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장석(韓章錫:1832~1894)


미산 한장석(韓章錫:1832~1894)                      PDF Download

 

생애 및 가계

그의 본관은 청주(淸州)이며, 자는 치수(稚綏) 또는 치유(稚由)이고, 호는 미산(眉山), 경향(經香), 삼관자(三觀子)로 썼는데, 경향은 젊었을 때의 호이고 미산은 늘그막에 썼던 호이다. 그가 17세 되던 어느날 꿈을 꾸게 되었는데, 꿈속에 한 석실(石室) 안으로 들어가자, 경서(經書)와 사서(史書) 등의 서적이 좌우에 가득하고 운향(芸香)이 자욱이 풍겼으며 경향각(經香閣)이라는 편액이 걸려 있었다고 한다. 그는 이 꿈을 꾸고 난 뒤에 그의 독서하는 곳을 경향관(經香館)이라고 하고 또 호를 경향이라 썼다고 한다.

그리고 미산은 청주(淸州)에 있는 산 이름인데, 그의 선조인 한성우(韓聖佑: 1633~1710)가 태학생(太學生)으로 있을 때 자의대비(慈懿大妃)의 상복 문제로 촉발된 제2차 예송(禮訟) 논쟁에서 우암(尤庵) 송시열(宋時烈)이 관직을 삭탈당하고 유배되자, 180여 명의 유생들과 함께 그를 변호하는 상소를 올리고 물러나 살던 곳이다. 한성우의 8세손인 그는 53세 되던 해에 고향인 아산(牙山)으로 옮겨가서 살며 선조의 고향에 대한 그리움을 잊지 않기 위하여 거처하는 집을 ‘미산서실(眉山書室)’이라고 이름을 붙이고 호로 삼았던 것이다. 이는 훗날 더 늙으면 미산으로 다시 돌아가 여생을 마칠 생각으로 그렇게 한 것이라 한다. 삼관자라는 호를 쓰게 된 데 대한 내역은 자세하지 않으나, 그가 25세(1856, 철종7) 되던 해에 〈삼관자자서(三觀子自序)〉를 지은 것으로 보아 아마도 젊은 시절부터 이 호를 사용한 듯하다.

그는 사헌부 대사헌(司憲府大司憲)을 지내고 의정부 좌참찬(議政府左參贊)에 추증된 한현모(韓顯謩)의 후손으로, 고조(高祖)는 동지중추부사(同知中樞府事)를 지내고 의정부 영의정(議政府領議政)에 추증된 한후유(韓後裕)이며, 증조(曾祖)는 통덕랑(通德郞)을 지내고 이조참판(吏曹參判)에 추증된 한용정(韓用鼎)이며, 조부(祖父)는 태인현감(泰仁縣監)을 지내고 이조판서(吏曹判書)에 추증된 한원리(韓元履)이다. 부친은 공조참판(工曹參判)을 지낸 하석(霞石) 한필교(韓弼敎)이며, 모친인 풍산홍씨(豊山洪氏)는 의정부 좌의정(議政府左議政)을 지낸 연천(淵泉) 홍석주(洪奭周)의 따님이며, 부인인 한산이씨(韓山李氏)는 이조판서(吏曹判書)를 지낸 이겸재(李謙在)의 따님이다.

그는 1832년(순조32) 12월 17일에 서울 소정동(小貞洞)에서 태어났다. 4살 때부터 모친에게 《사략(史略)》을 배울 수 있었던 것은 모친이 당대의 문장가로 명망이 높았던 홍석주의 딸이었기 때문인데, 모친 역시 어린 나이에 이미 《소학(小學)》과 사서(四書) 및 역사서 등을 공부하여 상당한 학식을 쌓았으므로 자식을 직접 교육할 수 있었던 것이다. 8세가 되던 해에는 외조부인 홍석주에게 나아가 공부하였다. 그가 17세 되던 해에 한산이씨(韓山李氏)와 혼인하였으며 이 해에 처음으로 반시(泮試)에 응시하고 자신의 서실(書室)을 경향관이라고 하였다.

그가 19세 되던 해에 증광 생원시(增廣生員試)에 합격하였으나 부친이 탄핵을 받게 된 연유로 회시(會試)에는 응시하지 못하였다. 그의 부친 한필교가 재령군수(載寧郡守)를 지낼 때의 사건에 연좌되어 이 해에 파직당하고 문의현(文義縣)으로 귀양 갔다가 해를 넘기고 돌아왔는데, 이는 황해도 암행어사 신석희(申錫禧)가 전 병사 김상우(金相宇)를 비롯한 여러 관리들의 죄상을 들추어내어 벌을 주어야 한다고 서계(書啓)한 일에서 비롯된 때문이었다.

23세 되던 해에 봉서(鳳棲) 유신환(兪莘煥)을 찾아가 그의 문하에서 《대학(大學)》을 비롯하여 여러 성리서(性理書)를 수업하였는데, 당시에 함께 동문수학한 사람으로 계운(溪雲) 김낙현(金洛鉉), 단번(丹樊) 윤치조(尹致祖), 진암(縝菴) 박홍수(朴洪壽), 경당(絅堂) 서응순(徐應淳), 장우(丈藕) 윤치담(尹致聃), 천식(泉食) 민영목(閔泳穆), 파강(巴江) 윤병정(尹秉鼎), 소산(素山) 이응진(李應辰) 등이 있다.

