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형규(鄭衡圭)


정형규(鄭衡圭)                                                           PDF Download

1880년(고종 17)∼1957년. 근현대의 유학자.

정형규는 1880년 경상도 삼가현 마협(지금의 경남 합천군 쌍백면 평구리)에서 부친 정방수(鄭邦壽)와 모친 남평 문씨 사이에서 태어났다. 부친은 출세를 위해 10여 년을 서울에서 보내다가 여의치 않자

“장부가 이미 출사할 수 없으면 몸을 닦고 집안을 바로잡는 것을 주장해야 하니, 이것이 바로 나의 직분이다.”

라고 하고 고향으로 돌아온 후, 자식을 가르치는데 더욱 힘썼다.

부친은 일찍이 학문에 종사하지 못한 것을 한스럽게 여겨 자식의 교육에 더욱 힘썼다. 부친은

“농사는 한 가지 작은 일이지만 힘을 기울이지 않으면 추수할 수 없다. 학문하는 것이 그것과 무엇이 다르겠는가.”

라고 하면서 자식들에게 항상 열심히 학문에 매진할 것을 독려하였다. 나라가 망했다는 소식을 듣고는 북쪽을 향하여 통곡하고 며칠간 음식을 끊었으며, 그 후로는 제사가 아니면 의관을 하지 않고 항상 갈대 삿갓을 썼다고 한다.

또한 모친인 문씨는 가난할 때 시집을 와 10년 만에 가업을 일으켜 세운 분으로, 경술국치를 당해서는 정형규를 불러놓고

“너에게 학문을 가르친 것은 본래 입신양명하여 가문을 빛내게 하려던 것인데 이제는 끝났다. 네가 이미 유학에 종사해 마음을 세우고 일을 처리함에 정대하여 뜻을 크게 가지고 나라가 어지러운 때에 기개를 세워야 한다.”

라고 당부하였다.

정형규는 17세 때 부친의 친구인 권명희(權命熙)에게 수학하였는데, 권명희는 송병선(宋秉璿)의 문인이었다. 이로 인해 23세 때인 1899년 송병선이 남행한다는 말을 듣고 김천 직지사로 달려가 뵙고, 이때부터 그를 스승으로 모시게 된다.

그러나 송병선은 1905년 을사조약에 항거하여 조약의 폐기와 오적(五賊)의 처단을 요구하다 절의를 지키기 위해 70세를 일기로 음독자결하자, 정형규는 송병순(宋秉珣)의 문하에 들어가게 된다. 송병순 또한 1912년 일본이 은사금을 보내고 경학원의 강사로 나오도록 요구한 것을 거부하다 74세를 일기로 절의를 지키기 위해 음독자결한다.

정형규는 30세 되는 1909년에 친구 전기진(田璣鎭)과 함께 부안 앞바다의 고군산도에 기거하는 전우를 찾아갔다. 그는 전우를 만나기 위하여 1904년 공주 신안으로 찾아갔으나 만나지 못한 일이 있었던 사실에서 일찍부터 전우의 문하에서 학문할 뜻을 지니고 있었음을 알 수 있다. 이후 그는 모원재(慕遠齋)에서 강학하면서 스승의 학문을 계승하여 의리를 지키고 후진을 양성하는데 힘썼다. 정형규는 스승에 대한 흠모의 정을 다음과 같이 기술한다.

 

“아! 지금 나라가 망하고 도가 없어져 의리가 어두워지고 막혔는데, 선대의 성인들이 전수한 것을 우뚝 세우고 백번을 꺾어도 꺾이지 않는 이는 오직 우리 스승 한 사람뿐이다. 우리들이 다행히 간옹(전우)의 뒤를 따라서 학문이 거의 어긋나지 않게 되었다.”

