존재(存齋) 위백규(魏伯珪:1727~1798)


존재(存齋) 위백규(魏伯珪:1727~1798)        PDF Download

 

1.위백규의 생애
존재 위백규는 전라남도 장흥군(長興郡) 관산면(冠山面) 방촌리(傍村里) 출생으로, ‘호남 4대 실학자’ 또는 ‘호남 3천재’ 중 하나로 손꼽힌다. 그가 태어나던 날 밤에 그의 아버지는 백룡(白龍)이 우물로 내려오는 꿈을 꿨다고 하는데, 그가 범상하지 않은 유년기와 소년기를 겪은 사실이 1875년에 종손 다암(茶嵒) 위영복(魏榮馥:1832~1884)이 펴낸 「존재집(存齋集)」의 서문에 잘 드러나 있다. 그 서문은 고산(鼓山 임헌회(任憲晦)가 지은 것이다. 그가 지은 서문의 내용을 일부 살펴보면 다음과 같다.

“공은 2세에 육십갑자를 외웠으며, 6세에는 글을 지을 줄 알았고, 8세에 역학(易學)에 몰두하였다. 10세 이후에는 제자백가(諸子百家)를 두루 읽어 천문(天文), 지리(地理), 복서(卜筮), 율력(律曆), 선불(仙佛), 병법(兵法), 의약(醫藥), 관상(觀相), 주거(舟車), 공장(工匠) 등등 학문에 널리 통달해서 손금 보듯 꿰뚫었으니, 참으로 하늘이 내리신 인재라 하겠다.”

이 글은 한국문집번역총서의 「존재집」에 실려 있는 글이다. 과연 천재다운 면모를 가히 짐작할 만하다. 그가 7살(1733) 때 지었다는 시 「별을 읊다[(詠星]」라는 작품은 이를 뒷받침하기에 충분하다 하겠다.

 

이름과 자리는 각각 정해졌어도 各定名與位
기운으로 형체 없이 걸려있다만 須氣掛無形
삼광 중의 하나로 참여하게 되어 參爲三光一
어두운 밤을 밝게 비쳐주는 구나 能使夜色明

 

그뿐만이 아니다. 그가 9세 때에는 천관산에 올라 시를 읊어 세상 사람을 놀라게 했다고 한다. 그 시의 내용은 다음과 같다.

천관산 절 찾아 발걸음 옮기다 보니 發跡天冠寺
공중에 사다리 놓으면 하늘에 오르겠네. 梯空上春昊
인간들이 사는 세상 잠시 굽어보니 俯視人間世
티끌먼지 삼 만리에 자욱이 끼어 있네. 塵埃三萬里

 

존재 위백규는 12살(1738) 때 “다른 사람을 보기보다는 차라리 자신을 보고, 다른 사람의 말을 듣기보다는 차라리 스스로에게 들어라”라는 문구를 좌우명으로 삼으며 수신(修身)에도 힘을 기울였다. 작은 분판을 만들어 차고 다니면서 그 날의 실수를 기록하면서 스스로의 언행을 경계하기도 했다. 그는 15세 이전에 4서6경을 섭렵하고 17세 때부터 장천재에 기거하며 훈장을 했다. 그는 25살(1751) 때 전남 장흥에서 충청도 덕산에 사는 병계(屛溪) 윤봉구(尹鳳九:1683~1767)를 직접 찾아가 속수례(束脩禮)를 올리고 그 문하에서 학문을 연마하였다. 그는 그 후에 과거시험에 계속 응시했으나 번번이 실패하자 40세에 관직에 대한 뜻을 접고 초야에 묻혀서 학문과 향촌 사회 계몽에 힘썼다.