그는 25세 되던 해에 상시(庠試)에서 장원하였으며, 27세 되던 해의 3월에 정시(庭試)에 합격하고 9월에 진사시(進士試)에 합격하였다. 이해 12월에 장남 한광수(韓光洙)가 태어나고, 31세 되던 해의 정월에 차남 한창수(韓昌洙)가 태어났으며, 이해 3월에 성균관 재임(齋任)에 천거되고 얼마 후에 장의(掌議)에 임명되었다. 33세 되던 해의 3월에 맏딸이 태어났는데 그는 후에 이범팔(李範八)에게 시집갔다. 8월에 증광문과(增廣文科) 초시(初試)에 합격하였다.

35세 되던 해의 9월에 광주(廣州) 부곡(富谷)의 병사(丙舍)로 이주하여 살았다. 36세 되던 4월에 동몽교관(童蒙敎官)에 임명되었으며, 11월에는 둘째 딸이 태어났는데 후에 그는 서상규(徐相珪)에게 시집갔다. 37세 되던 5월에 부친이 신천 군수(信川郡守)로 재직하던 중의 일로 암행어사의 장계(狀啓)에 의해 무함을 당하여 파직이 논의되자, 이에 인혐(引嫌)하여 동몽교관에서 체직시켜달라는 사직 상소를 올렸다.

그는 또 39세 되던 해에 선공감 봉사(繕工監奉事)에 임명되었다가 의금부 도사(義禁府都事)로 전직되고 다시 얼마 후에 전생서 직장(典牲署直長)으로 승진하였다. 이해 12월에 셋째 딸이 태어났는데, 그는 후에 협판 박승봉(朴勝鳳)에게 시집갔다. 40세 되던 해의 12월에 감제(甘製)에서 합격하고 전시(殿試)에 곧바로 응시하였다. 41세 되던 해의 4월에 정시(庭試)에 나아가 병과 제15인으로 합격하였다.

47세 되던 해의 4월에 부친상을 당하였고, 50세 되던 해의 7월에 모친을 모시고 양근(楊根)의 덕고정(德皐亭)으로 이사하였다. 52세 되던 해의 8월에 모친을 모시고 다시 아산(牙山) 황곡산장(篁谷山莊)으로 이사하였는데, 55세 되던 해의 5월에 모친상을 당하였다. 삼년상을 마치고 57세 되던 해에 형조판서(刑曹判書)가 되고, 이어 대제학(大提學), 협판 내무부사(協辦內務府事), 의정부 당상(議政府堂上), 우부빈객(右副賓客), 지춘추관사(知春秋館事), 규장각 제학(奎章閣提學) 등을 역임하였다.

63세 되던 해의 1월에 좌참찬(左參贊)을 역임하고, 5월에 좌부빈객(左副賓客)이 되었으나 병으로 체직되었다. 그해 7월 15일에 대사동(大寺洞) 집에서 별세하였다. 1898년(고종35)에 효문(孝文)이라는 시호(諡號)를 받았으나, 1910년(순종4)에 문간(文簡)으로 개시(改諡)하였다.

묘소는 원래 경기도 군포읍(軍浦邑) 산본리(山本里)로, 현재의 군포시 산본동에 있었는데, 1931년 경기도 시흥군(始興郡) 동면(東面) 독산리(禿山里)인, 현재의 서울시 금천구(衿川區) 독산동(禿山洞)에 예장(禮葬)하였다가 광복 이후에 경기도 의왕시(義旺市) 이동(二洞) 창말[倉村]로 이장하였다.

그는 본부인에게서 2남 4녀를 두었고 측실부인에게서 1남을 두었다. 장남 한광수는 일찍 과거에 급제하였으나 매우 어리석어 동료들로부터 웃음거리가 되었고, 차남 한창수는 출세에 급급하여 부친이 어찌하지 못할 정도였다고 한다. 그래서 당시 사람들은 한장석에게 아들이 없는 것과 같다는 말까지 하였을 정도이며, 한창수는 일제로부터 남작(男爵)의 작위를 받는 등 친일 행적으로 오명을 남기기도 하였다.

그는 당대의 최고의 문신(文臣)으로 대제학(大提學)을 역임하였다. 동시대의 명성이 있었던 운양(雲養) 김윤식(金允植), 하정(荷亭) 김영수(金永壽) 등과 교유하였으며, 특히 유신환(俞莘煥) 문하에서 동문인 경당(絅堂) 서응순(徐應淳)과 가장 친교가 깊었다 한다. 미산에게 영향을 준 선배로는 환재(瓛齋) 박규수(朴珪壽), 연재(淵齋) 윤종의(尹宗儀), 경대(經臺) 김상현(金尙鉉) 등을 지목할 수 있다. 특히 김상현과의 교유를 보여주는 다수의 수창시(酬唱詩)와 편지 등이 전해오고 있다. 후배인 창강(滄江) 김택영(金澤榮)과 영재(寧齋) 이건창(李建昌) 등과도 교유가 있었던 것으로 전한다.

