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송문흠(宋文欽, 1710-1752)


문흠(宋文欽, 1710-1752)                                 PDF Download

 

국 18현의 한 명인 동춘당 송준길(宋浚吉)의 4세손으로, 형 송명흠(宋明欽)과 더불어 당시 송씨 문중의 쌍벽으로 불리웠다.   자는사행(士行), 호는한정당 (閒靜堂)이다.  형과 마찬가지로 이재의 문하에서 학문을 닦았는데, 이재는김창협의 학통을 이은 수제자로서 노론 내 낙론학맥을 계승 발전시켰으며, 영조치  세연간노론벽파의중심인물로활동한문신이다.

조부는 의금부도사(義禁府都事)를 역임한 송병원(宋炳遠)이고, 부친은 송요좌(宋堯佐)이다.   생조는원래 상주목사(尙州牧使)를 지낸 송병익(宋炳翼)인데,  금산 군수(錦山郡守)를 지낸 묵옹 송병원(宋炳遠)에게 출계하였다. 모친은 파평 윤씨(坡平尹氏)로 호조정랑(戶曹正郞)을 지낸 윤부(尹扶)의 딸이다.   2남2녀중 둘째로 태어났다.

1733년(영조9) 계축식년사마시(癸丑式年司馬試)에 진사2등으로합격하였으나,  관직보다 학문에 더 뜻을 두어, 형 송명흠과 함께 회덕(懷德)의 비래암(飛來庵)에 뜻 있은 선비들을 모아<대학(大學)>을 강론하기도 하였다.  특별히예학(禮學)에 조예가 깊었다고 한다.
후에 장릉참봉(長陵參奉)에 보임되었으나 나가지 않았고,  그뒤 익위사시직(翊 衛司侍直)에 임명되었을 때 조태구(趙泰耉)의 아들 조현빈(趙顯彬)이 마침 세마(洗馬)가 되었으므로 더불어 동료가 될 수 없다고 하여 자리를 버리고 떠났다.

왜냐하면 조태구는 소론의 영수로서 경종치세 때 일어난 신임옥사에서 노론 4대신 주살을 주도하였기 때문이다.  얼마 후에 다시 익위사부수(翊衛司副率)이 되었으나조현빈이 그 자리에 계속 있자 역시 관직을 버리고 떠난다.

1743년(영조19) 목곡(牧谷) 이기진(李箕鎭)이 전랑(銓郞)이 되어 맨 먼저 그를 동몽교관(童蒙敎官)에 발탁하여 일 년여 동안 재직하게 하였으나, 가르칠 어린아이들이 없어 곧 벼슬을 사양하였다.  1747년(영조23) 종부시주부(宗簿侍注簿)에 올랐다가형조좌랑(刑曹佐郞)이 되었으며,  다시 문의현령(文義縣令)이 되었다.

1552년(영조28) 12월 15일, 향년43세의나이로갑자기사망하였다.
송문흠은 예서를 잘 써는데, 특히 이인상(李麟祥)과 의예술적 교분이도타웠다.  이인상은 3대에 걸쳐 대제학을 낳은 명문 출신으로 1735년(영조11) 진사에 급제하였지만 증조부 이민계(李敏啓)가 서자였기때문에 본과에 이르지는못하였다.  그는 서출이었지만 명문 출신답게 시문과 학식이 뛰어나 당시 문사들의 존경을 받았고 후대의 문인과 서화가들에게 지대한 영향을 끼쳤다.  당시에 그의 전서체에 대하여기(奇)하다고 하고 혹은 허(虛)하다고도 하였는데, 김정희(金正
喜)는 그문자향을 높이 평가하면서

“전각은 200년 이래로 따를 자가없다.”고 상찬하였다.

이런점에서 형인 송명흠이 유학하는 선비에 가깝다면 송문흠은 그예술적 역량이 출중했음을 추측할 수 있다.  이는그가 남긴 ‘한정당기’에서도 일단을 엿볼 수  있다.  <한정당집>은 양이 많지 않은데,  조카인송시연의 발문에 의하자면 상당량의 글이 유실되었을 것이다.
그가 당호를 한정당이라고 지은 것은 도연명에게서 따온 것이다.  그는‘한정당기’에서도 연명의 일생을 “민면사세우애한정(?勉辭世 偶愛閒靜)” 8자로 요약하였는바,  그뜻은‘세상에 매이지 않고자 몸부림치고, 한정한 삶을 사랑하네’라는 데에서 따온 것이다. 세상 사람들이 부귀공명을 얻기위해 서로 다투고 서로 자랑하는 것이 당연한 것이지만 나는 이를 좇지 않고도 연명이 그랬듯이 세상에 나아가 나를 드러내고 명예와 부귀를 얻고 세상에 큰 이름을 드리우는데 온 정신을 두기보다는 유유자적하며 천성을 다하는 인생을 살겠다.  그리하여 한정당 이라고 자호한 것이다.

송문흠을 후대에 서예가이자 문장가라고도 평하는 데는 아마 이와 같은그의 성정이 작용했을 것이다.
문집으로는 8권 4책의 『한정당집(閒靜堂集)』이 전한다.

송명흠(宋明欽, 1705-1768


송명흠(宋明欽, 1705-1768)                                 PDF Download

 

국 18현의 한 명인 송준길(宋浚吉)의 현손으로, 동생 송문흠(宋文欽)과 더불어 당시 송씨 문중의 쌍벽으로 불리웠다. 자는 회가요, 호는 역천(?泉)이며, 시호는 문원(文元)이다. 이재의 문하에서 학문을 닦았는데, 이재는 김창협의 학통을 이은 수제자 로서 노론 내 낙론학맥을 계승 발전시켰으며, 영조 치세 연간 노론 벽파의 중심인물로 활동한 문신이다.

동문수학한 미호 김원행과는 막역한 강학지우로 유명하다. 혈족 관계로 보면, 김원행의 생모가 송명흠의 조부인 송병원의 딸이기 때문에 송문흠은 김원행의 외가쪽 사촌 동생뻘이다. 대과에 응시하지는 않았고, 뒤에 학행으로 추천를 받아 청도도사·지평·장령 등이 제수되었으나 나아가지 않았다.

1754년(영조 30) 특별히 서연관(書筵官)을 제수하여 별유(別諭)를 내리기까지 하였으나 글을 올려 사양하였다. 1755년 옥과현감(玉果縣監)이 되었으나 모친상을 당하여 사직하였다. 삼년상을 마친 뒤, 집의·승지·참의 등의 벼슬이 주어졌으나 역시 글을 올려 거절하였다. 만년에 정국이 다소 안정되면서, 1764년 부호군에 임명되고 찬선(贊善)으로 경연관이 되어 정치문제를 논의하는 가운데 영조의 비위에 거슬리는 발언을 하여 파직되었다.

<국역 영조실록>에 따르면, 송명흠은 1763년(영조39) 3월 5일의 상소에서 비유한‘적불(赤?)’이란 말로 영조의 노여움을 샀는데, 이에 대해 계속해서 초선(抄選)들의 상소가 잇따르자 1764년 5월 17일의 기사에서 영조는 “송명흠의 적불이란 말도 역시 산야(山野)의 당론”이라고 단정 지었다. 이후 박세채의 문묘 종향 문제로 당론이 이어 지자 11월 28일에는 신경(申暻)ㆍ송명흠ㆍ홍계능(洪啓能)ㆍ김양행(金亮行)을 모두 초선에서 빼라고 명하면서 당습(黨習)은 망국의 단서인데 그 원인은 산림의 선비에게서 말미암았다고 글을 지어 유시하였다.
그리고 11월 30일에 송명흠, 김양행, 홍계능을 서인으로 만들었다.

적불(赤?)은 붉은 무릎 가리개로, 대부(大夫)이상의 관원은 적불을 착용하고 초헌을 탔는데, <시경(詩經)> 조풍(曹風) 후인장(候人章)에 조(曹)나라 군주가 군자(君子)를 멀리하고 소인을 가까이하였으므로, 대부가 5인인 제후(諸侯)의 제도를 무시한 채 그 복색(服色)을 한 자가 수백 명이었으며 어진 이는 도(道)를 지키느라고 도리어 빈천(貧賤)하게 되었다는 뜻으로 소인들이 조정에 가득한 것을 풍자한 말이다. 송명흠이 올린 상소에

“근습(近習)에 정(情)을 두거나 인척(姻戚)을 사사로이 좋아한다면 장차 덕망 있는 이를 임명하는 관작이 모두 사인(私人)에게 돌아가는 것을 볼 것이니, 사신이 비평한 바에 ‘저 소인들은 적불(赤?)을 한 자가 수백 명인 어리고 예쁜 소녀들이야 굶주리는 수밖에’라고 한 것이 될 것입니다. 이로 미루어 나간다면 온갖 일이 그러할 것입니다.”라고 하면서 적불 두 글자를 쓰고 있다. 이 소에 대해 영조가 “내 비록 덕이 없지마는 어찌 조후(曹侯)와 같은 데 이르렀겠느냐?”

라고 역정을 내며, 대신·승지·옥당을 불러 각각 소견을 진달하라 명하였는데, 영의정 신만(申晩)은 임금이 진정하기를 청하고, 좌의정 홍봉한(洪鳳漢)은 말하기를, “이것은 문장을 끊어서 뜻을 취할 것이니, 반드시 무심코 인용했을 것입니다.”라고 하여 변론을 하였고, 승지와 여러 옥당이 대답한 것도 모두 대신의 말과 같았기 때문에 임금의 뜻이 조금 풀려 이에 비답을 내리기는 했지만 그 사지(辭旨)가 몹시 엄중하였다고 기록에 전한다.

애초에 영조가 송명흠을 불러들일 적 기사가 <영조실록>에 실려 있는데, 군신 간에 이와 같은 대화를 나누고 있다. 송명흠이

“격물(格物)·치지(致知)의 공부가 극진하지 못하면 좋아하고 싫어하는 마음이 공정하지 못하게 됩니다. 그러나 임금의 덕을 광구(匡救)하는 자는 충(忠)이고 임금의 잘못에 아부하고 순종하는 자는 충이 아니니, 이것을 미루어 나가면 좋아하고 싫어함이 저절로 공정해질 것입니다. 무릇 진언(進言)에 대해서는 말이 쓸 만하면 쓰고 쓸 수 없으면 쓰지 않을 뿐입니다. 어찌 갑작스레 벌을 가할 수 있겠습니까?”

라고 말하였다.
이에 임금이 회답하기를,

“천천히 강구(講究)해야 할 것이니 모름지기 말을 쓰지 않았다 하여 떠나지 말라. 내가 경연관(經筵官)을 얻은 것이 마치 밝은 촛불을 얻은 것과 같으니, 모름지기 상세히 문의(文義)를 진달하라.”

실상 앞의 상소문에서 직언을 펼칠 수 있었던 것은 이와 같은 군신간의 후은의 정이 있었기 때문이기도 하려니와, 그 직언의 내용은 주자가 효종에게 올린 <무신봉사>의 격물치지의 학문에서 한 치도 벗어나지 않는 것이다.

처음에 군신간의 후은의 정 이 도타울 때에도 ‘격물치지’를 말하고 상소문에서도 마음을 비우고 ‘격물치지’의 학문에 힘쓸 것을 당부한 내용으로 전후가 수미일관하다. 그러하기에 상소문에 대한 평에서 사관들이 이렇게 적고 있다.

