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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생들을 돌려보낸 이성구


기생들을 돌려보낸 이성구

 

반정은 잘못 된 것을 바로 잡는다는 의미이다. 광해군이 무엇을 잘못했던가? 불충과 불효이다. 명나라가 왜란을 극복하는데 도움을 준 이른바 재조지은(再造之恩, 국운을 다시 회복시킨 은혜)를 저버린 불충을 저지르고, 배다른 형제를 죽이고 서모를 유폐한 불효를 범했다. 이 두 가지가 반정의 가장 큰 명분이다. 이 외에도 광해군이 호색광음(好色狂飮, 여색을 좋아하고 술을 즐긴다)한 임금임을 드러내는 것은 그가 부덕한 임금이라는 사실을 세상에 알리는 좋은 구실이 될 수 있다.

이성구(李聖求, 1584-1644)는 본관은 전주(全州). 자는 자이(子異)이고 호는 분사(分沙)·동사(東沙)이다. 태종의 후손이며, 아버지는 <지봉유설>을 지은 이조판서 이수광(李晬光)이다.

1608년(광해군 1) 별시 문과에 을과로 급제해 한원(翰苑: 예문관)에 들어가 관직 생활을 시작하였다. 1613년(광해군 5) 헌납으로 있을 때 아버지는 대사헌을, 동생 이민구(李敏求)는 홍문관부제학을 지내, 삼부자가 삼사의 언관직에 같이 있어 세인들의 주목을 받기도 하였다.

지평으로 있을 때 영창대군(永昌大君)의 옥사가 일어나자 시론(時論)에 반대했으며, 영의정 이항복(李恒福)이 정협(鄭浹)을 천거해 종성판관으로 삼자 이를 문제 삼는 간당(奸黨)들을 저지하다가 파직되었다. 인목대비를 폐하는 것을 강력히 반대했다. <연려실기술>에 이를 적어두었다.

 

“대비를 폐할 때에 바른 것을 지켜 흔들리지 않았다. 백사(白沙 이항복)가 정협(鄭浹)을 천거한 죄로 정승에서 파면되자 공이 지평으로서 반박하기를, ‘이항복이 정협을 천거하여 쓸 때에 어찌 후일에 정협의 반역을 미리 알 수 있었겠습니까. 대신에게까지 연루시킴은 너무 심합니다.’ 하였으나, 간당들이 탄핵하여 파면시켰다.”

후에 이항복이 북청의 유배지에서 죽자 포천의 향민들이 운구해 장사지내고 서원을 세워 봉사하였다. 이 일로 무고당해 대간의 탄핵을 받아 파면되었다.

1623년 인조반정 때에는 사간으로 기용되어 폐해가 심한 정치를 일신시키고, 영의정 이원익(李元翼)의 인정을 받아 강화부윤·부승지·예조참의를 거쳐 1625년(인조 3) 대사간, 이듬해 병조참지가 되었다. 병자호란 때에는 왕을 남한산성으로 호종하였다. 이 때 최명길(崔鳴吉) 등의 주화론에 동조했으며, 1637년 왕세자가 심양(瀋陽)에 갈 때 좌의정이 되어 수행하였다.

이귀의 아들로 반정의 주역인 이시백(李時白)이 “반정 이후 인조가 발탁한 정승 중에서 이성구의 인물됨이 첫째이다.”라고 하였다.

인정반정 당시에 사간으로 임명되어 정치를 일신했는데, 그중 기생을 흩어 보낸 일이 <연려실기술>에 나온다.

“반정할 당시에 사간에 임명되었는데, 함부로 잡아 가둔 사람들을 너그럽게 놓아 주고, 성문의 통행금지를 풀고, 광해조 때 만든 침향산(沈香山)을 불태우고, 기생을 흩어 보낸 일은 모두 공이 먼저 주장하여, 새로운 교화를 도운 것이다.”

 

기생을 흩어 보냈다면 필시 이전에 기생을 모았을 것이다. 바로 광해군이 침향산을 만들고 기생을 모은 것이다. 반정을 일으켜 새 정치를 구현하겠다는 입장에서 보자면 침향산을 불태우고 기생을 돌려보내는 일들이 전 왕조의 폐정을 바로 잡는 일임은 두 말이 필요 없다. 이 일을 이성구가 제일 먼저 주창했다. 이를 두고 반정 후에 처음 시작한 맑고 밝은 조치였다고 평을 얻었다.

 

그런데 재미있게도 이성구가 이 일을 후회하는 듯한 시가 <연려실기술>에 나온다.

“임금이 반정하던 당시에, 공은 사간이 되었는데, 기생을 파하도록 건의하여 지방에서 서울로 뽑혀왔던 기생들을 모조리 돌려보내었으니 이것은 처음 시작한 맑고 밝은 큰 정사였다. 얼마 후에 공이 의정부의 사인이 되었을 때에 지은 한 절구(絶句)가 있으니,

 

이원을 파하자고 아뢴 것은 간관이란 직명 때문이었는데 / 奏罷梨園爲諫名
연못의 정자에 오니 기생이 없으므로 풍정을 저버렸네 / 却來蓮閣負風情
못물은 가득하고 연꽃은 서늘한데 / 池塘水滿芙蓉冷
홀로 난간에 기대어 빗소리 듣는구나 / 獨凭危欄聽雨聲

하였으나 이는 농담이었다.

 

김시양(金時讓)이 화답하기를,

청루에 박행하다는 이름을 피하지 않았으니 / 不避靑樓薄倖名
한 장의 소가 참으로 임금 사랑하는 심정이 있었네 / 一封眞有愛君情
어찌 응향각(연못 가의 정자 이름) 빗소리 듣는 날 / 如何聽雨凝香日
도리어 당초 정성(음탕한 음악) 내친 것을 후회하는가 / 却悔當初放鄭聲

하였다.”

 

이성구의 시는 풍류의 흥을 높이고 있다면 김시양의 시는 정색하며 도의로 화답했다. 이성구가 기생을 돌려보낸 일을 정말로 후회한 것은 아니고 아름다운 풍정을 대하고 풍류의 정취를 한껏 펼친 것이다. 이를 김시양이 모를 리 없다. 그럼에도 김시양의 화답은 준엄하다.

 

이는 김시양이 1611년(광해군 3) 전라도도사(全羅道都事)가 되었을 때 향시에 출제한 시제가 왕의 실정(失政)을 비유했다 하여 유배되었다가 1623년(인조 1) 인조반정으로 풀려나서 광해조이 실정에 대한 준엄한 심판 의식이 작용하기도 했기도 했을 것이다. <연려실기술>에 당시 이 일을 기록해 둔 내용이 있다.

“전라 도사(全羅都事)로 향시를 주관하였는데, 여러 소인들이 시험 문제에 임금을 비방하고 풍자하였다고 적발하여 체포당하였다. 정 판서(鄭判書) 세규(世規)가 광릉(廣陵) 길에서 손을 잡고 눈물을 흘렸으나, 공은 얼굴빛이 태연하였다. 법정에 들어오자 의금부에서 극형에 처하기를 아뢰었는데, 광해주(光海主)가 그것을 3일 동안 발표하지 아니하였다. 공이 옥에서 평상시와 같이 잠을 자니, 윤효선(尹孝先)이 시관에 참여하였기 때문에 함께 잡혀 있었는데, 공을 차서 일으키며, ‘지금이 어떤 때인데 평안히 잘 수 있소.’ 하였다. 공이 웃으며 말하기를, ‘죽고 사는 것은 천명이요.’ 하였다. 백사 정승 이항복(李恒福)이 구원하여 사형에서 감형되어 종성(鍾城)으로 귀양 갔다. 공이 가던 길에서 시를 지었는데,

 

마음과 행동이 본래 백일을 속이지 않았으니 / 心跡本非欺白日
길흉은 원래 푸른 하늘에 물을 것이 아니다 / 吉凶元不問蒼天

하였다.”

 

이성구는 만년에 영의정이 되었으나 모함으로 사직했다가 곧 영중추부사가 되었다. 그런데 다시 선천부사 이규(李烓)가 청나라에 기밀을 누설한 사건을 논하다가 파직되어 양화강(楊花江) 부근에 만휴암(晩休庵)을 지어 소요하며 지냈다. 그 무렵 집에 불이 난 적이 있었다. <연려실기술>에 이때의 일화가 기록되어 있다.

“이규(李烓)의 전 가족이 처형되는 것을 구하다가 탄핵을 입어 벼슬이 떨어지자, 양화강(楊花江) 위에 우거하면서 집에 써 붙이기를 ‘만휴암(晩休菴)’이라 하였다. 어느 날 불이 났는데 나와서 밭둑에 앉아 말하기를, ‘술독은 탈이 없느냐.’ 하더니, ‘술을 따라 동네 이웃 사람들에게 사례하라.’ 하고, 다른 것은 묻는 것이 없었다.”

기생을 돌려보낸 것은 행정 관료의 실천이요 빗속에서 아쉬워하는 것은 묵객의 정취이다. 이 둘이 조화로울 수 있는 것은 집에 불이 났을 적에 다른 것은 묻지 않고 ‘술을 따라 동네 이웃 사람들에게 사례하라’는 이 한 마디에서 알 수 있다.

 

참고문헌

<연려실기술>, <한국민족문화대백과>

 

조선의 이익재, 이정귀


조선의 이익재, 이정귀

 

이정귀(李廷龜, 1564-1635)은 자는 성징(聖徵), 호는 월사(月沙)·보만당(保晩堂)·치암(癡菴)·추애(秋崖)·습정(習靜)이다.

이정귀는 유년시절부터 남다른 문학적 자질을 보이기 시작해 8세에 벌써 한유(韓愈)의 「남산시(南山詩)」를 차운(次韻)했다고 전한다. 1577(선조 10) 14세 때에 승보시(陞補試)에 장원을 하며 명성을 떨치기 시작해 1585년(선조 18) 22세에 진사, 5년 뒤인 1590년(선조 23)에는 증광문과에 병과로 급제했다.

1592년에는 임진왜란을 만나 왕의 행재소(行在所)에 나아가 설서(設書: 세자에게 경전과 역사를 가르치는 정7품관)가 됐다. 1593년(선조 26) 명나라의 사신 송응창(宋應昌)을 만나 『대학』을 강론해 그로부터 높은 평가를 받았다. 이것은 후에 『대학강어(大學講語)』로 간행됐다.

1598년(선조 31)에 명나라의 병부주사정응태(丁應泰)가 임진왜란이 조선에서 왜병을 끌어들여 중국을 침범하려고 한다는 무고사건을 일으켰다. 이정귀는 「무술변무주(戊戌辨誣奏)」를 작성하여 진주부사(陳奏副使)로 명나라에 들어가 정응태의 주장이 아무런 근거가 없음을 밝혀 그를 파직시켰다.

이와 같은 그의 능력이 왕의 신임을 받았으며 병조판서·예조판서와 우의정·좌의정 등 조정의 중요한 직책을 두루 역임했다.

그의 문장은 장유(張維)·이식(李植)·신흠(申欽)과 더불어 이른바 한문사대가로 일컬어진다. 이정귀의 문장에 대해서 명나라의 양지원(梁之垣)은 호탕(浩蕩: 세차게 내달리는 느낌)하고 표일(飄逸: 세속의 때가 없는 느낌)하면서도 지나치게 화려하지 않아 문장의 아름다움을 잘 보여주고 있다고 평가했다.

 

이정귀가 문장으로 일대의 종사라는 것은 잘 알려진 바이다. <연려실기술>에 몇 가지 예화가 나온다.