위백규의 나이 68세 때 서영보(徐榮輔)의 천거로 그의 저술과 덕행이 정조에게 알려졌다. 태풍으로 인해 마을 피해 지역에 파견되었던 서영보가 과객 행세를 하고 위백규 집에 묵게 되었다. 그날 밤이 제삿날인데 국법으로 밀주(密酒)를 단속할 때였다. 아내가 제주(祭酒)를 내오자 “백성들이 법을 안 지키면 누가 지킨단 말이요?”라고 하면서 제주를 부어버리고 청수(淸水)를 떠오게 하였다.

그런 행동과 그의 저술인 「환영지(寰瀛志)」를 정조임금에게 전하자, 정조는 그를 급히 상경하도록 했다. 궁궐에 들어가던 날 장문(長文)의 상소를 올렸다. 여섯 조항의 정책(政策)을 건의하였는데 유생들의 반발이 있었다. 그러나 정조임금은 그의 고향과 가까운 곳에 옥과현감(玉果縣監) 자리를 제수하였다. 그곳에서 그는 선정(善政)을 펼치다가 노환(老患)으로 72살에 세상을 떠났다. 그 후에 그의 묘지에는 어떤 글도 새기지 말라는 그의 유언에 따라 아무 글도 새기지 않은 백비(白碑)가 세워졌다.

 

2.위백규의 학문과 작품세계
위백규는 말년에 참봉 유맹환(兪孟煥)에게 보낸 편지에서 스스로를 ‘삼벽(三壁)’이라고 칭했다. “사는 지역이 궁벽하고, 성씨가 궁벽하고, 사람이 궁벽하다.”는 의미였다. 궁벽한 지역에 사는 선비로 거의 전 생애를 보냈으나 경학(經學) 뿐만 아니라 지리(地理), 역사(歷史), 의학(醫學) 등에 관한 저술에도 힘을 기울이며 학문의 폭을 넓혔다. 특히 그는 지리에 많은 관심을 가졌다. 그가 지은 「지제지(支提誌)」는 그의 고향에 있는 천관산에 관한 지리와 문화를 상세히 담고 있다. 현존하는 기록물 중에 개인이 편찬한 산지(山志)로는 유일하다. 정조임금이 궤짝에 담아 올려 보내라고 했던 「환영지」는 지리지의 백과사전이라고 할 수 있다. 조선 팔도의 지도와 함께 중국과 세계지리가 실려 있다. 이 저서에 있는 조선 팔도 지도는 김정호(金正浩)의 「대동여지도(大東輿地圖)」보다 91년이나 앞서 있다. 또한 유럽과 지중해가 표시된 지도도 같이 실려 있다. 32살 때 우연히 서양 「구구주도(九九州圖)」와 마테오리치의 「곤여만국전도(坤與萬國全圖)」를 본 계기로 12년에 걸쳐 마무리했다고 한다. 그가 남긴 저서 「존재집(存齋集)」은 경학, 지리, 역사, 의학에 대한 내용을 담고 있으며 총 24권 12책에 달한다.

그 방대한 그의 작품 중에서 그의 학문적 역량의 깊이를 엿볼 수 있는 작품이 셀 수 없을 만큼 많다. 그의 문집 「존재집」 제20권 잡저(雜著)에 보면 「연어(然語)」라는 재미난 글이 있어 일부분을 발췌하여 살펴보기로 한다. 이 글은 장문(長文)의 문답형식을 취하고 있으며, 그 대상은 매화를 의인화하여 대화 형식으로 열거하고 있는데, 고금의 역사에 대한 비판의식 등등 다양한 일을 소재로 다루고 있다. 이 글의 서문에는 매화를 의인화한 자신의 견해를 밝히고 있다.