또한

“선생께서 돌아가심에 대중들이 우러를 곳이 없고 학자는 물어볼 곳이 없어 온 세상이 긴 밤에 들어가게 되었으니, 나는 한 사람의 있고 없음이 나라의 성쇠(盛衰)에 이처럼 지대하게 관계됨을 알지 못했다.” 이는 「간재선생어록」과 「간재선생행록」을 정리하고 있는 데서도 여실히 드러나고 있다.

스승인 전우는 당시 영남의 곽종석과 쌍벽을 이루는 대표적 기호학파의 유학자이다. 그는 (율곡)이이-(사계)김장생-(우암)송시열-(농암)김창협-(미호)김원행-근재(박윤원)-(매산)홍직필-(전재)임헌회-(간재)전우로 이어지는 기호학파 낙론계열의 주요한 학통을 계승한 인물이다. 이처럼 정형규는 성장하여 송병선과 송병순의 문하에 나아가 수학하다가, 이들이 돌아가시자 전우의 문하에 나아가 종신토록 귀의한다. 스승의 학문적 전통을 계승하여 의리를 지키고 강학에 힘쓰던 정형규는 1957년 1월 14일 고향인 쌍백에서 향년 78세를 일기로 세상을 떠났다.

그는 망국의 시대 상황 속에서 유교적 의리에 기반한 강인한 척사의식과 실천성을 보여주었으며, 스승인 전우의 길을 따라 유교적 도의(道義) 교육과 계승을 위해 평생의 노력을 기울였다. 이는 제자들의 기억을 통해 전해지는 생활상에서도 여실히 드러난다. 정형규의 제자로서 성균관장을 지낸 최근덕(崔根德) 유교학술원장은 평생 한 치라도 흐트러지는 스승의 모습을 본 적이 없었다고 회상하고 있다. 함께 기거를 하면서 가르침을 받을 때도 의관이 흐트러지거나 자세가 흐르러진 적을 본 적이 없다고 하니, 얼마나 꼿꼿하게 삶을 살았는지 충분히 유추할 수 있다. 평생 흐트러지지 않는 삶의 태도를 견지한다는 것은 결코 보통 사람들에게는 쉽지 않는 일이다.

정형규의 성리설은 기호학파의 학문적 전통에 기초하고 있으며, 특히 전우의 성리학적 입장을 철저히 계승하고 있다. 그의 이론적 요지는 ‘리는 무위하고 기는 유위하다’는데 있다. ‘무위(無爲)’는 작용성이 없다는 말이고 ‘유위(有爲)’는 작용성이 있다는 말이다. 이러한 이론적 바탕 위에서 당시 리의 능동성과 관련된 리의 주재나 리의 동정문제에 대해서도 ‘리는 무위하다’는 관점에서 비판한다.

 

“‘리는 무형하고 무위하여 유형하고 유위한 것의 주인이 되고, 기는 유형하고 유위하여 무형하고 무위한 것의 그릇이 된다.’라고 말하지 않았는가. 이것은 리와 기의 능소(能所)의 구분이 되는 요지를 말한 것이다. 그 아래에서 ‘양이 동(動)하고 음이 정(靜)한 것은 그 기틀이 저절로 그러한 것이니 시키는 것이 있는 것이 아니다’라고 하지 않았는가. 이것은 양이 동하고 음이 정하는 것은 그 기틀이 저절로 그러한 것임을 말한 것이요 따로 그렇게 시키는 것이 있는 것이 아니다. 그 아래에서 ‘양의 동은 리가 동에 타는 것이지 리가 동하는 것이 아니며, 음의 정은 리가 정에 타는 것이지 리가 정하는 것이 아니다.’라고 하지 않았는가. 이것은 동정이 기틀이고 탄 것이 리임을 말한 것이다. 그 아래에서 ‘양이 동하고 음이 정하는 것은 그 기틀이 저절로 그러한 것이며, 그 양이 동하고 음이 정하는 까닭이 리이다.’라고 하지 않았는가. 이것은 유행에 나아가 보면 그 기틀이 저절로 그러한 것이며, 근원에 나아가 보면 반드시 소이연이 있음을 말한 것이다.”

