혁명가 이귀


혁명가 이귀

 

이귀(李貴, 1557-1633)는 인조반정이 성공한 후에 김류(金瑬, 1571-1648), 김자점(金自點1588-1651) 등과 함께 계해정사(癸亥靖社) 1등 공신에 책봉된다. 본관은 연안(延安)이고 자는 옥여(玉汝), 호는 묵재(默齋)이다.

이귀는 젊어서 이이(李珥)와 성혼(成渾)의 문하에서 수학해 문명을 떨쳤으며, 1582년(선조 15) 생원이 되었다. 이듬 해 일부 문신들이 이이와 성혼을 공박, 모함해 처지를 위태롭게 만들자 여러 선비들과 함께 논변하는 글을 올려 스승을 구원하였다.

1592년 강릉참봉(康陵參奉)으로 있던 중 왜적의 침입으로 어가(御駕)가 서행(西幸)한다는 소식을 듣고, 제기를 땅에 묻고 능침에 곡읍한 후 물러 나와 의병을 모집해 황정욱(黃廷彧)의 진중으로 갔다가 다시 어가가 주재하는 평양으로 가서 죄를 청하고 방어 대책을 아뢰었다.

이어 이덕형(李德馨).이항복(李恒福) 등의 주청으로 삼도소모관(三道召募官)에 임명되어 군사를 모집, 이천으로 가서 세자를 도와 흩어진 민심을 수습하였다. 이듬 해 숙천 행재소로 가서 왕에게 회복 대책을 올려 후한 상을 받고, 다시 삼도선유관(三道宣諭官)에 임명되어 군사 모집과 명나라 군중으로의 군량 수송을 담당하였다.

그는 체찰사 유성룡(柳成龍)을 도와 각 읍으로 순회하며 군졸을 모집하고 양곡을 거두어 개성으로 운반해서 서울 수복전을 크게 도왔다. 그 뒤 장성현감·군기시판관(軍器寺判官)·김제군수를 역임하면서 난후 수습에 힘썼다.

1603년 정시 문과에 병과로 급제해 형조좌랑·안산군수·양재도찰방(良才道察訪)·배천군수 등을 차례로 지냈고, 1616년(광해군 8) 숙천부사로서, 해주목사에게 무고를 받고 수감된 최기(崔沂)를 만난 일로 탄핵을 받아 이천에 유배되었다. 1619년에 풀려나와 1622년 평산 부사가 되었으나 광해군의 난정을 개탄하고, 김류(金瑬)·신경진(申景禛)·최명길(崔鳴吉)·김자점(金自點) 및 두 아들 시백(時白)·시방(時昉) 등과 함께 반정 의거를 준비하였다.

<연려실기술>의 기록을 보면 이귀가 반정을 도모하는데, 아들 시백의 응원이 큰 힘이 되었다고 한다.

“이귀(李貴)가 귀양 가 있을 때 이상한 돌을 한 개 얻었는데, 이름을 용암(龍巖)이라고 하고 거기에 한 수의 절구를 쓰기를,

슬프다 용이여 덕이 어찌 쇠하였는가 / 吁嗟龍兮德倚衰
물결 복판에 길게 누웠으니 세상이 모르는구나 / 長臥波心世不知
융중에 있는 제갈공명을 비웃지 말라 / 莫笑隆中諸葛老
은근히 세 번 찾음이 어찌 때가 없으랴 / 殷勤三顧豈無時

하였다.

이귀의 아들 시백(時白)이 화답하기를,

당년에 한 나라의 국운이 쇠함이 부끄럽고 한이 되어 / 愧恨當年漢業衰
돌로 변하여 알려지기를 구하지 않았구나 / 變形爲石不求知
깊은 못에서 자주 고개를 돌리며 / 深潭入處頻回首
부질없이 융중 꿈이 깰 때를 생각하도다 / 空憶隆中夢覺時

하니 이귀가 기뻐하며 그 아들의 손을 잡고 말하기를, ‘부자지기(父子知己 부자간에 서로 알아준다는 말)라 하겠다.’ 하고는 드디어 비밀스러운 의논을 정하였다.”

 

이귀는 아들만이 아니라 그의 딸도 반정을 도모하는데 중요한 역할을 한 것으로 보인다.

