황경원(黃景源)


황경원(黃景源)                                                              PDF Download

 

1709년(숙종 35)~1787년(정조 11) 조선후기의 문신.

본관은 장수(長水). 자는 대경(大卿), 호는 강한(江漢)이며 시호는 문경(文景)이다. 아버지는 통덕랑을 지낸 황기(黃璣)이며, 어머니는 안동권씨로 권취(權冣)의 딸이다. 황경원은 당시 노론 낙론계의 중심인물인 이재(李縡)의 문하에서 수학하였다.

황경원은 19세(1727)에 생원시에 2등으로 합격하였다. 그 뒤 의금부도사를 지내다가 1740년(영조 16)에는 증광문과에 병과로 합격하여 홍문관수찬에 제수되었다. 이어 예문관검열․병조좌랑을 거쳐 홍문관응교로 있을 때에는 명나라 의종(毅宗)의 제사를 건의하여 실시하게 하였다. 40세(1748)에는 당시 좌의정이었던 조현명(趙顯命)의 추천으로 동궁(東宮)이던 사도세자의 강학을 맡기도 하였다. 이로부터 대사성․대사간․대사헌 겸 양관제학 등을 거쳐, 1761년 이조참판에 이르렀으나, 이정(李涏)의 상소사건에 연루되어 거제도로 유배되었다.

그러나 이듬해 합천으로 옮겨졌다가 고향으로 돌아와 풍천부사로 복관되었다. 영조가 죽기까지 12년 동안 호조참판․홍문관제학․이조참판 겸 대제학과 형조․예조․공조의 판서 등으로 활약하였다. 1776년 정조가 즉위하면서 모두 사양하고 중추부판사로 있다가, 1787년(정조 11) 2월 25일 향년 80세로 별세하였다.

1776년 정조가 즉위하여 규장각을 건립하자, 제학에 임명되어 이후 규장각을 중심으로 하는 방대한 편찬사업에 참여하여 중추적 역할을 수행하였다. 특히 정조가 동궁 시절에 이미 구상하였던 송사(宋史)의 재수작업인 「송사전(宋史筌)」의 편찬에 적극 참여하였으며, 「규장각지(奎章閣志)」 편찬에 참여하여 그 서문을 남기고 있다. 또한 명나라 의종 이래로 명나라에 대한 절의를 지킨 조선 사람들의 전기인 「명조배신전(明朝陪臣傳)」을 저술하였으며, 문집으로 「강한집」이 있다.

조선후기 문학사의 흐름으로 살펴보았을 때, 황경원은 최립(崔岦) 이후 한문의 4대가인 장유(張維)․이식(李植)․이정구(李廷龜)․신흠(申欽)으로부터 김창협(金昌協)․이의현(李宜顯)의 계통을 잇고, 뒤로는 홍석주(洪奭周)․김매순(金邁淳) 등으로 이어지는 순정고문가의 계보 안에서 뚜렷한 위치를 차지하고 있다. 주로 스승 이재의 문인들과 교유하였으며, 특히 ‘영조조의 사가(四家)’로 일컬어지는 이천보(李天輔)․오원(吳瑗,)․남유용(南有容)과도 친밀한 사이였다. 그 밖에 감창협의 손자인 김원행(金元行)․송명흠(宋明欽)․송능상(宋能相) 등과 교유하였다.

황경원은 18세기 영․정조 시대의 대표적 관각문인이다. ‘관각’은 관청의 건물, 즉 국가의 문장을 관장하는 관료문인을 말한다. 황경원은 영조시대에 국가의 문장을 관장하는 문형(文衡)을 오래 역임하면서 당대 문풍을 주도했던 문인이다. 정조를 비롯하여 후대의 많은 평자들로부터 “고아한 순정문의 맥을 잇고 있는 대문장가”로 극찬을 받았던 인물이다. 또한 집권층인 노론 낙론계의 대표적 인사로서 투철한 주자학적 이념에 근간을 둔 보수적 흐름을 주도한 인물이기도 하다. 청년시절의 박지원(朴趾源)이 그를 찾아가 자문을 구하기도 하였으나, 지금은 진보적 성향을 보인 박지원과 대척적인 위치에서 시대변화에 다소 둔감했던 보수적 문인으로 인식되고 있다.

이 글에서는 황경원이 남긴 206편의 시 가운데 ‘대명의리’에 관한 내용을 소개한다. ‘대명의리’는 명나라에 대한 조선의 의리를 말한다. 대명의리는 황경원에 있어서 평생의 신념이자 동시에 그의 문학세계의 저변을 이루는 핵심 주제이다. 황경원은 명나라가 이미 역사의 뒤안길로 사라지고 반세기가 지난 시점이고, 또 청나라가 중원을 완전히 장악하여 의미가 없던 시대였음에도 불구하고, 왜 대명의리의 문제에 집착하였을까?