옛날에 장자(莊子)가 그림자가 말을 한다고 하자 사람들이 괴이하다고 했고, 미불(米芾)이 ‘돌 어른[石丈]’이라고 부르자 사람들이 미쳤다고 했다. 그림자는 말을 하지 않고 돌은 어른이라고 할 수 없기 때문이다. 지금 내가 매화와 말하면서 매화를 ‘군(君)’이라고 하니, 나는 과연 괴이하고 미쳤단 말인가? 군자는 괴이하고 미친 짓을 하지 않으니, 나는 과연 군자가 아니란 말인가. 아니면 장주와 미불이 소인이 아니니, 나는 과연 장주와 미불 같은 사람이란 말인가? ‘매군(梅君)’과 더불어 말한 것을 「연어(然語)」라고 이름 붙이니, 사람들이 나를 괴이하고 미쳤다고 말하는 것도 당연하다. 비록 그렇다 하더라도 나로 하여금 괴이하고 미치게 하는 자는 또한 누구인가? 이상은 제사(題辭)이다.
[昔莊周爲影言, 人以爲詭, 米芾呼石丈, 人以爲癲, 盖影非有言而石非可丈也. 今吾與梅言而君之, 吾果詭而癲哉. 詭與癲, 君子不爲, 吾果不君子哉. 周與芾亦不爲小人者, 吾果周與芾而已耶? 與梅君言, 命曰然語, 宜乎人之謂我詭而癲也. 雖然使我詭而癲者, 又誰歟? 右題辭.]

 

이 글은 단락을 짓고 있는 한편 작은 제목을 주어 그 아래 문답형식을 취하고 있는데, 이 글을 중간 중간 채택하여 살펴보기로 한다. 가장 먼저 ‘원지(原旨)’라는 제목 하에 매화와 더불어 대화형식을 설정하여 견해를 피력한 일부를 살펴보기로 한다.

자화가 “남에게 죄를 지으면 오히려 용서를 빌 수 있거니와, 자신에게 죄를 지으면 용서를 빌 곳이 없다오.”라고 하자, 매군이 “그래서 혼자 있을 때를 삼가라는 거지요.”라고 했다.
[子華曰, 得罪於人, 猶可辭也, 得罪於己, 無所容也. 梅君曰, 是以愼獨.]

자화가 “군자는 자신을 자기로 삼기 때문에 자신의 사욕을 극복하여 자기를 성취하고, 소인은 자신으로 자기를 잊기 때문에 자신을 죽여 자기를 망친다오.”라고 하니, 매군이 “그렇지요.”라고 했다.
[子華曰, 君子以己爲己, 故克己而成己, 小人以己忘己, 故殉己而亡己. 梅君曰, 兪.]

자화가 “살길이 많은 자는 그 삶이 곧 죽음이요, 군자는 살아가는 이유가 하나뿐인 까닭에 그 삶이 즐겁답니다.”라고 하니, 매군이 “그렇지요.”라고 했다.
[子華曰,生之路多者, 其生也死也. 君子之所以生者一而已, 故其生也樂. 梅君曰, 兪.]

자화가 “자신의 그릇된 점을 감추려는 자는 남의 작은 잘못을 들추어내기를 좋아하고, 남의 선행을 시기하는 자는 남이 면전에서 자기를 칭찬해 주는 것만을 기뻐하지요.”라고 하니, 매군이 “그렇답니다.”라고 했다.
[子華曰, 自掩其非者, 好摘人之細過, 猜忮人善者, 喜人面譽. 梅君曰, 兪.]

자화가 “나무를 부비여 불씨를 일으킬 수 있는 것은 열기가 계속 이어지기 때문이며, 닭이 비오는 밤에도 제때 우는 것은 지각이 오롯하기 때문이랍니다.”라고 하니, 매군이 “그래서 하루 동안 게으름을 피우면 1백년의 근면함을 무너뜨리게 되는 것이니, 정치(精緻)하지 않은 박학(博學)은 장점으로 취할 만한 재능이 못되지요.”라고 했다.
[子華曰, 鑽燧而火炎者, 熱氣接續也. 雞鳴雨夜而不忒者, 知專也. 梅君曰, 是以一日之怠, 廢百年之勤, 不精之博, 無取長之能.]

