청성(靑城) 성대중(成大中:1732~1809)


청성(靑城) 성대중(成大中:1732~1809)        PDF Download

 

성대중의 본관(本貫)은 창녕(昌寧), 자(字)는 사집(士執), 호(號)는 청성(靑城)‧동호장(東湖長)‧순재(醇齋)‧용연(龍淵)이다. 청성은 포천(抱川)의 다른 이름이다. 포천군(抱川郡) 소흘면(蘇屹面) 적안촌(赤岸村)에서 소계(疎溪) 성효기(成孝基: 1701~1770)의 아들로 태어나서 78세를 일기로 고향 포천으로 돌아와서 생을 마쳤다. 포천은 그의 4대조 성여완(成汝完: 1309~1397) 때부터 살았던 곳이다.

6대조인 은궤옹(隱几翁) 성이문(成以文: 1546~1618)은 홍문관(弘文館) 부제학(副提學)과 대사간(大司諫)을 역임하였고, 5대조인 성준구(成俊耈: 1574~1633)는 이이첨(李爾瞻: 1560~1623) 등의 모함으로 남해(南海)에서 16년간 유배생활을 하다가 인조반정(1623) 때 유배에서 벗어나 황해감사(黃海監司)와 양서관향사(兩西管餉士)를 지냈다. 그가 청하(淸河) 최씨(崔氏)인 덕남(德男)의 딸과 혼인하여 후룡(後龍)을 낳으니, 바로 성대중의 고조(高祖)이다. 고조인 성후룡(1621~1671) 때부터 서얼(庶孼)의 가계(家系)로 내려오게 되었다. 성후룡은 우의정을 지낸 풍계(楓溪) 김상용(金尙容: 1561~167)의 서녀(庶女)와 혼인하여 성완(成琬: 639~1710)과 성경(成璟: 1641~1712)을 낳았다. 증조인 성경은 성몽규(成夢奎)를 낳고 성몽규는 성효기를 낳았다.

성대중은 서얼출신이었으나 그의 선대는 벼슬을 계속 해왔으며, 그의 아들 성해응(成海應: 1760~1839)과 손자 성우증(成祐曾: 1783~1864)에게 이르도록 면면히 문한(文翰)의 전통을 이은 가문이었다. 손자 성우증은 자신의 가문에 대하여 ‘문장으로 이름이 났으며, 특히 일본에까지 드날렸음을 밝혔고, 큰아버지인 성해응은 문장은 물론 경학에까지 조예가 깊어 고금을 꿰뚫었음’을 회상하기도 했다.

그는 1753년(영조29) 22세에 생원시에 합격한 후 1756년(영조32) 25세에 정시(庭試)에 합격하였다. 1759년(영조35) 28세에 교서관 부정자, 정자, 박사가 되었으며, 이듬해에는 문신전강(文臣殿講)과 전경문신전시(專經文臣殿試)에서 영조의 칭찬을 받고 말을 하사받기도 하였다. 1763년(영조39) 32세에 통신사(通信使) 조엄(趙曮: 1719~1777)을 따라 제11차 계미통신사행(癸未通信使行)의 서장관(書狀官)이 되어 일본에 갔다. 그 이전에 이미 성대중의 종증조부인 성완은 1682년 임술사행(壬戌使行)의 제술관으로, 종조부(宗祖父) 성몽량(成夢良: 1673~1735)은 숙종(肅宗) 때 제9차 기해사행(己亥使行)에 통신사의 서기로 일본을 다녀오기도 하였다. 대부분 사행을 떠나기 전에 기존의 사행기록을 숙독하였음을 볼 때, 성대중은 이미 통신사로 다녀온 문사들의 기록들과 사행문화를 숙지하고 있었음을 알 수 있다.