“송명흠은 선정신 문정공(文正公) 송준길(宋浚吉)의 현손(玄孫)으로서 일찍이 가정의 학문을 이어받았으며 글을 읽고 몸을 닦아 사림(士林)이 추앙하는 바가 되었다. 정초(旌招)를 누차 내렸으니 뜻을 지키고 나오지 않더니, 은례(恩禮)가 갈수록 융성해지자 감격하여 조정에 나왔다. 전석(前席)에 출입하면서 애연히(?然)히 서로 믿음이 있었는데, 마침내 처음 의 예우(禮遇)를 계속하지 않기에 이르자 진소(陳疏)하고 지레 돌아감으로써 그 쓰임을 다할 수 없게 되었으니, 사론(士論)이 매우 애석하게 여겼다.”

저서에 《역천집》이 있다.

박성원(朴聖源, 1697-1757)


박성원(朴聖源, 1697-1757)                                  PDF Download

 

성원(朴聖源, 1697-1757)은 조선중기에 활동했던 문신이자 유학자로 이재(李縡)에게서 성리학을 배웠다.  낙론(洛論)을 지지하는 학자로 예서(禮書)에도 밝았다.
영조20년,  1744년에 그는 모두 11조목에 이르는 내용의 간언을 하였다.  당시 영조는 탕평책을 추진하고 있었는데 그러한 정책과도 맞물려 그의 간언은 조정을 뒤흔들고, 영조를 분노케 하였다.  하지만 그의 지적은 매우 구체적이었고, 치밀하였기때문에 사관도 그의 간언을 인정하였고, 영조도 결국 그를 조정에 다시 불러 세손 정조의 교육을 맡게하 였다.

1697년( 1세, 숙종23년)에 태어났다.  본관은 밀양(密陽), 자는 사수(士洙),호는 겸재(謙齋)·광암(廣巖)이다. 부친은 박진석(朴震錫)으로관직이 없었다.  김창협의 제자인 이재(李縡, 1680-1746)의 문하에서 학문을 배웠다.  박성원의 집안은 한미한 집안이었기 때문에 그는 ‘어디서 왔는지도 모르는 박성원’( ⌈영조실록 ⌋15년10월) 혹은 ‘세력이 없는 사람’( ⌈영조실록 ⌋20년 9월) 등으로 알려졌다.

1721년(25세, 경종1년) 생원시에 합격하였다.  1726년경 부터 이재(李縡)에게서 배우고,  서인과 노론의 중심 인물로 성장하였다.

1728년(32세,영조4년) 별시문과의 을과에 급제하였다.  사간원정자(司諫院正字)·사헌부감찰(司憲府監察) 등에 임명되어 언관으로 활동하였다. 영조가 펼친  탕평 정책에 대해서는 매 우비판적이었다.

1744년(48세,영조20년) 지평(持平)으로 있을 때 영조가 기로소(耆老所)에 들어가는 것을 반대했다.  당시 연로한 고위 문관들의 친목 및 예우를 위해 설치한 관서이다.  나이가 70이 되면 기(耆),  80이 되면 노(老)라고 하였다.  이곳에 이름을 올리는 것 은신하들도 영광으로 알았고 임금들 조차도 영광으로 알았다.  박성원은 반대 이유를 이렇게 들었다.

“임금이 기로소(耆老所)에 이름을 올리는 것은 태조 때에 시작되었고,숙종께서 계승하였습니다.  오늘날 마땅히따 라야 할 것은 태조와 숙종께서 시행하였던 규범이지 않겠습니까?  그런데 금년에 망륙(望六, 51세)이 되시 는전하를 기로소에 들도록 종신(宗臣)들이 상소를 한 것은 무슨 까닭입니까?  앞선 임금님들께서 향년이 56~7세가 되어도 신하들이 청하였다는 말을 듣지 못했으니 , 그 당시의 신하들이 임금을 사랑하는 마음이 지금의 종신에 미치지 못해서 그러하였겠습니까?  진실로 조종의 고사는 정해진 시기가 있었기 때문입니다. 숙종께서 기해년(1719년, 59세)에 거행하였던 것은 근거할 만 한 사유가 있었지만 지금 이를 근거로 기로소에 들고자 하는 것은 옳은 일인지 알지 못하겠습니다.”

박성원은 이어서 이렇게 호소하였다.

“아!  앞선 조상들께서 남몰래 도와주고 수많은 영혼들께서 함께 보호하여 성상(임금님)의 수령(壽齡)이 1백세까지 살 것을 기대하는데,  몇 년 동안을 기다리는 것이 무슨 어려움이 있기에 반드시 이처럼 급급하게 하십니까? (중략)
청컨대 우선 기로소에 이름을 올리자는 명령을 중지하도록 하소서.”

아직 50세를 갓 넘은 영조 임금이 몇 년을 못참아 기로소에 이름을 올리는 것은 아니 될 일이라는 주장이었다.  박성원의 주장은 기로소 건뿐만 아니라 모두 11조목에 이르는 것이었다.  그중에는 사관의 임용에 관한 일, 경연관을 잘못 선택한 일, 경연에 참석할 자격도 없는 자를 뽑았는데 임금이 학문이 훌륭한 자라고 오해한 일,  관리들이 부정을 저지른 일, 외직에 있는 대신들이 집을 짓지 못하게 하명을 하였는데 거의 모든 대신들이 집을 지은 일에 대해 처벌해야 한다는 것 등이었다.
박성원은 한건한건 구체적인 실명과 사례를 들어 근거를 제시하였다.
이러한 문건을 접한 영조는 자신이 몹시 부끄러웠는지 노발 대발 하면서

“이것은 반드시 우리 조정의 훌륭한 관리들을 모두 쫓아내려고 하는 계책이다.”

라고 하였다 .이윽고 박성원을 불러서, 크게 화를내면서 이렇게 말했다.

“전국 시대 사람들은 초(楚)나라가 아니면 조(趙)나라로 갔었는데,  한쪽 구석에 있는 조선은 남쪽 오랑캐 사는 곳이나 북쪽 오랑캐 사는 곳 이외에는 갈 만한 데가 없다.  너는 무슨 심보로 그런 맹랑한 글을 올렸는가?  내가 기미(機微)를 알아 차리고서 일찍이 물러났던들,  어찌 너에게 이처럼 곤욕을 당하였겠는가?  조정의 신하라면 혹시 자격도 없는데 기로소에 이름을 올리려고 하는 자가 있다면 그것을 반박하더라도 상관없다.  하지만 어찌 네가 감히 임금이 기로소에 들어가는 것을 반박하는가?”

영조는 결국 박성원에게 무슨 배짱으로 너는 임금을 모독하는가 라고 물었던 것이다.  조선에서 임금을 모독하고 도망 갈 곳은 아무데도 없다.  중국의 전국시대와는다르다는 것은 전국시대 사람들은 사방으로 도망갈 곳이 많았다는 것이다.  영조는 박성원을 죽여 버리고 싶은 생각까지 들었을 것이다.  그러한 간언을 하는 박성원으로서는 물론 죽을 각오를 하고 올린 것이었다.  모든 건의에 대한 자료도 철저히 조사 하여 매우 구체적인 물증까지 제시하였다.  그만큼 구체적이고 치밀했기 때문에 영조의 분노는 더욱 컸다.  20여년간 자신이 해온  정치,  자신이 세워 온 성군으로서의 권위가 무너지고,  그 동안 중요하게 추진해온  탕평책 역시 박성원의 한마디로 무위로 돌아갈 수  있었기때문이다.

영조는 박성원이 올린 상소문을 하나하나 들추어 몹시 꾸짖었다.  박성원은 자신이 생각하고 있던 것을 다시 상세히 말씀드리겠다고 청했으나 영조는 듣고 싶지 않았다.  곧바로 그의 관직을 박탈하고 그 자리를 다른 사람으로 임명하라 고명했다.  이에 승지 남태량(南泰良) 이이렇게 말했다.

“신의 팔뚝이 끊어지더라도 그와 같은 명령을 신은 감히 쓸 수가없습니다.”

영조는 그 자리에서 곧바로 남태량의 관직을 박탈하였다.  그리고 바로 승정원에 비망기(備忘記, 임금의 명령을 적은 기록)를 내렸다.  하지만 승지 정필녕(鄭必寧)과 이창의(李昌誼)가 그것을 반포하지 않고,  임금을 직접 만나 말씀을 듣겠다는 요청을 하였다.  영조는 그것을 허락하지 않고 승지 두 사람도 바로 관직을 박탈하고 다른 사람들을 새로 그 자리에 임명하였다.
상황이 이렇게 되자,  병을 구실로 오래도록 취임하지 않았던 좌의정 송인명(宋寅明)이 궁궐로 들어왔다.  그는 임금이 비상(非常)한 명령을 내렸다는 소문을 듣고서 들어온 것이다.  그는 여러 재신(宰臣)들과 3사(三司)의 관리들을 거느리고 함께 잇따라 임금에게 알현을 요청하였다.  영조는 그들의 계속되는 알현 요청에 밤 2시경에야 비로소 그것을 허락하였다.
송인명의 무리와 함께 영의정 김재로(金在魯)와 우의정 조현명(趙顯命)도 또 뒤따라 들어왔다.  여러신 하들이 모두 임금이 내린 명령을 취소하기를 호소했다.  이에 영조는 이렇게 말했다.

“나는 본래 성색(聲色)의 좋음을 빨리 취득할 생각이 없었다.  단지 노인(老人)의 이름을 얻고자 하는 데에 지나지 아니하였다.  그런데(박성원의 간언을 들으니) 경들은 아첨하여 내 마음을 즐겁게 하는 신하가 되었고 나는 아첨을 좋아하는 임금이 되었다.  이것은 내가 매우 한스럽게 여기는 바이다.  지금 다시 그 마음을 바꿀 생각은 없다.”

좌의정 송인명이 이렇게 말했다.

“3백 년의 종사(宗社, 나라)와  대신(臺臣, 간언을하는신하) 한 사람을 비교할 때 그 경중이 어떠하겠습니까?  전하께서 천승지국(千乘之國,  제후의 나라.  만승지국은 천자의 나라임)의 위엄으로 박성원 한 사람을 다스리는 데에 무슨 곤란이 있기에 이와 같이 과격한 행동을하십니까?”

예조판서 이종성(李宗城)이 이렇게 말했다.

“이번일은 앞으로 나가기만 하고 뒤로 물러남이 없는데,  만약 전하께서 끝내 마음을 돌이켜서 저희들의 말을 들어줄 수가 없다면 장차 궁문 앞에서 절규(絶叫)하는 일이 일어나서 동조(東朝,  태후가 집무하던 곳 .숙종의 둘째 부인 인원왕후仁元王后)를 놀라시게 할까 두렵습니다.”

영조는 이 말을 듣고 다소 누그러져 이렇게 말했다.

“예조판서의 말을 들으니,  능히 마음을  움직이지 아니할 수가 없다.  이번의 명령은 도로 거두겠으나 마음은 거둘 수가 없다.”

이에,  좌의정 송인명이 박성원을 유배하여 추방할 것을 청하였다. 영조는 박성원을 섬에 유배시키고,  앞서 명령한 관리들의 관직 박탈은 그대로 시행하라고 하였다.  그리고 이렇게 말했다.

“이번에 고위 관료들의 가슴  속에 가득찬 당심(黨心)과 종이에 널리 퍼져 있는 사사로운  뜻은 내가 명령하기를 기다리지 아니하더라도 여러 사람들이 다 아는 바이다.  그중 에서 조명겸·서명형·이명곤은 사람들이 욕하는 암담한 죄과를 그대로 둘 수가 없으니, 모두 해당 관부로 하여금 이들을 처리하게 하라.”

