윤원거(尹元擧, 1601-1672)


윤원거(尹元擧, 1601-1672)                                PDF Download

 

장생(金長生)의 문하에서 성리학과 예학을 전습하였다. ⌈국조인물고⌋에는 당질인 윤증(尹拯, 1629-1714)이 쓴 윤원거의 행장이 실려 있는데,

“을축년(乙丑年, 1625년 인조 3년)에는 종형 동토(童土, 윤순거(尹舜擧))공과 함께 사계(沙溪) 김 선생(金先生)의 문하에 종유(從遊)하였는데 김 선생이 허심탄회(虛心坦懷)하게 대해주었다.”

라고 적고 있다.

‘허심탄회하게 대해주었다’는 말은 사제의 연을 맺었다는 것과는 다소 거리가 있는데, 이는 아마도 윤원거가 이미 계해년(癸亥年, 1623년 인조 즉위년)에 인조가 반정을 일으키자 비로소 과거에 응시하여 초시(初試)의 초종장(初終場)에는 합격하였으나 때마침 할머니인 경 부인(慶夫人)의 상을 당하여 복시(覆試)에는 응시하지 못했던 것을 상고하자면, 윤원거의 공부가 이미 틀이 잡혀있었기 때문이기도 할 것이다.

본관은 파평(坡平)으로 자는 백분(伯奮)이고 호는 용서(龍西)이다. 시강원필선 윤전(尹烇)의 아들이며 어머니는 해평윤씨(海平尹氏)로 첨지(僉知) 윤환(尹晥)의 딸이다.

윤원거의 외조부인 첨지공 윤환은 바로 해평윤씨의 형제 재상으로 유명한 윤두수, 윤근수 형제 중 동생인 윤근수의 장남이다.

윤원거의 조부인 윤창세(尹昌世)는 아들 5형제를 두었는데, 대사간공 윤황(尹煌)이 둘째이고, 시강원필선 윤전(尹烇)은 셋째로 윤원거의 부친이다. 윤황은 창녕 성씨(昌寧成氏)를 배필로 맞이했는데 바로 우계(牛溪) 성혼(成渾)의 딸이다. 윤황의 아들 6형제는 윤훈거(尹勳擧), 윤순거(尹舜擧), 윤상거(尹商擧), 윤문거(尹文擧) 윤성거(尹成擧), 윤선거(尹宣擧)이며 윤성거는 장가들기 전에 죽었다. 행장을 지은 윤증은 윤선거의 아들로 윤원거에게는 종질이 된다. 윤증은 을축년에 윤원거가 김장생의 문하에 종형인 윤순거와 같이 출입하였다고 기록하고 있는 것을 보아도 사촌 간에 학문적 교류가 있었음을 짐작할 수 있다.

정자(正字) 권경(權儆)의 딸을 아내로 맞이했는데, 권경(權儆)은 지봉(芝峰) 이수광(李睟光)의 사위이다. 윤원거는 어려서부터 총명하고 문장이 뛰어나 이수광(李睟光)의 칭찬을 받았다.

윤증의 「행장」에 이수광이 윤원거의 재주를 높이 산 내용이 나온다.

지봉이 선생의 재명(才名)을 듣고 시험해 보고 싶어서 운(韻)을 부르고 하늘로 시제(詩題)를 삼으니 선생께서 일어나서 즉시 대답하기를, “조화의 성쇠는 초목으로 알고, 음양의 개합은 곤충으로써 알도다. 사람이 살고 죽는 건 조석간의 일이나 성도는 길이 존재하여 시종이 없다오.”라고 하니 칭찬하기를, “이치에 통달한 말이다.” 하였다.

1633년 생원·진사 양시에 합격해 1635년 성균관재생으로 들어갔다. 이 때 이이(李珥)·성혼(成渾)의 문묘종사운동에 참여하여 그 반대자들과 논쟁을 벌였으나 성사되지 못하였다.

1636년 병자호란이 일어나자 주전론을 제기했으나 아버지가 강화도에서 순절한 뒤에는 일절 국사를 논하지 않고 재야에 은거, 학문에만 몰두하였다.

1658년(효종 9)부터 학문과 덕행으로 추천되어 공조좌랑·정랑·종부시주부·성균관사업·사헌부지평 등에 임명되었으나, 모두 사퇴하고 벼슬에 나아가지 않았다.