황경원은 206편의 시를 남겼다. 무엇보다도 그에게 있어서 시는 아름다운 시상을 전개하여 문학적 역량을 드러내기 보다는 평생 고수하던 신념을 표출하는 수단이었던 것으로 보인다. 그는 의리를 지켜야 하는 대상인 명나라에 대해 공부를 하다가 느낀 점을 시로 읊었고, 임진왜란과 병자호란의 상처로 남은 흔적이 있는 유적지를 지나면서는 치욕의 역사에 몸서리치며 시를 지었다. 시로 명나라 장수들의 활약상을 장황하게 읊었고, 구원병을 파견하도록 결정을 내린 신종과 의종의 공덕을 높이 기렸다. 이들 시를 관통하는 일관된 정서는 청나라에 대한 강한 적개심과 역사적 치욕에 대한 울분, 그리고 명나라에 대한 한없는 고마움이다.

송시열(宋時烈)은 “대의에 입각하여 복수가 행해지지 않으면 대경(大經)․대법(大法)이 사라지고 인륜인 삼강(三綱)이 없어져 아들이 아비를 알지 못하고 신하가 임금을 알지 못하여 민심이 어긋나고 천지가 닫히게 되어 혼란에 빠져 금수의 무리로 전락한다”거나 “위로 천하의 제후로 무도한 자가 있거나 신하가 임금을 죽이고 자식이 부모를 죽이는 자가 있으면 힘으로 토벌해야 한다”라고 하여 북벌을 주장하였다.

병자호란 직후 송시열의 ‘북벌론’은 인륜 질서를 수호한다는 의미에서의 죄를 토벌한다는 개념이었다. 그러나 청나라가 중원을 완전히 장악하고 자신감이 커진 강희제(康熙帝)가 유화책을 쓰면서 조선에 대한 압력을 줄이게 되자, 청나라에 대한 토벌의 논리는 힘을 잃었다. 이때 부각되기 시작하는 것이 재조지은(再造之恩)의 논리이다. ‘재조지은’은 나라를 다시 만들어준 은혜라는 뜻으로, 나라가 망할 위기에서 구해준 것을 뜻한다. 임진왜란 때 명나라의 원조로 조선이 은혜를 입었고, 결국 명나라기 이로 인하여 멸망하였다는 것이다. 이에 명나라의 멸망이 조선에 대한 원조였기 때문이었다고 하는 상소로부터 시작된 ‘재조지은’의 논리는 곧바로 만동묘(萬東廟) 설치와 중수, 대보단(大報壇) 제향의 강화, 청나라의 연호 거부, 존명 관계 서적 편찬 등 국가 차원의 사업으로 이어졌다. 만동묘와 대보단은 임진왜란 때 원군을 보낸 명나라 신종의 은혜와 의리를 기리기 위해 세운 사당이나 제단이다.

 

忠臣刎腹怒 충신들은 분노로 배를 찔렀고
貞士裂書爭 곧은 선비들은 다투어 글을 찢었네.
已傷丹極淪 조정이 능욕을 당한 것도 이미 서럽거늘
未覩黃河淸 황하가 맑아지는 것을 보지 못하는구나.
招提餘恨在 법당에는 아직도 한이 남아 있는데
埤堄曉鴻鳴 성벽 위에 설치한 낮은 담에는 새벽 기러기만 울며간다.

 

이 시는 남한산성에 있는 절, 장경사에 묵으며 지은 「숙장경사(宿長慶寺)」라는 작품이다. 구름 고요하고 달 밝은 밤에 고즈넉한 피리 소리를 들으며, 황경원은 병자호란 당시 분노로 배를 가르고 항복 문서를 울부짖으며 찢었던 치욕의 날을 떠올린다. 만리 밖에서 명나라의 구원병이 출병하였으나 이르지 못해, 그 사이 조정이 능욕을 당했고 이후 기어이 황하가 맑아지는 것을 보지 못한 채 살아야하는 현실이기에 법당은 ‘아직도 한이 남은’ 공간이 된다.

병자호란 때 남한산성에 포위되어 있던 조선의 조정을 위해 명나라 숭정제(명나라 16대 황제 의종)가 구원병을 파견했다는 사실은 공식적인 역사에서는 찾아볼 수 없고 황경원의 시에 처음 보인다. 훗날 「조선왕조실록」의 기사에 의하면, 황경원이 「명사(明史)」「조선전(朝鮮傳)」을 읽는 과정에서 발견한 사실이라고 한다. 당시 황경원은 그 사실을 영조에게 전했다. “숭정(崇禎) 10년 정월에 조선이 급변을 고하자, 황제가 진홍범(陳洪範)에게 각 진영의 수군의 군관을 선발하여 구원하도록 명하였는데, 강화도가 이미 함락되었다는 말을 듣고 실행에 옮기지 못했다”는 것이 골자이다. 당시 의종은 이 일의 책임자를 통렬히 책망하면서 조선과 협력하여 구원하지 못하였음을 안타까워했다는 것이다. 「명사」에서 이러한 내용을 확인한 황경원은 의종의 은혜가 구원군을 보낸 신종과 차이가 없을 뿐만 아니라 더 깊다고 아뢴다. 신종의 파병이 명나라의 전성기였다면 의종의 파병은 위망이 박두할 즈음이었으니 “관창에 남은 무기가 없고 병사들의 실량이 떨어졌음에도 불구하고 속국의 어려움을 불쌍히 여겨 군사를 파견하였으니 잊을 수 없는 은혜”라는 것이다. 황경원은 이 사실을 영조에게 아뢰어 신종과 더불어 의종을 제향해야 할 필요성을 역설하였다. 이 사실을 들은 영조는 눈물을 흘리며 신종과 함께 의종을 대보단에 제사지내도록 하는 결정을 내린다.