“이보다 먼저 이귀의 딸이 김자점의 동생 자겸(自兼)의 아내였는데, 일찍이 과부가 된 후에 정조를 잃고 절간으로 떠돌아다니며 아미타불을 섬겼는데, 앞 설에는 자겸이 젊어서 불법을 좋아하여 죽을 때에 아내에게 권하여 말하기를, ‘삼가 불도를 닦으라.’고 하였기 때문에 이씨가 마침내 머리를 깎고 중이 되어 산에 들어가서 숨어 살았다고 한다. 간음한 일이 발각되어 잡히어 심문을 당하게 되니 궁중에 들어가기를 원하므로 광해가 허락하였다. 일설에서 광해가 풀어주고 성중(城中) 자수궁(慈壽宮)에 있게 하였는데 이씨가 이것이 인연이 되어 궁중에 출입하니 대궐 안 사람들이 모두 생불(生佛)이라 일컬어 신봉함이 비할 데가 없었다 한다. 궁중에 들어가게 되어서는 김상궁과 사귀어 모녀 간을 맺게 되었다. 항상 말하기를, ‘아버지 이귀와 시숙 김자점의 충성을 불행하게도 대북(大北)이 질시하여 항상 모해를 받는다……’ 하였다. 나날이 억울한 것을 호소하고 또 김자점을 후원하여 뇌물을 쓰는데 부족하면 김상궁에게서 꾸어서 다른 궁인에게 주고 또 다른 궁인에게 꾸어서 상궁에게 바치니, 이렇게 돌린 것이 수천 냥이므로 모든 궁인들이 기뻐하여 모두 김자점을 성지(成之)라 자를 부르며 의심하지 않았다. 이렇게 되니 광해가 유상(惟翔) 등이 아뢰는 말을 듣고 매양 잡아 신문하고 싶어도, 상궁과 개똥이[介屎] 등이 말하기를, ‘성지는 지극히 충성스러운 사람이며, 더구나 한미한 선비에 불과한데 무슨 권력이 있어서 다른 모의를 할 것입니까.’ 하니 광해가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이귀는 반정의 주역인 김류, 김자점보다 연장자다. <연려실기술>의 기록에 보면 이귀가 반정 주역의 연장자로서 오랫동안 일을 도모했음을 알 수 있다. 반정의 대장으로 추대된 김류도 이귀가 포섭한 것으로 기록하고 있다.

“이귀가 이름 있는 선비인 김자점ㆍ심기원과 무장(武將) 신경진ㆍ구굉 등과 함께 김여물(金汝岉)의 아들 김류와 협의하였다. 김여물의 아들 김류가 시의(時宜)에 부합하지 못한 채 중한 명망이 있었으니, 이때에 동지중추부사로 있으면서 세상에 쓰이지 못하였다. 경진의 아버지 신립(申砬)과 김류의 아버지 여물(汝岉)이 임진왜란 때에 충주에서 함께 전사한 인연으로 평소 정의가 두터웠으므로 경진을 시켜 뜻을 통하게 하였더니 김류가 이를 허락하였다.”

또한 신립 장군의 아들로 인정반정의 중핵 중 한 명인 신경진도 역시 이귀를 통해 반정에 참여한 것으로 보인다.

“이귀가 당시 일에 강개하여 반정할 뜻을 오래 전부터 지니고 있으면서도 일으키지는 못하였다. 전에 함흥 판관(咸興判官)이 되었을 때 신경진(申景禛)은 북우후(北虞候)로 있었는데, 이귀는 신경진이 함께 일을 할 만한 사람인 줄 알고 마음으로 서로 깊이 결탁하였다. 이귀가 체직되어 돌아온 후 신유년 4월에 아내의 상사를 당하자 신경진이 와서 위로하였는데 당시 상황에 말이 미치자, ‘지금 세상이 어찌 사대부가 벼슬할 때인가?’ 하였다. 이귀가 희롱삼아 답하기를, ‘이때는 태평성대라 할 만한데 그대는 어찌 이런 말을 하는가? 내가 고변(즉 고발)을 할 것이다.’ 하였더니, 경진이 “내가 먼저 고변할 것이니 어쩔 것인가?” 하여 이귀가 그 뜻을 추측하고 드디어 의논을 정하였다.”

혁명가 이귀가 반정을 도모하면서 많은 사람을 끌어들일 수 있었던 데에는 광해군의 폐정을 반대한 여론의 동향이 중요한 지렛대가 되기는 했겠지만 이귀에 대한 신망이 상당한 영향을 미쳤을 것이다.

“그때 훈련대장 이흥립(李興立)은 조정 안에서 중한 명망을 가지고 있었으므로 여러 사람이 걱정하여 그 사위 장신(張紳)을 시켜 설득하게 하였더니, 이흥립이 말하기를, ‘이귀도 함께 공모하였는가?’ 하므로 장신이 그렇다고 하니 이흥립이 말하기를, ‘그러면 이 의거는 반드시 성공할 것이다.’ 하고 드디어 허락하였다. 장유(張維, 장신의 형)가 이귀에게 회답하여 알리니 이귀가 크게 기뻐하여 일어나 절하며 사례하였다. 드디어 흥립을 시켜 손수 글을 써서 장단(長湍)에 보내어 군사를 일으키기로 약속하고 흥립이 안에서 호응하기로 하였다.”

