권필칭(權必稱)


권필칭(權必稱)                                                             PDF Download

 

필칭(權必稱, 1721년∼1784년)은 선비집안의 후손으로 무과에 급제하여 선전관을 거쳐 충청도우후, 해남현감, 광양현감, 삭주부사, 창성방어사, 경상좌도 수군절도사 등을 역임하였다.

신분은 비록 무인이며, 무과에 급제한 관리였으나 유학자의 풍모를 잃지 않았으며, 사후에 ‘유장(儒將)’이란 칭송을 들기도 하였다. 일생동안 관직생활을 하면서도 끊임없이 도학에 힘써 유학자로 이름을 알리고 문집을 남겼다. 『주역』·『논어』 등 경학에도 밝았으며, 사부(詞賦)에도 능하였다. 김원행(金元行)·송명흠(宋明欽)의 문인이다.

 

1721년(1세, 경종 1년)
선비집안의 권수무(權壽武)의 아들로 태어났다. 고향은 단성현 북면 신등리의 단계 상촌이다. 5대 할아버지 권도(權濤, 1557∼1644)는 과거시험 문과에 합격하여 성균관 주서, 병조정랑 사간원 정언, 사간원 대사간 등을 역임한 인물이다. 권도의 사촌인 권집(權潗)과 권준(權瀹)도 비슷한 시기에 과거에 합격하여 안동 권씨는 명문 가문으로 불렸다. 자는 자평(子平), 호는 오담(梧潭)이다. 송명흠(宋明欽), 김원행(金元行)의 문인이다.

 

1726년(5세, 영조 2년)
소학⌋을 배우고 글을 배우기 시작했다.

 

1733년(12세, 영조 9년)
암자에 들어가 시(詩)와 부(賦)를 공부하면서 과거시험에 대비했다.

 

1735년(14세, 영조 11년)
평산 사람 신씨(申氏)의 딸과 결혼했다. 처가 집안사람들 중에도 무과로 관직에 나간 사람들이 많았다.

 

1743년(22세, 영조 19년)
생원시 초시에 합격했으나 2차 시험인 회시에서 낙방했다. 다음해 부친상을 당하였다.

 

1747년(26세, 영조 23년)
다시 생원시에 도전하여 초시에 합격하였으나 또 2차 시험인 회시에서 낙방했다.

 

1750년(29세, 영조 26년)
그동안 사마시를 두 번 봤으나 모두 낙방하여, 식년 무과에 도전하여 급제하였다. 총 합격자 431명 가운데 425등으로 매우 저조한 성적으로 합격하였다. 이즈음 권필칭의 집안에서 소유한 노비수는 약 20명(도망 9구 포함한 28구) 정도였다. 이후로도 평생동안 지속적으로 그 정도의 노비를 유지하였다.

 

1751년(30세, 영조 27년)
3월에 선전관(宣傳官)에 임명되었다. 이 선전관은 무반의 관직 중에는 가장 요직 중 하나였다. 이후 훈련원 첨정(僉正) 등을 거쳐 충청우병마우후(忠淸右兵馬虞候) 청주진관(淸州鎭管)에 임명되었다.

 

1758년(37세, 영조 34년)
병조좌랑(兵曹佐郞)에 임명되었으나 사양하고 고향으로 돌아갔다.

 

1759년(38세, 영조 35년)
동생 권필시(權必時)가 식년 무과에 급제하였다. 권필칭은 낙향하여 1년 정도 어머니를 모시고 독서에 열중하였다. 당시 본인의 거처에 “이락헌(二樂軒)”이라는 편액을 걸어 놓았다.

이러한 모습을 보고 어머니가 이렇게 말했다.

“너의 집안이 적막한 지 오래되었는데 무슨 뜻으로 벼슬하지 않는가? 늙은 어미가 걱정하지 않도록 해달라.”

이 말을 듣고 다시 서울로 올라갔다. 당시 친구에게 보낸 편지에서 그는

“내가 청주에서 돌아온 후 다시는 세상에 나갈 생각이 없었으나 억지로 나오게 되었네. 또 이것이 헛되이 노모의 바램을 저버리는 결과를 초래할까 걱정스럽구나. 구하려고 해서 얻을 수만 있다면 나는 사양하지 않겠다.”

고 자신의 심정을 드러냈다.

 

1760년(39세, 영조 36년)
서지수(徐志修)의 도움으로 서산(瑞山) 군수에 임명되었으나 부임하지 않았다. 12월, 장기(長鬐) 현감에 임명되었다.

 

1764년(43세, 영조 40년)
장기의 현감을 지내던 중 어머니 상을 당하여 사직하였다. 작년에는 둘째 동생이 사망하였는데, 이해 4월에 어머니가 사망하고, 9월에 셋째 동생도 사망했다. 3년 뒤에는 넷째 동생도 사망했다. 이 때문에 몇 년간은 관직생활을 하지 않았다.

 

1771년(50세, 영조 47년)
고성 현령에 임명되었으나 부임하지 않았다. 원인손(元仁孫)과 서지수(徐志修)의 천거로 산림유신(山林儒臣)의 예에 준하여 임명되었으나 사양하고 학문에 힘썼다. 이즈음 삼가(三嘉)에 오담정사(梧潭亭舍)를 짓고 자신의 학문적인 꿈을 펼치고자 하였다.

 

1772년(51세, 영조 48년)
해남 현감에 임명되었다. 다음해 함경남도 병마우후(兵馬虞侯) 북청진관(北靑鎭管)에 임명되었다.