 

문집의 편찬 및 간행

그의 문집인 《미산집(眉山集)》은 저자의 두 아들 한광수와 한창수가 집에 보관하고 있던 초고본(草稿本)를 김인식(金寅植)에게 교정을 부탁하여 1907년에 연활자(鉛活字)로 간행한 초간본이 있고, 그 뒤에 차남 한창수가 증보 재편한 것을 손자 한상기(韓相琦)가 1934년 경성(京城)에서 연활자로 간행한 중간본이 있다. 이 중간본의 분량은 14권 7책으로 총 644판(板)이며, 반엽(半葉)은 11행 22자로 되어 있다.

그가 40세 때인 1871년에 지은 〈자서(自序)〉에

 “어린 시절 습작했던 고문(古文)과 시에 《만리초정(萬里初程)》 8권, 《화석고(花石稿)》 2권, 《요산집(樂山集)》 2권이 있다.”

라고 기술하고, 이어

“이는 모두 처음 말을 배우던 때에 지은 것이어서 가락에 맞는 것이 하나도 없으니 상자 속에 묶어 두었다가 화롯불에 태워버리고자 하였다.”

라고 한 것으로 보아 그의 사후에 정식으로 간행한 이 문집 말고도 남긴 작품이 상당수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그리고 그의 문집 중 《삼관갑고(三觀甲稿)》 7권은 그의 나이 17세 때부터 24세 때까지 지은 작품을 수록한 것이며, 《경향관을고(經香館乙稿)》는 24세 때부터 40세 때까지 지은 시작품 3권과 산문 6권을 수록한 것이다. 또 그밖에 저술로 《경의차록(經疑箚錄)》, 《산수유기(山水游記)》, 《필담(筆談)》 등도 있었던 것으로 파악된다.

 

문집의 내용 및 구성

미산집》의 내용과 구성을 좀 더 구체적으로 살펴보면 권수(卷首)에는 신응조의 〈미산집서(眉山集序)〉, 유신환의 〈삼관필경서(三觀筆耕序)〉와 저자의 〈자서(自序)〉가 수록되어 있고, 이어 전체 목차인 〈총목(總目)〉이 수록되어 있다. 그리고 권1~3은 시(詩), 권4는 서(書), 권5는 서(書), 소(疏), 계(啓), 권6은 응제문(應製文), 권7은 서(序), 권8은 기(記), 권9는 제발(題跋), 명(銘), 찬(贊), 잠(箴), 상량문(上樑文), 강의(講義), 권10은 잡저(雜著), 권11은 제문(祭文), 애사(哀辭), 비(碑), 묘갈(墓碣), 권12는 묘지(墓誌), 권13은 묘표(墓表), 행장(行狀), 시장(諡狀), 가장(家狀)을 수록하였고, 권14는 부록으로 연보(年譜)가 수록되어 있다. 다시 13권의 말미에 김인식의 〈미산선생문집발(眉山先生文集跋)〉을 수록하였고, 부록인 14권 연보 끝에는 이용신의 〈연보발(年譜跋)〉이 수록되어 있다. 이와 같이 그의 문집은 방대한 양과 짜임새 있는 규모로 분류하여 구성되어 있다.

그리고 신응조의 서문에

“그의 문(文)은 경전에 근거하여 말이 뜻을 전달하고 이치는 순조로우며, 시(詩)도 또한 연원이 깊은데다 고체(古體)에서 더욱 뛰어났다.”

라고 품평하고 있는 내용을 통하여 그의 학문세계를 대략은 짐작할 수 있겠다. 그런데 유신환의 〈삼관필경서〉가 첫머리에 실려 있어서 본 문집 《미산집》의 서문인 것처럼 보이기는 하나 다소 거리가 있는 듯하다. 유신환은 이 서문에서 주로 저자의 외조부인 홍석주의 훌륭한 점을 위주로 거론하고 한장석에 대하여 미숙한 점을 지적하면서 홍석주를 본받으려면 더욱 노력해야 한다고 강조하였다. 이는 필시 《삼관필경》이 그가 25세의 젊은 나이에 지은 글을 모아 놓은 것이었기 때문에 그 글에 국한하여 언급한 것으로 여겨진다. 또한 그가 직접 지은 〈삼관자자서(三觀子自序)〉가 있음에도 불구하고 정작 그 실제 작품은 후대에 전해오지 않는다.

시(詩)는 연대순으로 편차를 나누었는데 중간본의 경우 초간본처럼 간지를 자세히 기록하지는 않았다. 권1에는 사부(辭賦)인 〈경천대사(擎天臺辭)〉, 〈백어부(白魚賦)〉 2편과 시(詩) 140제(題)가 실려 있다. 〈경천대사〉는 이경남(李景南)이 명(明)나라가 망한 뒤에도 명나라 황제 태조(太祖), 신종(神宗), 의종(毅宗)의 기일(忌日)이 돌아오면 경천대에 올라가 제사를 지내며 대명의리(大明義理)를 지켰는데, 그 후로도 자손들이 대대로 그 의리를 지켜 오는 것을 찬양한 내용을 담고 있다.