자화가 “꽃이 지지 않으면 열매가 맺히지 않고, 소금을 볶지 않으면 짠맛이 만들어지지 않지요. 그래서 명예를 추구하는 자는 내실 있는 행동이 없고, 항상 안일하게 지내는 자는 성취하는 재주가 없답니다.”라고 하니, 매군이 “그렇습니다.”라고 했다.
[子華曰, 花不謝實不成, 鹵不熬醎不成. 是以求名者, 無實行. 恒逸者, 無成材. 梅君曰, 兪.]

자화가 “남한테 요구하기를 싫어하지 않는 자는 이미 남에게 줄 수 없는 자이고, 남이 자기를 떠받들어 주기를 끝없이 바라는 자는 이미 남을 섬길 수 없는 자이지요.”라고 하니, 매군이 “그렇습니다.”라고 했다.
[子華曰, 求諸人無厭者, 己不能與人者也. 欲人承奉不已者, 己不能事人者也. 梅君曰, 兪.]

자화가 “몸을 갈라 구슬을 몸속에 간직한다면 이는 재물에 대해 어리석은 것이고, 내 몸을 욕되게 하여 자손을 위한 계책으로 삼는다면 이는 나에 대해 어리석은 것이지요. 이는 자기 위함을 중요시하려다가 마침내 자기를 상실하는 것과 똑같습니다.”라고 하니, 매군이 “군자는 자기를 잊어버림으로써 자기를 온전하게 하지요.”라고 했다.
[子華曰, 剖身而藏珠, 愚於貨也. 僇吾身爲子孫計, 愚於我也. 其重於爲私, 遂以喪私一也. 梅君曰, 君子忘私以全其私.]

자화가 “위태롭고 어지러운 때를 당하여 순절(殉節)함으로써 의(義)를 취하기는 어렵지만, 자기를 알아주는 사람을 위해 죽기는 쉽다지요.”라고 하니, 매군이 “그렇습니다.”라고 했다.
[子華曰, 當危亂之時, 殉節以取義難, 爲知己死易. 梅君曰, 兪.]

자화가 “바라는 것 없이 선행을 하는 것은 음덕(陰德)이고, 이유 없이 복이 모이는 것은 몸을 망치는 재앙이지요.”라고 하니, 매군이 “그렇지요.”라고 했다.
[子華曰, 無所爲而爲善者, 陰德也. 無所致而福臻者, 身之殃也. 梅君曰, 兪.]

자화가 “성인은 자기 마음속에 천명을 터득하고 있기 때문에 천명을 즐기고, 군자는 하늘에서 천명을 받았음을 알기 때문에 천명을 두려워합니다. 보통 사람은 하늘을 무시하는데, 하늘을 무시하는 사람은 하늘도 그를 버립니다.”라고 하니, 매군이 “그렇습니다.”라고 했다.
[子華曰, 聖人得天於己故樂天, 君子知天於天故畏天, 衆人無天, 無天者天亦棄之. 梅君曰, 兪.]

 

이와 같이 다양한 소재를 가지고 매화를 의인화하여 대상을 설정해 놓고서 대화하듯이 글을 적어놓았는데 한결같이 교훈적인 내용을 담고 있다. 이 글 역시 그가 평소에 추구해오던 정신의 일면을 엿볼 수 있어 흥미롭다 하겠다. 그리고 이어서 ‘신회(神會)’라는 제목으로 되어 있는 글도 여러 가지 소재를 토대로 위와 같은 형식을 취하고 있으나 여기에서는 생략하도록 한다. ‘학례(學禮)’라는 제목 아래에 수록되어 있는 글들 중에 장사를 지내고 나서 신주(神主)를 세우고 정성을 쏟는 이유와 축문을 읽고 난 뒤에 바로 태우지 않는 것은 “효자의 지극한 정으로 간절하고 몹시 슬퍼하여 마치 장차 아뢸 것이 있는 듯이 하는데, 이는 마음으로 신령을 평안하게 하려는 뜻이니, 그 마음이 지극하고 은미하다 할 것입니다.[孝子至情, 慇懃惻怛, 如將告者, 此是以意安神之義也, 其意至矣微矣.]”라고 의견을 제시하여 일반인들이 “반혼(返魂)을 급히 하느라 축문을 불태울 겨를이 없다고 말하는 사람들이 있는데,이는 전혀 의미가 없는 말이라고 주장하여 의인화하여 설정한 매군(梅君)을 통해 긍정적인 답을 얻어내는 것으로 묘사하고 있다. 그리고 ‘사회(寫懷)’라는 제목 아래에서는 자신의 평생을 평가하는 듯한 회포를 칠언율시로 읊어놓았다. 그 글을 제시하면 다음과 같다.