일본에 체류할 때 시문으로 두각을 보여 일본인의 찬사를 받았으며, 사행원 중에서 성대중의 필체를 가장 높게 평가하여 길 가는 도중에도 사람들에게 글씨를 써주기도 하였다. 사행 다녀온 기록을 「일본록(日本錄)」이라는 이름으로 남겨놓았다. 1책은 「사상기(槎上記)」라는 이름으로 매일매일 있었던 일을 일기 식으로 적은 것이며, 2책은 바로 「일본록」으로 일본에서 체험한 견문(見聞)을 기록한 것이다. 분량은 많지 않지만 새로운 것에 대한 호기심과 학자적인 모습을 뚜렷하게 나타내고 있다. 예를 들면, 일본에서 수차(水車)를 적극 활용하여 민생에 도움을 준다는 사실을 포착하고 눈여겨보았다거나, 예수와 마테오리치의 학문에 대한 언급은 계미사행을 다녀왔던 다른 문사들의 기록에는 보이지 않는 귀중한 자료라고 할 수 있다. 일본에서의 체험은 귀국 후 이덕무나 홍대용 등 실학파 문인들에게 전해져 영향을 주었다고 하겠다.

성대중과 절친하게 교유한 인물을 꼽아보자면 청장관(靑莊館) 이덕무(李德懋: 1741~1793), 연암(燕巖) 박지원(朴趾源:1737~1805), 현천(玄川) 원중거(元重擧:1719~1790), 중운(仲雲) 이한진(李漢鎭:1732~?), 중흥(仲興) 나걸(羅杰?~?), 효효재(嘐嘐齋) 김용겸(金用謙:1702~1789) 등이 모두 연암그룹으로 분류되고 있다. 이들이 선진문물의 수용에 적극적이었음을 볼 때 성대중 역시 넓은 의미에서 실학파(實學派) 문인으로 볼 수 있겠다. 1764년(영조 40) 33세에 성균관 전적(成均館典籍), 승문원 교검(承文院校檢), 봉상시 판관(奉常寺判官)을 역임하였다. 1765년(영조 41) 34세 되던 해에 홍봉한(洪鳳漢)이 서얼(庶孼) 출신 인재로 추천하자 영조가 등용할 것을 명하여, 1766년(영조 42) 35세에 울진 현령(蔚珍縣令)이 되었다. 이때 자신의 호를 ‘동호장(東湖長)’이라 하였다.

울진에서 현령으로 약 5년간을 있으면서 울진의 옛 이름인 ‘선사(仙槎)’를 넣어 「선사만랑집(仙槎漫浪集)」이라는 시집을 남겼다. 개인이 지은 시뿐만이 아니라, 스승인 김준(金焌: 1695~1775)을 비롯하여 스승이 소개시켜준 임배후(林配垕)‧안석경(安錫儆)‧민백순(閔百順) 등을 만나고 함께 유람하며 지은 시들도 실려있다.

1772년(영조 48) 41세에 아버지의 장례를 마치고 사헌부 지평이 되었다. 당시 견책당한 간신(諫臣)을 구원하다가 삭직(削職)되었지만, 이듬해에 다시 지평에 제수되었다. 1774년(영조50) 43세에 사헌부의 장령이 되고, 이어 평안도 운산 군수(雲山郡守)가 되었다. 1777년(정조1) 46세에 벼슬이 갈리자 돌아와 1778년(정조2) 47세에 용양위 부사과(龍驤衛副司果)가 되었다.

1781년(정조5) 50세에 교서관 교리가 되었다. 당시 교서관을 외규장각(外奎章閣)으로 개편하였는데 성대중은 이를 관장하여 서적의 수교(讐校)와 편찬을 담당하였고, 51세 되던 해에 「국조보감(國朝寶鑑)」을 간행한 공로로 승서(陞敍)되었다. 다음 해에 경상도 흥해 군수(興海郡守)가 되어 구휼(救恤)정책을 잘 수행한 공으로 1784년(정조8) 53세에 승서되었다. 1787년(정조 11) 56세에 교서관 교리가 되었을 때 응제(應製)에서 수석을 차지하였고, 북청 도호부사(北靑都護府使)가 되어 부임할 때에 임금이 어필(御筆)과 설전첩(雪牋帖)을 하사하여 옛사람의 격언(格言)을 써서 올리게 하였다. 이 때 패관소품(稗官小品)의 문체가 유행하고 있던 차에 정조는 문체반정(文體反正)을 천명(闡明)하고 글을 지어 올리게 하니, 고금의 문로(文路)를 논한 수천 자의 글을 지어 올리기도 하였다.