백어부〉는 책을 햇볕에 거풍(擧風)하다가 책속에 서식하고 있는 좀을 발견하고서 좀의 생태와 해악(害惡)을 열거한 다음, 사람 중에도 좀과 같이 해악을 일삼는 사람들이 많으니, 이를 경계해야 한다는 내용을 담고 있다. 이는 병서(幷序)에서 직접 밝힌 대로 이상은(李商隱)의 〈슬부(蝨賦)〉, 육구몽(陸龜蒙)의 〈후슬부(後蝨賦)〉, 나은(羅隱)의 〈추충부(秋蟲賦)〉, 구양수(歐陽脩)의 〈증창승부(憎蒼蠅賦)〉와 같은 풍자의 기법을 모의(模擬)한 것으로 장문(長文)의 글을 구사하였다. 실제 작품의 중간 중간을 생략하고 그 일부를 살펴보기로 한다.

 

조화의 신이 만물을 만들어 냄에
夫惟大專之槃物

온갖 사물을 잉태하여 생성하나니
孕萬品而生成

혹은 형상을 비슷하게 만들고
或以形而肖化

혹은 기를 모아서 생겨나게 하네
或以氣而聚生

영물과 추물을 모아 나란히 아우르고
彙靈醜而竝凾

크고 작은 것을 합해 무리를 만드네
合洪纖而爲黨

—–중략—–

지렁이는 마른 흙에서 뭔가를 하고
螾何爲於槁壤

물고기는 서로 강과 호수에서 잊고 살건만
魚共忘於江湖

유독 지극히 작은 이 물건만은
獨此物之至眇

아무것도 없는 데에 의탁하여 몸을 이루어
托無有而成軀

알도 아니며 태도 아닌 것이
不卵不胎

제 무리를 번식시켜가며
寔繁其徒

사물에 따라 잘도 변화하니
遇物善變

찾아내어 잡을 수가 없네
不可捉摸

—–중략——

나무뿌리가 충실하면 벌레가 들어오지 않고
夫木根實則蟲不入

현인을 등용하면 아첨꾼은 절로 멀어지는 법
賢人用則佞夫自遠

군자는 이것을 응용하여
君子以之

문지도리의 동정을 살피네
覽戶樞之動靜

좋은 목재 버려지는 것이 아까우니
惜杞梓之見棄

기미를 미리 살펴 싹을 꺾어야 하네
燭幾折萌

이렇게 처음부터 경계하는 것이
以謹于始

도의 근본이라네
道之本也

혹자는 좀이 아름다운 글월을 먹고
或謂蠧魚咀嚼英華

육예에 푹 빠져
沈浸六藝

문인의 오랜 사귐을 얻는다 하건만
得文人之夙契者

아아,
嗚呼

비루한 선비는 진부한 얘기나 하고
曲士談陳腐

소인배 유자는 글귀나 지키며
小儒守章句

전각과 조충에만 공력을 쏟느라
工篆刻與雕蟲

마른 대를 태우고 토끼를 잡아대며
汗枯竹而殺兎

고금을 매몰시키고
陸沈古今

세상일을 쓸데없는 것으로 만들어
弁髦事務

문자의 숲에서 살고 죽다가
生死於文字之林

인의의 길에서 꿈을 깨니
夢覺於仁義之路

천지간의 한 마리 좀이 분명 아니랴
顯非天地之一蠧耶

 

위에서 보듯이 미물인 좀과 같은 행위를 하는 사람이 이 인간 세상에 숫하게 많다는 사실을 고발하는 내용이다. 이는 비루한 짓을 하면서 소인배의 행태를 벗어나지 못하는 부류의 사람들에게 경종을 울려주는 한편의 글이 아닐까 싶다. 이어서 시의 경우는 사육신(死六臣)의 절의를 찬양한 〈육신전을 읽고[獨六臣傳]〉라는 작품이 맨 첫머리에 수록되어 있다. 이 작품도 잠시 살펴보기로 한다.

 

당우시대 선양할 때 이일 저일 많았지만
唐虞禪受事多端

여섯 선비 충절 같이 단사처럼 밝았으랴
六士危忠炳若丹

동학사 푸른 단풍 숲엔 가을밤 혼백이요
鶴寺靑楓秋夜魄

집현전엔 옥홀 들던 그 옛날의 반열인데
集賢玉笏舊時班

무왕 당시 천하에는 이산 우뚝 하였거늘
武王天下夷山屹

성조의 궁중에선 큰 칼만이 차가웠으니
成祖宮中景劍寒

늠름해라 군신 부자 그 의리가 드높아서
凜凜君臣父子義

천년 두고 머리털이 모자를 찌르게 하네
令人千載髮衝冠

위의 글은 사육신의 절의에 대한 것을 백이숙제와 대비하여 자신의 소회를 적은 작품이다. 그런데 미산의 시 작품은 전반적으로는 지인들과의 교유시가 압도적으로 많다. 그 형태는 증별시(贈別詩), 차운시(次韻詩), 만시(輓詩), 수시(壽詩), 산수(山水)나 누정(樓亭)을 유람하며 읊은 시 등 다양하게 나타난다. 특히 외가에 대한 생각이 각별하였는데 외종조인 해거(海居) 홍현주(洪顯周)에 대한 축수시(祝壽詩)나 그와 증답한 작품이 많이 보인다.