조명겸, 서명형, 이명곤은 박성원이 문제있는 인물들로 지적한 관리들이었다.  이러한 상황을 일거수 일투족 옆에서 지켜보면서 기록하고 있던 사관은 다음과 같은 문장으로 역사적인 기록을 마무리하였다.

“사신은 말한다. ‘박성원은 임금과 소원한 신하로서 감히 말하는바가 거리낌이 없었다.  비록 그 마음이 과연 공의(公議)에서 나온 것인지는 알지 못하겠으나 그 기백은 숭상할 만하고,  그 말도 또한 취할 만한 것이 많았다.  특히 한 마디 말이 임금의 뜻을 거스렸기 때문에 그 몸은 귀양 가고 그 말은 쓰여지지 못하였으니,  애석한 마음을 이길 수가 없다.  아!  이 세상을 돌아 보건대,  당파가 없는 사람을 어찌 얻을 수가 있겠는가?  다만 그 말의 시비(是非)를 보아서 취하고 버리는 것이 옳을 터인데,  어찌 당인(黨人)이라고 지목하여 그 말을 다 버릴 수가 있겠는가? (박성원이 문제가 있다고 지적한) 조명겸의 무리는 하나같이 의금부에 나아갔으나,  곧 모두 죄가 없다고 밝혀졌다.  그러나 박성원이 논한 바가 또 어찌 다 허망한 말이겠는가?”

박성원은 남해에 ‘위리안치(圍籬安置)’의 유배형을 받았다. ‘위리안치’는 중죄인에 대한 처벌로 유배지에서 벗어나지 못하게 집 둘레에 가시가 많은 탱자나무를 돌려 막 는형벌이었다.  유배형 중에서도 특별히 엄한 형벌이었다.
박성원은 유배지로 떠날 때부터 남해에 도착하여 생활하면서 느낀 심정을 날짜별로 시를 지어 기록하였다. ⌈남천록(南遷錄) ⌋이 그 기록이다.   그가 유배간 남해는 대나무가 특히 많았다.  가운데는 대나무를 노래한 시가 많았다.
박성원이 대나무에게 물었다.

겨울 눈발에도 당당함은 오직 그대이기에 가능했는데
어쩌다가 눈의 위세에 몸을 굽히게 되었는가?
요즘 들어 (자네는) 사람들의 올곧은 정신에 이르지 못하니
지난날 늠름하고 강직하다는 칭송이 부끄럽구나.

대나무가박성원에게이렇게답했다.

내 머리를 누를 수 는있어도 뜻은 움직이기 어려우니
잠시 굽혔어도 결국 펼 것이니, 때가 있는 것 일세.
잠시 후  눈이 녹으면 푸르게 홀로서서
그대에게 다시  아름다운 자태를노래하리라.

1746년(50세,영조22년) 유배지에서 석방되었다.  석방되어 한양에 도착하여 다시 대나무 시를 썼다.
박성원이대나무를그리워하여말했다.

절해에서 비바람 서리를 함께 겪었더니
삼 년 유배살이에 (그대에게) 가장 정을 붙였었지
뜰에 가득 대숲 모습은 다시 대하기 어려워도
성근 운율은 응당 꿈속에 맑게 들어오리라.

대나무가박성원에게말했다.

나는 (대나무) 본래 무심한데 그대는 정을 남겼구려.
마음속 회포가 끝내 서로 맞는다면
천리 밖인들 한 뜰에서 대하는 것과 어찌 다르겠는가.

박성원은 유배지에서 석방된 뒤 얼마 되지 않아,  세자를 가르치는 세손강서원 유선(世孫講書院諭善)으로 임명되었다.

1750년(54세,영조26년) 어머니와 형, 형수가 사망하여 벼슬에 나아가지 않았다.  상을 마친 1754년에 사헌부장령으로 임명되었다.

1759년(63세,영조35년) 사헌부집의에 임명되었다.  영조에게 언로를 열것을 간언하였다.  8월부터 세손 (훗날의정조)을 가르치면서 일기를 기록하기 시작했다.

1760년(64세,영조36년) 10월에 여러 신하가 글을 올려 농사의 어려움과 백성의 고통을 세손에게 알려야 한다고 건의하였다.  이에 영조가 세손 교육을 담당하는 박성원에게 그러한 내용의 격언을 모아 만들게 하였다.  박성원은 경전 및 기타 서적에 서발췌하여⌈보민격언(保民格言) ⌋을 편찬하였다.  다음해 2월 1일 임금 앞에서 강의하였다.

1761년(65세,영조37년) 7월에 ⌈강서원일록(講書院日錄) ⌋의 기록을 마쳤다.  이 기록은 1759년(영조35년) 8월 9일부터,  이해 7월 5일 까지,  박성원이 정조가 세손 시절에 공부한 교육과정을 일기체로 기록한 책이다.  세손강서원(世孫講書院)의 종4품 관직인 좌익선(左翊善)으로 강의를 주관하였는데,  정조는 이때 10살이었다.  강의 과목은『소학』외편과 내편, 『대학』, 『논어』, 『사략』등이었다.

1767년(71세,영조43년)에 사망했다. 시호는 문헌(文憲)이다.  저서로는 『돈효록(敦孝錄)』, 『보민록(保民錄)』, 『돈녕록(敦寧錄)』, 『겸재집(謙齋集)』, 『예의유집(禮疑類輯)』등이있다. ⌈예의유집 ⌋은 예서(禮書) 연구에 힘쓴 그가 의문시 되는 문제를 지적해 조목마다 사견을 첨부한 것이다.
그는 낙론(洛論)에 동조하여 한원진(韓元震) 등의 호론(湖論)을 반박하였으며,  백성들을 교화하는 근본으로 효를 중시하고, 효가 바로 백성들을 보호하고 국기를 다지는 원동력이 된다고 생각하였다.
영조는 세손(정조)의 학문은 모두 박성원의 힘이라는 칭찬을 하였다. 정조는 나중에 자신을 가르친 박성원에게 큰 은혜를 입었다고 생각하였다.  어린 시절 자신에게 학문을 가르쳤고,  아버지 사도세자의 죽음 때문에 정신적으로 위태로운 시기에 자신과 함께했던 박성원에 대해서 특별한 감정을 가지고 있었다.  이에 시호를 내리고,  박성원의 자손들을 음직(蔭職)으로 관리에 등용시키고,  박성원의 ⌈돈효록 ⌋, ⌈예의유집 ⌋등을 왕명으로 간행하였다.

<참고자료>
⌈영조실록 ⌋. ⌈국역일성록 ⌋,영조37년조
김윤정, 겸재 박성원의 예학과 ⌈예의류집 ⌋의성격, ⌈한국문화 ⌋61,2013
이순두, 박성원,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한국학중앙연구원
⌈강서원일록(講書院日錄)⌋,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한국학중앙연구원
김성철, ⌈기로소와박성원의남해유배일기⌋,<남해타임즈>, 2015.6.2
이경식, ⌈남해유배문학기행⌋,<국제신문>, 2015.9.9

민우수(閔遇洙, 1694~1756)


민우수(閔遇洙, 1694~1756)                               PDF Download

 

우수(閔遇洙, 1694~1756)는 조선시대 중기의 문신이자 유학자이다.  여양부원군 민유중(閔維重)의 손자이며, 숙종의 부인 인현왕후의 오빠 문충공(文忠公) 민진후(閔鎭厚)의 아들이다.  김창협과 권상하에게 학문을 배웠으며 문장과 글씨를 잘 썼다.
1721년 신임사화로 노론의 관료들이 차례로 사형을 당하는 것을 보고 관직에 대한 꿈을 접고 학문에 전념하였는데,  나중에 성균관좨주, 세자찬선, 원손보양관 등을 지냈다.

1694년(1세,숙종20년) 12월 28일 서울 안국동에서 문충공(文忠公)  민진후(閔鎭厚, 1659-1720)의 아들로 태어났다.  여양부원군 민유중(閔維重)의 손자이며,  동춘당 송준길(宋浚吉, 1606-1672)의 외증손이다.  어머니는 정경 부인(貞敬夫人) 연안 이씨(延安李氏)로 현감덕로(德老)의 딸이다.  본관은 여흥(驪興),  자는 사원(士元), 호는 정암(貞庵), 혹은 섬촌(蟾村)이다.

1709년(16세,숙종35년) 윤경적(尹景績)의 딸과 결혼하였다.

1714년(21세,숙종40년) 사마시(司馬試)에 장원으로 합격하였다.  성균관에 들어가 학문을 닦았다. 그는 어려서부터 김창집(圃陰 金昌緝)에게 글을 배웠는데,  이즈음부터는 농암(農巖) 김창협과 수암(遂菴) 권상하(權尙夏)에게 성리학을 배웠으며, 문장과 글씨에 능했다.  김창협은 민우수의 아버지 민진후와는 동서 지간이다.  두 사람의 장인이 이단상(李端相, 1628-1669)이다.  민우수에게 김창협은 이모부인 셈이다.

1716년(23세,숙종42년) ⌈가례원류(家禮源流)⌋에 대한 분란이 생기자 소론파 인윤증(尹拯)을 공격하는 선비들의 상소문을 주도하였다. 이 일로 숙종은 송시열과 윤증의 대립에서 송시열이 옳다고 판단하게되었다.
이후 친구 김신겸(金信謙, 1693-1738)과 함께 호서 지방(충청도지역)의 산수를 유람하였다. 스승 권상하를 찾아가 유교경전(經傳)의 의심스러운 부분을 질문하였다.

1721년(28세, 경종1년) 전 년에 부친상을 당했다. 신임사화가 일어났다.  이해에 즉위한 경종이 몸이 약해 그의 동생 연잉군(후일의영조)을 왕세제로 책봉하는 문제로 조정이 시끄러웠다.  이 일은 노론과 소론의 정치싸움으로 번졌는데 결국 왕세제 대리 청정을 주장한 노론의 4대신 (이이명, 김창집, 이건명, 조태채) 등이 사형을 당했다. 옥중에 있던 처남 윤지술(尹志述)이 사망하고,  작은 아버지 민진원(閔鎭遠)과 매부김광택(金光澤)이 유배형을 당했다.  민우수는 이러한 일을 계기로 벼슬을 단념 하고 여주로 돌아가 유교경전(經傳) 연구에 힘썼다.

1726년(33세,영조2년) 봉릉참봉(奉陵參奉), 세자세마(世子洗馬), 명릉참봉 등에 임명되었다.  탕평책이 국론으로 정해지자 그러한 정책에 반대하고 관직을 사양하였다.  전년에 진사 김신겸이 내시교관(內侍敎官)에 임명되었으나 취임하지 않고 산수를 즐기면서 후진 양성에 힘쓰고자 강원도 영월의 산중으로 들어갔는데,  그와 함께 유숙기(兪肅基), 이봉상(李鳳祥) 등과 더불어 인심도심설(人心道心說), 명덕설(明德說) 등을 강의하고 토론하였다.

1731년(38세,영조7년) 은거하면서 집을 짓고 다음과 같은 시( ⌈정암집 ⌋ 1권樹屋)를 지었다.