“경기 감사가 되었을 때, 조정에서 막 국(局)을 설치하여《동국시문(東國詩文)》을 편찬하려 했다. 윤근수(尹根壽)와 이호민(李好閔)이 그 일을 주장하였는데 임금에게 아뢰기를, ‘이정귀가 비록 지방 일을 맡았으나 이 국(局)에 없을 수 없는 사람입니다.’ 하였더니, 왕래하면서 참정(參定)하도록 윤허하였다. 이것은 사원(詞苑 문단)의 아름다운 일로 전하여졌다.”

“칙사 웅화(熊化)가 올 때에 공이 접반사가 되었는데, 서로 즐겁게 사귀어 말끝마다 꼭 선생이라고 일컬었다. 공의 화답하는 시를 보고는, ‘글자마다 당 나라 사람의 넋이다.’ 하고 《황화집》의 서(序)를 지어 달라고 청하였다.”

 

문재는 원래 타고난 천부의 자질이 중요하다. <연려실기술>에 이정귀의 천부적 소질을 소개하였다.

“말을 배우자 곧 글자를 알고 능히 글을 만들었고 한 편이 나올 때마다 사람을 놀라게 하니 신동이라 일컬었다.”

“어머니 김씨가 공을 잉태하여 해산할 때가 되자, 범이 와서 대문 밖에 엎드려 있어 사람들이 감히 쫓아 보내지 못하였는데 해산하자 곧 갔다. 사람들이 말하기를, ‘문장에 뛰어날 징조다.’고 하였다.”

문장에 능한 선비 중에는 문한에는 출중하지만 시무는 능통하지 못한 경우가 종종 있는데 이정귀는 문장에만 능한 것이 아니라 일을 처리하는 능력이 출중했다.

“명나라에서 양 안찰사가 갑자기 서울에 왔을 때, 임금이 나가 접대하려 했으나 역관(譯官)을 갖추지 못하였다. 창졸히 공을 시켜 접대하게 하였더니, 보는 대로 알아내어 주선하는데 실수가 없었다. 일을 모두 마치자 임금이 기뻐하며 이르기를, ‘이정귀의 재주가 이렇게까지 좋으리라고는 생각지 못하였다.’ 하고, 관직을 7계급이나 뛰어 올려 주어 승지가 되었다. 이때부터 손님에 대한 의례(儀禮)가 있을 때마다 공이 꼭 임금 앞에 있었다. 중국의 사신들이 관사에 가득하여 응접하기에 번잡함을 이루 말할 수도 없었는데, 공이 안에서는 응대하고 밖으로는 외교하는 글을 맡아서 남들이 미루는 일도 공은 처리하기를 물 흐르는 것같이 하였다. 언젠가 병이 들어 여러 날 되었는데 임금이 묻기를, ‘이정귀는 어디 있느냐.’ 하고, 특별히 내구(內廐)의 말을 하사하였다.”

“정유년에 명나라 장수 양호(楊鎬)가 평양에 도착하여 군사와 성과 양식과 기계에 관한 실정을 묻고, 삼조(三曹 이조ㆍ호조ㆍ병조)의 판서들이 와서 대답하게 하였다. 조정에서 걱정하였으나 공이 풍부한 재주와 눈치가 있었으므로 자문(咨文)을 주어 대신 갔다 오도록 했다. 종사관으로 명 나라 장수 마귀(麻貴)를 따라서 남정(南征)하였다.”

이정귀는 중국어에도 능통하였다고 한다. 이런 면들이 어우러져 장유가 이정귀가 고문대책(高文大冊: 내용이 알차고 문장이 세련된 글)을 신속하게 창작하는 능력이 빼어나다고 한 이유일 것이다.

이는 사대부가 마땅히 해야 할 순수한 문학을 창작으로 실천하면서도 「무술변무주」 등의 외교와 직접적으로 관련된 실용문을 써 이름을 알린 상황과 직접적으로 연관된다. 이정귀의 문학은 한편으로 이웃 나라와의 돈독한 관계를 위한 외교에 있어서 문학이 가지는 쓸모를 십분 발휘한 의의를 것으로 일단의 의의를 갖는다.

 

이정귀의 일생의 업적과 삶을 전대의 선인에 견준다면 누굴까? <연려실기술>은 이렇게 말한다.

“문장이 있고 아울러 복록을 겸하여 누렸으며 공명이 장한 것을 세상에서 고려의 이익재(李益齋)와 비교하였다.”

참으로 이정귀는 조선의 이익재라고 할 만하다.

 

참고문헌

<연려실기술>, <한국민족문화대백과>

 

금옥 같은 군자 오윤겸


금옥 같은 군자 오윤겸

 

오윤겸(吳允謙, 1559-1636)은 자는 여익(汝益)이며 호는 추탄(愀灘), 토당(土塘)이다.

1582년(선조 15) 사마시에 합격한 뒤 1589년 전강에서 장원해 영릉참봉(英陵參奉)·봉선전참봉(奉先殿參奉) 등을 역임하였다. 1592년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양호체찰사(兩湖體察使) 정철(鄭澈)의 종사관으로 발탁되었으며, 시직(侍直)을 거쳐 평강현감으로 5년간 봉직하면서 1597년 별시 문과에 병과로 급제하였다.

1602년 모함을 받아 곤경에 처한 스승 성혼을 변호하다가 시론(時論)의 배척을 받아 경성판관으로 출보(黜補)되었으며, 그 뒤 7, 8년간 안주목사·동래부사 등의 외직을 전전하였다.

1610년(광해군 2) 비로소 내직으로 들어와 호조참의·우부승지·좌부승지 등을 역임하였다. 그러다가 당시의 권신인 정인홍(鄭仁弘)이 이언적(李彦迪)과 이황(李滉)의 문묘 종사를 반대하며 사림과 대립하자 이를 탄핵하다가 왕의 뜻에 거슬려 강원도관찰사로 좌천되었다.

1617년 다시 첨지중추부사가 되어 회답 겸 쇄환사(回答兼刷還使)의 정사로서 사행 400여 명을 이끌고 일본에 가서 임진왜란 때 잡혀갔던 포로 150여 명을 쇄환했다. 이때부터 일본과의 수교가 다시 정상화되었다.

1618년 북인들에 의해 폐모론이 제기되자 이를 반대하고 정청(庭請)에 불참하였다. 이로 인해 탄핵을 받자 벼슬을 그만두고 광주 선영 아래의 토당(土塘)으로 물러나 화를 피하였다.

인조반정이 일어나자 대사헌에 임명되고 이어서 이조·형조·예조의 판서를 두루 역임하였다. 특히, 북인 남이공(南以恭)의 등용 문제로 서인이 노서(老西)·소서(少西)로 분열될 때, 김류(金瑬)·김상용(金尙容) 등과 함께 노서의 영수가 되어 남인·북인의 고른 등용을 주장하고 민심의 수습을 꾀하였다.

만년에 재상의 자리에 10여 년 간 있을 때 백성의 편의를 위해 연해 공물(沿海貢物)의 작미(作米)와 대동법의 시행을 추진하고, 명분론의 반대를 물리치면서까지 서얼의 등용을 주장하였다. 또한 사림을 아끼고 보호해 어진 재상이라 불렸다.

오윤겸은 성혼 문하에서 손꼽히는 제자다. 성혼이 일찍이 오윤겸을 평한 내용이 <연려실기술>에 적혀 있다.

“우계(牛溪 성혼(成渾)) 문하에서 배웠는데, 우계가 사람에게 말하기를, ‘오윤겸은 어지러운 나라에서도 살 수 있는 사람이다.’고 하였다.”

성혼이 어지러운 나라에서도 살 수 있는 사람이라는 말은 대강을 말한 것이고 그 구체적인 것이 무엇인지는 밝히지 않았지만 <연려실기술>에 나오는 일화를 통해 그 의미를 유추해 볼 수 있다.

“임진년에 정철이 호남 체찰사(湖南體察使)로 갈 때, 종사관의 일을 보았는데 음관(蔭官)으로서 막부의 종사관이 된 것은 공이 처음이었다. 이 뒤에 평강 현감(平康縣監)이 되었다. 그때에 감사 정구(鄭逑)가 순찰하기 위해 강릉에 왔는데 부사(府使)에게 말하기를, ‘내가 평강에 가면 반드시 그 현감을 매질할 것이다.’ 하였다. 강릉 부사가, ‘무슨 까닭입니까?’ 하니, 정구가 말하기를, ‘이 사람이 스스로 선비라 일컫고서 문서를 기한에 못 마치니, 이 때문에 매질하려고 하는 것이다.’ 하였다. 강릉 부사가 말하기를, ‘공이 현에 이르시면 옳고 그른 것을 묻지 않고 갑자기 들어가 매질하면 그만이나, 만일 함께 이야기를 붙이면 매질하지 못할 것입니다.’ 하였다. 정구가 말하기를, ‘어찌 그럴 수가 있겠는가?’ 하였다. 정구가 평강현에 이르자 곧 현감을 불러들이었는데, 공의 행동하는 것이 단아하며 언사가 자상하고 민첩하여 묻는 데 따라 해명하는 것이 물 흐르듯이 하였다. 정구가 자기도 모르게 심복하여 무릎을 맞대고 앉아서 밤새도록 이치를 이야기하였는데, 기뻐서 하는 말이, ‘참으로 금옥 같은 군자로다.’ 하였다. 강릉으로 돌아오게 되자 부사에게 일러 말하기를, ‘그대의 말이 과연 옳았소.’ 하였다. 경포호에서 뱃놀이를 하는데, 호수 복판에 이르러 탄식하기를, ‘평강 현감과 함께 뱃놀이를 하지 못하는 것이 한스럽다.’ 하였다. 부사가 말하기를, ‘그것이 무슨 어려운 일입니까. 공무로 핑계하고 부르시면 곧 올 것입니다.’ 하니, 정구가 그 말을 따랐다. 며칠을 머물러 공이 오는 것을 기다려, 다시 호수 가운데서 잔치를 베풀고 한껏 즐긴 후에 헤어졌다.”

정구가 어떤 인물인가? 매섭기가 추상같은 인물이다. 이런 인물이 오윤겸과 더불어 이야기를 나누자 그의 매력에 폭 빠졌다니 놀라운 일이다. 정구가 “참으로 금옥 같은 군자로다”라는 이 말이 오윤겸의 기품을 그대로 표현한 말일 것이다.

오윤겸이 친화력과 기품은 왜인들에게도 그대로 드러났다.

“정유년에 비로소 과거에 오르고 정사년에 일본에 사신으로 갔는데 관백(關白) 이하 모두가 공경히 대접하였다. 돌아오자 일본 사신이 와서 묻기를, ‘귀국에는 오공과 같은 분이 몇이나 있습니까.’ 하였다. 답하기를, ‘너무 많아서 쉽게 셀 수가 없었다.’ 하니, 일본 사신이 웃으며 말하기를, ‘귀국이 비록 장하다 하지마는 인재는 반드시 한 사람에 지나지 않을 것입니다.’ 하였다.”

오윤겸의 이와 같은 친화력과 기품이 어찌 타고난 기질이 수승해서 뿐이겠는가? 젊어서 성혼의 문하에서 배우고 익힌 도학의 성정이 우러난 것일 터이다.

“임술년에 바다를 건너 중국으로 가서 황성도(皇城島)에 이르렀는데, 배가 몇 번이나 뒤집힐 뻔하였다. 여러 사람들은 얼굴이 질색이 되었는데 공은 단정히 앉아 글을 지어 쓰기를, ‘한 번 죽는 것은 이미 미리 정한 것, 이렇게 되어 다시 무엇을 의심하랴.’ 하고, 조용하게 옷깃과 소매를 여미고 목숨이 다할 때를 기다렸으나 마침내 무사하였다. 공은 포은(圃隱)의 외손(外孫)이다. 일본과 금릉(金陵)에 사신으로 간 것이 마침 포은과 같은 시일이었으므로 사람들이 더욱 기이하게 여겼다.”