권2에는 159제(題)의 시가 수록되어 있다. 당시의 대왕대비인 신정왕후(神貞王后)의 만수무강을 축원하는 〈대왕대비전연상시(大王大妃殿延祥詩)〉를 비롯하여, 관직 생활의 일면을 읊은 작품들이 다수 있다. 한편으로는 개경(開京), 평양(平壤) 등지를 유람하며 지은 기행시를 비롯하여, 후금(後金)의 포로가 되어 가서 적군의 실정을 탐지하여 보내주려다가 강홍립(姜弘立)의 고발로 처형당한 김경서(金景瑞) 장군에 대한 추모시, 영선사로 일본에 가는 김윤식, 종사관으로 천진(天津)에 가는 윤태준(尹泰駿) 등에게 준 증별시 등이 있다. 특히 2권에는 부친을 그리워하며 지은 시, 또는 부친의 작품에 화운한 시가 많아 깊은 효심을 확인할 수 있다.

권3에는 106제의 시작품이 수록되어 있다. 여전히 교유시가 압도적으로 많은 가운데 함경도 관찰사를 지낸 것을 계기로 왕래하던 도중의 기행시(紀行詩)나 임무 수행 중의 소회 등을 읊은 작품이 다수를 차지한다. 그중에 〈큰길가에 선정을 기리는 거사비가 곳곳마다 숲을 이루었으니 즉석에서 읊어 개탄을 드러내 보이다[官途善政去思之碑在在成林口占示慨]〉라는 작품은 조선 후기에 백성들을 착취하고도 관례에 따라 선정비를 남발해서 세우던 폐습을 비판하는 내용으로, 권필(權韠)의 〈충주석(忠州石)〉이나 이상적(李尙迪)의 〈길 가의 거사비를 읊다[題路傍去思碑]〉에 비견될만한 풍자문학의 면모를 여실히 보여준다. 〈옥소정에 새로 날이 개어 연구를 짓다[玉簫新晴聯句]〉라는 작품은 교유시의 한 측면을 보여준다는 점에서 주목할 만하다.

한장석 자신이 먼저 한 연을 시작하여 취농(醉農) 이교선(李敎善), 아들 한광수(韓光洙), 죽계(竹溪) 세 사람이 돌아가면서 연구(聯句)를 지은 것인데, 모두 14회 반복하고 마지막으로 한장석 자신이 마무리하여 모두 57련(聯)의 장편 연구를 이루었다. 그리고 이 당시 대제학은 표정(杓庭) 민태호(閔台鎬), 한장석, 하정(荷亭) 김영수(金永壽)로 이어졌는데, 〈문원의 옛 벼루를 태학사들이 차례로 서로 전수했는데 이름을 전심연이라 불렀으며……[文苑古硯太學士遞相傳受號曰傳心硯……]〉라는 작품에서 자신의 뒤를 이은 대제학 김영수에게 대제학의 상징인 벼루를 전해주며 사라진 풍습을 복원하는 내용을 읊기도 하였다.

권4에는 편지글인 서(書)가 별지(別紙)를 포함하여 31편이 수록되어 있다. 이 중 서응순과 주고받은 편지가 5편으로 가장 많다. 〈외종숙 원천 홍공께 올리는 편지[上從舅原泉洪公書]〉는 홍길주(洪吉周)의 아들인 홍우건(洪祐健)에게 보내는 편지인데, 장인 홍석주의 마지막 역작인 《학강산필(鶴岡散筆)》을 교정하고 편차한 일을 보고하면서 홍석주의 학덕을 기리고 추모하는 내용을 담고 있다. 〈이순명에게 보내는 편지[與李舜命書]〉는 이설(李偰)의 금강산 기행시집인 《봉래창수록(蓬萊唱酬錄)》에 발문을 쓰고 그 감격을 전하는 글인데, 말미에 가을이 되면 자신도 금강산을 유람하고 싶은데 함께 동행할 수 있겠는지 묻는 편지이다. 《봉래창수록》에 대한 발문은 9권에 〈서봉래창수록후(書蓬萊唱酬錄後)〉라는 제목으로 실려 있다. 〈김계용이 왕양명을 논한 편지에 답하다[答金季用論王陽明書]〉는 양명학에 대해 긍정적인 태도를 보이는 상대방에 대하여 우려하면서

“오직 총명한 사람은 독서하기도 어렵고 도리를 깨닫기도 어렵다. 왕양명은 미리 스스로 성현에 대적하는 허다한 생각을 가지고 있어서 자연히 책과 도리에 들어가기 어렵다.”

라고 주자(朱子)가 언급한 말을 빌어 왕양명의 총명함을 한편으로 인정하면서도 그 해악을 경계하였다.