樹屋幽棲好  집을 지었네,  조용히 살기 좋은 곳에.
蒲床宴坐宜  왕골로 만든 자리, 편안히 앉기 좋네.
鴻濛上皇意  아득한 기운은 태상황  복희의 마음이요
寂默老禪癡  적막함은 늙은 선승의 어리석음이네.
旭日盈黃卷  아침 햇빛은 누런 책위에 가득차고
閒花照墨池  꽃잎은 벼루 안의 연못에 비치네.
淸明本來氣  청명은 원래 오는 절기이지만
不待夜中知  기다리지 않아도 밤이 되면 알겠네.

1739년(46세,영조15년) 형조 좌랑에 임명되었다. 이후1743년에는사헌부 지평에 임명되었다.  1748년에는 경기도 유생 침빈(沈 䚔 ) 등이 상소문을 올려 민우수와 함께 한원진(韓元震),  윤봉구(尹鳳九) 등 조정에 불러들일 것을 호소하였으나 임금은 거부하였다.

1750년(57세,영조26년) 봄에 통정대부에 올라 공조참의에 임명되었다.  여름에 아들 민백첨(閔百瞻)이 사망하였다.  겨울에 원손보양관(元孫輔養官)에 임명되었으나 상소를 올려 사양하였다.

1751년(58세,영조27년) 사헌부 대사헌을 거쳐 성균관좨주, 세자찬선(世子贊善) 등에 임명되었다.  다음해 10월에는 특명으로 대사헌에 임명되었으나 나아가지 않았다.

1754년(61세,영조30년) 시강원 서연관,시강원 참선, 공조참판겸성균관좨주에 임명되었다가 , 9월에 원손보양관에 임명되었으나 사양하였다.  가르치던 제자 김양행(金亮行, 1715-1779)이 세자익위사세마(世子翊衛司洗馬)에 임명되었다.  그는 가깝게 지내던 친구 김신겸(金信謙)의 아들로 벼슬에 뜻을 두지 않고 성리학 연구에 전념하여 예학과 역학에 밝았다.  김양행은 이듬해 부수(副率)에 임명되었으나 부임하지 않았으며,  나중에 이조참의에 이르렀으며,  정조 때는 형조참판을 지냈다.  그가 가르친  제자로 이우신(李友信)·민치복(閔致福)·박준원(朴準源)  등이 있다.

1755년(62세,영조31년) 부인 윤씨가 사망하였다.  이해 3월에 대사헌에 임명되었다.

1756년(63세,영조32년) 가을에 사망했다. 여주섬락리(蟾樂里)에 장사지냈다.
저서로 ⌈정암집 ⌋ 16권이 있다.  그는 대명의리를 중시하고, 특히 노론의 원칙과 의리를 중요시 하였다.  일생동안 주로 재야유학자로서의 태도를 견지하였으며 관직도 대부분 그러한 성격의 것이 많았다.
2년뒤,  자헌대부 좌참찬에 증직되었다.  저서로는『정암집』16권이 있다. 시호는 문간(文元)이다.  그의 묘는 경기도 여주시 능현동 능말뒤쪽 구릉에 있다.

<참고자료>
⌈민우수 행력⌋, 한국문집총간 인물연표, 한국의 지식콘텐츠
김은정, ⌈정암 민우수의 삶과 한시⌋, ⌈한국한시작가연구⌋17,2013.
윤혁동, ⌈민우수⌋,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한국학중앙연구원

최신(崔愼, 1642-1708)


최신(崔愼, 1642-1708)                                           PDF Download

 

신(崔愼, 1642-1708)은 조선시대 후기의 문신이자 유학자로 송시열에게서 배웠다. 함경북도 회령 출신으로, 제릉(齊陵) 참봉(參奉), 사옹원(司饔院) 봉사(奉事), 회인현감 등을 역임했으며,  북도지방 사람들로 부터 널리 추앙을 받고 그곳에 유풍을 세우는데 큰 기여를 하였다.  그는 윤증(尹拯)이 송시열과 갈라서자 만언소(萬言疏)를 올려 송시열을 변호하고 그가 스승을 배신한 것에 대해 공격하였다.  이로 인해 소론의 배척과 탄압을 받았다.  스승 송시열의 일로 유배형을 당했다가 , 유배지에서 풀려나온 뒤에 는스승의 묘소 근처인  광주(廣州) 에 집을 짓고 은거하기도 하였다.

1642년(1세, 인조20년) 음력 5월 13일에 함경북도 회령(會寧)에서 최산후(崔山厚)의 셋째 아들로 태어났다.  본관은 회령(會寧), 자는 자경(子敬), 호는 학암(鶴菴)이며, 송시열(宋時烈)의 문인이다.  5살(1646년) 때 모친상을 당했다.

1657년(16세,효종8년) ⌈맹자⌋를 읽고 학문에 뜻을 두었다.

1661년(20세,현종2년) 부친상을 당하였다. 상례를 성실히 실천한 것이 조정에 알려져 복호(復戶,요역 부담의 감면)를 받았다.

1665년(24세,현종6년) 10월,  함경도 관찰사로 부임한 민정중(閔鼎重)을 따라 칠보산(七寶山)을 유람하였다.  함경도 함산(咸山)에서 ⌈심경(心經)⌋을 배웠다.  전년에는 외재(畏齋) 이단하(李端夏)가 북평사(北評事)로 부임하자 방문하여 인사를 한 적이 있었다.

1666년(25세,현종7년) 3월, 민정중(閔鼎重)의 소개로 회덕(懷德, 지금의 대전광역시)의 송시열(宋時烈)을 찾아가 인사하고 스승으로 모셨다.  이후 스승의 격려를 받으며 근사록(近思錄), 역학계몽(易學啓蒙), 가례(家禮), 상수(象數), 율려(律呂) 등 성리학(性理學) 관련지식을 배우며 연구하였다.
당시 그가 송시열의 문하에서 글 공부하던 상황은 그의 문집에 이렇게 실려있다.( ⌈학암집⌋ 제2권 華陽聞見錄)

“내가 화양동(華陽洞)에서 스승을 모시고 공부하던 때의 일이다.  매일 아침  맑은 첫새벽에, 선생님은 잠자리에서 일어나 ⌈맹자⌋ 몇 편과 ⌈상서⌋ 의 전모(典․謨), ⌈용학정문(庸學正文), 그리고 주자의 문장 중긴 것 한 두편을 읽었다.  이것은 선생님이 일생동안 해온 공부로 상례가 있거나 병에 들어 부득이 한때를 제외하고는 하루도 거르지 않는일과 였다.  선생님은 항상 제자들에게 ‘자네들은 평상시에 읽는 책은 없는가?’라고 물었다.  그리고 독서라 는것은 반드시 평소에 일상적으로 해야한다, 그래야 쓸모가 있다고 하셨다.  또 말씀하시길 삼사백번을 읽지 않으면 문장의 뜻을 완전히 이해할 수 없다고도 하셨다.”

1674년(33세,현종15년) 이단하(李端夏)가 현종(顯宗)의 행장을 지으면서 스승 송시열의 잘못을 지적하였다.  최신은 이단하에게 편지를 보내 스승을 저버린 죄를 꾸짖었다.

1675년(34세,숙종1년) 1월 13일 숙종이 왕세자 책봉에반 대하는 송시열을 함경도 덕원(德源)으로 유배보냈다.  당시 충청도 진천 길상사에 있던 송시열은 유배가 결정되었다는 소식을 듣고

“김우명(金佑明)의 계획이 지금에야 실현된 것이다.  지금까지 지체된 것은 임금의 참의심이 많으신 것이다.”

라고말했다.( ⌈최신록⌋)

이때 유필명(柳弼明)이 상소문을 올려 송시열의 유배를 반대하였는데 그 상소문을 최신이 지어 주었다고 의심을 받아 심문을 받고 사천(泗川)에 유배되었다.  이해 6월에 송시열은 남인파 관료들의 대대적인 공격을 받아 다시 경상도 장기(長鬐)로 이배(移配, 유배지를 옮김) 되었다.  이후 덕원, 웅천(熊川), 장기(長鬐), 거제(巨濟, 1679년4월), 청풍(淸風, 1680년5월) 등지에서 귀양살이를 하였다.

1680년(39세,숙종6세) 경신환국으로 스승 송시열이 풀려나왔다. 남인이 권력을 잃고, 다시 서인이 득세하였다.  최신도 유배지에서 풀려나 곧바로 제릉(齊陵) 참봉(參奉)에 임명되었다.

1681년(40세,숙종7년) 봄에 준원전(濬源殿) 참봉으로 임명되었다. 가을에,  고향인 함경도 회령(會寧)으로 돌아갔다.

1682년(41세,숙종8년) 1월에 상소문을 올려 당시의 폐단을 지적하였다.  8월에, 사직서(社稷署) 참봉에 임명되었다.  다시 상소하여 송시열을 우대하여 줄 것을 요청하고,  이단하(李端夏)가 박태보(朴泰輔)에 게 배척 당한 일을 임금에게 알렸다.  임금이 기꺼이 그 내용을 받아들였다.  그리고 특별히 사옹원(司饔院) 봉사(奉事)에 임명하였다.  얼마뒤에 직장(直長)으로 승진하였다.

1684년(43세,숙종10년) 윤증(尹拯)이 송시열과 갈라서자 만언소(萬言疏)를 올려 송시열을 변호하고 윤증이 스승을 배반한 것을 공격하였다.  이로 인해 큰 논란이 일어나 소론측의 배척을 받았다.

1685년(44세,숙종11년) 광흥창(廣興倉)의 주부(主簿)가 되었다.  다음해 회인(懷仁)의 현감(縣監)이 되었다.  당시 재해를 입은 고을의 부역을 면제시키는 등선정을 베풀어 송덕비가 세워졌다.

1688년(47세,숙종14년) 사람들의 시기와  미움을 받아 결국 파직되어 고향으로 돌아갔다.  다음해 기사환국으로 광양(光陽)에 유배되었다. 당시 스승 송시열이 사약을 받고 사망하자 제문(祭文)을 지어 올리고,  윤증이 스승을 죽인 것이라고 단언하였다.

1694년(53세,숙종20년)  갑술환국으로 유배지에서 풀려났다. 스승  송시열의 묘소 근처인 광주(廣州)에 임시 숙소를 만들어 은거하였다.

1697년(56세,숙종23년) 이해에 기근을 당하여 부인 창령 성씨(昌寧成氏)가 사망하였다.  당시 가정형편이 몹시 궁핍하여 주위 사람들이 돈을 모아 장례를 치러주었다.  집에 있던 종들도 모두 도망가버렸다.

1701년(60세,숙종27년) 진도(珍島) 목장의 감목관(監牧官)이 되었다.  다음해 회갑을 맞이하여 가족들의 시에 화답하여 오언(五言)으로된 고풍시(古風詩) 230여 구를 지었다.

1708년(67세,숙종34년) 7월 6일에 스승  송시열의 묘가 있는 광주(廣州, 경기도) 임시 숙소에서 사망하였다.  그는 함경도 출신의 사림으로 북도지방에서 널리 추앙을 받았다.  헌종 때 통정대부(通政大夫) 이조참의(吏曹參議)에 추증 되었다가 고종 때 가선대부(嘉善大夫) 이조참판(吏曹參判), 그리고 이조판서에 추증되었다. 이때 ‘문간(文簡)’이라는 시호를 받았다.
5대손 최경조(崔擎祖)가 문집의 간행을 위해서 유고를 정리하고,  묘표등 부록을 작성하였다.  이후 1882년경 조정이 최신을 기리는 추증을 내린 것을 계기로 문집 간행작업이 활발하게 이루어져 1884년에 9대손 최병진(崔秉鎭)이 연활자로 6권 3책의 문집 ⌈학암집⌋을 간행하였다.  제1권 외의 글은 대개 송시열의 문중에서 저자와 관계된 기록을 얻어 수록한 것이다.  1684년에 올린 만언소(萬言)도 이 문집에 포함되어 있는데,  만언소는 최신이 쓴 문장 중 가장 대표적인 저작으로 송시열과 윤증(尹拯)의 갈등을 표면화 시킨 것으로 노론과 소론의 분당 상황을 이해하는데 중요한 상소문이다.