 

이처럼 정형규는 ‘리는 무위하고 기는 유위하다’는데 근거하여 리의 동정을 부정한다. 음양이 동정하는 것과 같은 것은 유위한 기가 하는 일이요, 무위한 리가 할 수 있는 일이 아니다. 리는 다만 동정과 같은 작위적 개념이 아니라 ‘양이 동하고 음이 정하게 하는 까닭’에 해당하는 소이연의 개념이다. 그렇다면 정형규는 무엇 때문에 리의 동정을 부정하고 리의 무위성을 강조하는가.

그것은 리와 기의 개념적 구분을 분명히 하기 위한 것이다. 여기에서 리란 존재의 근원이자 가치의 근원이 된다. 리는 사물을 생겨나게 하는 근원(또는 원인)에 해당하며, 실제로 사물이 생겨나는 것은 전적으로 기의 작용에 의한다. 리는 궁극적 원인자이므로 절대적 선일 수밖에 없다. 그러나 현실세계는 차별적 모습으로 존재하며, 선도 있고 악도 있는 것이 사실이다. 리는 절대선이지만 현실세계는 그렇지 않으며, 그것은 기에 원인이 있다. 만약 리에 동정과 같은 작용성을 부여한다면, 리의 작용에 의해 생겨난 현실세계는 선만 존재해야 한다. 왜냐하면 리는 절대선의 개념이기 때문이다. 그렇지만 현실세계는 그렇지 않다는 것이다.

‘리가 무위하다’는 것은 리가 기에 의해 드러날 수도 있고 가려질 수도 있다는 것이다. 리가 기에 의해 가려지면 리의 절대선이 드러나지 못하므로 악의 세계가 된다. 반대로 리가 기에 의해 가려지지 않으면 리의 절대선이 드러나서 선의 세계가 된다. 따라서 만약 리에 능동적 작용성이 있다면 현실세계에서의 악은 존재하지 말아야 한다. 악이 존재하지 않으므로 기를 검속하는 공부도 필요가 없다.

그러나 현실세계는 그렇지 않다. 현실에는 엄연히 악이 존재하며, 이러한 악으로부터 벗어나기 위해서는 기를 검속하는 공부가 필요하다. 이처럼 현실세계의 악을 설명하는 과정에서 기가 리를 구속할 수 있다는 것이 바로 ‘리는 무위하고 기는 유위하다’는 설의 요지이다.

또한 그의 심성론의 바탕이 되는 이론적 요지는 ‘성은 리이고 심은 기이다’는데 있다. 이 이론은 물론 그의 ‘리는 무위하고 기는 유위하다’는데 근거한다. 성은 무위하므로 리가 되고, 심은 유위하므로 기가 된다.

“공자가 ‘사람이 도를 넓힐 수 있는 것이지 도가 사람을 넓히는 것이 아니다’라고 하였고, 주자가 그것을 해석하여 ‘사람의 마음에는 지각이 있고 도체(道體)는 무위하다’라고 하였으니, 이것은 ‘성은 리이고 심은 기이다’는 요체이다. 만약 이것을 들어 공자와 주자 또한 주기론자라고 말한다면 말이 되겠는가. 율곡이 평일에 이 말을 종주로 삼았는데, 지금 사람들은 어찌 그 의리의 당연함을 살피지 않고 주기(主氣)라고 해서 배척하는가.”

즉 공자와 주자의 해석에 근거하면, 심은 리가 아니라 기가 된다. 사람과 같은 기는 유위하므로 넓히는 주체가 되어 작용이 가능하다. 그러나 도와 같은 리는 무위하므로 넓히는 주체가 될 수 없다. 사람의 마음의 경우도, 도의 본체(리)가 무위한 것과 달리 심은 지각작용이 있으므로 기가 된다.