권5에는 서(書)와 소(疏)와 계(啓)가 실려 있는데, 서는 10편, 계는 1편, 상소문이 21편 수록되어 있다. 서간문은 경대(經臺) 김상현(金尙鉉)에게 돌아가신 모친의 묘지(墓誌)를 써 달라고 부탁한 편지와, 묘지를 지어준 것에 대해 감사하는 편지를 나란히 수록하였다. 여기 감사하는 편지 뒤에는 지어준 묘지에 대하여 수정을 요구하는 별지가 수록되어 있다. 내용을 살펴보면, 문장의 흐름 문제를 지적한 것도 있고 자신을 공(公)으로 부른 것을 감당하기 어려우니 군(君)으로 불러 달라는 겸손한 태도를 보이는가 하면, 모친의 생전 행적에 대해 우선시하고 싶은 점 등등 매우 세밀한 부분까지 윤문해 달라는 요구 사항을 담고 있다.

그 뒤에는 김상현의 편지 원문도 부록으로 실었다. 〈이원지에게 답한 편지[答李爰止書]〉는 경전의 내용에 대한 질문에 답한 것인데, 물(物)의 개념, 〈언잠(言箴)〉의 내용에 대한 질문, 주자(朱子)가 말한 ‘전심치지(專心致志)’에서 치지(致志)의 뜻, 계신공구(戒愼恐懼)가 미발(未發)인지 이발(已發)인지 여부 등 경학(經學)에 대한 깊이 있는 논의가 담겨 있다. 〈윤주현에게 답하는 편지[答尹周賢書]〉는 당대의 명사인 윤희구(尹喜求)가 조부 윤치응(尹致膺)의 묘도문(墓道文)을 부탁한 것에 대하여 공사다망해서 늦어진 점을 사과하면서, 내용을 충실하게 하는데 참조할 수 있도록 보계(譜系)와 행장(行狀)의 초고를 인편에 보내달라는 부탁의 글이다. 이때 지은 묘도문은 《미산집(眉山集)》 권11에 〈동부승지윤공치응묘갈명병서(同副承旨尹公致膺墓碣銘竝序)〉라는 제목으로 실려 있다. 상소문은 거의 대부분이 사직소(辭職疏)인데 대사성, 이조 참의, 홍문관 제학, 협판군국사무, 이조 참판, 대제학, 경기 감사 등을 사양하는 글이다. 유일하게 실린 계(啓) 1편은 함경도 관찰사가 되었을 때 함경도 여섯 고을의 금광(金鑛)을 혁파하고 영흥(永興)의 이미 견감(蠲減)된 포흠(逋欠)에 대해서는 다시 징수하지 말 것을 간청하는 내용을 담고 있다.

권6에는 응제문(應製文) 33편이 수록되어 있는데 옥책문(玉冊文), 시책문(諡冊文), 전문(箋文), 교서(敎書), 친제문(親祭文), 치제문(致祭文), 반교문(頒敎文) 등을 수록하였다. 이는 대부분 대제학으로서 임무를 수행하면서 지은 것들이며 문체(文體)의 성격상 변려문(騈儷文)이 많은데, 난해한 고사와 전고 투성이어서 매우 어려운 글임을 직감할 수 있다.

권7에는 서(序) 33편이 수록되어 있는데 송서(送序)와 시문집(詩文集)에 대한 서가 대부분이고 그밖에 수서(壽序)가 3편 실려 있다. 〈명청삼십사가문초서(明淸三十四家文抄序)〉, 〈명문속선서(明文續選序)〉는 저자가 편찬한 책에 대한 서문이고, 〈보도서(譜圖序)〉는 자기 집안의 족보인 《청주한씨보도(淸州韓氏譜圖)》의 서문인데 뒤에 부록으로 시조 한란(韓蘭)으로부터 저자의 아들 대까지의 보도(譜圖)와 인물에 대한 기록을 첨부하였다. 〈남행집소서(南行集小序)〉는 1869년 익산(益山)에 귀양 가 있던 부친을 찾아뵙고 다시 서울로 돌아올 때까지 25일간 1,060리를 다녀오면서 지은 근체시와 고시 38편을 수록한 〈남행집(南行集)〉에 대한 서문이다. 〈삼관자자서(三觀子自序)〉는 젊은 시절인 25세 때 지은 것으로, 스승 유신환의 ‘문에 나아가 도를 구하라[卽文求道]’라는 가르침에 따라, 선비가 문(文)을 통해 도(道)를 구하는 것이 마치 농부가 밭을 갈고 수확을 기다려 먹는 것과 같다고 여겨 자신의 시고를 ‘필경(筆耕)’으로 명명하였다는 내용을 담은 글이다.