<참고자료>
『학암집(鶴菴集)』
차용걸, ⌈최신⌋,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한국학중앙연구원
⌈최신행력⌋, 한국문집총간인물연표, 한국의지식콘텐츠(http://www.krpia.co.kr/)

정온(鄭溫, 1652-1707)


정온(鄭溫, 1652-1707)                                            PDF Download

 

온(鄭溫, 1652-1707)은 조선시대 후기에 활동했던 문신이자 유학자로, 충청북도 충주 출신이다.  집안의 여러 형들과 함께 송시열(宋時烈)에게 학문을 배웠으며 48세 때 사마시(司馬試)에 급제하였으나, 관직운은 없었다.  그의 형들 가운데 정호(鄭澔)는 송시열이 사망한 뒤,  노론의 선봉장으로 활약하였는데 영의정, 좌의정, 우의정 등3정승을 두루 거친 인물이다.  정온은 잠시 순릉봉사(順陵奉事)로 근무한 뒤 56세 때 병으로 사망하였다.

1652년(1세,효종3년) 음력 10월 7일에 태어났다. 본관은 영일(迎日), 자는 화중(和仲)이다.  어려서 초명(初名)은 순(洵) ,후에 유피(有避)라 하였다가 ‘따뜻할 온’(溫)으 로바꿨다.  아버지는 통훈대부행사헌부감찰(通訓大夫行司憲府監察) 정경연(鄭慶演, 1604-1666)인데,영의정 정철(鄭澈)정직(鄭稷)의 아들이다.
정온의 부친은 둘째 부인 여흥 민씨(驪興閔氏) 민광환(閔光煥)의 딸을 맞이하여 그 사이에 5남 1녀를 두었다.  정온은 그 중 넷째인데,  큰 어머니가 낳은 아들들까지 포함하면 일곱째이다. 형으로 통덕랑(通德郞) 정주(鄭澍)정인(鄭潾), 정비(鄭泌), 정섭(鄭涉)과 영의정, 좌우정, 우의정을 두루 지낸 장암(丈巖) 정호(鄭澔, 1648-1736), 정진(鄭津)이 있으며 동생으로 정영(鄭泳)이 있다.
정온은 어려서부터 품성이 단아하고 수려 하였는데,  장성하여 신이 중(愼爾中)의 딸을 부인으로 맞이 하였다.

1666년(15세,현종7년) 부친이 사망하였다.  정온의 부친 정경연 은정온이 태어나기 전인 1643년(인조21년)에 지방관리의 추천을 받아 영릉참봉(英陵參奉)에 기용되었다. 그 뒤 여러 지방의 수령으로 이곳 저곳을 돌아다녔는데,  생활이 검소하고 매사에 부지런하여 현지 주민들에게 찬사를 들었다.  성품이 매우 효성스러워서 홀어머니를 50여년이나 모셨는데,  항상 곁을 떠나지 않았다.  외지에 부임 할 때에도 항상 어머니를 모시고 갔다.  뒤에 평릉도 찰방(平陵道察訪)이 되었으나 지난해(1665년)  벼슬을 버리고 고향으로 돌아왔다.  이해 어머니 상을 당해 너무 애통하고 상심한 나머지 병을 얻어 한달 만에 별세하였다.

1671년(20세,현종12년) 우암 송시열 선생이 화양동(華陽洞)에 있음을 듣고 찾아가그문하에들어갔다. 당시 학비를걱정하였으나그가배움에뜻을두었음을기뻐하면서어머니가이렇게말했다.“네가스승을따라도를배우고자한다면내머리카락이라도잘라주겠다.”고하며노잣돈을마련해전송해주었다. 그뒤어머니는병에걸려수년뒤에사망하였다.

1675년(24세,숙종즉위년)스승 송시열이 귀양을 갔다. 친형 정호는 과거를 단념하고 성리학(性理學) 연구에 힘썼다.  하지만 이후에 주위의 권유로 1682년 생원이 되고, 1684년 정시 문과에 병과로 급제하여 검열을 거쳐 정언으로 승진하였다.

1689년(38세,숙종15년) 6월 8일, 송시열이 유배지 제주에서 서울로 압송되던 도중 정읍에서 사약을 받고 사망하였다.  조문을 가서 제문을 지어 영전에 올렸다.  친형 정호는 파직되고 문외출송(門外黜送, 성문 바깥으로 쫓겨남) 당하였다가 경성(鏡城, 함경도)으로 유배되었다.

1694년(43세,숙종20년) 갑술옥사로 인현왕후가 복권되어 다시 궁중으로 돌아왔다.  형 정호도 유배형에서 풀려나 지평, 수찬, 교리 등에 임명되어, 활동하였다.
하지만 1696년에 소론파 이사상(李師尙)을 비판 등 과격한 발언으로 파직되었다.  2년 뒤 다시 정호는수찬, 집의, 사간을 거쳐 동래부사로 임명되었는데,  근무 중에 신은(新銀) 약 12만냥을 왜인에게 판매한 일로 파직되었다.  하지만 형 정호는 일생을 늘 가난하게 지내면서 노론의 선봉으로 활약하였다.

1699년(48세,숙종25년) 사마시(司馬試)에 급제하였다.  통훈대부행순릉봉사(通訓大夫行順陵奉事)에임명되었다.

1701년(50세,숙종27년) 3월 충청도(忠淸道)에서 다른 유생들과 함께 상소를 올렸다.  이희정(李喜鼎)이 어진이를 근거 없이 모함한 일과, 호남․영남의 유생들이 함께 일어나 그런 모함에 호응한 일,  그리고 박명의(朴明義), 임수간(任守幹) 등이 번갈아 소를 올린 상황을 설명하고 이희정에게 내린 죄율(罪律)로 그들을 모두 처벌하기를 호소하였다.   조정에서는

“이미 태학(太學)의 여러 유생에게 타일렀고, 호남과 영남의 유소(儒疏)없다.”

고하였다.
이희정(李喜鼎)은 1656년 생으로 숙종17년, 1691년 증광시(增廣試)에 진사(進士) 3등(三等) 21위로 합격한 충청도 출신의 진사로 다른 유생들과 함께 이 해 2월에 상소를 하여 김장생(金長生)을 헐뜯고 배척하였으며, 나아가 이이(李珥)와 성혼(成渾)등 두 학자에 대해서도 비난하였다.  이에 승정원에서는 그가 방자하고 꺼림이 없는 죄를 저질렀다고 임금에게 보고하였다. 숙종은

“김장생을 업신 여긴 것은 지극히 무엄(無嚴)하고,  또 이이, 성혼 등 두현인을 방자하게 추한 욕설을 하고 있으니, 더욱 놀랄 만한 일이다.  이희정(李喜鼎)은 배소(配所)를 정하여 유배보내고 지금 이후로는 이와같은 상소문을 받아들이지 말라.”

고지시하였다.

1707년(56세,숙종33년)에 병으로 사망했다.  묘소는 충북 충주시 대소원면 영평리에 있다.  습재(習齋) 이직신(李直愼)이 묘표를 쓰고,  또 친형 장암 정호(鄭澔)가 묘표와  행장을 지었다.
친형 정호는 1710년에 대사간으로 복귀 하였으며 이후  대사헌이 되었다가 당론을 일삼는다는 이유로 유배형에 처해졌다.  다시 1713년에 대사성으로 복귀하여 송시열의 묘정배향을 건의하였고,  1715년 부제학으로 임명되었다.   또 소론 윤증(尹拯)이 송시열을 배반하였다는 주장을하여 파직되었다가,  노론이 권력투쟁에서 승리함으로써 대사헌으 로승진하였다.  하지만 윤선거(尹宣擧)의 문집에 효종에게 불손한 내용을 썼다는 이유로 윤선거 부자와 함께 관작을 박탈당했다. 1717년에 다시 예조판서로 복귀하여 다음해 이조판서에 올랐다. 1721년에는 ⌈숙종실록⌋의 편찬에 관여하였다가 신임사화를 당하여 노론 4대신과 함께 파직되어 강진으로 유배되었다가,

1725년(영조1년)에 노론이 재집권하자 우의정에 승진되어 좌의정을거쳐 영의정이 되었다.  2년 뒤,  정미환국을 당하여 관직에서 물러났다가 1729년에 영중추부사로 재직하던 중 사망하였다.

<참고자료>
⌈장암집(丈巖集)⌋ ⌈(권18, 墓表亡弟奉事遺事)⌋
⌈정온(鄭溫)⌋,  한국향토문화전자대전, 한국학중앙연구원
김현정,  ⌈정온, 디지털충주문화대전⌋, http://chungju.grandculture.net/

이희조(李喜朝, 1655∼1724)


이희조(李喜朝, 1655∼1724)                                PDF Download

 

희조(李喜朝, 1655∼1724)는 조선시대 후기의 문신이며 유학자로,  대사헌,  이조참판, 인천부사, 천안군수 등을 역임했다.  인천 부사 재직 때에는 선정을 베풀어 백성들의 칭송을 받았다.  송시열의 문인이며,  서인이 노론과 소론으로 나뉘기 전에는 박세채(朴世采)를 따랐으나 나중에는 송시열의 노론을 지지했다.  경종이 즉위하던 해 노론파가 실권하면서 영암(靈巖)으로 유배되었다가 다른 곳으로 이송하는과정에서 사망하였다.

1655년(1세,효종6년)에부제학(副提學) 이단상(李端相)의 아들로 태어났다. 본관은 연안(延安, 지금의 황해도 연백)이며,  자는 동보(同甫),호는 지촌(芝村)·간암(艮菴),시호는 문간(文簡)이다.  송시열(宋時烈)의 문인이다.

1680년(26세,숙종6년) 경신환국이 일어난 뒤 유일(遺逸)로 천거되었다.  이때는 남인들이 실각하고 다시 서인들이 복권한 때였다.  이후 건원릉참봉(健元陵參奉)에 임명되었으나 사양하였다가, 다시 전설별검(典設別檢), 의금부도사, 공조화랑, 진천현감(鎭川縣監) 등에 임명되었다.

1694년(40세,숙종20년) 갑술옥사로 다시 기용되었다.  인천현감(仁川縣監), 동궁서 연관(東宮書筵官), 지평(持平), 천안군수, 장악원정(掌樂院正) 등을지냈다.

1697년(43세,숙종23년) 인천 부사로 임명되었다.  그는 어머니를 모시고 인천에 부임했다.  그는 ‘이곳은 나의 아버지(이단상)가 부사(府使)를 역임한 고장으로, 부친의 치적이 아직 남아있는 이곳에서 정치를 잘 하지 못해 죄를 짓게 된다면 무슨 있겠는가?’ 라고 하며 선정을 베푸는데 힘썼다. 그곳에 큰 흉년이 들어 굶주린 백성들이 많
았는데,  그들을 구제하는데 정성을 다했다.  그는 자신이 거처하는 곳을‘ 인민당(人民堂)’이라하였다.  있다. 이단상과 이희조 두 부자(父子)의 선정은 오랫동안 인 천사람들에게 기억되었다.