 

육십일 년의 세월을 헛되이 보내고서 虛過六十一年春
총명한 남자의 몸을 홀로 저버렸구나. 孤負聰明男子身
늙어서야 지난날의 불효를 모두 알았고 到老全知曾不孝
책을 보고 내가 그릇됨을 매번 깨달았네. 看書每覺我非人
한 일의 절반은 과장을 드나든 잘못이오 事爲半是名塲誤
친구들과는 쓸데없는 농담으로 친한 냥하고 朋友空憑戲語親
여기에다 다시 술 잔뜩 취했으니 어찌하랴 仍復醉迷其奈爾
이제부터 술 절제하며 천진함을 기르리라 從今節飮養天眞

소싯적부터 날마다 잘못을 깨달았건만 日日知非自少時
이제 와보니 오십구 년이 되었음 알겠네 于今五十九年知
우연히 거백옥의 나이와 같아 부끄럽다만 偶同伯玉年堪愧
이렇게 깨친 뒤 어리석은 한 사람 되었구나 覺後眞成一呆痴

 

그야말로 자기 반성을 읊은 작품이라 하겠다. 그리고는 본격적으로 「창수(唱酬)」라는 제목 하에서 그는 매화와 대화형식을 빌어 마음껏 고금을 넘나들며 서술을 자유자재로 풀어내었다 그것이 무려 칠언율시(七言律詩)로 10수나 된다. 그 중 일부를 살펴보기로 한다. 앞의 것은 자화가 선창(先唱)한 작품이고 뒤의 것은 매군(梅君)이 이어서 화답한 것이다.

 

자화가 한가로이 즐기는 것 사랑하지 않는 건 子華非是愛偸閒
밭둑에 담배와 호미 있고 물가에 낚싯대 있어 田有烟鋤磯有竿
세상일은 다만 분수에 편안해야 좋은 법이니 世事只應安分好
이 마음 속이지 않기가 어렵다는 걸 알아야지 此心惟識不欺難
봄이 오면 부귀하게 온갖 나무에 꽃이 피고 春來富貴花千樹
고요해지면 벗님처럼 한 난간에 달 떠오르니 靜後賓朋月一欄
술에 취해 오동나무 기대자 천지 드넓어서 醉倚高梧天地濶
티끌과 아지랑이를 웃으며 바라본다오 塵埃野馬解頤看

산수 간의 그윽한 거처 깊어서 싫지 않는데 山水幽居不厭深
괴롭게도 물이 찾아와서 서로 사귀자 하네요 物來交物苦相尋
성현 모두 떠나 내가 스스로를 슬퍼하나니 聖賢盡去吾悲我
시비 서로 기울임은 옛날에도 지금 같았다오 非是相傾古爲今
어찌할 수 없는 때에 천명을 알게 되고 無奈何時知天命
헤아릴 수 없는 곳에서 사람 마음 보이나니 沒思量處見人心
구월의 가을과 삼월의 봄철을 맞아 但逢秋九春三節
국화와 꾀꼬리 찾아 숲에 가면 좋으리다 訪菊選鸎好出林