“광해조에 폐모 수의(廢母收議)에 반대하여 정청(庭請)에 참여하지 않았다가 사헌부의 탄핵을 받아 동대문 밖에서 처분을 기다리고 있었다. 친구들이 편지를 보내, ‘이런 큰일을 만나서 어떻게 처신할 것인가?’ 하니, 공은 ‘평생에 배운 바가 바로 오늘에 있네.’ 하는 여덟 글자로 답하였다.”

오윤겸의 수양 경지를 여실히 보여주는 일화임에 틀림없다. 생사의 기로에서 천명을 기다릴 수 있는 것이 이른바 <맹자>에서 말한 요수불이(夭壽不貳, 살고 죽는 데에 마음이 흔들림이 없다)의 경지가 아닌가?

 

오윤겸이 죽으면서 자손에게 남긴 말이 <연려실기술>에 기록되어 있다.

“공이 죽을 때 말하기를, ‘내가 거룩하고 밝은 임금을 만났어도 세도(世道)를 만회하지 못하였으며, 나라에는 공이 없고 몸에는 덕이 없었다. 비석을 세우지 말고 시호를 청하거나 남에게 만장(挽章)을 구하지 말라.’ 하였다”

성혼의 빼어난 제자라는 역대의 평이 결코 틀리지 않았음을 여기서도 알 수 있다.

 

참고문헌

<연려실기술>, <한국민족문화대백과>

원칙과 현실의 조화를 주장한 최명길


원칙과 현실의 조화를 주장한 최명길

 

최명길(崔鳴吉, 1586-1647)은 자는 자겸(子謙)이고 호는 지천(遲川), 창랑(滄浪)이다.

이항복(李恒福) 문하에서 이시백(李時白), 장유(張維) 등과 함께 수학한 바 있다. 1605년(선조 38) 생원시에서 장원하고, 그 해 증광문과에 병과로 급제하여 승문원을 거쳐 성균관전적이 되었다.

그 뒤 어버이의 상을 당하여 수년 간 복상(服喪)한 뒤 벼슬길에 나가지 않았는데, 이 무렵은 인목대비(仁穆大妃)의 유폐 등 광해군의 난정이 극심할 때였다. 1623년 인조반정에 가담, 정사공신(靖社功臣) 1등이 되어 완성부원군(完城府院君)에 봉해졌다. 이어 이조참판이 되어 비변사 유사당상을 겸임하였다. 그 뒤 홍문관부제학·사헌부대사헌 등을 거쳤다.

1627년(인조 5) 정묘호란 때, 강화(江華)의 수비조차 박약한 위험 속에서도 조정에서는 강화 문제가 발론되지 못하였다. 그러나 그는 대세로 보아 강화가 불가피함을 역설하여 이로부터 강화가 논의되었다. 때문에 화의가 성립되어 후금군이 돌아간 뒤에도 많은 지탄을 받았다.

1636년 병자호란 때, 일찍부터 척화론 일색의 조정에서 홀로 강화론을 펴 극렬한 비난을 받았으나, 난전(亂前)에 이미 적극적인 대책을 펴지 못한다면 현실적으로 대처할 수밖에 없다는 식의 강화론을 계속 주장하고 나섰다. 그리하여 제대로 조처하지 못한 채 일조에 적의 침입을 받으면 강도(江都)와 정방산성(正方山城)을 지키는 것으로는 도저히 지탱할 수 없음을 걱정하여 강력히 화의를 주장하였다.

이 해 겨울 다시 이조판서가 되었는데, 12월 청군(淸軍)의 침입으로 인조를 따라 남한산성으로 들어갔다. 주전론 일색 가운데 계속 주화론으로 일관하였다. 결국 정세가 결정적으로 기울어져 다음 해 정월 인조가 직접 나가 청태종에게 항복하였다.

이 때 진행 과정에서 김상헌(金尙憲)이 조선측의 강화문서를 찢고 통곡하니, 이를 주워 모으며 “조정에 이 문서를 찢어버리는 사람이 반드시 있어야 하고, 또한 나 같은 자도 없어서는 안 된다.”라고 말했다는 사실은 시국에 대한 각기의 견해를 잘 나타내고 있는 것이라 하겠다.

청군이 물러간 뒤, 그는 우의정으로서 흩어진 정사를 수습하는 데 힘을 쏟았다. 이에 국내가 점점 안정되었으며, 가을에 좌의정이 되고 다음 해 영의정에 올랐는데, 그 사이 청나라에 사신으로 가서 세폐(歲幣: 매년 공물로서 바치는 폐물)를 줄이고 명나라를 치기 위한 징병 요구를 막았다. 1640년 사임했다가 1642년 가을에 다시 영의정이 되었다.

이 때 임경업(林慶業) 등이 명나라와의 내통하고 조선의 반청적(反淸的)인 움직임이 청나라에 알려져 다시 청나라에 불려가 김상헌 등과 함께 갇혀 수상으로서의 책임을 스스로 당하였다. 이후 1645년에 귀국하여 계속 인조를 보필하다가 죽었다.

최명길은 이항복 문하의 제자로 이시백, 장유와 동문수학한 관례로라도 반정의 주역들과 밀접한 유대관계를 형성하고는 있었지만 <연려실기술>의 기록을 보면 처음에는 반정에 적극 가담한 것은 아닌 것으로 보인다. 그러다 점차 반정의 중책을 맡고 반정이 성공한 후에 계해정사 1등공신에 책봉된 것으로 보인다.

“이귀가 전에 벌써 심기원(沈器遠), 김자점(金自點) 등과 약속을 하였고 최명길(崔鳴吉)도 모의를 함께 하였다. 그러나 최명길은 매우 두려운 마음에 밤새도록 잠을 자지 못하였는데, 이귀의 집을 찾아감에, 이귀가 안석에 기대어 계집종을 시켜 머리를 빗으며 태연히 말하고 웃는 것을 보고서야 비로소 안심하였다.”

“이귀가 심기원을 청하여 평산에 함께 있으면서 평산을 모의하는 장소로 삼는 한편 최명길과 김자점은 서울에 머물러 모든 일을 주선하였다.”

“거사할 모의가 이미 정하여졌으나 여러 사람이 안팎으로 흩어져 있었으므로 힘을 합하지 못하여 일이 자못 어긋났다. 최명길이 이것을 걱정하여 계해년 봄에 서울 교외에서 성중으로 들어와서 여러 사람에게 통고함으로써 드디어 계획이 정하여졌다. 명길이 일찍이 유청전(劉靑田)의 영기점법(靈棋占法)에 통달하여 점을 쳐서 좋은 날을 받아 군사를 일으킬 시기를 정하였는데, 공훈을 정할 때에 명길이 일등공신이 된 것은 이 때문이었다.”

 

최명길이 영기점법에 통달하여 점을 쳐서 거사일을 정했다는 일화와 함께 <연려실기술>에 최명길의 신묘한 경험을 기록해 두었다.

“공이 정승 자리에 있을 때, 구오(具鏊)가 수원 부사(水原府使)가 되었다. 구오는 능천(綾川)부원군인후의 아들이다. 그때 그는 나이 젊고 이름난 무사(武士)였다. 구오가 수원으로 부임하면서 공에게 들러 인사하고 공과 함께 한참 동안 이야기한 뒤에 절하고 물러갔다. 그가 겨우 대청을 내려가자, 공이 갑자기 얼굴빛이 달라지며 천천히 완릉공(完陵公 공의 아들)에게 말하기를, ‘괴이한 일이다. 구오가 오래지 않아 죽을 것이다.’ 하였다. 완릉공이, ‘어찌된 말씀입니까.’ 하고 물으니, 답하기를, ‘내가 그 사람이 대청을 내려 걸어 나갈 때 보니, 정신이 벌써 흩어져 마치 인형이 걸어가는 것 같았다.’ 하였는데, 며칠이 안 되어 구오가 병도 없이 갑자기 죽었다.”

최명길은 당대의 경세지사로 이름이 높았는데, 현실을 직시하여 강화론을 주장한 것이 제일 유명하다. 그러나 강화론이 야합이 아닌 이상 어찌 원칙을 고수하는 것이 없겠는가. <연려실기술>에 원칙을 중시한 최명길의 일화가 소개되어 있다.

“양파(陽坡 정태화(鄭泰和))에게 고모의 사위 아무개가 있었는데 음사로 한 고을 수령 자리를 구하였다. 이때 공이 이조 판서로 있었는데, 양파가 고모의 청에 못 이겨 가서 청하였다. 공이 말하기를, ‘내가 전후에 벼슬을 제수한 것이 어찌 모두 다 적당한 사람을 얻었다고야 말할 수 있겠는가만 능히 내 양심에는 부끄럽지 않을 뿐이다. 이 사람은 능히 그 직책을 감당할 만한가.’ 하고는 끝까지 추천하지 않았다. 양파가 이 말을 가지고 자제들에게 매양 말하기를, ‘최 정승이 내 말에는 일찍 따르지 않은 것이 없었는데 할 수 없는 일에 대하여서는 분명하기가 이와 같다.’고 하였다.”

“정태화(鄭太和)가 일찍이 말하기를, ‘반정 훈신 중에 인망 있는 이가 많았으나 그 후의 처신과 마음가짐을 보면, 당초에 털끝만큼도 부귀에 마음을 두지 않고 순전히 종묘사직을 위하는 마음으로 거사를 한 사람은 또한 몇 사람에 불과하니, 지천(遲川, 최명길), 계곡(谿谷, 장유), 함릉(咸陵, 李澥) 몇 사람이 그러한 이들이다.’ 하였다.”

“계해년에 조정에서 훈신들에게 집을 내려주었는데 적몰(籍沒)한 여러 죄인들의 집이었다. 공은 사치하고 화려한 것을 싫어하여 끝내 거기 들어가지 않았다. 내려준 전답을 받자 또 말하기를, ‘권세 있던 사람들이 백성의 전지를 강탈한 것이 무수하였기 때문에, 내가 받은 전답 가운데에도 반드시 백성의 전지가 많을 것이다.’ 하여 마침내 도로 찾아 가기를 허락한다고 큰 거리에 방을 붙였다. 그 후에 와서 호소하는 자가 있으면, 공이 하나하나 문서를 만들어 돌려주었다.”

의리와 명분을 중시하는 조선성리학적 토양에서 현실을 직시하고 해결책을 주장하는 최명길의 소신은 비난을 면하기 어렵다. 그럼에도 최명길이 명체달용(明體達用, 본체를 밝히고 쓰임을 두루한다)의 유학자로 이름이 높은 이유는 멸사봉공의 원칙을 확고히 견지했기 때문일 것이다.

 

참고문헌

<연려실기술>, <한국민족문화대백과>

 

폐동궁과의 의리를 지킨 윤지경


폐동궁과의 의리를 지킨 윤지경

 

윤지경(尹知敬, 1584-1634)은 자는 유일(幼一)이며 호는 창주(滄洲)이다. 청요직을 지낼 무렵 인목대비의 폐모론이 일어나자 정형복(鄭亨復)으로 하여금 폐모론에 대한 반대 상소를 올리게 하고, 폐모론에 반대한 정홍익(鄭弘翼)이 유배당하자 도성 문밖까지 전송하는 등 폐모론에 적극 반대하였다.

1623년 겸보덕으로 궐내에 입직하던 중 인조반정이 일어나 반정군에게 체포되어 처형될 뻔했으나 이귀(李貴)의 만류로 화를 면하고, 반정에 호응해 전한이 되었다.

<연려실기술>의 기록을 보면, 윤지경이 폐모론을 적극 반대하기는 했지만 반정에 동조한 것은 아니었음을 알 수 있다. 반정은 다른 말로 하면 역모이기 때문이다.