1702년(48세,숙종28년) 인천 문학산(文鶴山) 기슭에 학산서원(鶴山書院)이 세워졌다. 이곳에 부친 이단상(李端相)이 배향되었다가 나중에 이희조도 함께 배향되었다.

1707년(53세,숙종33년) 장령(掌令), 해주목사(海州牧使)에 임명되었다.  해주목사 재직 시에는 석담(石潭)에 있는 율곡 이이(李珥)의 유적에 요금정(瑤琴亭)을 세  . 또 이제묘(夷齊廟)에 송시열의 글씨로 편액을 달고 기(記)를 지어 걸었으며, 나라를 위하여 죽은 사람들을 위해 사당을 세웠다.
이희조는 다음과 같은 시를 써서 율곡이 정한 고산구곡(高山九曲)  중여덟 번째 절경인 금탄(琴灘, 거문고 소리를 내는 여울)을 노래했다.

八曲溪山何處開
여덟번째골짜기는어디로열렸을까?
琴灘終日好沿洄
금탄의골짜기는종일토록오르내리기좋구나.
牙絃欲奏無人和
거문고를타고싶으나화답해줄사람없네.
獨待靑天霽月來
홀로기다리네, 푸른하늘에밝은달떠오르길.

1578년 율곡은 고향으로 내려가 해주 석담에 은거하면서,  은병정사(隱屛精舍)를 짓고 본격적으로 후학 양성을 추진하였다.  그때 주자의 ‘무이구곡가(武夷九曲歌)’를 본따 ‘고산구곡가(高山九曲歌)’ 를 지었는데,  총 10수로 구성된 시조 형식의 시가였다.  그 중 여덟 번째 ‘팔곡(八曲)’의 시는 다음과 같다. (요즘 문장으로 일부 수정함)
한문 은송시열이 번역한것이다.

八曲何處是  여덟째 골짜기는 어디일까?
琴灘月正明  금탄에 달이 참 밝구나.
玉軫與金徽  옥 거문고 금 거문고,
聊奏數三曲  두서너 곡 무심히 타보는데,
古調無知者  옛 가락 아는 이 없구나.
何妨獨自樂  누가 막으리, 혼자서 즐기는데.

이희조의 시는 밝은 달이 떠오르길 기다리는데 그것은 아마 도율곡 이이가 팔곡의 금탄을 노래한 시에서 달이 밝은 때 혼자서 거문고를 타는 상황을 염두에 둔 것 같다.  때까지 기다리면 율곡이 그곳에서 거문고를 탄 것처럼 자신도 그때의 분위기를 느껴볼 수 있을 것이라고 기대한 것이다.  달 밝은 밤 거문고를 타면서 율곡과 한 마음이 되어보고 싶은 마음을 노래한 것이다.

1717년(63세,숙종43년) 대사헌이 되었다.  이듬해 이조참판·찬선·좨주 등을 역임했다.  다음해 이조참판 등을 역임했다.  또 그 다음해 대사헌에 임명되었다.

1721년(67세, 경종1년)신임사화(辛壬士禍)가 발생하였다.  연잉군(후일의영조)을 왕세제로 책봉하는 문제를 둘러싸고 노론과 소론이 대립하였는데,  결국 소론파가, 경종에 대한 불충을 빌미로 노론파를 탄핵했다.  이에 김창집(金昌集) 등 노론4대신이 유배당하고, 이희조도영암(靈巖)으로 유배되었다.
이희조의 시 가운데 다음과 같은 시가 있다.  있을 것같다.( ⌈지촌집 ⌋권1)

纖雲不起玉輪盈
고운 구름 일지 않아, 밝은 달 가득차고,
影入淸溪溪更淸
맑은 시냇물에 달그림자 비치니 더욱 맑구나.
安得此心同此月
어찌하면 이 마음 저 달처럼 될까?
普天幽谷一般明
온 하늘 깊은 계곡까지 모두 밝게 하네.

1724년(70세, 경종4년)에 유배지가 변경되어 철산(鐵山)으로 이동하는 중에 정주(定州)에서 사망했다.  그는 후진양성에 힘쓰면서 많은저서를 남겼는데,  대표적 저서로 ⌈대귀설(大歸說) ⌋,  ⌈지촌집(芝村集) ⌋ 32권 등이 있다. ⌈대귀설 ⌋은 송시열이 귀양간 뒤에 양주의 지동(芝洞)으로 내려가 지은 것이다. ⌈지촌집 ⌋은 32권 15책으로 1754년(영조30년)에 이희조의 아들 이양신(李亮臣)이 간행하였는데,  이 가운데
에는 송시열(宋時烈)이 남인에게 몰렸을 때 그를 변호하는 문장, 억울하게 죽은 송시열에 대해 논죄 사실을 비판한 문장,  그리고 윤휴(尹鑴)나 윤선거(尹宣擧)에 대해서 비판한 문장 등이 실려 있다.  또 이문집에는 ⌈대학⌋,  ⌈중용⌋ ,  ⌈심경⌋,  ⌈태극도설(太極圖說)⌋,  ⌈맹자⌋등에 대해서 묻고 답한 문장,  상제례(喪祭禮)에 대해서 의견을 교환한 문장,  율곡의 행적에 관한 문장 등도 함께 실려 있어 후대 학자들이 중요시하였다.
이 외에도 그가 편찬한 서적으로 ⌈우서절요(尤書節要)⌋, ⌈주자대전차의(朱子大全箚疑)⌋,  ⌈주륙동이집람(朱陸同異輯覽)⌋, ⌈송원명서절요(宋元明書節要)⌋,  ⌈오선생서절요(五先生書節要)⌋,  ⌈해동유선록(海東儒先錄)⌋,  ⌈속경연고사(續經筵故事)⌋ 등 다수가 있다.

다음해 1725년 영조가 즉위하자,  유생들이 상소를 올려 복권되어, 좌찬성에 추증 되었다. 인천(仁川) 학산서원(鶴山書院), 평강의 산앙재영당(山仰齋影堂), 평안북도 정주군의 간암서원(艮菴書院) 등에 배향되었다. 이중 간암서원은 1731년(영조7년)에 정주 유림들이 뜻을 모아 이희조(李喜朝)의 학문과 덕행을 추모하기 위해 창건하고 그곳에 위패를 모신 것이다.

<참고자료>
『지촌집(芝村集)』
조준하, ⌈이희조⌋,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박연두, ⌈간암서원⌋,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이희조⌋, 『인천광역시사- 인천의인물』,  2002

소두산(蘇斗山, 1627-1693)


소두산(蘇斗山, 1627-1693)                                  PDF Download
소두산의 위패를 모신 익산의 화산서원 사진
소두산의 위패를 모신 익산의 화산서원

 

두산(蘇斗山, 1627-1693)은 조선시대 후기의 문신으로 송시열의 문하에 들어가  ⌈춘추⌋를 배우고 크게 될 인물로 칭찬을 받았다.  그러나 과거에 합격하여 관직생활을 하는 중에 임금에게 올린 직언을 싫어하는 권신들의 견제를 받고서 천군수, 나주목사, 강릉부사, 동래부사등 외직으로 돌았다. 외직에 있을 때도 탐관오리이며 독단적으로 일을 처리한다는 비판을 받았다.  하지만 그가 춘추대의(春秋大義)를 중시하였던 점,  궁중의 문제점을 자주 지적했던 점,  백성들의 입장에서 제도개혁을 하고자 했던 점, 강릉 부사 시절 선정을 베풀어 선정비가 세워졌던 점을 생각해보면 그러한 비판은 신중하게 평가해 볼 필요가있다.

1627년(1세, 인조5년) 11월 19일에 익산의 제산(濟山)에서 태어났다. 본관은 진주(晉州),  자는 망여(望如), 호는 월주(月洲)이다.  증조할아버지는 소건(蘇建), 할아버지는 소억선(蘇億善),  아버지는 동지중추부사(同知中樞府事)  소동명(蘇東鳴)이다.
송시열에게 학문을 배웠다.

1643년(17세, 인조21년) 약관이 되어 상투를 틀고 갓을 쓰는 예식을 하였다.  향시에 잇달아 합격하였으며 이즈음 ⌈춘추 ⌋를 공부하였다.

1646년(20세, 인조24년) 창신교위(彰信校尉) 권식(權植)의 딸 안동권씨(安東權氏)결혼하였다.  2년뒤,  모친상을 당하여 탄곡(炭谷)에 장사를지냈다.

1652년(26세,효종3년) 증광(增廣) 진사초시(進士初試)와 회시(會試)에 합격하였다. 다음해 송시열의 문하에 들어가 본격적으로 ⌈춘추 ⌋를 배웠다.  송준길과 송시열에게 대기(大器, 크게될인물)로 인정을 받았다.

1657년(31세,효종8년) 태학(太學, 성균관)에 들어갔다.  2년후,  서울에 머물던 스승 송시열에게 매일 ⌈춘추⌋에 관한 질문을 하였다.

1660년(34세,현종1년) 1월 유생들과 함께 상소하여 율곡(栗谷) 이이,우계(牛溪) 성혼의 문묘종사(文廟從祀)를 청했다. 4월, 식년 문과에 장원으로 합격하여, 성균관 전적에 임명되었다.  6월, 감찰에 임명되었다가 곧 공조좌랑이 되어 춘추관 기사관을 겸하였다. 8월에 병조좌랑이 되었다가 다음달, 병조정랑겸 춘추관 기주관이 되었다.

1662년(36세,현종3년) 6월, 병조정랑이 되었다가 정언이 되었다.  궁궐왕족의 폐단을 논하고, 충청수영(忠淸水營)의 소금과 쌀의 지가(紙價) 폐단을 들추어내 개혁했다.  7월, 외직인충청(忠淸) 도사(都事)로임명되었다.

1663년(37세,현종4년) 사간원 정언, 사헌부 지평에 임명되었다. 정언으로있을때 대사간 서필원(徐必遠)의 잘못을 임금에게 직언해 해임시켰다.  또송 시열을 비방한 홍우원(洪宇遠)의 잘못을 임금에게 고했다. 이러한 일들로 권력을 가진 고위관료들의 미움을 받았다.  9월에서천(舒川) 군수가 되었고, 이후 주로 외직으로 돌았다.  다음해 서천군 수직에서 파직되었다.  그 다음해(1665년) 다시 지평으로
임명되었다.

1666년(40세,현종7년) 임금의 온천 행차시 수행하는 여러 신하들과 내시(內侍)들에게 내리는 품계 승진을 줄이도록 청하였다. 유세철(柳世哲)을 논계하고,  강석빈(姜碩賓) 파직을 청하였다. 7월에 장령이 되었다가 9월에 다시 정언으로 임명되었다. 다음해 이숙(李䎘) 등 일곱간신(諫臣)의 소환을 요청 했다가 해직되었다.  다시장령으로 임명되었는데 내시의 잘못을 간언하다 또 해직되어 전라도 장성(長城)의
부사로 나갔다가 다시 나주목사로 나갔다.

1672년(46세,현종13년)  나주목사로 재임하고 있을때, 백성 구제활동을 잘하여 상을 받았다. 통정대부(通政大夫)에 임명되었다.  8월에부친의 노환을 이유로 사직하고 낙향하였다. 1 2월에 송준길(宋浚吉)의 사망 소식을 듣고 통곡하였다.

