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생들을 돌려보낸 이성구


기생들을 돌려보낸 이성구

 

반정은 잘못 된 것을 바로 잡는다는 의미이다. 광해군이 무엇을 잘못했던가? 불충과 불효이다. 명나라가 왜란을 극복하는데 도움을 준 이른바 재조지은(再造之恩, 국운을 다시 회복시킨 은혜)를 저버린 불충을 저지르고, 배다른 형제를 죽이고 서모를 유폐한 불효를 범했다. 이 두 가지가 반정의 가장 큰 명분이다. 이 외에도 광해군이 호색광음(好色狂飮, 여색을 좋아하고 술을 즐긴다)한 임금임을 드러내는 것은 그가 부덕한 임금이라는 사실을 세상에 알리는 좋은 구실이 될 수 있다.

이성구(李聖求, 1584-1644)는 본관은 전주(全州). 자는 자이(子異)이고 호는 분사(分沙)·동사(東沙)이다. 태종의 후손이며, 아버지는 <지봉유설>을 지은 이조판서 이수광(李晬光)이다.

1608년(광해군 1) 별시 문과에 을과로 급제해 한원(翰苑: 예문관)에 들어가 관직 생활을 시작하였다. 1613년(광해군 5) 헌납으로 있을 때 아버지는 대사헌을, 동생 이민구(李敏求)는 홍문관부제학을 지내, 삼부자가 삼사의 언관직에 같이 있어 세인들의 주목을 받기도 하였다.

지평으로 있을 때 영창대군(永昌大君)의 옥사가 일어나자 시론(時論)에 반대했으며, 영의정 이항복(李恒福)이 정협(鄭浹)을 천거해 종성판관으로 삼자 이를 문제 삼는 간당(奸黨)들을 저지하다가 파직되었다. 인목대비를 폐하는 것을 강력히 반대했다. <연려실기술>에 이를 적어두었다.

 

“대비를 폐할 때에 바른 것을 지켜 흔들리지 않았다. 백사(白沙 이항복)가 정협(鄭浹)을 천거한 죄로 정승에서 파면되자 공이 지평으로서 반박하기를, ‘이항복이 정협을 천거하여 쓸 때에 어찌 후일에 정협의 반역을 미리 알 수 있었겠습니까. 대신에게까지 연루시킴은 너무 심합니다.’ 하였으나, 간당들이 탄핵하여 파면시켰다.”

후에 이항복이 북청의 유배지에서 죽자 포천의 향민들이 운구해 장사지내고 서원을 세워 봉사하였다. 이 일로 무고당해 대간의 탄핵을 받아 파면되었다.

1623년 인조반정 때에는 사간으로 기용되어 폐해가 심한 정치를 일신시키고, 영의정 이원익(李元翼)의 인정을 받아 강화부윤·부승지·예조참의를 거쳐 1625년(인조 3) 대사간, 이듬해 병조참지가 되었다. 병자호란 때에는 왕을 남한산성으로 호종하였다. 이 때 최명길(崔鳴吉) 등의 주화론에 동조했으며, 1637년 왕세자가 심양(瀋陽)에 갈 때 좌의정이 되어 수행하였다.

이귀의 아들로 반정의 주역인 이시백(李時白)이 “반정 이후 인조가 발탁한 정승 중에서 이성구의 인물됨이 첫째이다.”라고 하였다.

인정반정 당시에 사간으로 임명되어 정치를 일신했는데, 그중 기생을 흩어 보낸 일이 <연려실기술>에 나온다.

“반정할 당시에 사간에 임명되었는데, 함부로 잡아 가둔 사람들을 너그럽게 놓아 주고, 성문의 통행금지를 풀고, 광해조 때 만든 침향산(沈香山)을 불태우고, 기생을 흩어 보낸 일은 모두 공이 먼저 주장하여, 새로운 교화를 도운 것이다.”

 

기생을 흩어 보냈다면 필시 이전에 기생을 모았을 것이다. 바로 광해군이 침향산을 만들고 기생을 모은 것이다. 반정을 일으켜 새 정치를 구현하겠다는 입장에서 보자면 침향산을 불태우고 기생을 돌려보내는 일들이 전 왕조의 폐정을 바로 잡는 일임은 두 말이 필요 없다. 이 일을 이성구가 제일 먼저 주창했다. 이를 두고 반정 후에 처음 시작한 맑고 밝은 조치였다고 평을 얻었다.

 

그런데 재미있게도 이성구가 이 일을 후회하는 듯한 시가 <연려실기술>에 나온다.