 

1774년(53세, 영조 50년)
증광별시시관(增廣別試試官)으로 임명되었다.

 

1775년(54세, 영조 51년)
7월에 심환지의 추천을 받아 광양현감에 임명되었다. 11월에 겸임 순천부사에 임명되었다. 이때 집안의 동생에게 보낸 편지에서 그는

“북쪽으로 온 후에 ⌈근사록⌋만 수 백차례 읽었는데 의심나고 모르는 곳을 매번 누구와 함께 강론하고 물어야할지 모르겠다.”

라고 답답한 마음을 표현하였다. 이해에 백두산을 여행하고 다음과 같이 ⌈백두록⌋을 지었다.

“을미년(1775년) 5월 13일에, 나는 남병영(南兵營)의 우후(虞侯)로서 백두산으로 길을 떠났다. 이번 유람은 자항(玆航), 제인(濟仁), 황수(黃水), 종포(終浦), 웅이(熊耳), 호린(呼麟)등지를 거쳐서 갑산부(甲山府)에 도착하는 여정이다. 여기서부터 백두산까지는 모두 갑산부 경내이고, 허항령(虛項嶺) 북쪽으로는 무산부(茂山府)와 경계다. 남병영에서 후치령(厚峙嶺)까지는 110리, 후치령에서 갑산부까지는 170리, 갑산부에서 연지봉(臙脂峯) 까지는 350리, 연지봉에서 백두산 가장 높은 봉우리까지는 35리이다.

우리 일행은 불행히도 비가 쏟아지고 안개가 짙어서 비록 정상을 5리쯤 남겨 둔 곳까지밖에 가지 못했지만, 그 높이를 어림잡아 보건대 과연 백두산 높이가 300리라는 말이 거짓이 아니다.
다행히 때마침 산 동쪽 기슭이 맑게 개더니 붉은 해가 막 떠올랐다. 온 산이 영롱하게 빛나고 여섯 개의 높은 봉우리가 줄지어 늘어서 있다. 이에 갑산부에서 가져온 홍로주(紅露酒)를 꺼내 술잔에 가득 채워 한 잔 마시고는, 머리를 들어 산을 멀리 바라보며 길게 휘파람을 불기도 하고 손으로 가리키기도 했다. 이는 내 평생에서 가장 유쾌하고 웅장한 일이다.

정상 아래는 둘레가 2,000여 리쯤 되는, 그리 경사가 심하지 않은 언덕이다. 산의 몸체를 사람의 몸에 비유하면, 2,000여 리의 언덕은 백두산의 배와 장기에 해당하고, 평안도 지방은 오른팔에 해당하고, 함경도 지방은 왼팔에 해당하고, 강원도와 경상도 지방은 왼쪽 다리에 해당하고, 충청과 전라도 지방은 오른쪽 다리에 해당하고, 한라산과 대마도는 양쪽 발이 끝나는 부분이라고 할 수 있다.

이처럼 두텁고 웅장한 기세를 쌓아 둔 산은 비단 우리 조선에만 처음 있는 것일 뿐 아니라 곤륜산(崑崙山) 외에는 온 천하를 통틀어도 비할 바가 없다.

옛말에 ‘뛰어난 인재는 땅이 영험한 덕택이다.(人傑地靈)’라는 말이 있는데, 단군 이래로 뛰어나고 이름나고 신이한 인재들이 우리나라에서 그 얼마나 많이 배출되어 중국의 인물들과 미명(美名)을 함께 일컬을 수 있었던가? 그것은 이 백두산이 정기와 신령을 잘 모아서 저절로 그리 된 것이 아니겠는가? (이하 생략)”

1776년(55세, 영조 52년)
용양위부호군(龍驤衛副護軍), 충주진영장(忠州鎭營將)에 임명되었다. 다음해 통정대부, 삭주(朔州) 도호부사(都護府使)에 임명되었다. 삭주부사에 임명하는 자리에서 , 정조는 권필칭에게

“관리로서의 치적은 전에 이미 들었다. 이번에도 마음을 다해 잘 다스려 그 명성에 부합하도록 하라.”

고 치하했다.

 

1779년(58세, 정조 3년)
아들 권엽이 사망했다. 삼가의 집을 정리하여 고향 단계 마을의 집으로 돌아갈 계획을 세웠다. 이듬해 단계 마을로 이사했다.

 

1781년(60세, 정조 5년)
평안도 방어사 창성(昌盛) 도호부사에 임명되었다. 이해에 ⌈수사첩록(隨思輒錄)⌋을 완성하였다. 수신에 관한 이 기록에서 그는 선비가 과거에만 전념하는 폐단을 비판하면서, 이렇게 말했다.

“과거시험에서 선비의 풍습이 바르지 않은 지가 오래되었다. 향당에서 자호(自好)하는 선비는 오히려 부끄럽게 여겨 과거에 종사하고자 하지 않는다. 선비들은 진실로 뜻을 두어 일체의 과거 공부를 폐하고 집안을 다스리는 데 있어서 힘써 옛 책을 읽고 자손을 가르치는 것이 좋다.”

1783년(62세, 정조 7년)
경상좌도 수군절도사 동래진(東萊鎭) 도절제사(都節制使)에 임명되었다.

 

1784년(63세, 정조 8년)
3월, 수영(水營) 관사에서 사망하였다. 저서에 ⌈오담문집(梧潭文集)⌋이 있다.

 

참고문헌)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정해은, 「18세기 경상도 단성현의 한 양반 무과급제자의 사환과 처세」, 「조선시대사학보」26.