혁명은 그 시작이 승패의 중요한 갈림이 되는데, 이귀가 거사 초기에 반정을 성공시키는데 중요한 역할을 한 내용들이 <연려실기술>에 기록되어 있다. 이흥립의 예언이 틀리지 않았다.

“이날 인조가 특명으로 이귀를 호위대장에, 신경진을 부장에, 김자점ㆍ심기원ㆍ심명세ㆍ송영망(宋英望) 등을 종사관에 임명하였다. 이서ㆍ이괄ㆍ이흥립 등도 모두 여기에 소속시켜 이들에게 절제를 받지 않는 자는 먼저 베고 뒤에 알리게 하였다. 모든 일이 새로 시작되어 육조와 모든 관아에 인원이 미처 배치되지 않았으므로 설치와 시행이 모두 이귀에게서 나왔다.”

반정을 일으키고 그 빠른 수습을 이귀가 했다고 한다. 이 와중에서 왕가의 최고 어른인 대비의 윤허를 받아야 혁명은 마침표를 찍을 수 있다. 역시 이귀의 활약이 돋보인다.

“이날 이귀가 명을 받들어 도승지 이덕형과 함께 의물(儀物)을 갖추어 대비를 모시고 가려 하였으나 대비가 허락하지 않았다. 이귀가 그 아들 시백(時白)을 시켜 인조에게 아뢰어 인조가 곧 서궁으로 가서 문안드리니, 대비가 드디어 임금으로 책립하자는 명을 내렸다.”

“이때 인조가 또 이정귀(李廷龜)를 보내니, 대비가 분판(紛板)에 글을 써서 내보이기를, ‘좋은 대궐에 앉아서 스스로 하면 안 될 것이 무엇이 있기에 꼭 나를 청하는가?’ 하였다. 인조는 대비가 끝내 마음 돌릴 뜻이 없음을 알고 해가 저물 즈음, 수레를 갖추고 친히 서궁에 나아가는데 폐주(광해군)를 여(輿)에 태워서 뒤따르게 하였다. 그래도 대비의 노여움이 풀리지 않으므로 인조가 땅에 엎드려 대죄하니, 밤이 이미 깊었다. 대비가 또한 전국보(傳國寶 옥새)를 들이라고 재촉하므로 이귀가 대답하기를, ‘대비께서는 전국보를 받아서 장차 무엇에 쓰시렵니까. 신의 머리가 부러져도 국보는 들이지 못하겠나이다.’ 하니, 대비가 ‘오늘 한 일을 내가 상세하게 알지 못하니 글을 써서 들이라.’ 하므로, 이귀가 김대덕(金大德)을 시켜 자초지종을 모두 쓰게 하고 또 임기응변으로 말하기를, ‘도원수 한준겸(韓浚謙)이 사방의 의병을 거느리고 와서 모일 것입니다.’ 하였다. 대비가 친히 안뜰에 서서 시녀를 시켜 말을 전하기를, ‘대장이 어찌 나를 의심하느냐? 나에게 친아들이나 있느냐? 국보를 재촉하여 거두는 것은 국체(國體)를 존중하기 위함이다.’ 하니 이귀가 ‘진실로 그러시다면 정전(正殿)에 납시어 임금을 책립하고 대신을 불러 국보를 전하는 것이 옳겠사온데, 하필 국보를 빨리 들이라 하시나이까?’ 하였다. 이렇듯 상하가 서로 고집만 피우고 있을 때, 인조가 박홍구(朴弘耈)에게 명하여 국보를 받들어 들이게 하고, 또 계자(啓字)도 들이게 하였다. 대비가 대신과 도승지에게 명하여 오랫동안 뜰아래 엎드려 있던 인조를 받들어 들어오게 하여, 비로소 책립하는 예를 행하였다.”

“대비가 전후의 어렵고 위태로웠던 사실을 역력히 진술하고, 또한 조종(祖宗) 이래 임금이 신하와 백성에게 행한 도리에 대해 말하였다. 이에 여러 신하가 모든 일이 겨를이 없다고 여러 번 청하고 인조도 또한 겸손함이 매우 간절하니, 대비가 천천히 옥새를 주면서 ‘잘하시오.’ 하였다.”

<연려실기술>의 기록들을 보면 인조반정을 처음부터 준비하고 결행하고 수습하는 과정에서 이귀의 민활함과 주도면밀함이 잘 드러난다. 게다가 아들과 딸들까지도 반정에 참가했다. 혁명가 이귀라고 해도 손색이 없다.

 

<참고문헌>

<연려실기술>, <한국민족문화대백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