“보덕 윤지경(尹知敬)이 분주히 내전으로 들어가 광해를 찾았으나 보지 못하고, 불빛 속에서 중궁 유씨(柳氏)가 있는 곳으로 달려가 땅에 엎드려 청하기를, ‘원컨대 세자를 따라 빠져나가서 일을 도모하소서.’ 하였다. 일설에는 문이 닫혀 안에서도 모두 숨어서 어쩔 수 없었다고 한다. 창졸간에 무사에게 끌려가게 되었는데 무사가 칼을 들어 치려 하는 것을 이귀가 보고 급히 말렸다. 이끌고 인조를 뵙게 하니, 꼿꼿이 서서 절하지 않고 말하기를, ‘밤중에 군사를 일으킨 사람이 누구이기에 내가 가벼이 무릎을 꿇겠소.’ 하였다. 김류가 말하기를, ‘능양군이 부득이 종묘사직을 위하여 이 일을 일으킨 것이오.’ 하니, ‘그러면 어찌하여 궁실을 태웠소?’ 하였다. 김류가 말하기를, ‘군사가 실화하여 탄 것이지, 일부러 불을 놓은 것은 아니오.’ 하였다. 또 묻기를, ‘전 임금은 어떻게 처우할 것이오?’ 하니 ‘죽이지 않는 것으로 대우할 것이오.’ 하니 지경이 바로 내려서서 절하였다.”

윤지경의 목숨이 경각에 달려있을 적에 이귀가 그의 생명줄을 잡아준 것으로 나온다. 이 와중에서도 시비곡직을 가리고 사태를 파악하여 처신하는 윤지경의 모습이 이채롭다.

“반정하는 날 모든 사람이 도망쳐 숨어 황겁하지 않은 이가 없었는데, 도승지 이덕형과 보덕(輔德) 윤지경은 처음에 절하지 않고 땅에다 손을 짚고 버티어 지조를 잃지 않았으니 존경할 만하다.”

“(윤지경이) 드디어 동쪽 행랑에 가서 (본인을) 가두어주기를 청하므로 최명길 형제가 그의 손을 잡고 내력을 상세히 말하였다. 지경이 상소하기를, ‘신이 어두운 조정에서 자주 중요한 관직을 지내면서 망하는 것을 가만히 앉아 보고 한 마디도 바르게 구하는 말이 없었던 것이 첫째 죄입니다. 반정하는 군사가 들어올 때 먼저 기미를 알아 명에 응하지 못하고, 감히 집사와 다툰 것이 둘째 죄입니다. 폐동궁(廢東宮)에게 특별한 사랑을 입었는데, 그가 망명할 때에 말고삐를 잡고 따라가지 못한 것이 셋째 죄입니다. 신이 무슨 낯으로 의거한 여러 사람을 보며 새 조정을 다시 욕되게 하겠습니까.’ 하였다. 임금이 그의 사직을 허락하지 않았다. 지경은 이로써 세상에 명망이 중해졌다.”

 

이 외에도 윤지경의 재질과 행실을 보여주는 자료들이 <연려실기술>에 실려 있다.

“공이 어렸을 때, 모습이 시원스럽고 명랑하여 보는 사람마다 모두 말하기를, ‘윤씨 집에 대대로 사람이 있다.’ 하였다. 필주(泌州) 박이서(朴彛叙)가 보고 말하기를, ‘이 집에 이 아이가 있으니, 가르쳐 성취시켜야겠다.’ 하고, 드디어 사위로 삼았다.”

“이첨이 정권을 잡아 시사가 크게 변하니 드디어 병을 핑계로 문을 닫고 사람을 만나지 않았다. 하루는 친한 손이 바로 방에 들어와, 한참을 쳐다보고는 말하기를, ‘공이 병으로 혼자 물러나 있다더니 얼굴은 아무렇지도 않네.’ 하였다.”

“정형복(鄭亨復)이 폐모론을 배척하는 소를 올릴 때에, 공이 실제로 도왔었는데 이 일에 연루되어 폐고되었다. 후일 정공(鄭公) 홍익(弘翼)이 폐모에 반대하다가 귀양 가자, 공이 술을 가지고 새문[新門]밖에 가서 이별하고, 옷을 벗어서 선사하였다. 물러와서 말하기를, ‘내가 만일 이 폐모론에 참여한다면 그것은 정이(靜而)를 저버리는 것이 된다.’ 하였는데, 정이는 정형복의 자다.”

“공이 충청 감사에 임명되어 임금에게 하직하는 날에 임금이 인견하고 술을 내렸는데, 공이 신은 신발이 매우 낡은 것을 보고, 곧 어화(御靴)를 벗어 내시를 시켜 전문(殿門) 밖에서 뒤따라 나와 주게 하였으니 은혜와 사랑이 이러하였다.”

반정이 끝난 후에 광해군과 폐동궁에 대한 처분에 대해 여러 말들이 있었지만 유리안치하고 목숨을 보전하는 것으로 결정을 보았는데, 후에 폐동궁이 강화도에서 땅굴을 파고 도망쳤다가 붙잡힌 사건이 발생했다. 이 사건을 계기로 결국은 폐동궁에게 자진하라는 처분이 내려지는데, 이런 논란의 와중에 이경진은 이에 참여하지 않아 비판을 받게 된다.

“삼사에서 폐동궁(廢東宮)이 도망쳐 나간 죄를 논하였는데, 공은 스스로 여러 신하와 다르다 하여 처음부터 끝까지 참여하지 않으니, 시배(時輩)들이 장차 중상하려 하였다. 친구들이 와서 참론(參論)하기를 권하지 않는 이가 없었다. 정형복도 와서 굳이 권하였는데, 공이 말하기를, ‘의(義)가 있는 바에 마음으로 차마 하지 못한다.’ 하고, 끝까지 듣지 아니하였다. 그것은 일찍 폐동궁에게 두터운 사랑을 받았던 까닭이었다.”

이경진의 인품을 재삼 다시 확인하게 된다. 이런 정신이 있었기에 국난에 기꺼이 자신의 몸을 던져 나설 수 있는 것이다.

“정묘년 난리에 여러 진지가 모두 무너지니, 공이 분개하여 말하기를, ‘어찌 수천 리의 큰 나라를 가지고 적병의 소문만 듣고 먼저 무너진단 말인가.’ 하였다. 밤에 일어나 크게 탄식하며 눈물을 흘리면서, 하인에게 촛불을 잡게 하고 스스로 소를 지어 썼는데 말이 매우 강개하였다. 임금이 편전에 불러서 보니, 공이 울며 말하고 또 말하며 울었는데, 충성된 계책이 환하였다. 임금이 얼굴을 고치고 그 말을 모두 쓰기로 하고, 즉시 독검어사(督檢御史)로 삼았다. 달려서 임진강에 이르니 적병이 벌써 황주에 들어와 있었다. 공이 여러 번 군사를 청하므로, 호서 충청도 군사 수천을 배속시켰더니, 군사가 아직 이르지 않았는데 적병이 강화하고 물러갔다. 임금이 강화에서 돌아와, 공을, ‘나라가 위태함을 보고는 몸을 잊는 사람이다.’ 하고, 특히 형조 참의로 올려 주고, 해동 남자라 부르며 비단을 내려 상을 주니, 나라 사람이 모두 공을 찬양하고 말하기를, ‘만일 여러 신하들이 능히 이 대부와 같이 나라만 알고 몸을 잊는다면 어찌 강한 오랑캐를 근심할 것인가.’ 하였다.

윤지경은 청나라와의 척화를 강력히 주장해 윤황(尹煌), 윤형지(尹衡志)와 함께 삼윤(三尹)으로 당시 사람들로부터 높이 칭송되었다.

 

참고문헌

<연려실기술>, <한국민족문화대백과>

이덕형, 광해를 살펴주소서


이덕형, 광해를 살펴주소서

 

이덕형(李德泂, 1566-1645)은 자는 원백(遠伯)이며 호는 죽천(竹泉)이다. 관찰사 이언식(李彦湜)의 증손이다. 기발한 장난과 우정이 얽힌 ‘오성과 한음’ 설화의 주인공 중 한명인 한음 이덕형(李德馨, 1561-1613)은 다른 인물이다. 한음은 남인이었지만 북인의 영수 이산해의 사위가 됐다. 이산해의 숙부인 토정 이지함이 한음의 인물 됨됨이를 알아보고 사윗감으로 추천했다고 전해진다. 이산해 집안에 한음과 동명이인의 인물이 있었는데, 바로 죽천 이덕형이다.

이덕형은 광해군 때에 응교·동부승지·승지·대사간·좌부승지·부제학·이조참의·우승지·병조참판·도승지 등의 경관직(京官職)과 나주목사·전라감사·황해감사 등의 외관직을 지냈다.

광해군이 영창대군(永昌大君)을 해치고 인목대비를 유폐시킬 때에 직접 반대의 입장에 서지 않고, 왕의 뜻에 따르거나 소극적인 태도를 취하였다. 광해군 말년에 도승지로 있을 때 세태가 어지러워지자 병을 이유로 사직소를 올렸으나 허락받지 못하였다.

인조반정 때 광해군을 죽이지 말 것을 주장했으며, 이를 본 능양군(綾陽君: 인조)이 충신이라고 판단해, 반정 후 인목대비를 맞이하는 의식에서 이덕형을 앞세워 반정을 보고했고, 능양군에게 어보(御寶)를 내리게 하는 데 공을 세웠다.

이덕형은 광해의 폐정을 반대하면서 반정에 참여하지는 않았지만 반정 후의 처신을 보건대 애초에 광해의 폐정에 적극적으로 가담하지는 않았고, 심정적으로 반정의 명분에 동감한 것으로 보인다.

그렇지만 반정이 일어날 때 직책이 도승지로서 광해군의 총임을 받는 자리에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반정파들의 칼날을 맞지 않고 인조 시대에도 여전히 활동할 수 있었던 데에는 그의 지조 있는 행실이 옳게 평가받은 것처럼 보인다.

“반정하는 날 모든 사람이 도망쳐 숨어 황겁하지 않은 이가 없었는데, 도승지 이덕형과 보덕(輔德) 윤지경은 처음에 절하지 않고 땅에다 손을 짚고 버티어 지조를 잃지 않았으니 존경할 만하다.”

목숨이 백척간두에 서 있는 상황에서도 의연한 모습이 엿보인다.

이덕형은 광해가 반정으로 폐주가 되었지만 광해조의 녹을 먹은 신하로서 광해에 대한 충의를 접지 않았다. 이는 인조가 가상히 여긴 바이고, 반정의 주역들로부터도 좋은 평을 받았는데, 이는 이덕형의 평소 몸가짐이 어떠했는지를 가늠하기에 충분하다.

“인조가 돈화문 안에 앉은 후, 군사를 나누어 서궁에 가서 문안을 드리었다. 대궐에 입직한 신하들 병조 판서 권진(權縉) 이하가 모두 허둥지둥하며 절하여 축하드리고 땅에 엎드려 명을 듣는데, 유독 도승지 이덕형(李德泂)만은 절하지 않았다. 군사들이 덕형을 에워싸니 덕형이 땅에 버티고 소리쳐 말하기를, ‘신하로서 어찌 된 영문도 모르고서 갑자기 절할 것이냐?’ 하였다. 좌우에서 말하기를, ‘능양군이 대비를 받들어 반정하셨다.’ 하니 덕형이 눈물을 흘려 사례하며 말하기를, ‘원컨대 임금께서는 전(前) 임금을 보전하여 주소서.’ 하였다. 여러 장수 가운데 칼질하려는 사람이 있었으나 인조가 중지시켰다.”