권8에는 기(記) 26편이 수록되어 있는데 주로 누정기(樓亭記)와 산수 유람기(遊覽記)이다. 이 중 〈유수락산기(遊水落山記)〉는 1868년 4월에 이병익(李秉翼)과 그의 일가인 이선익(李璿翼), 이웃의 서생(徐生)과 함께 일행을 이루어 수락산 옥류동(玉流洞), 은선동(隱仙洞), 영지동(靈芝洞) 등을 유람하고 그 흥취를 기록한 글이다. 〈강남간사록(江南幹事錄)〉은 1874년 2월에 원자(元子)가 탄생한 경사를 기념하기 위하여 시행한 증광시(增廣試)에서 전라좌도(全羅左道) 경시관(京試官)에 차임되어 화순(和順)과 임실(任實)에서 시험을 주관한 다음 화순 동복(同福)의 적벽(赤壁), 광주(光州)의 무등산(無等山) 등을 유람하고 여산(礪山), 목천(木川), 성환역(成歡驛), 오산점(五山店), 과천(果川)을 거쳐 도성에 들어올 때까지의 41일 동안 1,947리를 다녀온 기록이다.

돌아오는 과정에 장성(長城)에 들러 오랫동안 흠모하던 칠순(七旬)이 넘은 노사(蘆沙) 기정진(奇正鎭)을 찾아뵈었다. 이때 지은 일련의 시들이 권1에 〈호남 시사의 행차를 출발하다[發湖南試士行]〉이하 10여 수가 실려 있다. 그중 〈장성부에 묵다[宿長城府]〉라는 작품에서 주석으로,

“이 여행에서 산으로는 백양산(白羊山)을 보았고 인물로는 징사(徵士) 기정진을 뵈었는데, 모두 지난날 사모해왔던 대상들이다.”

라고 하여 그 감격을 특기(特記)하였다. 〈36동유람기[遊三十六洞記]〉는 그가 1875년 8월부터 1877년 12월까지 황해도 용강 현령(龍岡縣令)으로 근무할 때 유람한 기록을 담은 글이다. 문성강(文城江)이 서쪽으로 흘러 능성강(能成江)이 되어 평안도 삼등면과 황해도 수안군과의 경계를 지나는데 바로 이 능성강변에 강물과 기암괴석이 어우러져 36곳의 경승을 이루어 ‘삼십육동천’이라 부르는 명승지가 되었다. 이 때 지은 일련의 시들은 권2에 실려 있다. 〈미산서실기(眉山書室記)〉는 저자가 1884년 4월에 용문산(龍門山)을 유람하고, 8월에 모친을 모시고 아산(牙山)의 황곡산장(篁谷山莊)으로 옮겨 거처하면서 자신의 서실 이름을 지은 내력을 적은 글이다.

권9에는 제발(題跋) 32편, 명(銘) 6제(題) 8편, 찬(贊) 3편, 잠(箴) 1편, 상량문(上梁文) 4편, 강의(講義) 3제(題) 5편이 실려 있다. 제발은 서후(書後), 제후(題後), 문집발(文集跋), 연보발(年譜跋) 등이다. 그중 〈항해집발(沆瀣集跋)〉과 〈숙수념후(孰遂念後)〉는 항해 홍길주의 문집에 대한 발문으로, 그들의 교유 관계와 문학 세계를 살필 수 있는 중요한 글이다.

연보발(年譜跋)은 선친 한필교(韓弼敎)의 연보와 선친이 생전에 편찬한 8세조, 5세조, 조고(祖考), 백부(伯父)의 연보에 대한 발문이다. 〈연천집산서목록후발(淵泉集散書目錄後跋)〉은 외조부 홍석주의 문집인 《연천집(淵泉集)》을 1876년에 편찬 간행한 다음, 홍석주의 저술 가운데 이름만 남아 있고 책은 없어진 것, 이미 간행된 것, 미처 간행되지 못했으나 전할 만한 것 21종을 ‘사고전서존목제요(四庫全書存目提要)’의 예에 따라 목록을 만들고 여기에 발문을 붙인 것이다. 명(銘) 중에서 〈청라연명(靑蘿硯銘)〉은 아주 짧은 소품이지만 병서(幷序)와 함께 3편이며, 강의는 〈동궁논어강의(東宮論語講義)〉가 3편이다. 상량문 중 〈경성전상량문(慶成殿上樑文)〉과 〈정선당상량문(正善堂上樑文)〉은 응제문으로 대작(代作)한 것을 수록하였다.

권10에는 잡저(雜著) 22편이 실려 있다. 그중 다수는 예서(禮書), 사서(史書), 문집(文集), 공양전(公羊傳), 태극도(太極圖) 등 여러 서적을 읽고 지은 독후감 성격의 글이 많다. 〈독대례의(讀大禮議)〉는 명나라 세종(世宗)이 무종(武宗)의 적통을 이어 황제가 된 뒤에 아버지 흥헌왕(興獻王)을 예종(睿宗)으로 추존한 것이 잘못되었음을 말하고 아울러 각종 대례(大禮)에 대해 논변한 글이다. 〈정론(政論)〉은 용법(用法), 선거(選擧), 친현(親賢), 위군(爲君), 전제(田制), 심관(審官)에 대한 저자의 논변이다. 〈김열부전(金烈婦傳)〉은 명천(明川)의 사인(士人) 박종윤(朴宗允)의 처 김씨가 남편의 억울한 옥사를 바로잡기 위하여 5년간 장례도 치르지 않는 등 갖은 노력 끝에 옥사의 시말을 바르게 한 전말을 기록한 내용의 글이다.