삼벽이라서 세상사람 모두가 비웃는다만 三僻由來世共嗤
좋은 시절 만날 때면 홀로 시 읊조려보네 每逢佳節獨吟詩
경륜과 재주는 비록 여상은 아니어도 經綸才局雖非呂
요순 기약한 포부 어찌 이윤에게 사양하랴 堯舜襟期豈讓伊
어두운 곳 속이지 않는 마음 하늘이 알고 暗不欺心天可質
배움에 옛날을 스승으로 여김 내 의심치 않네 學念師古我無疑
긴긴 낮 밝은 창에 봄바람 따사로우니 明窓晝永春風暖
바로 은자가 꿈에서 깨어나는 그때로다 正是幽人夢覺時

시비와 영욕은 모름지기 놀랄 것도 없으니 是非榮辱莫須驚
만사가 내게는 점점 부질없음을 느낀다오 萬事由吾漸覺輕
절로 건재한 시내와 산은 천고의 뜻이요 自在溪山千古意
조용히 폈다지는 꽃과 대나무는 사철의 마음 從容花竹四時情
근심하지 않아야 천지가 위대함을 믿게 되고 不憂始信乾坤大
시기함이 없어야 세상살이 평탕함을 알련마는 無忮方知世路平
소옹의 청야음을 읊조리고 나니 誦罷邵翁淸夜咏
창에 가득 맑은 꿈에 달빛도 분명하구나 一窓晴夢月分明

세월이 번갈아 서로 떠나가니 歲月迭相謝
고금이 고개 돌릴 사이에 바뀌었네 古今轉眄移
앉아서 시절의 경물이 변한 걸 보니 坐看時物變
늘그막에 생각이 하염없구려 遲暮有餘思

봄바람에 꽃은 정원에 만발하고 春風花滿庭
여름비에 물고기가 물가에서 뻐끔대는데 夏雨魚吹澨
가을 절구에서 올벼의 향기 풍기고 秋杵早稻香
겨울 베갯머리 새 술 한창 익어 가네요 冬枕新酒沸

 

위에서 본 바와 같이 그의 작품세계는 실로 대단하리만큼 격조가 있음을 짐작할 수 있겠다. 가히 문장력과 천재성을 두루 겸비한 인물임을 증명할 수 있겠다.

위백규는 또한 백성들의 삶을 어느 양반들보다도 가장 가까이에 살면서 그들을 이해하고자 했다. 그는 양반 신분임에도 향촌(鄕村)에서 직접 농사를 지으며 살았다. 그 경험을 바탕으로 그는 46세(1772년) 때에 「농가 9장(農歌九章)」을 지었다. 농사를 짓는 모습을 관찰하거나 자연을 즐기는 시가 아니라 직접 논밭을 경작하며 땀흘려 일하면서 느낀 점을 한글로 지은 작품을 남겼다. 아침에 농기구를 챙겨 소를 몰고 집을 나서서 밭을 갈고, 보리밥 한 사발과 콩잎 나물 반찬으로 새참을 먹고, 저녁에 집으로 돌아오기하기까지 농번기의 하루와 가을 수확의 즐거움을 9개의 연시조로 묘사한 것이다. 그 중의 두 번째 작품인 「밭으로 가다[適田]」는 시를 살펴 보기로 한다.

 

“도롱이에 호미를 걸고 뿔이 굽은 검은 소를 몰고
고동풀을 뜯어먹게 하며 깃물가로 내려갈 때
어디서 품진 벗님은 함께 가자하는가.”

