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국헌(1599-1672)


오국헌(1599-1672)                                                   PDF Download

 

장생(金長生)의 문인이다. <국조인물고>에 수록된 권상하의 ‘묘갈명’에 송준길(宋浚吉)의 문하(門下)에 출입하였는데 송준길 또한 칭찬하고 허여하였다고 하는데, 송준길(1606-1672)과의 나이를 따져보았을 때 제자로 입문하여 배운 것은 아닌 것 같다. 김장생의 문집인 <사계전서>의 ‘문인록’에 오국헌의 이름이 들어있다.

인조반정 후에 서인의 영수로 활약한 김장생은 늦은 나이에 벼슬을 시작하고 과거를 거치지 않아 요직이 많지 않았고, 인조 즉위 뒤에도 향리에서 보낸 날이 더 많았지만, 그의 영향력은 이이의 문인으로 줄곧 조정에서 활약한 이귀(李貴)와 함께 인조 초반의 정국을 서인 중심으로 안착시키는 데 결정적인 구실을 하였다.

특히 그의 문하에서 이후 학계와 정계를 주름잡은 제자들이 많이 나왔는데, 송시열(宋時烈)·송준길(宋浚吉)·이유태(李惟泰)·강석기(姜碩期)·장유(張維)·정홍명(鄭弘溟)·최명룡(崔命龍)·김경여(金慶餘)·이후원(李厚源)·조익(趙翼)·이시직(李時稷)·윤순거(尹舜擧)·이목(李楘)·윤원거(尹元擧)·최명길(崔鳴吉)·이상형(李尙馨)·송시영(宋時榮)·송국택(宋國澤)·이덕수(李德洙)·이경직(李景稷)·임의백(任義伯) 등 당대의 비중 높은 명사를 즐비하게 배출하였다.

본관은 해주(海州)로 자는 중현(仲賢)이고 호는 어은(漁隱)이다. 아버지는 동지중추부사 산립(山立)이며 어머니는 남원양씨(南原梁氏)로 대사간 사귀(思貴)의 딸이다.

향시(鄕試)에 여러 번 합격하였으나 정시(庭試)에 거듭 실패하였고, 병자호란의 치욕이 있은 뒤에는 벼슬을 포기하고 학문에 전념하였다. 성리학과 예학에 밝았으며, 나중에 단성(丹城)의 도천(道川)에 옮겨 살면서 마을 이름을 어은동(漁隱洞)이라 고치니 송시열(宋時烈)이 ‘어은(漁隱)’이라는 편액을 써주었다고 한다.

권상하는 <묘갈명>에서 <신증동국여지승람(新增東國輿地勝覽)>과 <읍지(邑誌)>의 기록을 전재하길,

“공은 젊어서 문재(文才)가 뛰어났는데, 누차 과거에 응시했으나 급제되지 않자 시골에 내려가 두문불출하고서 수석(水石)과 화조(花鳥)를 완상하며 스스로 즐겼고, 성현(聖賢)의 글을 열심히 읽으며 늙어서도 게을리하지 않았다. 그리고 남이 벼슬하기를 권하면 머리를 흔들며 대꾸하지 않았는데 우암 선생(尤菴先生), 송시열(宋時烈)이 ‘어은(漁隱)’이라는 두 글자를 써 주어 공을 가상하게 여기기도 하였다. 공은 또 일찍이 동춘(同春, 동춘당(同春堂) 송준길(宋浚吉)의 문하(門下)에 출입하였는데, 동춘 선생 역시 공을 퍽 칭찬하고 허여하였다. 임자년(壬子年, 1672년 현종 13년) 동짓달 14일에 집에서 별세하니, 향년 74세였다.”

라고 적고 있다.

음직으로 수차에 걸쳐 참봉에 제수되었으나 번번이 사양하고 부임하지 않았다. 1712년(숙종 38)에 승훈랑(承訓郎)과 호조좌랑에 추증되었다.

저서로는 『사서해의(四書解義)』 2권, 『역계해의(易繫解義)』 1권, 『잡저(雜著)』 3권, 『유후귀감(遺後龜鑑)』 3권이 있었다고 하나 전하지 않고 『어은유고』 5권만이 전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