“이때 덕형이 도승지로서 대궐 안에 있었는데, 혼란스러운 가운데서도 연이어 인조에게 청하여 ‘전 임금을 살려주소서. 전 임금을 살려주소서.’ 하니 눈물이 쏟아져 흐르고 흐느낌이 심하여 말소리조차 이룰 수가 없었다. 후에 또 스스로 청하기를, ‘전 임금을 바르게 인도하지 못한 죄를 지닌 채 그 전 벼슬에 그대로 있는 것은 맑은 조정에 큰 누가 됩니다.’ 하니 임금이 이르기를, ‘경의 마음은 반정하던 날에 내가 이미 알았으니 사양하지 말라.’ 하였다. 뒷날 임금이 하교하기를, ‘이덕형의 충의는 내가 반정하던 날 알았노라.’ 하였다.”

광해에 대한 충의의 도리를 다했지만 사태를 파악한 이덕형이 반정을 부정하지 않고 자신의 역할을 담당해서 반정이 성공할 수 있도록 했기 때문에 반정 후에 인조 시대에서도 살아남을 수 있었을 것이다.

“이날 이귀가 명을 받들어 도승지 이덕형과 함께 의물(儀物)을 갖추어 대비를 모시고 가려 하였으나 대비가 허락하지 않았다. 이귀가 그 아들 시백(時白)을 시켜 인조에게 사뢰어 인조가 곧 서궁으로 가서 문안드리니, 대비가 드디어 임금 책립하자는 명을 내렸다.”

저서로 <죽창한화>와 <송도기이>가 있다. 수필집 <죽창한화>는 이덕형이 겪은 다양한 풍습과 제도, 인물 등을 서술하였다. 그중 연산군에 관한 기록이 있다.

이덕형은 임진왜란 이듬해인 1593년(선조 26) 난리를 피해 전라도 진안에 머물렀다. 그곳에서 97세 한 노인과 만났다. 노인은 7세 때부터 군역이 부과돼 서울에서 향군(鄕軍)으로 근무하면서 연산군을 목격했다고 증언했다. 노인은 조금도 떠듬거리지 않고 연산군의 인상을 얘기했으며 당시 상황도 정확히 떠올렸다.

“연산의 얼굴을 쳐다보니 빛은 희고 수염은 드물고 키가 크며 눈에는 붉은 기운에 있었다. 연산이 전교(서울 중랑천 살곶이다리)에 거동할 때 역군으로 따라갔다. 화양정(성동구 살곶이목장 내에 있던 정자) 앞에 목책을 세우고 각 읍에 예치했던 암말 수백 마리를 가둔 다음 연산이 정자에 자리를 잡으니 수많은 기생만이 앞에 가득했고 신하들은 물리쳤다. 마관(馬官)이 수말 수백 마리를 이 목책 안으로 몰아넣어서 그들의 교접하는 것을 구경하였다. 여러 말이 발로 차고 이로 물면서 서로 쫓아다니는 그 소리가 산골짜기를 진동했다. 그해 가을 반정(중종반정)이 일어났다.”

조선왕조에서 반정으로 물러난 왕이 앞으로는 연산군이요 뒤로는 광해군인데, 이덕형은 광해군의 반정을 목도하였다. 그리고 <죽창한화>에 실린 연산군 이야기는 행간에 황음무도한 연산군의 폐정을 들추어내고 있다.

<참고문헌>
<연려실기술>, <한국민족문화대백과>
매일경제 배한철의 초상화돌아보기(2018.08.08.) : 세종대왕이 시골뜨기를 형의 사위로 삼은 속셈은?

든든한 혁명 동지 신경진


든든한 혁명 동지 신경진

 

신경진(申景禛, 1575-1643)은 자가 군수(君受)이다. 임진왜란 때 순국한 도순변사(都巡邊使) 신립(申砬)이 아버지다.

임진왜란 때 전망인(戰亡人: 전쟁에 참여하여 죽은 자)의 아들이라 하여 선전관으로 기용되었고, 오위도총부도사로 전보되어 무과에 급제하였다. 그 뒤 태안군수·담양부사를 거쳐 부산첨사가 되었으나 일본과의 화의에 반대하고, 왜나라 사신의 접대를 거부하여 교체되었다.

이어 갑산부사를 거쳐 함경남도병마우후(咸鏡南道兵馬虞候)로 전보되자, 체찰사 이항복(李恒福)의 요청으로 경원부사와 벽동군수가 되었다.

광해군이 즉위하여 대북파(大北派)가 정권을 장악하자 관직에서 물러나 있던 중 1620년(광해군 12) 김류(金瑬)·이귀(李貴)·최명길(崔鳴吉)·구인후(具仁垕) 등과 모의, 신경진과 인척 관계에 있는 능양군(綾陽君: 인조)을 추대하기로 하였다.

그 뒤 기회를 노리다가 1622년(광해군 14) 이귀가 평산부사가 되자 그 중군(中軍)이 되기를 자원하여 거사 준비를 하고자 하였다. 그러나 사전에 누설되어 효성령별장(曉星嶺別將)으로 쫓겨나 1623년의 인조반정에는 직접 참여하지 못하였다.

반정에 따른 논공행상 때 제일 먼저 반정계획을 세웠다 하여 분충찬모입기명륜정사일등공신(奮忠贊模立紀明倫靖社一等功臣)에 녹훈되고, 평성군(平城君)에 봉해졌다.

반정 후 서인이 훈서(勳西)·청서(淸西)로 분열하자 김류·이귀·김자점(金自點)·심기원(沈器遠) 등과 함께 훈서의 영수가 되었으나 무신임을 들어 조정의 시비에 간여하기를 극력 회피하였다. 또한 송시열(宋時烈) 등의 사림을 천거하고 장용(奬用: 장려하여 등용)하여 그들의 환심을 사기도 했다.

무인이면서도 김류·이귀·최명길 등의 문인들과도 널리 교유했는데, 특히 김류와는 선대의 인연(김류의 아버지 김여물(金汝岉)은 신경진의 아버지 신립의 종사관으로 충주에서 같이 전사하였다)으로 절친한 사이였다.

<연려실기술>에 신경진이 김류와 합심하여 반정을 도모한 내용들이 다수 나온다.

“신경진이 평소 김류와 서로 마음이 맞았는데, 하루는 조용히 글 배우기를 청하고는 바로 사략(史略)을 내어놓았다. ‘이윤(伊尹)이 태갑(太甲)을 내치다. [伊尹放太甲 ]’는 대목에 이르러서 책을 덮으며 탄식하기를, ‘신하로서 임금을 내쫓는 일이 옳은가?’ 하니, 김류가 말하기를, ‘태갑이 탕(湯)의 법도를 뒤엎었으니 내쫓는 것이 또한 옳지 않은가.’ 하였다. 경진이 말하기를, ‘요즈음은 어떠한가?’ 하니, 김류는 ‘옛날과 지금이 무엇이 다르냐.’ 하였다. 경진이 울며 말하기를, ‘천하에 어찌 어미 없는 나라가 있는가. 나는 나라가 망하게 되는 것을 그냥 앉아서 볼 수가 없다.’ 하니, 김류가 말하기를, ‘그것이 내 뜻이다.’ 하였다. 이내 묻기를, ‘마음 가는 데가 어디 있는가?’ 하니, 경진이 말하기를, ‘능양군(綾陽君, 인조)은 바로 선조의 친손인데 총명하고 무용(武勇)이 뛰어나니 하늘이 주신 바이다.’ 하여 마침내 의논이 결정되었다. 신경진이 평안 우후(平安虞候)에 임명되었는데 신병을 빙자로 부임하지 않으니 박승종(朴承宗)이 의심하여 효성령 별장(曉星嶺別將)으로 내쫓으므로 그날로 출발하였다.”

“(김류가) 혼자 있을 때에 늘 통분해하며 뜻이 나라를 바로잡아 다시 세우는 데에 있었다. 마침 정승 신경진(申景禛)이 왔는데 공은 평소부터 그의 사람됨이 침착하고 굳세어 함께 일을 할 만한 자임을 알고 있었다. 눈물을 흘려 울면서 말하기를, ‘옛날이나 지금이나 어찌 어미 없는 나라가 있는가? 이씨의 종묘사직이 아침저녁으로 왕망(王莽)과 동탁(董卓)의 손에 옮겨지는 것과 같은 지경이니, 우리가 어찌 멸족될 것을 두려워하여 위태로운 나라를 앉아서 보고만 있겠는가? 또 하물며 우리 두 사람의 아버지께서 나라 일로 함께 돌아가셨으니, 우리 두 사람이 종묘사직을 위하여 함께 죽지 않으면 어떻게 돌아가신 어른들을 지하에서 뵐 것인가?’ 하였다. 신공이 팔을 걷어붙이며 무릎을 맞대고 말하기를, ‘그것이 나의 뜻이다.’ 하여 드디어 큰 계획이 정해져서 서로 죽음으로써 다짐하였다.”

신하가 반정을 도모한다는 것은 생사의 외줄을 아슬아슬하게 탈 수밖에 없다. 만약 도모하는 일이 사전에 발각된다면 본인이 능지처참을 당하는 것은 말할 필요도 없고 구족멸문의 화가 미친다. 일이 사전에 누설되는 경우는 내부자의 고발일 가능성이 많은 법, 생사를 함께 하기로 다짐한 혁명 동지가 배신자가 될 가능성이 가장 높다. 이런 이치를 생각해보면, 김류와 신경진은 선대부터 시작된 인연으로 맺어진 서로 가장 신뢰하는 동지였을 것이다.

신경진은 무장인지라 경세지책을 펼치는 데는 한계가 있었다. 그럼에도 상신(相臣)의 반열에 올랐다. <연려실기술>에 이와 관련된 내용이 기록되어 있다.

“신경진(申景禛)은 인헌왕후(仁獻王后)의 외종(外從)으로 벼슬이 좌의정에 이르렀는데, 병이 중하여 일어나지 못하게 되어서야 비로소 영의정 자리에 오르게 되었다. 이것은 임금이 그가 글을 읽은 사람이 아니므로 백관을 통솔할 수 없을 것을 염려한 것으로 벼슬을 중하게 아끼는 뜻을 가진 한편 그의 공로를 생각하여 죽은 뒤에 신하의 최고직을 명정(銘旌)에나마 쓰게 하고자 함이었다.”

신경진이 무장으로 백관을 통솔하는 데에는 한계가 있다손 치더라도 반정에 참여하여 공을 이루는 데에는 신경진의 남다른 면모가 있었기 때문이다. <연려실기술>에 기록된 내용 중 일부에서도 엿볼 수 있다.

“임금이 언젠가 구궁(舊宮)에 행차하여, 친척들을 불러들여 만난 적이 있었는데, 나아가 뵈는 이가 모두 앞을 다투었다. 그러나 공이 혼자 즐거워하지 않고 말하기를, ‘신하가 어찌 감히 사사롭게 뵐 수 있는가?’ 하였다. 정경세(鄭經世)가 듣고 감탄하며 말하기를, ‘식견이 다른 사람은 따라가지 못할 바이다.’ 하였다.”

“안주(安州) 목사로 있을 때, 어머니의 상을 당하였다. 시묘살이를 하면서 3년 동안에 한 번도 집에 오지 않았으며, 아침저녁으로 무덤에서 울고 큰비나 눈이 와도 그만두지 않았다.”

“(병자호란 중) 남한산성에서 동성(東城)을 지키는데 홀연히 대포알이 날아와 단(壇) 위를 쳐서 대장기(大將旗)가 부러지니 사람들이 모두 놀랐는데, 공은 태연히 진정시켰다.”

“남한산성에서 공은 동쪽 성을 지켰는데, 군중이 정돈되어 엄숙하였다. 날마다 출병하여 잘 싸워 적을 죽이고 잡은 것이 많았다. 적과 서로 바라볼 수 있는 곳에 높은 언덕이 있는데, 적이 그곳을 점령하여 성을 내려다보았다. 공이 포수를 선발하여 쏘게 하니, 한 방에 그 장수가 맞아 떨어졌다. 우리 군사가 모두 용기를 내어 마구 쏘아대니 적이 감히 달려들지 못하였다.”