1792년(정조 16) 문체반정(文體反正) 때에는 그의 글이 순정(醇正)한 글이라는 평가를 받아 노론계 북학자들 중에서는 거의 유일하게 정조의 칭찬을 받았으며, 종삼품(從三品)에 해당하는 북청부사(北靑府使)로 특채되었다. 그가 받은 가장 높은 직급이었다. 정조는 여러 각신들에게 북청에 부임하는 성대중을 위해 전별연(餞別宴)을 열어주도록 명하기도 하였다. 그리하여 남공철이 전별연을 열었고 이 자리에는 이덕무(李德懋)․서영보(徐榮輔)․이서구(李書九)․유득공(柳得恭) 등이 참석하여 함께 시를 짓기도 하였다.

1793년(정조 17) 62세에 통정대부(通政大夫)에 오르고, 이듬해 위원 군수(渭源郡守)가 되어 호전법(戶錢法)을 행하고 사군을 없애어 민심을 다스렸다. 1795년(정조19) 64세에 체직되어 포천으로 돌아갔다. 이듬해인 1796년에 정조의 특명으로 「장릉사보(莊陵史補)」를 수교(讐校)하고, 이서구(李書九)와 「존주휘편(尊周彙編)」을 편찬하였다. 그 해 겨울 임금이 「춘추(春秋)」를 간행하려 하면서 대문(大文)의 글씨를 쓰도록 하고 학식과 필법이 순정(醇正)하다고 칭찬하자 ‘순재(醇齋)’라는 자호(自號)를 지었다. 1797년(정조 21) 66세에 오위장(五衛將)이 되었고, 「춘추」가 간행되자 상으로 말을 하사받았다.

1803년(순조 3) 72세 되던 해 가을에, 아들 성해응(成海應)이 음성 현감(陰城縣監)이 되자 아들의 부임지로 따라가면서 화양동(華陽洞)의 문정서원(文正書院)과 만동묘(萬東廟)를 배알하고 그 주변을 유람한 뒤 「화양동기(華陽洞記)」를 지었다. 1807년(순조 7) 76세 되던 해 가을에 고향인 포천으로 돌아왔다. 포천에서 후학을 가르치던 중 1809년(순조 9) 2월 17일 78세를 일기로 생을 마감하였다.

그가 저술한 기록물 가운데 「청성잡기(靑城雜記)」가 전하는데 자기 자신을 언급한 부분이 흥미롭다. 영조로부터 자신의 관상에 대하여 평가받은 일화를 적고 있다. 기록에 실려있는 그 내용의 일부를 소개하면 다음과 같다.

“영조대왕(英祖大王)이 황송하게도 나의 얼굴을 가지고 한번은 임헌(臨軒)하여 연신(筵臣)들에게 말하였다. ‘성(成) 아무개의 얼굴은 하관(下觀)이 풍만한 것이 강자아(姜子牙: 강 태공(姜太公))의 모습과 닮았다.’ 당시 내 나이 아직 서른이 못 되었기에 혼자 남몰래 웃으면서 생각했다. ‘나는 서른이 되기도 전에 성주(聖主)를 만났는데 어찌 여든이 되어서야 문왕(文王)을 만난 자와 비교한단 말인가. 성왕(聖王)의 말도 때로는 틀릴 때가 있나 보다.’

지금 내 나이 예순이 넘어 귀밑머리가 희끗희끗해진 뒤에야 비로소 금상(今上: 정조)으로부터 세상에 흔치 않은 대우를 받게 되었다. 옛 문장에 재주 있는 신하로 한나라의 두 사마씨(司馬氏: 사마천(司馬遷)과 사마상여(司馬相如)) 이후로 임금에게 인정을 받은 자를 어찌 헤아릴 수 있겠는가. 그러나 모두 나에게 미치지는 못한다. 이제야 비로소 영조대왕이 나를 강태공에 비유한 것이 아마도 오늘을 예견한 것이었음을 알고 나니 감개무량하고 황송하기 그지없다. 그래서 삼가 기록하여 자손들에게 보이는 것이다.”