“임금이 반정하던 당시에, 공은 사간이 되었는데, 기생을 파하도록 건의하여 지방에서 서울로 뽑혀왔던 기생들을 모조리 돌려보내었으니 이것은 처음 시작한 맑고 밝은 큰 정사였다. 얼마 후에 공이 의정부의 사인이 되었을 때에 지은 한 절구(絶句)가 있으니,

 

이원을 파하자고 아뢴 것은 간관이란 직명 때문이었는데 / 奏罷梨園爲諫名
연못의 정자에 오니 기생이 없으므로 풍정을 저버렸네 / 却來蓮閣負風情
못물은 가득하고 연꽃은 서늘한데 / 池塘水滿芙蓉冷
홀로 난간에 기대어 빗소리 듣는구나 / 獨凭危欄聽雨聲

하였으나 이는 농담이었다.

 

김시양(金時讓)이 화답하기를,

청루에 박행하다는 이름을 피하지 않았으니 / 不避靑樓薄倖名
한 장의 소가 참으로 임금 사랑하는 심정이 있었네 / 一封眞有愛君情
어찌 응향각(연못 가의 정자 이름) 빗소리 듣는 날 / 如何聽雨凝香日
도리어 당초 정성(음탕한 음악) 내친 것을 후회하는가 / 却悔當初放鄭聲

하였다.”

 

이성구의 시는 풍류의 흥을 높이고 있다면 김시양의 시는 정색하며 도의로 화답했다. 이성구가 기생을 돌려보낸 일을 정말로 후회한 것은 아니고 아름다운 풍정을 대하고 풍류의 정취를 한껏 펼친 것이다. 이를 김시양이 모를 리 없다. 그럼에도 김시양의 화답은 준엄하다.

 

이는 김시양이 1611년(광해군 3) 전라도도사(全羅道都事)가 되었을 때 향시에 출제한 시제가 왕의 실정(失政)을 비유했다 하여 유배되었다가 1623년(인조 1) 인조반정으로 풀려나서 광해조이 실정에 대한 준엄한 심판 의식이 작용하기도 했기도 했을 것이다. <연려실기술>에 당시 이 일을 기록해 둔 내용이 있다.

“전라 도사(全羅都事)로 향시를 주관하였는데, 여러 소인들이 시험 문제에 임금을 비방하고 풍자하였다고 적발하여 체포당하였다. 정 판서(鄭判書) 세규(世規)가 광릉(廣陵) 길에서 손을 잡고 눈물을 흘렸으나, 공은 얼굴빛이 태연하였다. 법정에 들어오자 의금부에서 극형에 처하기를 아뢰었는데, 광해주(光海主)가 그것을 3일 동안 발표하지 아니하였다. 공이 옥에서 평상시와 같이 잠을 자니, 윤효선(尹孝先)이 시관에 참여하였기 때문에 함께 잡혀 있었는데, 공을 차서 일으키며, ‘지금이 어떤 때인데 평안히 잘 수 있소.’ 하였다. 공이 웃으며 말하기를, ‘죽고 사는 것은 천명이요.’ 하였다. 백사 정승 이항복(李恒福)이 구원하여 사형에서 감형되어 종성(鍾城)으로 귀양 갔다. 공이 가던 길에서 시를 지었는데,

 

마음과 행동이 본래 백일을 속이지 않았으니 / 心跡本非欺白日
길흉은 원래 푸른 하늘에 물을 것이 아니다 / 吉凶元不問蒼天

하였다.”

 

이성구는 만년에 영의정이 되었으나 모함으로 사직했다가 곧 영중추부사가 되었다. 그런데 다시 선천부사 이규(李烓)가 청나라에 기밀을 누설한 사건을 논하다가 파직되어 양화강(楊花江) 부근에 만휴암(晩休庵)을 지어 소요하며 지냈다. 그 무렵 집에 불이 난 적이 있었다. <연려실기술>에 이때의 일화가 기록되어 있다.

“이규(李烓)의 전 가족이 처형되는 것을 구하다가 탄핵을 입어 벼슬이 떨어지자, 양화강(楊花江) 위에 우거하면서 집에 써 붙이기를 ‘만휴암(晩休菴)’이라 하였다. 어느 날 불이 났는데 나와서 밭둑에 앉아 말하기를, ‘술독은 탈이 없느냐.’ 하더니, ‘술을 따라 동네 이웃 사람들에게 사례하라.’ 하고, 다른 것은 묻는 것이 없었다.”

기생을 돌려보낸 것은 행정 관료의 실천이요 빗속에서 아쉬워하는 것은 묵객의 정취이다. 이 둘이 조화로울 수 있는 것은 집에 불이 났을 적에 다른 것은 묻지 않고 ‘술을 따라 동네 이웃 사람들에게 사례하라’는 이 한 마디에서 알 수 있다.

 

참고문헌

<연려실기술>, <한국민족문화대백과>