“임종할 때, 정신과 언어가 평일과 같은데, 한 마디도 집안일을 말하는 것은 없고, 다만 나라 일을 걱정하였다. 낮에 큰 별이 갑자기 떨어졌는데, 이날 대사동(大寺洞) 집에서 죽었다.”

신경준이 김류와 더불어 반정을 도모하고 반정공신에 든 데에는 그만한 이유가 있음을 알 수 있다.

 

<참고문헌>

<연려실기술>, <한국민족문화대백과>

혁명군 총사령관 김류


혁명군 총사령관 김류

 

김류(金瑬, 1571-1648)는 인조반정이 성공한 후에 이귀(李貴, 1557-1633), 김자점(金自點1588-1651) 등과 함께 계해정사(癸亥靖社) 1등 공신에 책봉된다. 본관은 연안(延安)이고 자는 옥여(玉汝)이고 호는 묵재(默齋)이다. 음사(蔭仕)로 참봉에 제수되었다가, 1596년(선조 29) 정시 문과에 을과로 급제해 승문원권지부정자(承文院權知副正字)에 임명되었다.

임진왜란 때는 복수소모사(復讐召募使) 김시헌(金時獻)의 종사관으로 호서·영남 지방에서 활약하였다. 그러나 1598년 아버지가 전사한 탄금대 아래에서 기생과 풍악을 벌여 놀았다는 사헌부의 탄핵을 받아 파면되었다.

1601년 모함이 풀려 예문관검열로 복직되고 대교(待敎)·주서(注書)·봉교(奉敎) 등을 역임하였다. 그러나 1602년 정인홍(鄭仁弘)이 사헌부를 담당하자 다시 이전의 일로 파직되었다. 그 해 봉교로 복직되어 형조좌랑에 승진되었다. 그러나 이후 외직으로 밀려나 충청도도사·전주판관 등을 역임하였다.

1610년(광해군 2) 시강원사서(侍講院司書)·부교리를 지내고 외직으로 나가 강계부사를 역임하였다. 1614년 대북 정권 아래서 가선대부(嘉善大夫)로 승진되어 동지사(冬至使)·성절사(聖節使)로 명나라에 다녀왔다. 1617년 북인들로부터 임금도 잊고 역적을 비호한다는 대간의 탄핵을 받아 쫓겨났다.

1620년 이귀(李貴) 등과 반정을 꾀했으나 미수에 그치자, 다시 1623년 거의대장(擧義大將)에 추대되어 이귀·신경진(申景禛)·이괄(李适) 등과 인조반정을 일으켰다.

이항복이 김류에게 광해군의 폐정을 논한 이야기가 여러 번 <연려실기술>에 나온다.

“광해주 10여 년 동안에 조정은 문란하여 상하가 마음이 이반되고, 대비를 감금하여 아침저녁으로 없앨 궁리를 하니 이항복이 김류(金瑬)에게 은밀히 말하기를, ‘요사이 임금의 정사가 말할 수 없이 어지러우니 우리 무리들 가운데 종묘사직을 평안하게 할 수 있는 사람은 오직 그대뿐이다.’ 하고 손으로 얼굴을 가리며 흐느껴 우니 김류가 그 뜻을 알았다.”

“항복이 귀양 길에 오를 때에 작별하면서 김류에게 말하기를, ‘요사이 일이 이 지경에 이르렀으니, 종묘사직을 평안하게 할 이는 관옥(冠玉, 곧 김류) 뿐이다. 힘써주기를 바란다.’ 하니 김류가 묵묵히 있었으나 김류의 뜻은 이미 이때에 정해졌다고 한다.”

“반정하던 날에 항복이 김류ㆍ이귀 두 사람의 꿈에 나타나서 말하기를, ‘오늘 종묘사직을 위하여 이 거사가 있다. 그러나 다음에 이보다 더 큰 일이 있을 것인데, 내가 그것을 매우 걱정하니 여러분은 힘쓸지어다.’ 하였는데, 이는 대개 남한산성(南漢山城)의 일을 가리킨 것이었다.”

이항복이 김류를 광해군의 폐정을 끝장낼 인물로 점찍은 것처럼 이귀 또한 김류를 높이 평가하여 반정의 대장으로 추대했다.

“이귀가 김류에게 말하기를, ‘이 일을 할 때의 대장은 나처럼 노쇄한 자는 안 될 것이오. 영감은 원래 장수의 물망이 있는 사람이니, 인심을 진정시킬 수 있을 것이오. 영감을 대장으로 삼는 것이 좋겠소.’ 하였다.”

본래 김류는 문과 급제한 인물이지만 무장의 능력이 있었다. 이귀가 김류에게 장수의 물망이 있다는 말이 그런 의미다. 이런 사정에 대해서는 박세채가 구체적으로 밝혔다.

“김류는 천성이 비범하고 기국이 엄숙하고 단정하며 또한 문장을 잘하고 지략이 있었다. 일찍이 대궐 뜰에서 책문 시험을 볼 때에 병무(兵務)에 대해 매우 잘 논했으므로 사람들이 장상의 재목이 된다고 여겼는데, 이 때문에 광해주 때에도 자주 원수(元帥)의 물망에 올랐다. 계해년 정사(靖社)에 모든 사람이 추대하여 영수(領袖)로 삼은 것도 이로 말미암은 것이었다. 임금이 반정하기 전에 세 번 그 집에 찾아가서 큰일을 도모하였다.”

김류가 반정군의 대장이었다는 것은 여러 기록에 나온다. 그런데 거사 당일 김류가 늦게 합류하여 잠시나마 혼란이 발생한다. 혁명의 성패는 일초일각을 다투는 법인데 대장이 나타나지 않았으니 회합 장소에 모인 이들의 심사가 어떠했을지 족히 가늠하게 된다. <연려실기술>에는 김류가 늦게 합류한 사연을 적어두었다.

“이때 김류가 고변한 사람이 있다는 말을 듣고는 앉아서 잡히기를 기다려 주저하며 나가지 못하였는데, 심기원이 원두표와 함께 그 집에 달려와서 말하기를, ‘모이기로 약속한 시간이 다 되었는데 어찌 움직이지 않소?’ 하니, 김류가 말하기를, ‘조정에서 날 잡으러 오기를 기다릴 뿐이오.’ 하였다. 기원이 말하기를, ‘그러면 장차 고스란히 잡혀간단 말이오? 이 마지막 지경에 이르러서 잡으러 오는 것이 무슨 상관이오. 금부도사가 어찌 두려울 것이오.’ 하였다. 김류가 옳게 여겨 그 아들 경징(慶徵)을 불러서 전통(箭筒)과 마구(馬具)와 군복을 재촉하여 갖추고 모화관(慕華館)에 이르니, 기원의 군사가 이미 와서 정렬하여 기다리고 있었다. 기원이 대장좌(大將座)를 설치하여 김류를 부축하여 자리에 올리고, 원두표(元斗杓)와 이해(李澥)ㆍ박유명(朴惟明) 등과 함께 절하여 꿇어앉고는 항오(行伍)를 정돈하여 사현(沙峴)을 넘어갔다. 김류가 늦게 온 것은 실로 이러한 연유에서였다.”

“밤이 되자, 이괄이 군관 20여 명을 거느리고 약속한 곳에 먼저 갔는데 고요하기만 하고 사람의 형적이 없었다. 근심하고 낭패할 즈음에 홀연히 한 점의 불빛이 서북 산 아래 켜졌다 꺼졌다 하는 것을 보고 달려가서 기다리니, 이귀(李貴)ㆍ김자점(金自點)ㆍ송영중(宋英重)ㆍ한교(韓嶠) 등이 각각 모집한 군사 수백 명을 거느리고 와서 모였다. 조금 뒤에 장유(張維)가 와서 전하기를, ‘어떤 사람이 고변을 하여 벌써 국청을 개설하고 사방으로 나가 체포하는데, 도감 중군(都監中軍) 이곽(李廓)이 포수 수백 명을 거느리고 창의문(彰義門)을 나왔다.’고 하였다. 이때 미리 약속하였던 모든 군사가 태반도 오지 않았고 장단(長湍)의 군사도 아직 오지 않았는데, 다만 대오(隊伍)도 되지 않던 수백 명 오합지졸만이 이 소식을 듣고는 겁을 내고 무너져 흩어지려 할 판이었다. 이귀가 이괄의 손을 잡고 귀에다 입을 대고 말하기를, ‘대장 김류가 오지 않고 일이 이미 이쯤 되었으니, 반드시 그대가 대장이 되어야만 여러 사람의 마음을 진압할 수 있을 것이오. 나도 평일에 본래 군사 일에 등한하지 않았으나, 창졸간에 힘을 얻기 어렵소.’ 하였다. 드디어 이괄을 추천하여 대장으로 삼고 말하기를, ‘나(이귀 자신)부터 누구든지 규율을 어기면 목을 베시오.’ 하고 거느리고 있던 군사들로 하여금 줄지어 이괄에게 전하게 하니 이괄이 기꺼이 따랐다. 곧이어 군관들을 불러 써두었던 의(義) 자 수백 조각을 꺼내어 모든 사람에게 나눠주니, 모두 옷 뒤에 달아 표적을 삼았다. 이시백(李時白)이 말하기를, ‘군에 계통이 서지 않으면 활동하기가 어려울 것이니, 빨리 여러 장수들을 나누어 군사를 거느리고 진을 치는 것이 가하다.’ 하였다. 이괄이 곧 그 말대로 하여 엄하게 부서를 단속하니, 군사들의 마음이 비로소 안정되었다. 밤중이 된 후에 김류와 여러 사람이 다른 곳에서 모여 전령으로 이괄을 부르니, 이괄이 크게 노하여 가지 않으려고 하였는데 이귀가 극력 권하여 그리로 가서 모였다. 이에 이괄이 김류에게 대장을 사양하였으니 당초의 약속을 준수하기 위해서였다.”

만약 심기원과 원두표가 찾아가 김류의 마음을 돌리지 않았다면 반정이 어찌 되었을지도 모를 일이다. 게다가 김류가 나타나지 않자 다급해진 이귀가 김류를 대신하여 이괄을 대장으로 삼았는데 만약 이대로 반정을 거행하여 성공했다면 이괄의 난은 일어나지 않았을 수도 있었다. 바로 “밤중이 된 후에 김류와 여러 사람이 다른 곳에서 모여 전령으로 이괄을 부르니, 이괄이 크게 노하여 가지 않으려고 하였는데 이귀가 극력 권하여 그리로 가서 모였다. 이에 이괄이 김류에게 대장을 사양하였으니 당초의 약속을 준수하기 위해서였다.”는 대목에서 이괄의 심사가 잘 드러난다. 여기서 이미 이괄의 난은 싹을 키우고 있었는지도 모른다. 물론 역사는 만약이라는 가설을 허용하지는 않지만 말이다.

 

<참고문헌>

<연려실기술>, <한국민족문화대백과>

혁명가 이귀


혁명가 이귀

 

이귀(李貴, 1557-1633)는 인조반정이 성공한 후에 김류(金瑬, 1571-1648), 김자점(金自點1588-1651) 등과 함께 계해정사(癸亥靖社) 1등 공신에 책봉된다. 본관은 연안(延安)이고 자는 옥여(玉汝), 호는 묵재(默齋)이다.

이귀는 젊어서 이이(李珥)와 성혼(成渾)의 문하에서 수학해 문명을 떨쳤으며, 1582년(선조 15) 생원이 되었다. 이듬 해 일부 문신들이 이이와 성혼을 공박, 모함해 처지를 위태롭게 만들자 여러 선비들과 함께 논변하는 글을 올려 스승을 구원하였다.