1660년 복제예송(服制禮訟)에서 남인 권시(權諰)를 옹호하는 발언을 했다가 송시열(宋時烈) 일파의 비난을 받았다. 질부인 윤증의 처가 권시의 딸이다. 1661년부터 여러 차례 사헌부장령에 임명되었으나 사양하였다.

1670년 세자시강원 진선에 임명되었을 때에는 상소를 올려 수기치인(修己治人)의 도를 논하였다. 그 요지는 솔선수범·입지·정심(正心)·면학·휼민(恤民)·근검절약·무사봉공 등이었다. 그 뒤에도 여러 차례 청요직에 임명되었으나 끝내 사양하고 나아가지 않았다.

이산(尼山)에서 가난하게 살았지만, 윤순거(尹舜擧)·윤문거(尹文擧)·윤선거(尹宣擧) 등의 종형제와 학문을 연마하고 후생을 가르치는 것으로 즐거움을 삼았다. 윤증은 행장에서 “선생(윤원거)은 동토(윤순거)와 석호(윤문거) 양공(兩公) 및 우리 선자(윤선거)와는 형제이면서 친구처럼 지냈다. 매양 서로 만나면 즐거이 연마하여 낮과 밤을 지새우면서도 피로한 줄을 몰랐는데 성정(性情)과 심의(心意)의 오묘함과 일용(日用) 사물의 떳떳함에서부터 세도 승강(世道升降)의 기수(氣數)와 국가 치란(國家治亂)의 원인에 이르기까지 부지런히 강토(講討)하지 않음이 없었고 때로는 위연(喟然)히 삼대(三代, 하ㆍ은ㆍ주를 가리킴) 이상으로 만회(挽回)하려는 상념(想念)도 가졌었다.”라고 적고 있다.

윤증은 윤원거에 대한 각별한 정의를 「행장」에서 밝히고 있다.

 ‘윤증(尹拯)이 볼품이 없는 데도 윤원거가 자식같이 사랑해 주었고, 매번 찾아가면 환한 표정으로 회포를 열었고, 물러나오면 반드시 쉬어 가라고 재삼 명하였다. 지금 생각해보아도 얼굴 모습이나 말소리가 마치 어제의 일 같은데 세상을 떠난지 벌써 12년 하고도 남음이 있다고 아쉬운 심사를 토로하고 있다.’

윤증은 윤원거를 전체적으로 이렇게 묘사한다.

선생은 천품이 고매하고 욕심이 없어 명리(名利)와 분화(芬華) 및 일체의 세상사를 담박(淡泊)하게 간과(看過)하였으며 심지어 영욕(榮辱)ㆍ훼예(毁譽)ㆍ화복(禍福)ㆍ우락(憂樂)에 있어서도 한결같이 마음에 동요되는 바가 없었다. 평거(平居)에도 마음이 즐겁고 화평(和平)하여 질언(疾言)과 거색(遽色)을 하지 않았고 대인(待人) 접물(接物)에는 진실되게 마음을 다하고 꾸미는 바가 없었으며 마음이 탄탕(坦蕩)하고 논의(論議)가 통쾌(痛快)하여 표리(表裡)가 여일하고 물아간(物我間)에 간격이 없어 구인(寠人, 옹졸한 사람)이나 소부(小夫)가 왕왕 곁에서 몰래 비웃어도 스스로 그 마음의 한계를 엿보기 어려움을 알지 못하였다. 지취(旨趣)가 고상하여 사물에 부딪치고 구경거리에 접하고 하면서 도처에서 우유자적(優遊自適)하였다. 그러나 만년에는 항상 아들들을 경계하기를,

“나는 젊어서 자신의 역량을 헤아리지 못하여 현허(玄虛)하고 절실하지 않는 데로 치닫고 진실되게 공부를 할 수 없어 노년에 이르도록 성취함이 없게 되었으니 너희들은 절실히 조심해야 할 것이다.”

하였다. 대체로 선생은 자[尺]로 재듯 규율(規律)에 얽매이지 않았는데 나의 선자(先子)가 그럴 때마다 공경은 안팎이 없다고 규간(規諫)하면 선생은 좋아하지 않음이 없었으나 소시에 스스로 힘쓰지 않아 노년에 후회가 있음을 한탄하였다. 때문에 스스로 한 말씀이 매번 이와 같았다.

시율에 격조가 높았으나 저술은 즐겨하지 않았다.

시문집 『용서문집(龍西文集)』이 전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