1675년(49세,숙종1년) 아들을 보내 송시열의 무고(誣告)를 변론하게하였다.  제주 목사에 임명되었다. 9월, 장기(長鬐)송시열에게 약재(藥材)를 보냈다.  12월에 홍우원(洪宇遠)의 대계(臺啓, 관리들의 잘못을 임금에게 보고 하는글)로 관직이 박탈되었다.

1676년(50세,숙종2년) 귀향하여 시를 지으며 가슴에 담긴 답답함을 풀었다. 거처의 이름을 거백옥(蘧伯玉)의 고사에서 따와 ‘사구당(四九堂)’이라고 지었다.  2년 뒤,용양위(龍驤衛) 부호군(副護軍)이 되었다가 송시열에 대한 죄목 추가가 논의되면서 다시 관직이 박탈되고 금고형에 처해졌다.

1680년(54세,숙종6년) 경신환국(庚申換局)으로 정세가 다시 바뀌었다. 남인들이 대거 실각하고 서인들이 복권되었다. 소두산은 강릉 부사에 임명되고 임금으로 부터 ⌈고문진보(古文眞寶) ⌋를 하사받았다. 강릉 부사시절에 는근면하고,  이속(吏屬)을 엄하게 다스리고 선정을 베풀어 선정비가 세워졌다. 이후 의주 부윤(義州府尹), 상주 목사(尙州牧使) 등에 잇달아 임명되었으나 모두 사양하고 부임하지 않았다.

1683년(57세,숙종9년) 동래부사에 임명되었다. 왜관에 사는 일본인들의 규율 준수와 밀무역 금지 등을 주 내용으로 하는 약조를 대마도(對馬藩) 도주와 체결하는데 관여하였다.  또 춘분과 추분 그리고 백중에 초량 왜관의 왜인들이 두모포 왜관으로 성묘 가는 것을 허락해 달라는 장계를 올려 허락을 받았다

1684년(58세,숙종10년) 공홍도(公洪道)  관찰사(觀察使), 공홍도 수군절도사 등을 역임했다. 1688년에는 평안도 병마절도사에 임명되었다.  이러한 외직을 돌면서 그는 시를 많이썼다.  그의 문집, ⌈월주집(月洲集) ⌋에는 병사들의 해상훈련을 노래한 ⌈수조후차최진사운(水操後次崔進士韻)⌋, 육상훈련을 주제로 노래한 ⌈육조후호운
(陸操後呼韻)⌋ 등이 들어있다.  또 ⌈등통군정(登統軍亭)⌋ 등 변경지대의 모습을 담은 시도 적지 않다.  부인 권씨가 이해에 사망하였다.  다음해 경주 최씨와 재혼하였다.

1689년(63세,숙종15년) 소의(昭儀) 장씨가 낳은 아들을 왕세자로 삼는 문제로 정국이 시끄러웠다. 숙종은 장씨를 희빈으로 책봉하고 이에 반대한 서인들을 관직에서 쫓아냈다. (기사환국己巳換局) 또 송시열을 제주도에 유배 시켰다가 사약을 내려 사형에 처했다.  김수항(金壽恒), 민유중(閔維重)도 귀양을 갔다.  남인들이 다시 정권을 잡았다. 소두산은 4월에 무고(誣告)를 당해, 낙향하였다. 6월에 송시열의 발인에 참석하였으며,  이해 우계 성혼과 율곡 이이의 출향(黜享, 배향했던 위패를 거두어 치우는일) 소식을 듣고 아들과 동생을 시켜 무고를 변호하는 상소문을 올리게 하였다. 다음해 무고를 받아 조사를 받고 금고형에 처해졌다.
그가 지은 시문 중에 이러한 것이 있다.

草綠江潭雨  초록빛 강가에 비가 내리니
騷人萬古愁  시인의 마음은 만고의 수심.
停杯誰問月  술잔 멈추고 누가 달에게 물었을까?
撫跡客登舟  옛 자취 더듬어 나그네는 배에 올라
日落欺山面  해가 지니 산길 찾기 어렵고
潮來失渡頭  조수가 밀려오니 나루터를 잃었네.
長安何處是  한양은 어디에 있을까?
歸思獨憑樓  돌아가고 싶은 마음, 홀로 누각에 기댄다.

1693년(67세,숙종19년) 남인들의 모함을 많이 받아 울분으로 병사하였다. 4월에 진산 천비산(天秘山)에 장사 지냈다가 나중에 전주 지둔산(智屯山) 선영으로 이장되었다.  묘는 전북 완주군 봉동읍 둔산리620-12에 있다. 둔산리 870번지 완주 공단 옆에 신도비가 있다.
1968년에 화산서원(華山書院, 전라북도익산시금마면용순신기길44-76)에배향되었다.  이 서원은 김장생의 학문과 덕행을 추모하기 위해 1657년에 창건 되었는데, 김장생, 송시열 등이 배향되어있다. 문집으로 『월주집(月洲集)』이 있다.
그는 외직(外職)에 재직할 때 자주 남인들로부터,

“권신들에게 부탁하여 여러번 고을을 다스리며 탐학(貪虐)을 자행하였다.”

는 탄핵을 받아 파직되곤 했었다.  서인이 집권할 때에도 대간으로 부터 처신이 신중하지 못하다고 하여 비판을 받았으며, 재임할 때는 탐관오리라는 비난을 받거나 권세를 등에 업고 함부로 시비를 판단하고, 독단적으로 일을 처리한다는 비판을 받기도 했다.  이러한 비판들이 사실에 근거한 것인지는 좀 더 깊이 조사를 해봐야 할 것이다.  지배계층들이 자행한 횡포가 상세히 묘사되어 있다.  또 궁중의 권력자들이 산이나 바다를 독점한 뒤 시장(柴場), 어장(漁場) 등을 만들어 놓고 농어민을 착취하는 횡포를 근절해 달라는 상소문도 있다.  그외에도 경자유전(耕者有田)의 원칙에 따라 태인, 고부 등에서 궁노(宮奴)돌려 주라는 문장도 보인다.  서인과 남인의 대립관계를 살펴 볼 수 있는 자료, 어염(魚鹽), 노비(奴婢), 환곡(還穀) 등의 문제를 다룬 문장도 많다.
그가 지은 시는 오래도록 한시 애호가나 서예가들에게 사랑을 받았다. 특히 다음과 같은 그의 격양가(擊壤歌)는 요즘도 사람들의 주목을 받고있다.

百年身世生涯足
길어야백년사는신세, 이생애로만족하네.

長作堯衢擊壤翁
오래도록격양가를부르는노인으로살리라.

<참고자료>
⌈월주집 ⌋
⌈소두산⌋, <한국향토문화전자대전>, 한국학중앙연구원
⌈소두산⌋, <한국민족문화대백과>, 한국학중앙연구원

박광후(朴光後, 1637~1678)


 

박광후(朴光後, 1637~1678)                              PDF Download

 

광후(朴光後, 1637~1678)는 조선시대 중기의 문신으로 송시열의 문하에서 학문을 배웠다.  그는

“지금은 세상에 나가서 도(道)를 행할 때가 아니다.”

라고 하면서, 늘 나라에 도가 없음을 개탄하고,  뜻을 같이하는 사람과 함께 상소를 하거나,  궐문(闕門)에 가서 항의를 하였다. 혹독한 형벌을 받기도 하였으나 기개를 꺾이지 않았다.  마음씀이 공명정대 하고불의에 굴하지 않아 생전에 호남의 대표적인 선비로 인정을 받았으나 42세가 되던해 갑자기 사망하였다.

우암송시열이지은박광후의묘갈명
우암송시열이지은박광후의묘갈명

1637년(1세, 인조15년) 6월 2일에 광주(光州)의 아산리(지금의비아도천동)에서 태어났다.  본관은 순천(順天), 자는 사술(士述),호는 안촌(安村)이다.  할아버지는 진사(進士) 박창우(朴昌禹)이며, 부친은 충의위(忠義衛) 박천용(朴天用)이다.

부친은 일찍 세상을 떠났으며, 모친은 남씨(南氏)이다. 할아버지 박창우는 호가 칠졸재(七拙齋)인데, 병자호란(丙子胡亂) 때에 의병을 일으켜 북으로 올라가 출정(出征)한 적이 있다.  송시열은 박광후의 묘갈명에이렇게 적었다.

“박사술의 본관은 평양(平陽, 즉순천順天)이며 10대조 박석명(朴錫命)은 본조(本朝)의 훈신(勳臣)인데, 아마도 인수(仁叟, 박팽년朴彭年의자字) 선생과 같은 집안일 것이다. 할아버지 박창우(朴昌禹)는 진사(進士)이고 아버지 박천용(朴天用)은 학문이 있었으나 일찍 별세하였으며, 어머니 남씨(南氏)는 성품이 엄하고 법도가 있었다.
박사술은 홍씨(洪氏)를 아내로 맞아 한 아들과 여섯 딸을 낳았는데, 아들 박중회(朴重繪)는 사리에 밝고 재주가 뛰어나서 사우(士友)들이 칭찬하며, 네딸은 다사인(士人)의 아내가 되고 두 딸은 아직 출가하지 않았다.”

1650년(14세,효종1년) 남양홍씨(南陽洪氏)를 아내로 맞이 했다. 부친을 일찍 여의고 집안일을 도맡아 하면서 어머니를 섬겼다.

1651년(15세,효종2년) 향교에 다녔다.

1656년(20세,효종7년) 송시열(宋時烈)과 송준길(宋浚吉)의 문하에들어가 성리학을 배웠다. 그는 어려서부터 학문에 정진하여 학식(學識)이 높았으며,  마음이 정대(正大)하고 조금도 불의(不義)에 굴하지않아, 호남 선비들 의사표가 되었다.  그를따라 남도에서 정상용, 박치도, 박상현, 박상진, 박광일, 박광원, 박광오, 박광선, 박광윤, 박중회, 박상지, 민사하등많은학자들이 일어나 학통(學統)을 계승하였다.

1660년(24세,현종1년) 서울에 가서 윤휴(尹鑴)를 만났다 . 고향으로 돌아가 주위사람들에게 윤휴를 평하기를 “길인(吉人, 좋은사람)이아니다.” 라고 하였다.

1666년(30세,현종7년) 식년사마시(式年司馬試)에 생원 3등으로 합격하였다.  성균관(成均館)에 들어가 학문공부를 하였다.  과거공부에연연하지 않고 자기 실천을 위한 학문에 힘썼다.

1675년(39세,숙종1년)스승 송시열이 유배를 당하자 박광후는 광주, 나주, 장성 등 고을 유생들과 연대하여 구명운동을 펼쳤다.  이 일로 옥고를 치르게 되었으나 조금도 좌절하지 않고 스승을 따랐다.  이즈음세상의 상황이 크게 변하여 출세할 생각을 접었다. 혹시 권하는 자가있으면 “지금은 세상에 나가서 도(道)를 행할 때가 아니다.” 라고 하였다. 하지만 늘나라에 도가 없음을 개탄하고,  뜻을 같이하는 사람과 함께 상소를 하기도 하고, 궐문(闕門)에 가서 호소하여 잘못된 일에 대해 극진히 말하여 항의하기도 하였다.  당시 동료들과 함께 혹독한 형벌을 받기도 하였으나 기개를 꺾이지 않았다.

1677년(41세,숙종3년) 장기해변(지금의포항부근)에 유배중인 스승송시열을 찾아가 위문하고, 순천박씨(順天朴氏)의족보(族譜) 서문을청했다.