꽤 많은 시간이 흐르고 실현 가능성도 없는 ‘재조지은’이 황경원에게만 유독 집요한 신념으로 나타나는 것은 주목해야 하는 부분이다. 특히 황경원은 무도한 세력이 중원을 차지하면서 도(道)가 어두워졌다고 하는 위기의식에서 나아가 ‘토벌’이라는 실천의지를 곳곳에서 나타내고 있다.

 

滿洲據神京 만주족이 황제의 도읍을 점거하여
天下皆被髮 천하가 온통 오랑캐 세상이 되었네.……
中原多志士 중원에는 지사가 많은데
胡不謨北伐 어찌 북벌을 도모하지 않는가.

 

‘중원에 지사가 많은데 왜 북벌을 도모하지 않는가’라는 물음은 무도한 청나라는 반드시 정벌되어야 한다는 의지를 반영한 것이다. 실리와 동떨어져 있고 실현 가능성도 희박하지만 국가 간의 명분과 의리는 마땅히 지켜야 할 것이라고 황경원은 믿었다. 그랬기에 청나라와의 ‘화친’이라는 외교적 전략에 대해서 철저히 부정적인 시각을 가지고 있었다. 무엇보다도 그는 무도한 청나라에 대해 토벌이 이루어지지 못하고 도리어 안정화되어가는 국제 정세에 크게 분개하였던 것으로 보인다.

 

有賢人兮行純粹 현자가 있어 순수를 행하였으니
爲天下兮明大義 천하를 위하여 대의를 밝혔다네.
南漢被圍兮援不至 남한산성이 포위되었는데 원병이 이르지 않아
謀臣操筆兮主和議 모신이 붓을 잡고 화의를 주장하였네.
文正裂書兮灑血淚 문정공이 편지를 찢고 피눈물을 흘리며
六日不食兮又自縊 엿새 동안 먹지 않고 또 목을 맸다네.

 

이 시는 김상헌을 기린 「북관행(北館行)」의 일부이다. 김상헌은 병자호란 때에 화친을 주장하는 최명길 등의 주화론(主和論)에 맞서 싸울 것을 주장한 주전론(主戰論) 뿐만 아니라 청나라가 명나라를 공격하면서 출병을 요구하자 반대 상소를 올려 청나라에 압송되었던 인물이다. 김상헌이 강화를 반대하며 “편지를 찢고 피눈물을 뿌리며 엿새 동안 먹지 않고 자살까지 기도한” 사실을 섬세하게 재현한다. 그리고 청나라에 압송되어 감옥에 갇혀서 목숨까지 위협받으면서도 버리지 않았던 충절을 감동적으로 드러낸다.

이처럼 황경원이 시를 통해 표현하고자 했던 것은 ‘대의(大義)’정신이었다. 그러나 대의가 널리 선양되지 못하고 토벌이 실현되지 못하는 현실은 늘 답답할 수밖에 없었다. 그 때문에 그는 시에서 슬픔, 한, 눈물 등 격한 감정으로 표현되었던 것이다. 명사(明史)에 해박하고 의리관념이 투철했던 황경원으로서는 명나라의 역사, 우리에게 베풀어준 명나라 황제의 은혜, 우리나라를 위해 싸운 명나라 장수들의 활약상은 물론 조선의 신하이자 명나라의 배신(陪臣, 제후의 대부가 천자에 대하여 자기를 이르듯이, 명나라에 대해 자기를 낮춘 말)으로서 충절을 다한 신하들을 널리 알리는 것을 소명으로 삼았으리라고 생각한다. 그가 붓을 들어 장편의 시를 쓰게 된 것도 이러한 소명의식에서 비롯되었다고 할 수 있다.

 

[참고문헌]: 「영조실록」, 「정조실록」, 「강한집」,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황경원의 문학관과 학문의 성격」(임유경, 「한국말글학」18, 한국말글학회, 2001), 「황경원의 시에 나타난 對明義理의 양상과 성격」(이은영, 「동양한문학연구」36, 동양한문학회, 201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