1592년 강릉참봉(康陵參奉)으로 있던 중 왜적의 침입으로 어가(御駕)가 서행(西幸)한다는 소식을 듣고, 제기를 땅에 묻고 능침에 곡읍한 후 물러 나와 의병을 모집해 황정욱(黃廷彧)의 진중으로 갔다가 다시 어가가 주재하는 평양으로 가서 죄를 청하고 방어 대책을 아뢰었다.

이어 이덕형(李德馨).이항복(李恒福) 등의 주청으로 삼도소모관(三道召募官)에 임명되어 군사를 모집, 이천으로 가서 세자를 도와 흩어진 민심을 수습하였다. 이듬 해 숙천 행재소로 가서 왕에게 회복 대책을 올려 후한 상을 받고, 다시 삼도선유관(三道宣諭官)에 임명되어 군사 모집과 명나라 군중으로의 군량 수송을 담당하였다.

그는 체찰사 유성룡(柳成龍)을 도와 각 읍으로 순회하며 군졸을 모집하고 양곡을 거두어 개성으로 운반해서 서울 수복전을 크게 도왔다. 그 뒤 장성현감·군기시판관(軍器寺判官)·김제군수를 역임하면서 난후 수습에 힘썼다.

1603년 정시 문과에 병과로 급제해 형조좌랑·안산군수·양재도찰방(良才道察訪)·배천군수 등을 차례로 지냈고, 1616년(광해군 8) 숙천부사로서, 해주목사에게 무고를 받고 수감된 최기(崔沂)를 만난 일로 탄핵을 받아 이천에 유배되었다. 1619년에 풀려나와 1622년 평산 부사가 되었으나 광해군의 난정을 개탄하고, 김류(金瑬)·신경진(申景禛)·최명길(崔鳴吉)·김자점(金自點) 및 두 아들 시백(時白)·시방(時昉) 등과 함께 반정 의거를 준비하였다.

<연려실기술>의 기록을 보면 이귀가 반정을 도모하는데, 아들 시백의 응원이 큰 힘이 되었다고 한다.

“이귀(李貴)가 귀양 가 있을 때 이상한 돌을 한 개 얻었는데, 이름을 용암(龍巖)이라고 하고 거기에 한 수의 절구를 쓰기를,

슬프다 용이여 덕이 어찌 쇠하였는가 / 吁嗟龍兮德倚衰
물결 복판에 길게 누웠으니 세상이 모르는구나 / 長臥波心世不知
융중에 있는 제갈공명을 비웃지 말라 / 莫笑隆中諸葛老
은근히 세 번 찾음이 어찌 때가 없으랴 / 殷勤三顧豈無時

하였다.

이귀의 아들 시백(時白)이 화답하기를,

당년에 한 나라의 국운이 쇠함이 부끄럽고 한이 되어 / 愧恨當年漢業衰
돌로 변하여 알려지기를 구하지 않았구나 / 變形爲石不求知
깊은 못에서 자주 고개를 돌리며 / 深潭入處頻回首
부질없이 융중 꿈이 깰 때를 생각하도다 / 空憶隆中夢覺時

하니 이귀가 기뻐하며 그 아들의 손을 잡고 말하기를, ‘부자지기(父子知己 부자간에 서로 알아준다는 말)라 하겠다.’ 하고는 드디어 비밀스러운 의논을 정하였다.”

 

이귀는 아들만이 아니라 그의 딸도 반정을 도모하는데 중요한 역할을 한 것으로 보인다.

“이보다 먼저 이귀의 딸이 김자점의 동생 자겸(自兼)의 아내였는데, 일찍이 과부가 된 후에 정조를 잃고 절간으로 떠돌아다니며 아미타불을 섬겼는데, 앞 설에는 자겸이 젊어서 불법을 좋아하여 죽을 때에 아내에게 권하여 말하기를, ‘삼가 불도를 닦으라.’고 하였기 때문에 이씨가 마침내 머리를 깎고 중이 되어 산에 들어가서 숨어 살았다고 한다. 간음한 일이 발각되어 잡히어 심문을 당하게 되니 궁중에 들어가기를 원하므로 광해가 허락하였다. 일설에서 광해가 풀어주고 성중(城中) 자수궁(慈壽宮)에 있게 하였는데 이씨가 이것이 인연이 되어 궁중에 출입하니 대궐 안 사람들이 모두 생불(生佛)이라 일컬어 신봉함이 비할 데가 없었다 한다. 궁중에 들어가게 되어서는 김상궁과 사귀어 모녀 간을 맺게 되었다. 항상 말하기를, ‘아버지 이귀와 시숙 김자점의 충성을 불행하게도 대북(大北)이 질시하여 항상 모해를 받는다……’ 하였다. 나날이 억울한 것을 호소하고 또 김자점을 후원하여 뇌물을 쓰는데 부족하면 김상궁에게서 꾸어서 다른 궁인에게 주고 또 다른 궁인에게 꾸어서 상궁에게 바치니, 이렇게 돌린 것이 수천 냥이므로 모든 궁인들이 기뻐하여 모두 김자점을 성지(成之)라 자를 부르며 의심하지 않았다. 이렇게 되니 광해가 유상(惟翔) 등이 아뢰는 말을 듣고 매양 잡아 신문하고 싶어도, 상궁과 개똥이[介屎] 등이 말하기를, ‘성지는 지극히 충성스러운 사람이며, 더구나 한미한 선비에 불과한데 무슨 권력이 있어서 다른 모의를 할 것입니까.’ 하니 광해가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이귀는 반정의 주역인 김류, 김자점보다 연장자다. <연려실기술>의 기록에 보면 이귀가 반정 주역의 연장자로서 오랫동안 일을 도모했음을 알 수 있다. 반정의 대장으로 추대된 김류도 이귀가 포섭한 것으로 기록하고 있다.

“이귀가 이름 있는 선비인 김자점ㆍ심기원과 무장(武將) 신경진ㆍ구굉 등과 함께 김여물(金汝岉)의 아들 김류와 협의하였다. 김여물의 아들 김류가 시의(時宜)에 부합하지 못한 채 중한 명망이 있었으니, 이때에 동지중추부사로 있으면서 세상에 쓰이지 못하였다. 경진의 아버지 신립(申砬)과 김류의 아버지 여물(汝岉)이 임진왜란 때에 충주에서 함께 전사한 인연으로 평소 정의가 두터웠으므로 경진을 시켜 뜻을 통하게 하였더니 김류가 이를 허락하였다.”

또한 신립 장군의 아들로 인정반정의 중핵 중 한 명인 신경진도 역시 이귀를 통해 반정에 참여한 것으로 보인다.

“이귀가 당시 일에 강개하여 반정할 뜻을 오래 전부터 지니고 있으면서도 일으키지는 못하였다. 전에 함흥 판관(咸興判官)이 되었을 때 신경진(申景禛)은 북우후(北虞候)로 있었는데, 이귀는 신경진이 함께 일을 할 만한 사람인 줄 알고 마음으로 서로 깊이 결탁하였다. 이귀가 체직되어 돌아온 후 신유년 4월에 아내의 상사를 당하자 신경진이 와서 위로하였는데 당시 상황에 말이 미치자, ‘지금 세상이 어찌 사대부가 벼슬할 때인가?’ 하였다. 이귀가 희롱삼아 답하기를, ‘이때는 태평성대라 할 만한데 그대는 어찌 이런 말을 하는가? 내가 고변(즉 고발)을 할 것이다.’ 하였더니, 경진이 “내가 먼저 고변할 것이니 어쩔 것인가?” 하여 이귀가 그 뜻을 추측하고 드디어 의논을 정하였다.”

혁명가 이귀가 반정을 도모하면서 많은 사람을 끌어들일 수 있었던 데에는 광해군의 폐정을 반대한 여론의 동향이 중요한 지렛대가 되기는 했겠지만 이귀에 대한 신망이 상당한 영향을 미쳤을 것이다.

“그때 훈련대장 이흥립(李興立)은 조정 안에서 중한 명망을 가지고 있었으므로 여러 사람이 걱정하여 그 사위 장신(張紳)을 시켜 설득하게 하였더니, 이흥립이 말하기를, ‘이귀도 함께 공모하였는가?’ 하므로 장신이 그렇다고 하니 이흥립이 말하기를, ‘그러면 이 의거는 반드시 성공할 것이다.’ 하고 드디어 허락하였다. 장유(張維, 장신의 형)가 이귀에게 회답하여 알리니 이귀가 크게 기뻐하여 일어나 절하며 사례하였다. 드디어 흥립을 시켜 손수 글을 써서 장단(長湍)에 보내어 군사를 일으키기로 약속하고 흥립이 안에서 호응하기로 하였다.”

혁명은 그 시작이 승패의 중요한 갈림이 되는데, 이귀가 거사 초기에 반정을 성공시키는데 중요한 역할을 한 내용들이 <연려실기술>에 기록되어 있다. 이흥립의 예언이 틀리지 않았다.

“이날 인조가 특명으로 이귀를 호위대장에, 신경진을 부장에, 김자점ㆍ심기원ㆍ심명세ㆍ송영망(宋英望) 등을 종사관에 임명하였다. 이서ㆍ이괄ㆍ이흥립 등도 모두 여기에 소속시켜 이들에게 절제를 받지 않는 자는 먼저 베고 뒤에 알리게 하였다. 모든 일이 새로 시작되어 육조와 모든 관아에 인원이 미처 배치되지 않았으므로 설치와 시행이 모두 이귀에게서 나왔다.”

반정을 일으키고 그 빠른 수습을 이귀가 했다고 한다. 이 와중에서 왕가의 최고 어른인 대비의 윤허를 받아야 혁명은 마침표를 찍을 수 있다. 역시 이귀의 활약이 돋보인다.

“이날 이귀가 명을 받들어 도승지 이덕형과 함께 의물(儀物)을 갖추어 대비를 모시고 가려 하였으나 대비가 허락하지 않았다. 이귀가 그 아들 시백(時白)을 시켜 인조에게 아뢰어 인조가 곧 서궁으로 가서 문안드리니, 대비가 드디어 임금으로 책립하자는 명을 내렸다.”

“이때 인조가 또 이정귀(李廷龜)를 보내니, 대비가 분판(紛板)에 글을 써서 내보이기를, ‘좋은 대궐에 앉아서 스스로 하면 안 될 것이 무엇이 있기에 꼭 나를 청하는가?’ 하였다. 인조는 대비가 끝내 마음 돌릴 뜻이 없음을 알고 해가 저물 즈음, 수레를 갖추고 친히 서궁에 나아가는데 폐주(광해군)를 여(輿)에 태워서 뒤따르게 하였다. 그래도 대비의 노여움이 풀리지 않으므로 인조가 땅에 엎드려 대죄하니, 밤이 이미 깊었다. 대비가 또한 전국보(傳國寶 옥새)를 들이라고 재촉하므로 이귀가 대답하기를, ‘대비께서는 전국보를 받아서 장차 무엇에 쓰시렵니까. 신의 머리가 부러져도 국보는 들이지 못하겠나이다.’ 하니, 대비가 ‘오늘 한 일을 내가 상세하게 알지 못하니 글을 써서 들이라.’ 하므로, 이귀가 김대덕(金大德)을 시켜 자초지종을 모두 쓰게 하고 또 임기응변으로 말하기를, ‘도원수 한준겸(韓浚謙)이 사방의 의병을 거느리고 와서 모일 것입니다.’ 하였다. 대비가 친히 안뜰에 서서 시녀를 시켜 말을 전하기를, ‘대장이 어찌 나를 의심하느냐? 나에게 친아들이나 있느냐? 국보를 재촉하여 거두는 것은 국체(國體)를 존중하기 위함이다.’ 하니 이귀가 ‘진실로 그러시다면 정전(正殿)에 납시어 임금을 책립하고 대신을 불러 국보를 전하는 것이 옳겠사온데, 하필 국보를 빨리 들이라 하시나이까?’ 하였다. 이렇듯 상하가 서로 고집만 피우고 있을 때, 인조가 박홍구(朴弘耈)에게 명하여 국보를 받들어 들이게 하고, 또 계자(啓字)도 들이게 하였다. 대비가 대신과 도승지에게 명하여 오랫동안 뜰아래 엎드려 있던 인조를 받들어 들어오게 하여, 비로소 책립하는 예를 행하였다.”