또한 정형규는 ‘심이 기이다’는 관점에서 『대학』의 명덕(明德)을 리로 해석하는 것을 비판한다.

“대개 명덕은 다만 허령불매하여 이치를 갖추고서 온갖 일에 응하는 마음으로, 기의 욕심에 구애되고 가리우면 그 광명을 잃어버리는 까닭에 그것을 밝혀 처음을 회복하게 한 것이다. 명덕이 과연 리라면 리는 스스로 순선한데 왜 밝히는 공부가 필요하겠는가.”

심은 리가 아니라 기에 해당하니, 심에 갖추어진 명덕 역시 심인 기의 영향을 받지 않을 수 없다는 것이다.

이러한 그의 심성론은 스승인 전우의 ‘성존심비(性尊心卑)’ 또는 성사심제(性師心弟) 등을 논하는데서 총괄적으로 드러난다.

“성은 곧 리이니 그 존귀함은 짝이 없다. 지금 모두 심이 성보다 존귀하다고 말하니 천하가 장차 모두 석씨에게로 들어가려고 하는가. 간옹이 이를 염려하여 그 말을 뒤집어 성은 존귀하고 심는 낮다고 하였으니, 이는 시대를 구제하는 권도이다.……선생이 말한 ‘성존심비’란 천지의 높고 낮은 것처럼 심과 성이 현격하게 다름을 말한 것이 아니다. 다만 성은 심의 준칙이 되지만 실제로는 능연(能然)의 힘이 없고, 심은 다만 능연의 힘만 있고 실제로는 준칙의 근본이 없다. 근세에 ‘심은 높고 성이 낮다’는 설이 성행하여 사람들의 마음을 현혹시키고 옛 성인의 전함을 무너뜨리는 까닭에 선생이 부득이하여 분변한 것이니, 어찌 변론하기를 좋아해서 그러한 것이겠는가.”

성은 무위하고 순선하며 존귀한 것이다. 심은 성에 비하여 유위하고 비천한 것이다. 성은 인의예지의 덕목이며, 그것은 실제 생활에서 유교적 윤리 덕목으로 드러난다. 그러나 인간행위를 규정하는 것은 심이기 때문에 심이 성에 근본해야만 인간행위가 도덕적 당위성을 얻을 수 있다. 왜냐하면 심은 기이므로 심의 행위가 그대로 도덕적 행위로 이어질 수 없다.

이 때문에 정형규는 심을 곧장 리의 관점에서 논하는 ‘심즉리(心卽理)’를 주장하는 자들의 해석을 비판한다.

“근세의 ‘심즉리’설이 있는데, 이것은 성인에 나아가서 말한 것이다. 성인의 심은 혼연히 일리(一理)이니 비록 심즉리라 해도 좋다.”

또는

“심이 곧 리라고 하는 것은 성인의 마음에 사욕이 없기 때문이다. 양심이나 도심과 같은 것은 중인에 나아가 성명에서 곧장 나온 것을 따로 떼어내 선한 일변만을 말한 까닭에 확충하고 떨어지지 말라는 경계가 있는 것이다. 만약 심이 리라면 어찌 확충하고 떨어지지 말라는 말을 붙이겠는가.”

즉 심을 리의 관점에서 보는 것은 성인의 경우에는 가능하겠지만, 보통 사람의 경우는 실제로 그렇지 않다. 보통 사람의 양심이나 도심과 같은 것도 선한 한쪽만을 뽑아내어 말한 것에 불과하다. 그러므로 심을 곧장 리와 연결시켜서는 안된다. 심은 리가 아니라 기가 되므로 ‘확충하고 떨어지지 말라는 경계가 있다.’ 반대로 심이 곧장 리라면 굳이 ‘확충하고 떨어지지 말라는 경계가 있을 필요가 있겠는가.’라고 반문한 것이다.

 

[참고문헌]: 「창수 정형규의 학문과 의리」(이상호, 『간재학논총』4, 간재학회, 200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