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존중(李存中: 1703∼1761)


이존중(李存中: 1703∼1761)                               PDF Download

 

관은 전주(全州), 자는 경이(敬以), 호는 척재(惕齋) 또는 하당(荷堂)이며, 이중휘(李重輝)의 증손으로,  할아버지는 영의정 이유(李濡)이고,  아버지는 서윤 이현숭(李顯崇)이며, 외조부는 홍수헌(洪受瀗)이다.  그리고 그는 광평대군(廣平大君)  이여(李璵)의 후손이다.

그는 사마시(司馬試)에 장원하여 진사가 되고,  정릉참봉(貞陵參奉)을거쳐 익위사 사어(翊衛司司禦)를 역임 하였으며 세자 시강원(世子侍講院)에 출입하여 자주 의견을 진술하였다.  1750년 (영조26)에 합천군수(陜川郡守)로 있으면서 다시 식년문과(式年文科)과에서 삼장원(三壯元: 초시·복시·전시에서 모두 장원을 차지함)을 석권하고 통정 대부(通政大夫)의 품계에 올라 여주목사(驪州牧使), 동부승지(同副承旨) 등을 역임하였다.

1751년 (영조27)에 대사간으로 있으면서 권신 김상로(金尙魯)형제를 신임사화(辛壬士禍) 당시의 적당(賊黨)으로 지목하여 탄핵했다가 대신을 능욕했다는 죄명을 입어 거제도(巨濟島)로 귀양가게 되었으나,  굽히지 않고

“신은 국가의 세록지신(世祿之臣)으로서 나라의 일이 날로 비뚤어지는 것을 목격하고 그냥 있을 수  없어 죽음을 무릅쓰고 이 글을 올립니다.”

라고 하여 강경한 자세를 취하여 투철한 애국심을 보이기도 하였다.

이때 부제학 윤급(尹汲)이 차자를 올려,

“이존중(李存中)은 젊어서부터 명망을 짊어진 선비로서 대단(臺端)의 우두머리가 되어, 우직한 충성심에 북받쳐 숨김 없이 말을 다하였으니,  강직한 기풍이 존중할 만한 것이 있습니다.  진실로 마땅히 너그럽게 용납하고 용서해서 퇴패한 세도(世道)를 부지해야 될 것인데,  대조(大朝)의 처분이 지나치게 엄중하여 불러서 힐책하고 즉시 먼 바다로 귀양을 보내시니,  이것이 어찌 성명(聖明)의 세상에 바라는 바이겠습니까?  아, 언로(言路)의 열리고 닫힘은 실로 나라의 흥망에 관계되는 것이니,  결단코 가볍게 꺾어서 국맥(國脈)을 손상시켜서는 안 됩니다.”

라고 하며,  이렇게 하는 것은 사기(士氣)를 위축시키는 처사이므로 권장 할 일이 못된다고 극력 구원하자, 특별히 파직하였다는 기록이 있다.

그는 4개월 뒤에 다시 정의현(㫌義縣)으로 옮겨졌다가 1753년(영조29) 풀려난 뒤 예조참의(禮曹參議)에 제수되었으나,  곧 사직하고 낙향(落鄕)하여 학문 연구에만 전심하면서 강직한 삶을 추구하였다. 오원(吳瑗) 등과 사귀는 한편 특히 윤심형(尹心衡), 이태중(李太重) 등과는 더욱 친밀하게 지냈다.

그는 평소에 강직하고 합리적인 사고를 가져 사색당파(四色黨派)의폐단을 제거하기 위한 노력을 아끼지 않았다.  그가 김상로(金尙魯)형제의 비위를 힘써 탄핵한 공로를 인정받아 그의 사후 정조 때에 와서 이조판서(吏曹判書) 겸대제학(大提學)에 추증되었다.
이와 관련한 기사로 《일성록(日省錄)》의 정조 즉위년 4월 13일조에 보면 ‘고(故) 대사간 이존중(李存中)에게 특별히 문형(文衡)을 증직하도록 명하였다.’ 라는 기록이 보이는데,  이는 참찬관 홍국영이,

“고 대사간 이존중은 흉적 김상로(金尙魯)가 정권을 훔친 때를 당하여 한 통의 소를 장하게 진달하여 힘써 흉적을 토죄하다가,  결국 두번 이나 험한 바다를 건너 10년이나 귀양살이를 하다가 죽었으니,  선대왕께서 뒤늦게 안타까워하시는 하교가 여러 차례 연석에서 나왔습니다. 지금은 흉적 김상로의 죄상이 드러나 주벌이 행해졌으니,  조정에서 포장(褒獎)하는 도리로 보아 의당 특이한 은전(恩典)이 있어야 할 것입니다.”

라고하였다.

정조가 하교하기를,

“참찬관의 말이 옳다.  내가 매우 비통해 하고 있다. 언로(言路)를 장려하고 사대부의 기풍을 수립하는 도리에 있어 의당 포증(褒贈)하는 은전이 있어야 할 것이다.  더구나 그는 문형에 준점(準點)된 자이니, 대제학을 특별히 증직하라.”

하여 내려진 증직이 었다.

그 뒤 1768년(영조44)에는 그의 아들인 문학 이상악(李商岳)이 부친의 일에 대하여 상소하여 아뢰기를 ,

“신이 지극히 애통한 마음이 있는데, 어찌 관직을 논할 수 있겠습니까?  아! 신의 망부(亡父)인 신(臣) 이존중(李存中)이 간관(諫官)의 이름을 가졌으니,  마음 속에 있는 것을 숨기자 않는 것은 충성[忠]을 위한 한 가지 일에 불과하였습니다.  그런데 네번이나 바다의 험한 파도를 건너고 아홉 번이나 죽을 고비를 당했으면서도 후회함이 없었으며,  몰(沒)함에 임해서는 심장을 가리키면서 신에게 말하기를,

‘나는 그만 지만 너는 힘쓸지어다.’

라고 하였으니, 아비와 아들이 죽고 살 즈음에 그 말이 몹시 슬픕니다.”

라 고호소 하였다.  결국 영조는 나이 젊은 신진(新進)의 무리가 ‘충(忠)’자를 함부로 거들먹 거리며 아비에 대한 억울함을 호소하였다고 지목하여 이를 억제하고 윤허해 주지 않았다.

이 기록들을 통하여 이존중이 강직한 삶을 살았던 것을 본받아 그 아들 역시 그러한 삶을 외면하지 않았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그래서인지 이 글을 보면서 그 아버지에 그 아들 이라는 말이 새삼 다가오는 것을 느껴보았다.
저서에는《척재집(惕齋集)》, 《국조명신록(國朝名臣錄)》등이 있다.
<참고문헌>
《조선왕조실록(朝鮮王朝實錄)》
《일성록(日省錄)》
《국조방목(國朝榜目)》
《척재집(惕齋集)》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