1678년(42세,숙종4년)에 갑자기 안청동 외성당(畏省堂)에서 별세하였다.  부인 남양홍씨(南陽洪氏)와 사이에 1남 6녀를 두었으며,  광주(光州) 진곡리(晉谷里)에 장사를 지냈다. 스승 송시열은 1680년 8월에 부탁 받은 족보 서문과 묘갈명을 보내왔다.  묘갈명에서 송시열은 이렇게 말했다.

“아! 박사술(박광후의자)은 이제 죽었거니와, 지금 세상에 다시 이런사람이 있겠는가?  그는 어버이에게 효성하고 뭇사람에게 자상하고 벗에게 성실하였으며 늦게는 학문에만 종사하였으니,  그 진취는 장차 한이 없었을것이다. 아!운기(運氣)가 좋지 않으니, 그가 어찌 죽지 않을 수  있었겠는가?  나는 매우 고루하여 그와  전혀 친분이 없었는데,  하루는 천리 길을 찾아 왔으므로 그 용모를 대하고 그 이야기를 들으니,  사람으로 하여금 시원히 마음을 각성하게 하였다.  내가 제주(濟州)에 있을 때에 그가 또 사우(士友) 몇 사람과 함께 보러 왔는데, 변을 겪고 험한고 난을 겪은 것이 이처럼 지극한데도 기개와 언론은 예전과 다름없었다. 내가 이 사람은 장차은 산철벽(銀山鐵壁)이 될 것이라고 생각하였는데,  이제 갑자기 이지경이 되었으니, 귀신이 어찌 어질지 못한가?”

송시열은 10여년이 지난 1689년 2월 18일, 기사사화(己巳士禍) 때에제주도로 유배가는 길에 광주의 안청동 부근을 지나게 되자 박광후가세상을 떠난 고택 외성당을 찾아 그 감회를 적고 애절한 시 한수를 남기고 길을 떠났다.  약200년 후인 1879년 면암 최익현도 유배지 흑산도에서 풀려 나와  상경할 때 외성당을 방문하여 외성당 방문기(訪問記)와 시 한수를 남겼다.
박광후는 문집으로 『안촌집(安村集)』을 남겼는데, 4권 2책으로 목활자본이 전남대학교 중앙도서관에 보존 되어있다. 기정진(奇正鎭)이 서문을 작성했으며,  송시열의 충절을 노래한 시가 많고,  이이와  성혼을 문묘에 배향해 달라는 상소문, 기축옥사에서 정철이 최영경(崔永慶), 이발(李潑) 등을 죽이지 않았다는 상소문, 옥중에서 동료들에게 보내는 편지 등이 실려있다.  또1677년 유배지에서 송시열의 말을 기록한 어록도 이 문집에 실려 있다.

<참고자료>
송시열, 박광후묘갈명, 세종대왕기념사업회, ⌈국조인물고 ⌋, 1999
이미선, 박광후,<한국역대인물 종합정보시스템>, 한국학중앙연구원

박상현(朴尙玄, 1629-1693)


박상현(朴尙玄, 1629-1693)                                 PDF Download

 

박상현(朴尙玄, 1629-1693)은 조선시대 중기의 유학자다. 우암 송시열을 스승으로 모시고, 명나라를 사모하는 마음이 지극하였다.  조정이 청나라 만주족을 두려워하여,  중국 남부에서 표류해 온 명나라 유민들을 청나라로 압송한 것을 보고 세상에 나갈 뜻을 버렸다.  조용한시골에 은둔하며 주희의 학문을 근본으로 삼아 경전 연구에 매진하였는데, 특히 ⌈대학 ⌋에 정통했다.  아들들과 조카를 송시열 문하에서 학문을 하도록하여 ,호남노론의 핵심이 되었다.

1629년(1세, 인조7년) 음력 5월 9일에 태어났다.  본관은 순천(順天), 자는 경초(景初), 호는우헌(寓軒)이다. 증조할아버지는 박언침(朴彦琛),  할아버지는 박진정(朴震挺), 아버지는 박수림(朴遂林), 어머니는봉산 이씨(鳳山李氏)로 이사숙(李思淑)의 딸이다.  부인은 장택 고씨(長澤高氏) 고부민(高傅敏)의 딸이자,  군수 고성후(高成厚)의 손녀이다.

1643년(15세, 인조21년) 부친상을 당하였다. 3년 동안 나물국을 먹지않고 제사에 정성과 공경을 다했다.  글 공부를 시작한 뒤에는 자기 수양에 힘쓰고 경전공부를 열심히 하였다. 특히 ⌈대학 ⌋에 공을 들여 공부를 하고,  학문의 바탕으로 삼았다.
주희(朱熹)를 본받고자 하였으며,  산림의 깊은 골짜기(전라도광주光州의 진곡眞谷)에서 평정을 지키고 살며,  부귀와 화려한 것에 대해서욕심을 가지지 않았다.  당시 중국과 우리나라를 침범한 청나라를 극도로 싫어하여 책력 속에 있는 청나라의 연호를 모두 지워버렸다. 우헌(寓軒)이라 호를 지었다.

1663년(35세,현종4년) 이즈음 송시열의 문하에 들어갔다 . 서인이 노론파와 소론파로 대립하게 될 때 그는 노론을 선택하여 송시열과 더욱 가깝게 지내고 집안의 아들,  조카들을 송시열의 제자가 되게 하였다.  정이, 주희(朱熹), 퇴계이황(李滉), 율곡이이(李珥)를 높이 받들고, ⌈태극도설(太極圖說) ⌋, ⌈통서(通書) , ⌈황극경세(皇極經世) ⌋, ⌈역학계몽(易學啓蒙) ⌋, ⌈정몽(正蒙) ⌋등 성리학 서적을 깊이 연구하였다.
특히 성명(性命), 이기(理氣), 도기(道器), 태극 등의 개념에 관심이 많았다. 스승 송시열과 이런 문제에 대해서 대화한 내용이 그의 문집에들어있다.

1667년(39세,현종8년) 제주도에 표류해 온 임인관(林寅觀) 등 중국인 95명을 청나라에 압송하였다.  그들은 청나라 만주족에 대항하던 복건성(福建省)의 명나라 유민들이었다.  그들은 자기들이 일본으로가던 상인인데 풍랑을 만나 표류하게 되었다며 일본으로 보내 주든지고향으로 돌아갈 수  있게 해달라고 요청하였다.  그러나 조정의 관리들은 그들이 가진 물건으로 보아 평범한 상인이 아니라 중국 남부지방에 명나라의 잔존세력들이 세운 남명(南明)의 관리들이라고 판단하였다.  조정에서는 청나라의 후환이 두려워 그들을 강제로 청나라로 압송하였다.  명나라 유민들을 결국 청나라에 보냈다는 소식을 들은 박상현은 명나라를 섬기는 충정으로 조정의 결정에 분개하였다. 이에 세상에 나갈 뜻을 끊고 두문불출하며 경전연구에 힘썼다.
명나라 유민들 송환 사건은 130여 년이 지난 정조때 다시 문제가 제기 되었다.

1797년(정조21년)에 정조는 임인관 등95인이 청나라에 굴복하지 않고 명나라를 섬긴 절개가 가상한데 그들을 받아들이지 않고 청나라에모두 강제 압송한 일은 잘못된 일이라고 평가하였다.  이러한 정조의평가에 따라 그들은 현충사(顯忠祠)에 배향되었다.

1677년(49세,숙종3년) 9월 27일 큰 아들 박광일(朴光一)과 집안 조카 박광후(朴光後)를 송시열이 유배가 있는 장기(長鬐)로 보냈다.  두 사람은 박상현의 편지를 전하고 예물을 올리며,  송시열의 문인(門人)이 되는 의식을 행하였다.

1684년(56세,숙종10) 두아들 박광일과 박광원(朴光元)을 회덕(懷德)의 송시열(宋時烈)에게 보내 가르침을 받도록 하였다. 아들 박광일은자는 사원(士元), 호는 손재(遜齋)로, 1701년 천거를 받아 내시 교관(內侍敎官), 시강원 자의(侍講院咨議) 등에 임명되었으나 모두 사퇴하고 권상하(權尙夏), 정호(鄭澔) 등과 교류하며 학문연구에 힘썼다. ⌈손재문집 ⌋은 그의 작품이다.  둘째 아들 박광원은 자는 사선(士善)이며, 호는 백야당(白野堂)이다.  1712년에 참봉(參奉)이 되었으며, 이어서 종묘봉사(宗廟奉事)·의금부도사(義禁府都事) 좌랑, 정랑, 청암도찰방(靑巖道察訪) 등을 역임하고, 1738년에 첨지중추부사(僉知中樞府事)가 되었다.

1689년(61세,숙종15년) 1월, 제주도로 귀양가는 송시열을 전송하였다.  6월, 송시열이 사약을 받고 사망하였다는 소식을 듣고 곡을하였다.

1690년(62세,숙종16년) 6월, 송시열의 제문(祭文)을 지었다. 이즈음박상현의 모습은 권상하(權尙夏)가 지은 묘갈명에 잘 묘사되어 있다.

“공(박상현)은 기상과 용모가 장엄하고 중후하며 정신과 풍채가 조용하고 안정되어 있었다.  말이 간결하고 걸음걸이가 조용하며 간사하고 문란한 소리나 일들은 화살처럼 멀리피하였다.  집안에서는 삼가고 부드러워서 친척을 접대하면 각각 그들의 환심을 얻고, 멋대로 구는 것을 보면 더불어 겨루지 않았다. 옛 사람이 구별하여 밝히지 않은 말을 늘 외우면서 되새겼다.  그러므로 향리 사람들이 감복하여 우헌 선생(寓軒先生)이라 칭하고 이름을 부르지 않았다.”( ⌈墓碣銘 ⌋)

1693년(65세,숙종19년) 암행어사가 된 교리(校理) 김만길(金萬吉)이임금에게 박상현을 추천하였다.  1월 12일에 사망하였다.  3월에 광주(光州) 북쪽 태산(台山)에 장사를 지냈다. 숙종40년(1714년)에 사헌부장령 (掌令) 에  추증(追贈) 되었다.  권상하(權尙夏)가 묘갈명을 짓고, 이희조(李喜朝)가 묘지명을 지었다.  문집으로 ⌈우헌선생문집(寓軒先生文集) ⌋ 이 있다.  그는 사단칠정설(四端七情說)은 율곡이이의 설을 따랐으며, 예학은 김장생(金長生)을 따랐다.  천문역법에도 밝아<음양소장도(陰陽消長圖)>와 <혼천의(渾天儀)>를 만들기도 했다.

⌈우헌선생문집 ⌋은 4권 2책으로 1898년에 간행 되었으며, 규장각에그 필사본이 소장되어 있다. 스승인 우암 송시열과의 편지문, 시문 그리고 제문(祭文) 등이 다수 실려있다. 시문 중에는 제주도로 귀양가는 송시열을 전송하는 시, 송시열을 곡하는 시 등이 있다.  이 외에도 ⌈무극이태극(無極而太極)⌋, ⌈이설(理說)⌋, ⌈성설(性說)⌋,
⌈성리문답(性理問答)⌋, ⌈잡설(雜說)⌋, ⌈권경변(權經辨)⌋ 등의 문장이실려 있다.
<참고자료>
⌈송자대전⌋ 제 16권 어록3,  박광일(朴光一)의 기록
권상하, ⌈박상현의 묘갈명⌋, ⌈국역국조인물고⌋,  세종대왕기념사업회, 1999