“대비가 전후의 어렵고 위태로웠던 사실을 역력히 진술하고, 또한 조종(祖宗) 이래 임금이 신하와 백성에게 행한 도리에 대해 말하였다. 이에 여러 신하가 모든 일이 겨를이 없다고 여러 번 청하고 인조도 또한 겸손함이 매우 간절하니, 대비가 천천히 옥새를 주면서 ‘잘하시오.’ 하였다.”

<연려실기술>의 기록들을 보면 인조반정을 처음부터 준비하고 결행하고 수습하는 과정에서 이귀의 민활함과 주도면밀함이 잘 드러난다. 게다가 아들과 딸들까지도 반정에 참가했다. 혁명가 이귀라고 해도 손색이 없다.

 

<참고문헌>

<연려실기술>, <한국민족문화대백과>

신성문무(神聖文武) 한 인조


신성문무(神聖文武) 한 인조

 

인조(1595-1649)는 조선의 제16대 왕(재위 1623~1649)이다.

자는 화백(和伯)이고, 호는 송창(松窓)이며 휘는 종(倧)이다. 선조의 손자이고 아버지는 정원군(定遠君:元宗으로 追尊)이고 어머니는 인헌왕후(仁獻王后)이다. 비는 한준겸(韓浚謙)의 딸 인열왕후(仁烈王后), 계비(繼妃)는 조창원(趙昌元)의 딸 장렬왕후(莊烈王后)이다.

인조는 조선의 제16대 왕이고 15대 왕은 광해군이다. 광해군의 뒤를 이어 왕위에 올랐지만 잘 알려진 것처럼 반정으로 왕위에 올랐다. 인조는 1623년 김류(金瑬)·김자점(金自點)·이귀(李貴)·이괄(李适) 등 서인(西人)의 반정(反正)으로 조선의 제16대 왕이 되었다.

반정으로 왕위에 오른 인조는 그 후에도 병란을 겪었다. 1624년 이괄이 반란을 일으켜 서울을 점령하자 일시 공주(公州)로 피난하였다가 도원수 장만(張晩)이 이를 격파한 뒤 환도하였다.

왕위에 오른 인조는 광해군 때의 중립정책을 지양하고 반금친명(反金親明) 정책을 표방하면서 1627년 후금의 침입을 받고 형제의 의(義)를 맺었다. 바로 정묘호란이다. 정묘호란 이후에도 인조는 친명적(親明的) 태도를 취하는데, 1636년 국호(國號)를 청(淸)으로 고친 태종이 이를 이유로 10만 대군으로 침입한다. 남한산성(南漢山城)에서 항전하다가 패하여 청군(淸軍)에 항복하고 군신(君臣)의 의를 맺는다. 소현세자(昭顯世子)와 봉림대군(鳳林大君)이 볼모로 잡혀가는 치욕을 당하였는데, 곧 병자호란이다.

임진왜란과 병자호란은 조선시대의 양대 전란이다. 임진왜란은 선조 때에 병자호란은 인조 때에 겪은 국난이다. 역대로 사가들이 선조를 높이 평가하지 않는 것처럼 인조 또한 평이 좋지 않다.

애초에 반정을 도모하던 세력들은 광해군을 대신할 왕을 누구로 할 것인지 상당히 고심했을 것이다. 봉건왕조에서 반정의 최종적인 성공은 반정 후에 추대된 왕에 달렸기 때문이다. 반정 세력을 옹호하면서도 국론을 한데로 모을 수 있는 적임자.

 

반정을 의논할 적에 반정으로 모실 왕을 논하는 이야기들이 <연려실기술>에 나온다.

“신경진(申景禛)이 승평군(昇平君, 김류)과 반정을 의논하면서 먼저 추대할 분을 정하려 할 때에 공이 인조대왕을 두고 말하기를, ‘신성문무(神聖文武)가 실로 천명을 받을 만한 인물이다.’ 하였다.”

“처음에 여러 사람이 의거(義擧)를 의논하면서 말하기를, ‘능양군(綾陽君, 인조)은 용의 걸음과 범의 걸음 같으며, 해와 달 같은 의표(儀表)가 있으니 신인(神人)의 주인이 됨직하다.’ 하였다.”

“신경진이 평소 김류와 서로 마음이 맞았는데, 하루는 조용히 글 배우기를 청하고는 바로 사략(史略)을 내어놓았다. ‘이윤(伊尹)이 태갑(太甲)을 내치다. [伊尹放太甲 ]’는 대목에 이르러서 책을 덮으며 탄식하기를, ‘신하로서 임금을 내쫓는 일이 옳은가?’ 하니, 김류가 말하기를, ‘태갑이 탕(湯)의 법도를 뒤엎었으니 내쫓는 것이 또한 옳지 않은가?’ 하였다. 경진이 말하기를, ‘요즈음은 어떠한가?’ 하니, 김류는 ‘옛날과 지금이 무엇이 다르냐?’ 하였다. 경진이 울며 말하기를, ‘천하에 어찌 어미 없는 나라가 있는가? 나는 나라가 망하게 되는 것을 그냥 앉아서 볼 수가 없다.’ 하니, 김류가 말하기를, ‘그것이 내 뜻이다.’ 하였다. 이내 묻기를, ‘마음 가는 데가 어디 있는가?’ 하니, 경진이 말하기를, ‘능양군(綾陽君, 인조)은 바로 선조의 친손인데 총명하고 무용(武勇)이 뛰어나니 하늘이 주신 바이다.’ 하여 마침내 의논이 결정되었다.”

 

이 기록들은 반정이 성공하여 왕위에 오른 주상 인조에 대한 평임을 감안하더라도 인조의 풍모를 가늠하는데 도움을 준다. 조선의 왕으로 추대될 만한 인물로서의 인조의 모습 말이다.

 

<연려실기술>에는 이외에도 인조의 풍모를 이해하는데 도움이 되는 기록들이 다수 나온다.

“임금은 성품이 매우 공손하고 검소하여 항상 사치를 경계하고 음악과 여색, 진기한 오락을 아예 가까이하지 않으면서 하교하기를, ‘사치와 화려함은 말류의 폐습이니, 이 어찌 다스려진 세상에서 숭상할 일이겠는가. 우리 조종 때부터 절약과 검소를 몸소 행하여 윗사람이 표본이 됨으로써 뭇백성이 감화되었으니, 순박한 풍속이 수백 년 동안 흘러 내려왔다. 그동안 나라의 운수가 불행하여 어지러운 조정의 군신들이 조종(祖宗)의 훌륭한 법과 아름다운 뜻을 저버리고 화려함을 숭상하여 의복과 거마와 궁실 등을 사치스럽게 하지 않음이 없으니 염치(廉恥)가 이로 인하여 무너져 없어지고 백성이 이로 인하여 도탄에 빠지게 되었다. 어찌 마음 아프지 않겠는가. 내가 외람되이 대업을 이어받아 밤낮으로 삼가고 두려워하여 먼저 이러한 풍습을 없애려고 생각하였으나, 물들어 더러워진 지 이미 오래이므로 갑자기 개혁하기가 어렵다. 그러나 예부터 백성을 바꾸어 다스리는 법은 없으며, 위에서 좋아하는 것은 아래서 반드시 더 좋아하는 것이다. 오늘날 사치한 풍습이 변하지 않는 것은 위에서 모범을 보이는 도리를 다하지 못하였기 때문에 그런 것이 아닌가. 무릇 우리 종실과 공, 경, 대부들은 모두 나의 뜻을 체득하여 혼인 잔치와 손님 대접하는 것이나 거마, 의복의 제도에 검소와 절약을 힘써서 나쁜 풍습을 크게 고쳐야 할 것이다.’ 하였다.”

 

인조가 검소한 덕이 있다는 설명은 선조가 검소한 덕이 있었다고 밝힌 <연려실기술> 선조 조목의 내용을 연상시킨다. 두 임금이 공히 존귀한 왕좌에 있었음에도 검약한 생활을 했다는 점은 대서특필할 만하다. 이는 두 임금이 천성으로 검약한 덕을 숭상한 바도 있었겠지만 국란을 겪은 후 산업과 물자가 궁핍한 시기를 보내면서 자연스레 더욱 검소한 덕을 실천했을 수도 있겠다.

“임금이 상벌을 삼가고 벼슬을 아꼈으며 찡그리고 웃는 것을 함부로 하지 않았다. 이형익(李馨益)과 박군(朴頵)은 의술로 사랑을 받았으나 박군은 육품(六品)에 지나지 않았고, 형익은 삼품산질(三品散秩)이었다. 매우 무겁고 말이 없어 가까이 모시는 궁녀도 임금의 말을 자주 듣지 못하였으며, 여러 신하는 임금의 뜻이 어떠한가를 측량하지 못하였고, 임금의 한 마디 칭찬과 꾸짖음이 곧 평생의 판정이 되었다. 궁중에서 쓰는 상(床)과 자리는 아예 붉은 칠을 하지 않았으니, 그 검소한 덕이 이와 같았다.”

“임금은 문장이 매우 뛰어났으나 아예 한 구의 시도 짓지 않았고, 비답하는 문자도 또한 내시(內侍)에게 베껴서 쓰게 하고, 손수 초(草)한 것은 물 항아리에 담가 찢어버렸으므로 종친과 왕자의 집에는 몇 줄의 필적도 없었다.”

 

인조가 말이 무겁고 감정 표현을 겉으로 잘 드러내지 않는 성격임을 알 수 있다. 심지어 자신의 필적도 남기지 않으려고 한 인조의 행위를 여러 측면에서 생각해 볼 수 있다. 천성으로 ‘신성문무(神聖文武)’ 하거나 ‘해와 달 같은 의표(儀表)’가 있기도 하겠지만 신하들이 임금의 뜻이 어떠한가를 측량하지 못하도록 하고, 몇 줄의 필적도 남기지 않으려는 데에는 반정으로 왕위에 오른 인조의 고심이 배여 있다고도 볼 수 있겠다.

“임금의 체모가 준엄하고 무거우며 덕량이 깊고 넓어 몸가짐 하나하나가 규범에 어긋나지 않았다. 보위에 있은 지 27년 동안에 효를 다하고 윤리를 돈독히 하며, 학문을 닦고 어진 이를 가까이 두며, 하늘을 공경하고 백성의 일에 마음과 힘을 다하며, 교화를 두텁게 하고 풍속을 바로잡으며, 궁중을 엄하게 다스리고 벼슬을 아끼며, 절약과 검소한 것을 숭상하고 간언을 용납하며, 형옥을 보살피고 나쁜 당파를 없애는 것이 한결같이 지성에서 나와 조금도 중단이 없었다.”

 

위의 글은 <연려실기술>에 인용된 인조 지문(誌文)의 일부이다. 이는 <연려실기술>의 저자 이긍익이 인조에 대한 총평이라고도 할 수 있다. 반정이라는 비정상적 수단을 통해 왕위에 오르기는 했지만 조선의 왕으로 국부의 체통을 가지고 있다는 평이다. 물론 위대한 업적을 이루지는 못했지만 말이다.

 

<참고문헌>

<연려실기술>, <한국민족문화대백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