권11에는 제문(祭文) 29편, 애사(哀辭) 2편, 비(碑) 3편, 묘갈(墓碣) 8편이 수록되어 있다. 제문은 유신환에 대한 〈제봉서유선생문(祭鳳棲兪先生文)〉, 종형수 박씨에 대한 〈제종형수박씨문(祭從兄嫂朴氏文)〉, 외할아버지에 대한 〈제외왕고묘문(祭外王考墓文)〉와 〈제외구묘문(祭外舅墓文)〉 등이 수록되어 있는데, 대부분 운문(韻文) 형식을 취하고 있으며 특히 4언 고체(古體)가 가장 많은 비중을 차지한다. 애사는 서응순의 처 박유인(朴孺人)에 대한 것과 친구 이위(李偉)에 대한 내용을 수록하였다.

비는 시조 태위공(太尉公) 한란(韓蘭)의 유기비음기(遺基碑陰記), 양헌수(梁憲洙)와 구완식(具完植)의 신도비명이다. 양헌수는 1866년 병인양요(丙寅洋擾) 때 로즈 제독이 이끄는 프랑스 함대가 흥선대원군의 프랑스 신부 처형을 빌미로 조선을 침략해오자, 강화도 정족산성(鼎足山城)에서 프랑스군을 격퇴한 장군이다. 구완식은 1882년 임오군란 때에는 호위장(護衛將)으로서 충주로 피신한 명성황후(明成皇后)를 봉영(奉迎)한 인물이다. 묘갈은 박종여(朴宗輿), 김이일(金履一), 윤치응(尹致膺), 민치상(閔致庠), 한몽린(韓夢麟), 이언저(李彦著), 이겸재(李謙在), 김창희(金昌熙)에 대한 내용을 수록하였다.

권12에는 묘지(墓誌) 13편이 수록되어 있다. 외조부 홍석주, 종형 한윤석(韓胤錫), 자형 이승구(李承九) 등 일가친척과 김기형(金璣衡), 김상현(金尙鉉), 김병덕(金炳德) 등의 묘지명이다. 이 중 홍석주에 대한 묘지는 저자가 지극히 존경하던 인물이었던 연유로 다른 사람의 묘지에 비해 몇 배에 달하는 장편의 글을 남겼다. 양적인 것이 존경의 표상을 대표하지는 않지만 존경하다보면 관심을 갖기 마련이고 관심을 갖다보면 그만큼 보고들은 것이 많아서 할 말이 많을 것은 부인할 수 없는 사실이라 여긴다.

권13에는 묘표(墓表) 5편, 행장(行狀) 4편, 시장(諡狀) 1편, 가장(家狀) 2편이 실려 있다. 묘표는 문헌공(文獻公) 조성하(趙成夏), 부친 한필교와 모친 풍산 홍씨, 동녕위(東寧尉) 김현근(金賢根), 이윤(李潤)에 대한 것이며, 행장은 이인설(李寅卨), 연재 윤종의, 백모(伯母) 완산 이씨(完山李氏), 석지(石芝) 이시우(李時愚)에 대한 것이며, 시장은 계운(溪雲) 김낙현(金洛鉉), 가장은 선고(先考)와 선비(先妣)의 것이다. 말미에 1898년에 지은 김인식의 발문이 실려 있다.

권14는 부록(附錄)으로, 이용신(李庸信)이 지은 연보(年譜)와 〈연보발(年譜跋)〉이 실려 있다. 연보 안에 한장석을 대상으로 아들 한광수(韓光洙)가 지은 가장과, 이설(李偰)이 지은 묘갈과 묘표, 김돈희(金敦熙)가 지은 묘지명, 이용원(李容元)이 지은 신도비명 등이 포함되어 있다.

 

마무리

미산은 위에서 본바와 같이 방대한 양의 문집을 남겼으며, 또 다양한 분야의 글을 저술하였다. 게다가 학문 연원과 당시 대제학까지 지낸 이력이나 교유했던 인물들의 면면을 고려해 볼 때 주목해 볼만한 인물임에 틀림이 없다. 그런데 같은 시기에 활동했던 인물인 운양(雲養) 김윤식(金允植)에 견주어 보면 그동안에는 학계에서 그다지 주목받지 못한 경향이 있는 듯하다. 그나마 다행스러운 것은 최근 들어 모기관에서 그의 문집을 완역하여 여러 연구자들에게 제공함에 따라, 상당한 관심을 가지게 된 점이라 하겠다. 이제 앞으로 좀 더 많은 연구자들의 깊은 관심과 심도 있는 연구가 이루어졌으면 하는 바람을 다시 한 번 가져본다.

 

<참고문헌>

《일성록(日省錄)》
《승정원일기(承政院日記)》
《조선왕조실록(朝鮮王朝實錄)》
《미산집(眉山集)》, 한장석(韓章錫).
《고담일고(孤潭逸稿)》, 이순인(李純仁).
《기원집(杞園集)》, 어유봉(魚有鳳).
《신독재전서(愼獨齋全書)》, 김집(金집).