 태인(泰仁) 무성서원(武城書院)에서 강학회를 열고, 호서․호남 일대의 유림 인사들을 규합하여 항일운동 단체인 면암의진(勉庵義陣)을 구성할 때 함께 참가하여 항일투쟁을 전개하였다. 최익현의 독립의군부(獨立義軍部)에서 정훈(政訓)을 담당하여 전국 8도에 의병궐기의 격문을 전포하였다. ‘의진’이 순창에 이르렀을 때 관군에 포위되어 싸우려고 하였으나, 최익현이 민족끼리 더 이상 골육상잔할 수 없음을 선언하고서 항전을 금지하였다. 그러다 순창(淳昌) 귀암사(龜巖寺)에서 크게 패하였는데, 그 때 일본군에게 체포되어 전주감옥에 투옥되었다가 같은 해 12월에 석방되었다.

1914년 임병찬(林炳瓚)이 대한독립의군부(大韓獨立義軍府)를 결성하고 국권회복운동을 전개하자 이에 가담하여 서기관(書記官)으로 활약하였다. 대한독립의군부는 일제강점기인 1912년에 임병찬이 고종황제의 밀명을 받아 만든 비밀결사단체 조직이다. 전국 의병장과 유생들이 참여하였으며, 이들은 주로 호남지방을 중심으로 경기도와 강원도 지역까지 그 활동영역을 넓혀갔었다. 이 단체는 대한제국 때의 왕정 복고주의를 추구하였으며, 전국적인 의병투쟁을 벌이는 것을 목표로 삼았다. 독립의군부를 조직한 임병찬은 한때 조선총독부 관리에게 한국 침략의 부당성을 통고하고 ‘국권반환요구서’를 수차례 보내기도 하였다. 그러나 독립의군부는 일제에 의해 사전에 발각되면서 임병찬을 비롯한 지도부가 구속되는 사태로 일단락되었다.

1919년에는 김창숙(金昌淑) 등이 파리 만국평화회의에 보내는 파리장서(巴里長書)에 호남 유림의 일원으로 서명하는 등 항일 독립투쟁에 앞장섰다. 파리장서는 한국의 유림들이 프랑스 파리에서 1919년 개최된 세계만국평화회의에 보낸 조선독립을 호소하는 장문의 서한이다. 파리장서 호소문은 일본의 방해와 각국의 이해관계가 얽혀 당시 파리강화회의에 정식안건으로 상정되지는 못했으나, 3.1운동과 함께 한민족의 독립운동을 전 세계에 천명한 사건으로 기록되고 있다.

그 뒤 부모의 상으로 귀가 중에 일본군에 체포되어 전주 감옥에서 옥고를 치른 후 귀향하였다. 대한제국에서는 고예진에게 공적이 많음을 알고 밀칙종삼품(密勅從三品) 통훈대부(通訓大夫)를 명하였다. 저서로는 송천집(松川集)이 있다. 1977년 건국포장이 추서되고 1990년 건국훈장 애국장이 추서되었다.

지금도 전라북도 고창군 흥덕면 송암리 358번지에는 애국지사 고순진․고예진선생 추모비(愛國志士高舜鎭高禮鎭先生追慕碑)가 있다. 이것은 한말의 애국지사 고순진(高舜鎭)과 고예진(高禮鎭) 형제의 애국 충절을 기리기 위하여 1986년 5월 5일 건립하였다. 국가보훈처 지정 현충시설로 장흥 고씨 장령공파 송암 종중에서 관리하고 있다. 비는 총 2기로 모두 거북모양의 기단 위에 오석 비신을 올리고 이수를 얹은 형태이다. 비 전면에는 각각 ‘만취고선생추모비(晩翠高先生追慕碑)’, ‘송천고선생추모비(松川高先生追慕碑)’라고 새겨져 있다.

참고로 고예진의 형인 고순진은 고예진과 함께 고시청의 장남과 4남으로 이곳 성암리 379번지에서 태어났다. 고순진은 호가 만취(晩翠)이며, 고예진과 마찬가지로 최익현의 문인이다. 1906년 최익현 의거 당시 항일투쟁을 호소하는 격문을 인쇄하여 전국으로 보냈다. 1914년에는 무기와 군량미, 거액의 군자금 등을 독립의군부에 헌납하였고, 1919년에는 대한독립청원서(파리장서)에 서명하였다. 이후 1999년 건국훈장 애족장이 추서되었다.

고예진의 시문집 송천집은 모두 13권 4책으로 신활자본이다. 1963년 친척인 고만상(高萬相)․고좌상(高佐相)․고광은(高光殷) 등이 편집하여 간행하였다. 권두에 최익현의 손자인 최용식(崔龍植)의 서문과 권말에 고만상․고좌상․고광은 등의 발문이 있다. 전라남도 장성의 변시연가(邊時淵家)에 소장되어 있다.

권1에는 시 500여수, 부(賦) 2편, 표(表) 1편, 권2에는 서(書) 144편, 권3에는 잡저 15편, 권4에는 서(序) 39편, 권5에는 기(記) 44편, 권6에는 발(跋) 6편, 찬(贊) 1편, 축문 6편, 혼서(婚書) 4편, 권7에는 제문 23편, 권8에는 상량문 19편, 권9에는 비문 14편, 묘표 4편, 권10에는 묘갈명 15편, 권11에는 행장 10편, 사장(事狀) 5편, 가장 2편, 전(傳) 5편, 찬장(贊狀) 8편, 권12․13에는 부록으로 구성되어 있다.

시에는 「근차면암선생일옥구호운(謹次勉菴先生日獄口呼韻)」․「탄시색(嘆時色)」․「척확(尺蠖)」 등 폭넓은 제재로 구성된 시가 고루 실려 있다. 서에는 그가 최익현에게 보낸 3편의 「상면암선생(上勉菴先生)」과 그의 아들 최영조(崔永祚)에게 보낸 12편의 「상운재최장(上雲齋崔丈)」을 비롯하여 당시의 시대상을 이해하는데 참고자료가 되는 다수의 편지가 실려 있다. 잡저에는 독립운동사 연구에 참고가 되는 「면암선생병오거의시사실록(勉菴先生丙午擧義時事實錄)」과 그의 실천적 학문연마에 관한 탐구결과인 「경의문대(經義問對)」 등이 있다.

참고할 만한 문헌으로는 면암집(勉庵集), 흥성지(興城誌), 벽옹김창숙일대기(壁翁金昌淑一代記), 대한민국독립유공인물록(大韓民國獨立有功人物錄)(국가보훈처, 1997), 독립운동사(독립운동사편찬위원회, 1970) 등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