 

소박한 시골 풍경을 저만치서 바라보는 듯한 느낌을 준다. 존재 위백규가 남긴 시는 무려 200여 편 400여 수나 된다. 「농가9장」 외에도 보리 농사 연작시인 「죄대(罪對)」, 「맥대(麥對)」, 「청맥행(靑麥行)」 등과, 자연재해를 원망하고 관리들의 횡포를 고발하는 「연년행(年年行)」과 회갑을 맞아 부모를 추모하는 장편가사 「자회가(自悔歌)」 등이 사람들의 입에 회자되고 있다. 그뿐만 아니라 백성들의 삶을 몸소 겪으며 현실 사회에 문제를 인식하고 폐단에 대한 비판과 정책을 제시하는 「정현신보(政絃新譜)」를 남겼다. 그는 이 글에서 탐관오리들의 부패 실상을 고발하고 벼슬아치들의 횡포를 고발하였다.

 

3.위백규의 효성과 개구리 전설
위백규는 돌아가신 어머니 유인(孺人) 오씨(吳氏)를 장사지낼 때에 고례(古禮)를 상고하여 명기(明器)에다 미곡(米穀)과 육포(肉脯)와 어포(魚脯)를 넣어 편방(便房)에 두었다. 그런데 그 이듬해 여름에 검은 개미가 무덤 옆에 잔뜩 몰려 있는 것을 발견하였다. 발견한 위치가 하필이면 편방의 위쪽과 너무 가까웠다. 그는 개미가 먹을 것을 이리저리 찾다가 어쩌면 편방을 침입할까봐 걱정하여 개미를 상대로 다른 곳으로 옮겨가도록 회유하는 글을 지어 타이르듯이 읽어 주었다. 그 글을 요약하여 소개하면 다음과 같다.

 

“너희에게는 군주와 신하의 의리가 있고 수시로 흙을 물어 나르는 예(禮)가 있고 집을 짓는 지혜가 있으니, 준동하는 다른 미생물들과는 비교할 바가 아니다. 지금 만약 사람이 그 어버이를 장사지낸 땅을 염두에 두지 않고 봉분을 쌓은 곳에 구멍을 내서 현실(玄室)의 음식에 침노하여 꺼내 먹으려한다면 불인(不仁)함이 심한 것이니, 의리가 있고, 예가 있고, 지혜가 있다는 너희들이 어찌 유독 이렇게까지 불인한 짓을 할 수 있다는 말이냐?
[惟爾有君臣之義, 有時述之禮, 有築封之智, 非與他蠢蝡蒙迷之虫比也. 今若不有人葬其親之地, 竅穴其堋築, 侵奪其玄室之食, 則其不仁甚矣. 豈有義有禮有智之物, 獨不仁若是哉.]”

 

라고 하면서 그는 개미를 마치 철없는 어린 아이들을 어르고 달래듯이 회유하였다. 그러나 계속해서 염려하는 마음을 늦추지 못하고 다시 간곡한 어조로 사리를 들어서 회유하였다. 그 말에는 진정 부모를 위하는 효성이 깃들어 있음을 볼 수 있다. 다시 그 원문을 살펴보기로 한다.

 

“게다가 개미는 본래 사람들이 미워하는 대상이 아니다. 지금 다행히 명기는 침범하지 않았다마는 만년의 유택(幽宅)을 견고하게 하려는 것은 사람의 자식이라면 지극한 심정을 갖기 마련인데, 파헤쳐 가르고 구멍을 내서 점차 무너지게 한다면 또한 어찌 지각 있다는 너희들이 차마 할 수 있는 일이겠느냐? 이리해서 너희 스스로 사람에게 증오를 자초한다면 이 또한 매우 지혜롭지 못한 짓이다. 불인(不仁)하고 지혜롭지 못한 존재가 어찌 무덤 속에서 군신의 의리를 행할 수 있겠느냐? 삶을 욕되게 함이 또한 크다 할 것이다. 네 형상이 비록 미물일지라도 어찌 그 본성을 욕되게 하면서 살고자 한다는 말이냐? 너희 개미들은 분명 이런 짓을 하지 않으리라 믿는다.
[且蟻本無惡於人, 今雖幸而不犯明器, 維是萬年幽宅, 欲其鞏固, 是人子至情, 而蝕作罅孔, 使馴致圮壞, 亦豈有知之物所可忍耶, 以此自取憎惡於人, 是亦不智之甚也, 不仁不智, 焉能作君臣於幽房之中哉, 其爲忝生又大矣, 而爾形雖微, 寧欲忝其性以生哉, 蟻必不爲是也, ]