 

성대중은 영조에게 관상에 대하여 들을 당시에는 왜 하필 나이 많은 강태공에 비유하는지 속으로 웃었다고 고백하였다. 나아가 임금의 말로 옳지 않을 때가 있는 것이라고까지 생각하였다. 그러나 세월이 흘러 나이가 들었을 때 정조에게까지 대우를 받게 되는 지경에 이르자, 영조께서 강태공에 비유한 이유를 짐작해 볼 수 있겠다고 고백하며 감개무량함을 토로하였다.

하지만 후손들에게는 단지 관상과 골격으로 함부로 판단하지 않기를 경계하고 있다. 계속된 그의 기록을 마저 보기로 한다.

“그러나 얼굴 모습이 풍만하고 수척한 것은 오로지 양생에 달려 있으니 단지 골격만이 부귀로 인해 크게 자라는 것은 아니다. 나는 어렸을 때 지나치게 수척해서 사람들이 모두 요절할 것이라고 여겨 장가도 들지 못할 뻔했는데, 가정에서 교도하여 보양을 적절하게 한 덕분에 스물이 넘어서는 혈기가 충만하고 얼굴이 풍만해서 도리어 관상이 좋다는 말을 들었다. 일본에 갔을 때 우리 일행을 살펴본 자들이 대부분 나를 두고 풍채가 으뜸이라고 하였다. 지금도 허연 수염에 홍안이라서 사람들이 나에게 뭔가 특별한 수양 방법이 있을 것이라고 의심하는 경우가 있지만, 사실 섭생(攝生)조차도 이러고저러고 할 만한 것이 전혀 없는데 무슨 특별한 수양 방법이 있겠는가. 다만 어렸을 때부터 생각을 적게 하고 기욕(嗜慾)을 줄였을 뿐이다.

옛사람이 말하는 ‘세 가지(술, 여색, 재물)에 미혹되지 않는다’는 것을 내가 거의 실천한 듯하니, 이것이 내가 내 자신을 양생(養生)하는 방법이다. 이것은 모두 자기 자신에게 달려있는 것이어서 누구나 할 수 있는 것이지만 섭생(攝生)은 오히려 정력을 소모하는 것이다. 그래서 이 점을 아울러 기록하여 자손들을 경계하는 것이다.

금상(정조)이 또 나의 얼굴을 가지고 경연에서 여러 차례 언급하여 못난 나의 관상이 재차 성왕(聖王)의 인정을 받았으니, 어찌 평생에 잊지 못할 은총이 아니겠는가. 이것 또한 자손들이 대대로 전해야 할 것이다.”

 

성대중은 영조와 정조 시대에 서얼(庶孽) 출신으로서 문학적 재능에 뛰어나서 수많은 벼슬이력과 다양한 인물들과의 교유를 통해 존재를 드러냈던 지식인이다. 문인들만이 아니라 다양한 예술인들과의 교유를 통해 그의 학문과 사유의 깊이를 더했음을 알 수 있다. 우리나라의 실학파 문인들에게도 영향을 주었을 뿐만 아니라, 일본 문인들과도 교유하며 지은 창화시(唱和詩)나 필담(筆談)들의 기록을 볼 때, 그의 문학적 재능과 식견이 탁월했다는 것은 미루어 짐작하고도 남음이 있다.

 

<참고문헌>
「조선왕조실록(朝鮮王朝實錄)」
「국조방목(國朝榜目)」
「일성록(日省錄)」
「국조보감(國朝寶鑑)」, 신숙주(申叔舟).
「다산시문집(茶山詩文集)」, 정약용(丁若鏞).
「오주연문장전산고(五洲衍文長箋散稿)」, 이규경(李圭景).
「번암집(樊巖集)」, 채제공(蔡濟恭).
「약천집(藥泉集)」, 남구만(南九萬).
「여유당전서(與猶堂全書)」, 정약용(丁若鏞).
「금릉집(金陵集)」, 남공철(南公轍).
「농수집(農叟集)」, 최천익(崔天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