 

하찮은 미물임에도 불구하고 “봉의(蜂蟻)는 유군신(有君臣)”이라는 옛말에 근거하여 의리를 내세워 설득하고 회유하고 달래는 논조로 글을 지었다. 이 글의 끝부분에서는 서로의 갈등관계를 해소하고 화해의 무드로서 서로 침해하지 않는 차원에서 타협을 유도하는 논지로 마무리를 하였다. 흥미롭다기보다는 그의 부모에 대한 효성의 발로로 인식하는 것이 타탕한 글로 여겨진다.

“지금 너희 개미들을 위한 계책을 말해보자면, 이곳 산 말고도 토양이 깊고 고와서 어느 곳이든 너희 거처로 마땅하지 않은 데가 없으니, 너희들은 너희 무리를 데리고 멀리 옮겨가서 새롭게 개미무덤을 만드는 것이 좋겠다. 그리하여 명기(明器)에 가까이 오지 말고, 봉분의 사초도 무너뜨리지 말도록 하거라. 그리하면 너희들에게는 해로움이 없을 것이요, 나에게는 증오가 없을 것이다. 사람이 하는 말을 듣고 깨닫는다면 어찌 보통의 벌레 가운데 훨씬 뛰어난 존재가 아니겠느냐? 개미들아! 속히 떠나도록 하여라.
[今爲蟻計, 此一山之外, 深壤美土, 無往而不宜爾居也. 爾率醜類, 遠徙爾垤, 勿近明器, 勿敗莎封, 在爾無害, 在我無惡. 人有所言, 能聞覺悟, 豈不超勝於凡虫又萬萬哉, 蟻其速圖之.]”

 

이뿐만이 아니라 그는 생전에 특별한 행적이 종종 보이기도 했다. 미물에게 어떤 영향을 준 것이 분명한 듯도 싶다. 우선 그와 관련된 ‘개구리 전설’이 있는 장소가 두 곳이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그가 옥과에서 현감직에 있을 때 천광호(天光湖)라는 넓은 호수가 있었는데, 밤만 되면 개구리들이 시끄럽게 울었다고 한다. 개구리 소리 때문에 잠을 못 이루자 「주역(周易)」의 괘(卦)를 뽑아 던지자 잠잠해졌다. 그 이후부터 개구리 울음소리가 들리지 않았다고 한다.

이와 비슷한 이야기가 그의 종택(宗宅)에도 전해온다. 그의 종택 앞 연못에서 개구리 소리가 요란해서 위백규는 독서에 집중할 수가 없어 부적(符籍)을 그려 노비에게 연못에 던지게 하였더니 개구리가 울지 않았다고 한다. 지금도 이 연못에는 개구리가 없으며 시험삼아 살아 있는 개구리를 연못에 넣으면 금방 생기를 잃고 만다는 이야기가 전해오고 있다.

 

<참고문헌>

「존재집(存齋集)」(위백규)
「병계선생문집(屛溪先生文集)」(윤봉구)
「매산집(梅山集)」(홍직필)
「사마방목(司馬榜目)」
「조선유학사」(현상윤, 민중서관, 1949)
「존재 위백규와 다산 정약용의 생애와 사상연구」(위정철. 한국학술정보(주)」, 2012.8.10.)
「존재 위백규의 사회개선론: 18C(세기) 말 향촌의 자율성 모색을 중심으로」(이해준, 「한국사론」5, 서울대학교, 1979)
「위백규의 생애와 사상」(하성래, 「실학논총」, 호남문화연구소, 1975)
「이조실학파의 성리학관」(김경탁, 「고려대학교 문리논집」7, 196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